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루스 고든의 초기 생애는 매사추세츠주 퀸시에서 시작되었으며,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
1.1. 출생 및 가족

루스 고든 존스는 1896년 10월 30일 매사추세츠주 퀸시 위스롭 애비뉴 41번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마리온 스트리트 41번지(1901~1903년)와 엘름우드 애비뉴 14번지(1903~1914년)에서 거주했는데, 이 세 집 모두 퀸시의 울러스턴 지역에 위치해 있다. 그녀는 애니 태플리(결혼 전 성은 지글러)와 클린턴 존스의 딸이었다. 그녀의 유일한 형제는 아버지의 첫 결혼에서 태어난 이복 언니 클레어였다. 그녀는 성공회 신자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의 첫 대중 노출은 유아 시절에 아버지의 고용주인 유아 및 병약자용 멜린스 푸드 광고에 사진이 사용되면서였다.
1.2. 교육
퀸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그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여러 여배우들에게 사인이 담긴 사진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그중 그녀가 연극 《핑크 레이디》에서 보았던 헤이즐 던으로부터 받은 개인적인 답장은 그녀가 연기를 시작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연기라는 어려운 직업에서 성공할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1914년 딸을 뉴욕으로 데려가 미국 연극 예술 아카데미에 등록시켰다.
2. 경력
루스 고든은 무성 영화 시대부터 텔레비전과 영화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펼치며 오랜 경력을 쌓았다.
2.1. 연극 및 무성 영화 경력

1915년, 고든은 뉴저지주 포트 리에서 촬영된 무성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했으며, 버넌과 아이린 캐슬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영화 《인생의 소용돌이》에서는 댄서로 등장했다. 같은 해, 그녀는 《피터 팬》의 리바이벌 공연에서 닙스(잃어버린 아이들) 역으로 브로드웨이에 데뷔하여 모드 애덤스와 함께 무대에 섰고, 영향력 있는 비평가 알렉산더 울콧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울콧은 그녀를 "언제나 명랑하다"고 묘사했으며, 그는 그녀의 친구이자 멘토가 되었다.
1918년, 고든은 부스 타킹턴의 《세븐틴》의 브로드웨이 각색판에서 배우 그레고리 켈리와 함께 출연했다. 두 사람은 프랭크 크레이븐의 《첫해》와 타킹턴의 《클래런스》, 《트위들스》의 북미 투어에서 계속 함께 공연했다. 그리고 1921년, 고든과 켈리는 결혼했다.
1920년 12월, 고든은 평생 앓아온 오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시카고의 한 병원에 입원하여 다리를 부러뜨리고 곧게 펴는 수술을 받았다. 세 달간의 회복 후, 그녀는 인디애나폴리스로 이주하여 레퍼토리 극단을 시작했다.
켈리는 1927년 36세의 나이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고든은 수년간 "아름답지만 멍청한" 캐릭터로 고정 출연된 후 맥스웰 앤더슨의 《새터데이즈 칠드런》에서 바비 역으로 브로드웨이에 출연하며 재기를 누리고 있었다.
1929년, 고든은 히트작인 《세레나 블랜디시》에 출연하던 중 이 쇼의 프로듀서인 제드 해리스의 아이를 임신했다. 그들의 아들 존스 해리스는 그해 파리에서 태어났고, 고든은 그를 뉴욕으로 데려왔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고든과 해리스는 아들에게 정상적인 양육 환경을 제공했고, 사회적 관습이 변하면서 그의 친자 관계는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932년, 가족은 뉴욕시의 작고 우아한 브라운스톤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 그들의 아들은 후에 여배우이자 상속녀인 하이디 밴더빌트와 결혼했다.

2.2. 영화 및 방송 활동 (시기별)
고든은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다양한 영화와 텔레비전 작품에 출연하며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2.2.1. 1930년대
고든은 1930년대 내내 무대에서 계속 활동했으며, 이선 프롬에서 매티 역, 윌리엄 위처리의 복원 희극 《컨트리 와이프》에서 마저리 핀치와이프 역(런던의 올드 빅 극장과 브로드웨이),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노라 헬머 역(콜로라도주 센트럴 시티와 브로드웨이)으로 주목할 만한 공연을 펼쳤다.
