1. 초기 생애 및 배경
메리 토드 링컨은 켄터키주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당시 상류층 여성에게 제공되던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1.1. 출생과 어린 시절
메리 토드는 1818년 12월 13일 켄터키주 렉싱턴에서 은행가인 로버트 스미스 토드와 엘리자베스 파커 토드의 일곱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녀의 가문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메리 자신은 노예를 소유한 적이 없지만 안락하고 세련된 환경에서 성장했다. 메리가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출산 중 사망했고, 2년 후 아버지는 엘리자베스 "베시" 험프리스와 재혼하여 아홉 명의 자녀를 더 두었다. 메리는 계모와 어려운 관계를 유지했다.
1832년부터 메리와 그녀의 가족은 현재 메리 토드 링컨 하우스로 알려진 렉싱턴 웨스트 메인 스트리트 578번지에 위치한 14개의 방을 갖춘 우아한 저택에서 살았다.


메리의 부계 증조부인 데이비드 리바이 토드는 아일랜드 롱퍼드주 출신으로, 펜실베이니아를 거쳐 켄터키로 이주했다. 또 다른 증조부인 앤드루 포터는 아일랜드 이민자의 아들로 뉴햄프셔와 펜실베이니아에서 살았다. 모계 고조부인 새뮤얼 맥도웰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펜실베이니아로 이주했다. 다른 토드 가문의 조상들은 잉글랜드 출신이었다.
1.2. 교육
메리는 어린 나이에 마담 멘텔의 예절 학교에 보내져 프랑스어와 문학에 집중된 교육 과정을 이수했다. 그녀는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춤, 드라마, 음악, 사교 기술을 배웠다. 20세 무렵에는 재치 있고 사교적이며 정치에 대한 이해가 깊은 여성으로 평가받았다. 그녀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휘그당원이었다.
1.3. 가족 배경
토드 가문은 켄터키주에서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가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로버트 스미스 토드는 은행가였다. 메리는 아버지의 두 번의 결혼으로 총 15명의 친척을 두었으며, 그 중 아홉 명은 이복 형제자매였다. 그녀는 스프링필드의 젠트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2. 결혼과 가족
메리 토드 링컨은 에이브러햄 링컨과의 만남을 통해 결혼에 이르렀으며, 네 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그 중 세 명을 어린 나이에 잃는 비극을 겪었다.
2.1. 링컨과의 만남과 결혼
1839년 10월, 메리는 결혼한 언니 엘리자베스 토드 에드워즈와 함께 살기 위해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로 이주했다. 언니 엘리자베스는 전 주지사의 아들인 니니언 W. 에드워즈와 결혼했으며, 당시 니니언 W. 에드워즈는 메리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 메리는 스프링필드의 상류층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으며, 떠오르는 젊은 변호사이자 민주당 정치인이었던 스티븐 A. 더글러스를 비롯한 여러 남성들의 구애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같은 휘그당원이던 에이브러햄 링컨을 선택했다.


메리 토드는 1842년 11월 4일 스프링필드에 있는 언니 엘리자베스의 집에서 에이브러햄 링컨과 결혼했다. 당시 메리는 23세였고 링컨은 33세였다. 사교적이고 화려함을 좋아하는 메리의 성격은 링컨과는 정반대였지만, 그들은 연애 결혼을 했다.
2.2. 자녀
링컨 부부의 네 아들은 모두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서 태어났다.
- 로버트 토드 링컨 (1843년 ~ 1926년): 변호사, 외교관(미국 육군장관 역임), 사업가로 활동했다. 그는 부모 모두보다 오래 산 유일한 자녀였다.

- 에드워드 베이커 링컨 (1846년 ~ 1850년): "에디"로 불렸으며, 결핵으로 사망했다.

