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만프레트 롬멜(Manfred Rommel독일어, 1928년 12월 24일 ~ 2013년 11월 7일)은 독일의 저명한 정치인이자 기독교민주연합(CDU) 소속 당원으로, 1974년부터 1996년까지 22년간 슈투트가르트 시장을 역임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명한 장군인 에르빈 롬멜 원수의 외아들로, 아버지의 명성에 가려지지 않고 자신만의 포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정책으로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방 정치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롬멜 시장은 도시 재정의 엄격한 관리와 인프라 개선을 통해 슈투트가르트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특히, 적군파 테러리스트들의 매장 문제와 외국인 이민자들에 대한 공정한 대우를 주장하는 등 논란이 많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소신 있는 입장을 견지하며 그의 관용적인 정치 철학을 보여주었다. 또한, 아버지의 전쟁 중 적수였던 조지 S. 패튼 장군의 아들 조지 패튼 4세와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의 아들 데이비드 몽고메리와의 깊은 우정을 통해 전후 독일과 영국, 미국 간의 화해와 통합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작가이자 강연가로 활발히 활동하며 정치와 문화, 유머에 대한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생애는 독일의 전후 민주주의 발전과 사회적 통합에 기여한 중요한 인물로서 기억되고 있다.
2. 초기 생애 및 가족
만프레트 롬멜은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겪으며 성장했으며, 특히 유명한 아버지 에르빈 롬멜과의 관계는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1. 출생과 성장 과정
만프레트 롬멜은 1928년 12월 24일, 독일국 뷔르템베르크 자유인민주의 주도인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독일 육군의 장교였던 에르빈 롬멜이었고, 어머니는 루치아 마리아 몰린(Lucia Maria Mollin, 1894년~1971년)이었다. 만프레트라는 이름은 어린 나이에 사망한 에르빈 롬멜의 형의 이름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2.2. 아버지 에르빈 롬멜과의 관계
만프레트 롬멜은 14세가 되던 1943년에 공군 보조원(Luftwaffenhelfer)으로 입대하여 대공포 부대에서 복무했다. 그는 한때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는 것을 고려했으나, 그의 아버지는 이에 반대했다. 1944년 10월 14일, 만프레트는 부모님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날 그의 아버지는 아돌프 히틀러 암살을 모의한 7월 20일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자살을 강요당하기 위해 끌려갔다. 나치 지도부는 에르빈 롬멜의 죽음을 전쟁 중 부상으로 인한 사망으로 대중에 공표했지만, 만프레트는 아버지의 강요된 죽음을 직접 목격하며 큰 충격을 받았다.
2.3. 제2차 세계 대전 중 경험
1945년 2월, 만프레트 롬멜은 공군 복무에서 해제되었고, 같은 해 3월에는 준군사 조직인 국가노동봉사단(Reichsarbeitsdienst)에 징집되었다. 4월 말 리들링겐에 주둔하던 그는 프랑스 제1군이 마을에 진입하기 직전 탈영했다. 이후 그는 전쟁 포로가 되었고, 당시 프랑스군 장군이었던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를 비롯한 여러 인물에게 심문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만프레트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며, 나치 정권의 거짓 선전을 폭로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이러한 경험은 전후 독일 사회의 재건과 화해에 대한 그의 시각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3. 학업 및 공직 경력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만프레트 롬멜은 학업에 매진하여 법률가로서의 기반을 다졌으며, 이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정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3.1. 전후 학업 및 법률 활동
1947년, 만프레트 롬멜은 비베라흐 안 데어 리스에서 공부하며 아비투어 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그는 튀빙겐 대학교에 진학하여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잠시 변호사로 활동하며 법률 분야에서의 실무 경험을 쌓았다.