2.2.2. 1940년대
고든은 1930년대 초 잠시 메트로-골드윈-메이어 영화 계약을 맺었지만, 그레타 가르보의 마지막 영화인 《두 얼굴의 여인》(1941)에서 조연을 맡기 전까지는 이 회사에서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고든은 할리우드의 다른 스튜디오에서 더 좋은 기회를 얻어 1940년대 초 《일리노이의 에이브 링컨》(메리 토드 링컨 역), 《닥터 에를리히의 마법 총알》(에를리히 부인 역), 《북대서양의 작전》 등 여러 영화에서 조연으로 출연했다.
1940년대 고든의 브로드웨이 연극 출연작으로는 폴 빈센트 캐롤의 《내 주여, 줄이 거짓말입니다》에서 아이리스 역, 캐서린 코넬과 거스리 맥클린틱의 안톤 체호프 《세 자매》 리바이벌 공연에서 나타샤 역, 그리고 자신의 희곡 《오버 투애니원》과 《주연 여배우》에서 주연을 맡았다.
고든은 1942년 두 번째 남편인 작가 가슨 케이닌과 결혼했다. 고든과 케이닌은 캐서린 헵번과 스펜서 트레이시 주연의 영화 《아담의 갈비뼈》(1949)와 《팻과 마이크》(1952)의 각본을 공동 작업했다. 두 영화 모두 조지 큐커가 감독했다. 그들은 헵번과 트레이시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영화에 배우들의 성격 요소를 통합했다. 고든과 케이닌은 이 두 각본뿐만 아니라 역시 큐커가 감독한 《이중 생활》(1947)로도 아카데미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2.2.3. 1950년대
《여배우》(1953)는 고든의 자전적 희곡 《몇 년 전》을 영화로 각색한 작품으로, 메트로-골드윈-메이어가 제작했으며 진 시몬스가 퀸시 출신의 소녀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뉴욕으로 가서 배우가 되는 이야기를 연기했다. 고든은 1970년대에 《내 편》, 《다른 사람들 속의 나》, 《열린 책》이라는 세 권의 회고록을 집필했다.
고든은 1950년대에도 무대 연기 경력을 이어갔으며, 손턴 와일더의 《더 매치메이커》에서 돌리 레비 역을 맡아 1956년 토니상 연극 부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녀는 이 역할을 런던, 에든버러, 베를린에서 연기했다.
2.2.4. 1960년대

1966년, 고든은 내털리 우드와 함께 출연한 《인사이드 데이시 클로버》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고 골든 글로브상 영화 부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는 그녀의 첫 연기 부문 후보 지명이었다. 1969년에는 맨해튼 어퍼 웨스트 사이드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탄 숭배 집단에 대한 아이라 레빈의 베스트셀러 공포 소설을 영화화한 《로즈메리의 아기》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제4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무대에서 상을 받으며 고든은 아카데미에 "이런 일이 얼마나 격려가 되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관객들의 큰 웃음을 자아냈다. 당시 그녀는 50년간 이 업계에 종사했으며 72세였다. 그녀는 "그리고 저에게 투표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투표하지 않으신 모든 분들께는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덧붙여 더 많은 웃음과 박수를 받았다.
고든은 《로즈메리의 아기》로 또 다른 골든 글로브상을 수상했으며, 1971년에는 《해롤드와 모드》(버드 코트가 상대역)에서 모드 역으로 다시 후보에 지명되었다.
2.2.5. 후기 경력 (1970년대 이후)
그녀는 70대와 80대에도 22편의 영화와 수많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성공적인 시트콤인 《로다》(보이지 않는 도어맨 칼턴의 어머니 역으로 에미상 후보에 오름)와 《뉴하트》 등이 포함된다. 그녀는 1977년 에피소드 《형사 콜롬보: 나를 잡아봐》에서 살인 작가 역을 연기했다. 그녀는 수많은 토크쇼에 출연했으며, 1977년에는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를 진행하기도 했다.
고든은 1979년 방영된 시트콤 《택시》의 "슈가 마마" 에피소드 출연으로 에미상을 수상했다. 이 에피소드에서 그녀의 캐릭터는 시리즈 주연인 저드 허시가 연기한 택시 운전사의 서비스를 남성 에스코트로 요청하려 한다.