- 윌리엄 월러스 링컨 (1850년 ~ 1862년): "윌리"로 불렸으며, 링컨이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던 시기에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 토머스 링컨 (1853년 ~ 1871년): "태드"로 불렸으며, 18세에 사망했다. 사망 원인으로는 흉막염, 폐렴, 울혈성 심부전 또는 결핵 등이 거론된다.

로버트와 태드(토머스)는 아버지의 사망까지 생존했지만, 어머니보다 오래 산 것은 로버트뿐이었다. 세 아들과 남편의 죽음은 메리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특히 윌리의 죽음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메리는 3주 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거나 태드를 돌볼 수 없을 정도로 비탄에 잠겼다. 이로 인해 링컨은 그녀를 돌볼 간호사를 고용해야 했다. 1871년 7월, 로버트가 결혼한 후 메리와 함께 여행하며 시간을 보냈던 막내아들 태드마저 심장 질환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사망하자, 그녀는 극심한 슬픔과 우울증에 빠졌다.
3. 링컨의 경력과 가정 생활
링컨이 변호사이자 정치인으로서 경력을 쌓는 동안, 메리 토드 링컨은 가정생활을 관리하고 사회적으로 남편을 내조하며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링컨이 스프링필드에서 변호사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가는 동안, 메리는 늘어나는 가정을 돌보았다. 그들이 1844년부터 1861년 백악관으로 떠날 때까지 거주했던 스프링필드의 집은 현재 링컨 홈 국립 역사 유적지로 보존되어 있다. 링컨이 일리노이주 순회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메리는 종종 몇 달 동안 혼자 남아 아이들을 키우고 가정을 꾸려야 했다. 당시 링컨의 연수입은 1200 USD에 달했는데, 이는 주지사의 보수와 같은 금액이었다. 대신 링컨은 순회 재판소를 돌아야 했고, 하루에 50 km를 말을 타고 이동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메리는 1860년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될 때까지 남편을 사회적, 정치적으로 적극 지원했다. 링컨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메리는 자주 링컨을 위해 요리를 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요리는 소박했지만, 수입산 굴을 포함한 링컨의 입맛을 만족시켰다.
4. 미국의 영부인
메리 토드 링컨은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부인으로서 백악관에서 다양한 공식적, 비공식적 활동을 수행했으며, 동시에 재정적 논란과 남북전쟁이라는 시대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4.1. 백악관에서의 역할
백악관 재임 기간 동안 메리 링컨은 국가 내 정치적 분열로 인해 많은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그녀의 가족은 노예 제도가 허용된 접경 주 출신이었다. 메리는 남편의 연방 수호 노력을 굳건히 지지했으며, 그의 정책에 엄격하게 충실했다. 그녀는 좀 더 세련된 남부 상류 도시 렉싱턴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서부인"으로 여겨졌다. 동부 문화가 지배적인 워싱턴 D.C.에서 영부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링컨은 최초의 "서부" 출신 대통령으로 여겨졌고, 비평가들은 메리의 예절을 거칠고 허세적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메리는 백악관의 사교 행사 코디네이터 역할을 맡아 호화로운 무도회를 주최했다. 그녀는 백악관을 재단장했으며, 여기에는 모든 공용 및 개인실의 대대적인 재장식과 새로운 도자기 구매가 포함되어 막대한 초과 지출로 이어졌다. 대통령은 비용에 대해 매우 분노했지만, 의회는 결국 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두 차례 추가 예산을 승인했다.
메리는 또한 종종 워싱턴 주변의 병원을 방문하여 부상당한 병사들에게 꽃과 과일을 나누어주고,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낼 편지를 대신 써주기도 했다. 때때로 그녀는 링컨과 함께 전장 시찰에 동행하기도 했다.