3.2. 주 정부 공직
1956년, 롬멜은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공무원으로 임용되면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59년에 참사관으로 승진하여 한스 필빙거 내무장관의 비서로 일했다. 1971년에는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재무부 장관실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차관으로 승진하며 주 정부 내에서 중요한 직책을 수행했다. 그의 공직 경험은 훗날 슈투트가르트 시장으로서 도시 행정을 이끄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4. 슈투트가르트 시장 재임
만프레트 롬멜은 22년간 슈투트가르트 시장으로 재임하며 도시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그의 정책은 관용적이고 자유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4.1. 시장 당선 및 임기
1974년, 만프레트 롬멜은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후보로 고향 슈투트가르트의 시장 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2차 투표에서 58.5%의 득표율을 얻어 독일 사회민주당의 페터 콘라디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후 1982년 선거에서는 69.8%, 1990년 선거에서는 71.7%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1차 투표에서 재선에 성공하며 총 3선에 성공했다. 그는 1996년 용퇴할 때까지 22년간 슈투트가르트 시장직을 수행하며 도시의 장기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4.2. 주요 업적 및 시정 운영
롬멜 시장은 슈투트가르트의 재정을 엄격하게 관리하여 도시 부채를 줄이고, 도로 및 대중교통을 포함한 지역 인프라를 혁신적으로 개선하는 데 힘썼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슈투트가르트는 경제적으로 크게 번성했으며, 그는 이러한 번영을 시민 복지 증진에 활용했다. 또한 그는 독일 도시 협의회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국제 지방 자치 위원회 설립에도 관여하는 등 지방 행정 분야에서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4.3. 사회적 이슈 및 논란
롬멜 시장은 재임 중 발생한 여러 사회적 논란에 대해 그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1977년 슈탐하임 교도소에서 자살한 적군파 테러리스트 안드레아스 바더와 구드룬 엔슬린의 매장 문제에 대한 그의 대처는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이들의 묘지가 급진 좌파의 순례지가 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롬멜은 엔슬린 가족의 요청을 받아들여 도르할렌 공동묘지에 매장지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당 내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모든 적개심은 언젠가 끝나야 하며, 이 경우에는 그들의 죽음과 함께 끝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자신의 결정을 옹호했다. 이러한 결정은 그의 관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정치 철학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또한 그는 슈투트가르트의 급성장하는 경제로 인해 유입된 외국인 이민자들에 대한 공정한 대우를 옹호하며 인기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했다.
4.4. 국제 관계 및 화해 상징
롬멜 시장은 전후 독일의 화해와 국제적 통합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프랑스와의 관계 증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는 롬멜의 슈투트가르트 시장 재임 기간 동안 프랑스와 독일 간의 관계가 얼마나 잘 유지되고 발전되었는지를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아버지 에르빈 롬멜의 제2차 세계 대전 중 주요 적수였던 조지 S. 패튼 장군의 아들 조지 패튼 4세와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의 아들 데이비드 몽고메리와 깊은 우정을 쌓았다. 조지 패튼 4세는 슈투트가르트 인근 미국 제7군단 본부에 배치되면서 롬멜과 만나게 되었고, 이후 두 사람은 평생에 걸쳐 우정을 이어갔다. 이러한 우정은 전쟁 후 영국과 독일 간의 화해, 그리고 서독의 NATO 가입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롬멜의 이러한 국제적 교류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시대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5. 정치적 관점
만프레트 롬멜의 정치적 관점은 그의 공직 생활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드러났다.
5.1. 정치적 입장
만프레트 롬멜의 정치적 성향은 '관용적'이고 '자유주의적'으로 묘사된다. 그는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로 분류되기도 했으며, 이는 그의 정책 결정과 사회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도시 재정의 효율성을 강조하면서도,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포용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특히 적군파 테러리스트의 매장 문제나 외국인 이민자 처우 문제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당내 보수 세력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유주의적 신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관용과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한 그의 정치적 리더십은 그를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방 정치인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6. 퇴임 후 활동
1996년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만프레트 롬멜은 작가이자 강연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6.1. 저술 활동
롬멜은 파킨슨병으로 고통받는 와중에도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는 정치, 문화, 유머 등 다양한 주제로 여러 권의 책을 출판했다. 그의 저서들은 솔직하고 유머러스한 어록과 인용문으로 유명했다. 때때로 그는 지역 신문인 슈투트가르터 차이퉁에 기고하기도 했다.
그의 주요 저서 목록은 다음과 같다:
- Abschied vom Schlaraffenland. Gedanken über Politik und Kultur (1987)
- Manfred Rommels gesammelte Sprüche (1988, 2001)
- Wir verwirrten Deutschen (1989)
- Manfred Rommels gesammelte Gedichte (1993)
- Die Grenzen des Möglichen. Ansichten und Einsichten (1995)
- Trotz allem heiter. Erinnerungen (1998) - 그의 회고록
- Neue Sprüche und Gedichte (2000)
- Holzwege zur Wirklichkeit (2001)
- Soll und Haben (2001)
- Das Land und die Welt (2003)
- Ganz neue Sprüche & Gedichte und andere Einfälle (2004)
- Vom Schlaraffenland ins Jammertal? (2006)
- Gedichte und Parodien (2006)
- Manfred Rommels schwäbisches Allerlei. Eine bunte Sammlung pfiffiger Sprüche, witziger Gedichte und zumeist amüsante Geschichten (2008)
- Auf der Suche nach der Zukunft. Zeitzeichen unter dem Motto: Ohne Nein kein Ja (2008)
- 1944 - das Jahr der Entscheidung. Erwin Rommel in Frankreich (2010)
- Die amüsantesten Texte (2010)
또한 롬멜은 바실 리델 하트와 협력하여 그의 아버지 에르빈 롬멜이 군사 작전 중 및 그 이후에 작성한 일기, 편지, 메모를 모아 출판한 롬멜 페이퍼스에 기여했다.