그녀의 마지막 브로드웨이 출연은 1976년 조지프 팝이 비비안 보몽 극장에서 제작한 조지 버나드 쇼의 《워렌 부인의 직업》에서 워렌 부인 역이었다. 1976년 여름, 고든은 매사추세츠주 데니스에 있는 케이프 플레이하우스에서 자신의 희곡 《호! 호! 호!》의 주연을 맡았다. 그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 《더티 파이터》와 《더티 파이터 2》에서 오빌 보고스(제프리 루이스)의 어머니인 마 보고스 역으로 조연을 맡았다.
1983년, 고든은 영화 속 여성 로스앤젤레스로부터 크리스털 어워드를 수상했다. 이 상은 인내심과 뛰어난 작품을 통해 엔터테인먼트 산업 내 여성의 역할을 확장하는 데 기여한 뛰어난 여성들에게 수여된다.
《해롤드와 모드》, 《아담의 갈비뼈》, 《로즈메리의 아기》는 미국 의회도서관의 내셔널 필름 레지스트리에 보존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3. 집필 활동
루스 고든은 배우로서의 활동 외에도 여러 영화 각본과 희곡, 회고록을 집필하며 작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했다.
3.1. 영화 각본
고든은 남편 가슨 케이닌과 함께 여러 영화 각본을 공동 집필했다. 이들의 주요 작품으로는 캐서린 헵번과 스펜서 트레이시 주연의 《아담의 갈비뼈》(1949)와 《팻과 마이크》(1952)가 있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조지 큐커가 감독했으며, 고든과 케이닌은 이들 영화의 각본으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또한 그녀는 1947년 영화 《이중 생활》의 각본으로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그녀가 각본을 맡은 다른 영화로는 《결혼하는 종류》(1952), 《여배우》(1953) (자신의 희곡 《몇 년 전》을 각색), 《로지!》(1967), 《하드햇 앤 레그스》(1980) 등이 있다.
3.2. 희곡 및 회고록
고든은 직접 여러 희곡과 회고록을 집필했다. 그녀의 희곡으로는 《오버 투애니원》(1944), 《몇 년 전》(1946), 《주연 여배우》(1948), 《호! 호! 호!》(1976) 등이 있다. 특히 《몇 년 전》은 1953년 영화 《여배우》로 각색되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1970년대에 세 권의 회고록을 출간했는데, 《내 편》(1976), 《다른 사람들 속의 나》(1971), 《열린 책》(1980)이 그것이다. 이 회고록들은 그녀의 삶과 경력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4. 개인 생활
루스 고든의 개인 생활은 두 번의 결혼과 자녀를 통해 형성되었다.
4.1. 결혼 및 자녀
고든은 1921년 배우 그레고리 켈리와 결혼했으나, 켈리는 1927년 36세의 나이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1929년, 그녀는 연극 《세레나 블랜디시》의 프로듀서 제드 해리스와의 사이에서 아들 존스 해리스를 낳았다. 고든과 해리스는 결혼하지 않았지만, 아들에게 정상적인 양육 환경을 제공했으며, 존스 해리스는 후에 여배우이자 상속녀인 하이디 밴더빌트와 결혼했다. 1942년, 고든은 작가 가슨 케이닌과 재혼했으며, 그들은 고든이 사망할 때까지 43년간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5. 수상 및 후보
루스 고든은 연기와 집필 활동을 통해 수많은 상과 후보 지명을 받으며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연도 | 시상식 | 부문 | 작품 | 결과 |
---|---|---|---|---|
1947 | 아카데미상 | 최우수 각본상 | 《이중 생활》 | 후보 |
1950 | 《아담의 갈비뼈》 | 후보 | ||
1952 | 《팻과 마이크》 | 후보 | ||
1965 | 최우수 여우조연상 | 《인사이드 데이시 클로버》 | 후보 | |
1968 | 《로즈메리의 아기》 | 수상 | ||
1965 | 골든 글로브상 | 영화 부문 여우조연상 | 《인사이드 데이시 클로버》 | 수상 |
1968 | 《로즈메리의 아기》 | 수상 | ||
1971 | 영화 부문 여우주연상 - 뮤지컬·코미디 | 《해롤드와 모드》 | 후보 | |
1976 | 프라임타임 에미상 | 코미디 또는 드라마 시리즈 부문 최우수 게스트 여우주연상 | 《로다》 | 후보 |
1977 | 코미디 또는 드라마 스페셜 부문 최우수 여우조연상 | 《위대한 후디니》 | 후보 | |