4.2. 재정 및 사치 논란
백악관 재임 중 메리의 과도한 지출은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는 고급 보석류를 자주 구매했으며, 여러 차례 지역 보석상인 갈트 앤 브로(Galt & Bro.)에서 외상으로 보석을 구입했다. 링컨 대통령 사망 당시 그녀는 보석상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었는데, 이 빚은 나중에 면제되었고 많은 보석이 반환되었다. 이러한 사치스러운 지출 습관은 링컨 자신뿐만 아니라 일부 국민들에게도 불만을 야기했다.
4.3. 남북전쟁 시기의 어려움
남북전쟁 기간 동안 메리는 남부 출신 가족과의 관계로 인해 개인적, 사회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녀의 이복 형제 중 여러 명이 남부군에 복무하다 전사했으며, 한 명은 남부군의 외과 의사로 활동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녀는 백악관의 사회적 책임과 경쟁, 이권 청탁자들, 그리고 남북전쟁 시기 워싱턴의 높은 국가적 음모 분위기 속에서 신문들의 비난에 대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5. 링컨 암살과 그 여파
메리 토드 링컨은 포드 극장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암살 사건을 직접 목격했으며, 이는 그녀에게 극심한 정신적 충격과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다.
5.1. 암살 사건 목격
남북전쟁이 끝나가면서 메리 링컨은 평화로운 국가의 영부인으로서 계속 활동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1865년 4월 14일 아침, 링컨 대통령은 기분 좋게 잠에서 깨어났다. 며칠 전 로버트 E. 리 장군이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했으며, 이제 대통령은 조지프 E. 존스턴 장군의 항복 소식을 노스캐롤라이나주로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아침 신문에는 대통령 부부가 저녁에 극장에 참석할 것이라는 발표가 실렸다. 한때 메리는 두통으로 집에 머물고 싶어 했지만, 링컨은 신문에 이미 발표되었기 때문에 참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메리 링컨은 남편과 함께 포드 극장에서 코미디 연극 아메리칸 커즌을 관람하고 있었으며, 손님으로는 헨리 래스본과 클라라 해리스가 동석했다. 3막이 진행되는 동안 링컨 부부는 서로 손을 잡고 연극을 즐기며 더 가까이 다가앉았다. 링컨 부부의 마지막 대화에서 메리는 남편에게 "미스 해리스가 제가 이렇게 당신에게 매달리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요?"라고 속삭였고, 링컨은 미소 지으며 "그녀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답했다.
5분 후인 밤 10시 15분경, 링컨 대통령은 존 윌크스 부스의 총에 맞았다. 부스의 총알이 링컨의 머리 뒤를 강타했을 때 메리는 남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메리 링컨은 치명상을 입은 남편과 함께 길 건너편 피터슨 하우스로 이동했으며, 링컨은 뒷방으로 옮겨져 침대에 가로로 눕혀졌다. 이때 링컨의 내각이 소집되었는데, 윌리엄 H. 수어드는 부스가 포드 극장에서 암살을 실행하기 몇 분 전 루이스 파월에게 심각한 공격을 당해 참석하지 못했다. 그들의 장남 로버트는 밤새도록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인 1865년 4월 15일 토요일까지 링컨 곁을 지켰다. 한때 링컨의 육군장관 에드윈 M. 스탠턴은 메리가 슬픔으로 너무나 이성을 잃었기 때문에 방에서 나가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5.2. 암살 이후의 슬픔