6.2. 강연 및 대중 활동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롬멜은 인기 있는 작가이자 강연가로 꾸준히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파킨슨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활발하게 강연 활동을 펼쳤으며, 언론 기고와 대중 연설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견해를 피력했다. 그의 소탈하고 유머러스한 화법은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7. 개인적인 삶
만프레트 롬멜은 공적인 활동 외에도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통해 개인적인 삶의 충만함을 추구했다.
7.1. 가족 및 우정
만프레트 롬멜은 1954년에 리셀로테와 결혼하여 카테리네라는 딸을 두었다. 그는 2013년 11월 7일, 84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아내 리셀로테와 딸 카테리네가 그의 뒤를 이었다.
그는 특히 아버지의 두 주요 군사적 적수였던 조지 S. 패튼 장군의 아들 조지 패튼 4세와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의 아들 데이비드 몽고메리와 깊은 우정을 쌓았다. 조지 패튼 4세는 당시 롬멜이 시장으로 재임하던 슈투트가르트 근교의 미국 제7군단 본부에 고위 장교로 부임하면서 롬멜과 만나게 되었고, 이후 두 사람은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이러한 우정은 전쟁 후 영국과 독일 간의 화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8. 대중 문화 속 묘사
만프레트 롬멜의 삶과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는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다루어졌다.
- 1951년 영화 사막의 여우(Rommel, der Wüstenfuchs독일어, 감독: 헨리 헤서웨이): 윌리엄 레이놀즈가 만프레트 롬멜 역을 맡았다.
- 1962년 영화 가장 긴 하루(der längste Tag독일어, 감독: 켄 애너킨, 앤드루 마턴, 베른하르트 비키, 게르트 오스발트, 대릴 F. 재넉): 미하엘 힌츠가 만프레트 롬멜 역을 연기했으며, 미하엘의 아버지 베르너 힌츠는 이 영화에서 롬멜 원수 역을 맡았다.
- 1989년 TV 시리즈 전쟁과 추억: 마티아스 힌체가 만프레트 롬멜 역으로 출연했다.
- 2012년 영화 롬멜 (감독: 니키 슈타인): 파트리크 묄레켄이 만프레트 롬멜 역을 맡았다.
또한 2021년 다큐멘터리 롬멜: 군인, 아들, 그리고 히틀러에서는 그레그 키니어의 내레이션과 함께 만프레트가 아버지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이 담겨 있다.
9. 수상 및 영예
만프레트 롬멜은 그의 뛰어난 업적과 공로를 인정받아 국내외에서 수많은 상과 훈장을 받았다.
9.1. 주요 수상 경력
만프레트 롬멜은 자신이 받은 수많은 영예에 대해 "칭호의 수는 끝이 없어라. 묘비에는 '뒤집어 보시오!'라고 쓰여 있을 것이다"라는 유머러스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가 받은 주요 상과 훈장은 다음과 같다.
- 1978년: 독일 연방 공로 십자훈장 대공로십자장 (1989년 성(星)장, 1996년 대십자장 추가 수훈)
- 1979년: 카이로 명예 시민
- 1982년: 오렌지 나사우 훈장 대장 (네덜란드)
- 1982년: 슈투트가르트 응용과학대학교 명예 상원의원
- 1982년: 티어리셰 에른스트 훈장 (유머 감각을 인정받아 수여)
- 1984년: 클레이 장군 메달
- 1985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프랑스)
- 1987년: 예루살렘 수호자
- 1987년: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대십자장
- 1990년: 대영 제국 훈장 3등급 (CBE)
- 1990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공로 메달
- 1990년: 대중교통 발전에 기여한 프리드리히 레너 박사 메달
- 1990년: 독일-미국 우정 유대 메달
- 1992년: 메릴랜드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 1993년: 국제 육상 경기 연맹 황금 공로 훈장
- 1995년: 오토 히르슈 메달
- 1996년: 슈투트가르트 시 명예 시민
- 1996년: 합동참모본부장 표창 (뛰어난 공공 서비스 공로)
- 1996년: 슈바벤 방언 발전에 기여한 프리드리히 E. 포그트 메달
- 1996년: 웨일스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 1996년: 교수 임명
- 1997년: 독일-프랑스 우정을 위한 프랑스-독일 협정상
- 1997년: 독일 도시 협회 명예 회원
- 1997년: 하인츠 헤르베르트 카리 상
- 1998년: 돌프 슈테른베르거 상
- 2008년: 한스-페터-슈틸 상
9.2. 기념 및 유산
만프레트 롬멜의 이름은 그의 고향 슈투트가르트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의 사망 후 슈투트가르트 공항은 공식 명칭에 "만프레트 롬멜"을 추가하여 "만프레트 롬멜 공항"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슈투트가르트 21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슈투트가르트 중심부에 조성될 광장 역시 "만프레트-롬멜-광장"으로 명명될 예정이다. 이러한 기념물들은 그가 슈투트가르트 시와 독일 사회에 남긴 깊은 유산과 공헌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