1979 | 코미디 시리즈 부문 최우수 여우주연상 | 《택시》 | 수상 | |
1985 | 정보 프로그램 부문 최우수 개인 공로상 - 공연 | 《매우 어린 아이들의 비밀 세계》 | 후보 | |
1956 | 토니상 | 연극 부문 최우수 여우주연상 | 《더 매치메이커》 | 후보 |
1949 | 미국 작가 조합상 | 최우수 코미디 각본상 | 《아담의 갈비뼈》 | 후보 |
1950 | 후보 | |||
1952 | 《팻과 마이크》 | 후보 | ||
《결혼하는 종류》 | 후보 | |||
1953 | 《여배우》 | 후보 |
6. 평가 및 유산
루스 고든은 배우와 작가로서 예술 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그녀의 작품과 활동은 사회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6.1. 예술적 기여
루스 고든은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며 독특한 연기 스타일과 개성을 구축했다. 특히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노년의 배우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녀는 《해롤드와 모드》에서 보여준 활기 넘치고 자유분방한 노년 여성의 모습으로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또한, 그녀는 단순한 배우를 넘어 각본가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아담의 갈비뼈》와 같은 명작의 탄생에 기여했다. 그녀의 대표작인 《해롤드와 모드》, 《아담의 갈비뼈》, 《로즈메리의 아기》는 미국 내셔널 필름 레지스트리에 보존 작품으로 선정되어 그녀의 예술적 기여가 길이 기억될 것임을 보여준다. 1983년에는 영화 속 여성 로스앤젤레스로부터 크리스털 어워드를 수상하며 엔터테인먼트 산업 내 여성의 역할을 확장하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6.2. 사회적/문화적 영향
루스 고든의 작품 중 특히 《해롤드와 모드》는 80세 노년 여성과 10대 청소년의 사랑을 다루며 당시 사회의 보수적인 시각에 도전하고 비전통적인 가치관을 제시하여 일부 보수 언론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세대 간의 이해와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메시지를 전달하며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으로 남아있다. 그녀는 또한 영화 속 여성 로스앤젤레스로부터 크리스털 어워드를 수상하며 엔터테인먼트 산업 내 여성의 역할 확장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는 등, 사회적 변화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7. 사망
1985년 8월 28일, 루스 고든은 매사추세츠주 에드거타운에 있는 여름 별장에서 뇌졸중으로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43년간 그녀의 남편이었던 가슨 케이닌은 그녀의 곁을 지켰으며, 그녀의 마지막 날조차 산책, 대화, 심부름, 그리고 새 희곡 작업으로 가득 찬 전형적인 하루였다고 전했다. 그녀는 사망 2주 전 영화 《해롤드와 모드》의 자선 상영회에서 마지막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사망 직전까지 네 편의 영화 촬영을 마친 상태였다.
8. 기념 및 추모
루스 고든을 기리기 위한 여러 기념 활동이 이루어졌다. 1979년 8월, 매사추세츠주 웨스트보로에 있던 작은 영화관이 '루스 고든 플릭'으로 명명되었다. 그녀는 개관식에 참석하여 로비의 벤치 위에 서서 자신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이 극장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1984년 11월에는 매사추세츠주 퀸시의 메리마운트 공원에 있는 야외 원형 극장이 그녀를 기려 '루스 고든 원형 극장'으로 명명되었다.
9. 관련 항목
- 아카데미상
- 골든 글로브상
- 프라임타임 에미상
- 토니상
- 미국 작가 조합상
- 브로드웨이
- 할리우드
- 내셔널 필름 레지스트리
- 로즈메리의 아기 (영화)
- 해롤드와 모드
- 아담의 갈비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