링컨 대통령은 약 9시간 동안 혼수 상태에 빠져 있다가 56세의 나이로 1865년 4월 15일 오전 7시 22분에 사망했다. 오전 7시 직전, 메리는 다시 링컨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딕슨의 보고에 따르면 "그녀는 다시 대통령 옆에 앉아 그에게 키스하고 모든 애정 어린 이름으로 불렀다." 그가 사망할 때 숨소리는 더 조용해졌고, 그의 얼굴은 더욱 평온해졌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암살 다음 날 아침, 마지막 숨을 거둘 때 그는 활짝 미소 지으며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역사가들, 특히 작가 리 데이비스는 링컨이 사망했을 때와 그 후에 보인 평화로운 모습에 대해 "아마도 4년 만에 처음으로 평화로운 표정이 그의 얼굴에 나타났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링컨 행정부 재무부 차관보였던 모운셀 브래드허스트 필드는 "대통령의 얼굴에서 이보다 더 온화하고 기분 좋은 표정을 본 적이 없다"고 썼다. 대통령의 비서 존 헤이는 "그의 지친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평화로운 표정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남편의 죽음과 그 이전에 아들들을 잃은 슬픔은 메리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 이후 깊은 상실감과 고통을 겪었으며, 이는 그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6. 건강 문제와 정신 상태
메리 토드 링컨은 평생 동안 다양한 신체적, 정신적 건강 문제로 고통받았으며, 이에 대한 의학적, 역사적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6.1. 신체적 건강 문제
메리는 성인기 내내 심한 두통, 즉 편두통에 시달렸다. 1863년 백악관 재임 중 마차 사고로 머리 부상을 입은 후 이러한 증상은 더욱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또한 성인기 내내 많은 신체적 증상들을 호소했다. 말년에는 심한 백내장으로 시력이 저하되었는데, 이 상태가 그녀의 낙상에 대한 취약성을 증가시키는 데 기여했을 수 있다. 1879년에는 발판에서 떨어져 척수 손상을 입기도 했다.
6.2. 정신 건강에 대한 논란
메리는 만성적인 우울증을 겪었다. 링컨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그녀의 기분 변화, 격렬한 성격, 공개적인 분노 표출, 그리고 과도한 지출 이력은 일부 역사가와 심리학자들로 하여금 그녀가 양극성 장애를 앓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또 다른 이론은 메리의 조증 및 우울증 에피소드와 많은 신체 증상이 악성 빈혈의 발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윌리의 죽음으로 인한 메리의 슬픔은 너무나 엄청나서 그녀는 3주 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고, 장례식에 참석하거나 태드를 돌볼 수 없을 정도로 절망했다. 그녀의 생존한 아들 로버트 링컨은 어머니의 점점 더 예측 불가능한 행동에 경악했다. 1875년 3월, 플로리다주 잭슨빌을 방문하는 동안 메리는 로버트가 치명적인 병에 걸렸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서둘러 시카고로 갔을 때 그는 건강했다. 그를 방문하는 동안 그녀는 기차에서 누군가 자신을 독살하려 했으며, "떠돌이 유대인"이 자신의 지갑을 가져갔다가 돌려주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한 사용하지 않을 커튼이나 정교한 드레스(남편 암살 후에는 검은색 옷만 입었다)와 같은 물건에 많은 돈을 썼다. 그녀는 5.60 만 USD에 달하는 정부 채권을 속치마에 꿰매어 도시를 돌아다녔다. 이 많은 돈과 의회로부터 받는 연간 3000 USD의 수당에도 불구하고, 메리 링컨은 여전히 가난을 두려워했다.
7. 말년과 사회 시설 수용
링컨 암살 이후 메리 토드 링컨은 깊은 슬픔과 건강 문제에 시달리며 유럽에서 생활하기도 하고, 재정적 어려움으로 연금을 청원하는 등 힘든 시간을 보냈다. 결국 아들의 요청으로 정신 병원에 수용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7.1. 유럽 여행과 연금
남편의 사망 후, 그녀는 전 세계로부터 위로의 메시지를 받았고, 많은 메시지에 직접 답장하려고 노력했다.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낸 답장에서 그녀는 여왕이 4년 전 남편 앨버트 공을 잃은 슬픔을 겪었음을 언급하며, "폐하께서 친절하게 써주신 편지를 받았습니다. 폐하의 깊은 슬픔을 이해하시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부드러운 위로의 표현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지금 겪고 있는 '극심한 슬픔'을 폐하께서도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라고 썼다.
미망인이 된 메리 링컨은 일리노이로 돌아와 시카고에서 아들들과 함께 살았다. 남편은 8.00 만 USD (1865년 기준)의 유산을 남겼는데, 이는 그녀가 편안하게 살기에 충분한 금액이었다. 그러나 돈에 대해 불안정한 관계를 가졌던 메리 링컨은 1868년 뉴욕 월드에 도움을 요청하는 광고를 내고 개인 소지품을 경매에 팔려고 시도하여 대중을 경악시켰다. 그녀와 어린 아들 태드는 유럽으로 이주하여 몇 년간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했다. 이 기간 동안 셀리그먼 가문이 그녀를 돌보며 항해 비용을 지불하고 돈을 보내며 그녀를 위해 변호해 주었다.
1868년, 그녀의 전 재봉사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엘리자베스 케클리 (1818년 ~ 1907년)는 무대 뒤에서, 또는 30년간의 노예 생활과 백악관에서의 4년이라는 회고록을 출판했다. 노예로 태어나 자신과 아들의 자유를 사들여 워싱턴 D.C.에서 성공적인 사업가가 된 케클리의 이 책은 메리 토드 링컨의 성격과 삶에 대한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했지만, 당시 전 영부인과 대중, 언론은 이를 우정과 기밀 유지 위반으로 간주했다. 케클리는 특히 그녀의 편집자가 메리 링컨이 보낸 편지들을 책에 실었기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책은 현재 많은 역사가와 전기 작가들에게 귀중한 자료로 받아들여져, 행정부 내부에서 대통령과 영부인의 성격을 자세히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에 여러 영화와 TV 미니시리즈의 기반이 되었다.
1870년 7월 14일, 미국 의회는 근소한 차이로 통과된 법안을 통해 메리 링컨에게 연간 3000 USD의 종신 연금을 지급했다. 메리는 이러한 연금을 위해 의회에 수많은 편지를 쓰고 사이먼 캐머런이나 조지프 셀리그먼과 같은 후원자들에게 자신을 위해 청원해 달라고 촉구하는 등 강력하게 로비했다. 그녀는 남편을 전사한 사령관으로 묘사하며 자신이 병사들의 미망인만큼 연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대통령 미망인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고, 메리 링컨은 많은 의원들을 소외시켜 의회의 승인을 얻기 어려웠다.
아들 로버트가 1868년에 결혼한 후, 메리는 토머스(태드)를 데리고 유럽으로 가서 그가 학교에 다니고 자신은 여행을 다녔으며, 때로는 태드가 동행하기도 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직후, 태드는 현재 심장 질환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사망했다. 1871년 7월 태드의 죽음은 다른 두 아들과 남편의 죽음에 이어 그녀에게 압도적인 슬픔과 우울증을 안겨주었다. 1881년 그녀는 뉴욕으로 가서 가필드 대통령 암살 이후 그의 가족을 위한 조항이 논의되자 연금 인상을 로비했다. 그녀는 자신의 지출 습관과 남편이 남긴 5.60 만 USD의 정부 채권을 포함한 개인 재정 관리에 대한 소문으로 인해 부정적인 언론 보도에 직면하며 어려운 싸움을 벌였다. 의회는 결국 추가 금전적 선물과 함께 연금 인상을 승인했다.
7.2. 정신 병원 수용 및 석방
메리의 생존한 아들 로버트 링컨은 시카고의 떠오르는 젊은 변호사였는데, 어머니의 점점 더 예측 불가능한 행동에 경악했다. 1875년 5월 20일, 재판 후 배심원단은 그녀를 일리노이주 배타비아의 사립 정신병원(벨뷰 플레이스)에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재판 절차 후 그녀는 너무나 낙담하여 자살을 시도했다. 그녀는 여러 약국을 방문하여 자신을 죽일 만큼의 아편 팅크를 주문했지만, 기민한 약사가 그녀의 시도를 좌절시키고 결국 플라세보를 주었다.
벨뷰 플레이스에 수용된 지 3개월 후, 그녀는 탈출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변호사 제임스 B. 브래드웰과 그의 아내 마이라 브래드웰 (그녀의 친구이자 페미니스트 변호사)에게 몰래 편지를 보냈다. 그녀는 또한 시카고 타임스 편집자에게도 편지를 썼다. 곧 로버트가 피하려 했던 대중적 망신이 임박했고, 그의 어머니의 재정을 통제하고 있었던 로버트의 성격과 동기가 의심받게 되었다. 메리의 재판에서 벨뷰의 원장은 그녀가 자신의 시설에서 치료를 통해 이점을 얻을 것이라고 배심원들에게 확신시켰었다. 잠재적으로 해로운 언론 보도에 직면하여, 그는 메리가 원하는 대로 스프링필드에 있는 언니 엘리자베스와 함께 살기에 충분히 건강하다고 선언했다.
메리 링컨은 스프링필드의 언니의 보호 아래 풀려났다. 1876년, 그녀는 자신의 일을 관리할 능력이 있다고 선언되었다. 이전의 강제 입원 절차로 인해 메리는 아들 로버트와 깊이 소원해졌고, 그들은 그녀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다시 만나지 못했다.
메리 링컨은 이후 4년 동안 유럽을 여행하며 프랑스 포에 거주했다. 그녀의 말년은 건강 악화로 점철되었다. 그녀는 시력을 저하시키는 심한 백내장을 앓았으며, 이 상태가 그녀의 낙상에 대한 취약성을 증가시키는 데 기여했을 수 있다. 1879년에는 발판에서 떨어져 척수 손상을 입기도 했다. 1880년대 초반, 메리 링컨은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언니 엘리자베스 에드워즈의 저택에 머물렀다.
8. 사망
1882년 7월 15일, 막내아들이 사망한 지 정확히 11년 후, 그녀는 언니의 집에서 쓰러져 혼수 상태에 빠졌고, 다음 날 아침인 7월 16일 뇌졸중으로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의 장례식은 스프링필드의 제1장로교회에서 거행되었다.
9. 평가와 유산
메리 토드 링컨은 역사적으로 복합적인 평가를 받아왔으며, 그녀의 삶은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재해석되었다.
9.1. 역사적 평가
역사가들은 메리 링컨을 영부인으로서 간섭이 심하고 파괴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는 그녀의 심리적 상태가 링컨 대통령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링컨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그녀가 겪은 정신 질환뿐만 아니라, 재임 중 한 명을 포함해 두 자녀를 잃은 개인적인 고통 또한 그녀의 평가에 영향을 미쳤다.
1982년부터 시에나 칼리지 연구소는 주기적으로 역사가들에게 미국 영부인들을 배경, 국가에 대한 가치, 지능, 용기, 업적, 청렴성, 자립성, 대중 이미지, 대통령에 대한 가치 등 독립적인 기준에 따라 누적 점수로 평가해 달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해 왔다. 처음 네 차례의 설문조사에서 메리 링컨은 최하위 4분위에 속했다.
연도 | 순위 (총 영부인 수) |
---|---|
1982 | 42위 (42명 중) |
1993 | 37위 (37명 중) |
2003 | 36위 (38명 중) |
2008 | 35위 (38명 중) |
2014 | 31위 (39명 중) |
2020 | 29위 (40명 중) |
그러나 2020년에 실시된 다섯 번째 설문조사에서는 그녀의 평가가 상승하여 3분위에 진입했다. 1982년 첫 설문조사에서 최악의 영부인으로 평가받았던 그녀의 순위가 2020년 3분위로 상승한 것은 그녀에 대한 연구와 저술이 증가했기 때문일 수 있다. 2008년 시에나 연구소 설문조사에서 링컨은 10개 기준 중 4개(국가에 대한 가치, 업적, 리더십, 대중 이미지)에서 최하위를 기록했다. 2014년 설문조사에서는 링컨 부부가 "파워 커플"로서 39쌍의 영부인 부부 중 7번째로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9.2. 대중문화 속에서의 모습
메리 링컨과 그녀의 남편에 대한 많은 전기가 쓰여졌다. 바바라 햄블리의 해방자의 아내 (2005)는 그녀가 당시 여성들에게 흔히 처방되던 알코올과 아편이 함유된 일반 의약품을 사용한 배경을 제공하는 잘 연구된 역사 소설로 평가받는다. 재니스 쿡 뉴먼의 역사 소설 메리: A. 링컨 부인 (2007)은 메리가 정신병원에 수감된 후 자신의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용으로, 메리의 최근 전기 작가인 진 H. 베이커는 이 작품이 메리 링컨의 삶을 '실제에 가깝게' 묘사했다고 평가했다. 앤드루 홀러란의 2006년 소설 슬픔은 그녀의 미망인 시절 겪었던 비탄을 주제로 다룬다. 루이 베이어드의 링컨 씨를 구애하다 (2019)는 1839년부터 1842년까지 스프링필드에서 링컨과 메리 토드, 그리고 링컨의 절친한 친구였던 조슈아 프라이 스피드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다.
메리 링컨은 여러 영화에서 배우들에 의해 연기되었다.
- 케이 해먼드: D.W. 그리피스 감독의 에이브러햄 링컨 (1930)
- 마조리 위버: 존 포드 감독의 젊은 링컨 (1939)
- 루스 고든: 일리노이의 에이브 링컨 (1940)
- 줄리 해리스: 연극을 각색한 1976년 TV 영화 링컨 부인의 마지막
- 메리 타일러 무어: 1988년 TV 미니시리즈 링컨
- 도나 머피: 1998년 영화 링컨이 총에 맞은 날
- 샐리 필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12년 영화 링컨
- 페넬로페 앤 밀러: 링컨을 구하다 (2012)
-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테드: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에이브러햄 링컨: 뱀파이어 헌터 (2012)
- 비비 재니스: 1955년 앤솔러지 텔레비전 시리즈 TV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운명이 링컨을 대통령으로 만든 방법" 에피소드
- 릴리 테일러: 2024년 애플 TV+ 미니시리즈 맨헌트
메조소프라노 일레인 보나치는 1972년 에미상을 수상한 토머스 파사티에리의 오페라 메리 링컨의 재판에서 메리 역을 연기했다.
2005년 수프얀 스티븐스는 그녀가 생애 대부분을 보낸 일리노이주를 주제로 한 앨범 일리노이의 연주곡 "미쳐버렸지만 아주 좋은 이유가 있었던 메리 토드를 위한 짧은 재연"에서 메리 토드 링컨을 언급했다.
2024년에는 평단의 찬사를 받은 연극 오, 메리!가 오프브로드웨이에서 개막했다. 이 블랙 코미디는 남북전쟁 말기와 에이브러햄 링컨 암살 직전 몇 주 동안의 메리 토드 링컨의 삶을 조명한다. 상상력이 풍부한 대본은 퀴어 요소와 현대적 언급을 포함하며, 인기로 인해 여러 차례 연장되었고 브로드웨이로 이전될 예정이다. 작가 콜 에스콜라는 완전히 독창적인 텍스트를 쓸 때 자신의 불안감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나중에 링컨 자신의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해 알게 되었다.
존 랜섬 필립스의 연극 대통령 부인은 메리 링컨과 사진작가 매튜 브래디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한다.
1872년, 메리 링컨은 영혼 사진작가 윌리엄 H. 멈러를 찾아가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에는 그녀 뒤에 링컨의 "유령"이 희미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사진은 현재 인디애나주 포트웨인의 앨런 카운티 공공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심령 연구 대학은 윌리엄 스테인턴 모지스의 기록을 인용하여, 이 사진이 1870년대 초에 촬영되었고, 링컨이 '린달 부인'이라는 가명을 사용했으며, 멈러의 아내가 링컨에게 사진 속 인물이 자신의 남편임을 확인하도록 설득해야 했다고 주장한다. P.T. 바넘은 멈러의 사기 재판에서 증언하며, 자신과 에이브러햄 링컨의 '유령'이 함께 찍힌 사진을 제시하여 멈러의 사진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법정에서 시연했다. 이 사진은 이제 다중 노출을 통해 이전에 준비된 사망자의 이미지가 담긴 양화 유리판을 사용하지 않은 감광 유리판 앞에 삽입하여 만든 조작된 사진으로 인식되고 있다.

10. 친족
메리 토드 링컨은 에이브러햄 링컨과의 관계 외에도 다양한 친족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언니 엘리자베스 토드는 일리노이 주지사 니니언 에드워즈의 아들인 니니언 에드워즈 주니어와 결혼했다. 그들의 딸 줄리아 에드워즈는 일리노이 주립 저널의 편집장이자 에드워드 L. 베이커 시니어의 아들인 에드워드 L. 베이커 주니어와 결혼했다. 그들의 딸인 메리 토드 링컨의 종손녀 메리 에드워즈 브라운은 링컨 홈스테드의 관리인으로 일했으며, 그녀의 딸 또한 같은 역할을 했다.
메리의 이복 여동생 에밀리 토드는 남부맹방 장군이자 켄터키 주지사 존 L. 헬름의 아들인 벤저민 하딘 헬름과 결혼했다. 또 다른 이복 여동생 엘로디 토드는 남부맹방 준장 내서니얼 H. R. 도슨과 결혼했는데, 그는 나중에 제3대 미국 교육 국장이 되었다. 메리 토드의 사촌 중 한 명은 다코타 준주 의원이자 미국 장군이었던 존 블레어 스미스 토드였다.
11. 외부 링크
- [https://bidenwhitehouse.archives.gov/about-the-white-house/first-families/mary-todd-lincoln/ 백악관 프로필]
- [https://books.google.com/books?id=i2vNS5n1UHgC Mrs. Abraham Lincoln: A Study of Her Personality and Her Influence on Lincoln By W. A. Evans]
- [https://www.histclo.com/pres/ind19/lincoln/lin-child.html 링컨 자녀들]
- [http://rogerjnorton.com/Lincoln90.html 메리 토드 링컨 인용문]
- [http://www.shapell.org/search/?search=mary+todd+lincoln 메리 토드 링컨의 원본 서신]
- [http://firstladies.c-span.org/FirstLady/18/Mary-Lincoln.aspx C-SPAN의 '영부인: 영향력과 이미지'의 메리 링컨]
- [http://hdl.loc.gov/loc.rbc/lprbscsm.scsm1298 메리 토드 링컨의 시드-펄 목걸이와 팔찌]
- [http://www.cr.nps.gov/nr/travel/lexington/mtl.htm 메리 토드 링컨 하우스 (국립공원관리청)]
- [http://www.mtlhouse.org/ 메리 토드 링컨 하우스 (공식 홈페이지)]
- [http://rogerjnorton.com/Lincoln15.html 메리 토드 링컨 연구 사이트]
- [http://www.sonofthesouth.net/leefoundation/civil-war/1862/november/mary-todd-lincoln.htm 1862년 하퍼스 위클리 신문의 메리 토드 링컨]
- [http://rogerjnorton.com/Lincoln76.html 학생들을 위한 개요 - 메리 토드 링컨의 삶]
- [http://www.mlwh.org/inside.asp?ID=15&subjectID=2 링컨 씨의 백악관: 메리 토드 링컨]
- [https://web.archive.org/web/20070602132247/http://www.chicagohistory.org/wetwithblood/index.htm "피로 젖은", 메리 토드 링컨의 망토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 (시카고 역사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