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마크 로브슨(Mark Robson영어, 1913년 12월 4일 ~ 1978년 6월 20일)은 캐나다계 미국인 영화 감독, 영화 프로듀서, 영화 편집자이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45년간의 경력을 쌓았으며, 초기에는 영화 편집자로 활동하다가 이후 감독과 프로듀서로 영역을 확장했다. 로브슨은 생애 동안 34편의 영화를 연출했으며, 대표작으로는 《챔피언》(1949), 《브라이트 빅토리》(1951), 《원한의 도곡리 다리》(1954), 《페이튼 플레이스》(1957), 《여섯번째 행복의 여관》(1958), 《탈주 특급》(1965), 《인형의 계곡》(1967), 《대지진》(1974) 등이 있다.
로브슨은 《페이튼 플레이스》와 《여섯번째 행복의 여관》으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두 차례 지명되었으며, 미국 감독 조합상 장편 영화 부문 감독상 후보에도 네 차례 이름을 올렸다. 그의 영화 두 편은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 후보로 선정되기도 했다. 1960년에는 영화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되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마크 로브슨은 1913년 12월 4일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에서 태어났다. 그는 몬트리올의 로즐린 초등학교와 웨스트마운트 고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대학교와 퍼시픽 코스트 대학교 법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학업을 마친 후 그는 20세기 폭스 스튜디오의 소품 부서에서 일자리를 얻었고, 이어서 RKO 픽처스로 옮겨 영화 편집자로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3. 경력
마크 로브슨은 영화 편집자로 할리우드 경력을 시작하여 점차 감독과 프로듀서로 활동 영역을 넓히며 다양한 장르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3.1. 편집자
1940년, 마크 로브슨은 오슨 웰스의 데뷔작인 《시민 케인》의 편집 작업에 로버트 와이즈의 조수로 참여했다. 그는 와이즈와 함께 웰스의 다음 영화인 《위대한 앰버슨가》(1942)의 편집도 맡았는데, 이 과정에서 웰스의 동의 없이 영화의 결말을 대폭 수정하기도 했다.
로브슨은 1942년 RKO의 B급 영화인 《더 팰콘스 브라더》의 편집자로 승진했다. 이어서 오슨 웰스의 회사에서 제작한 《저니 인투 피어》(1943)를 편집했는데, 이 역시 웰스의 관여 없이 편집이 진행되었다.
3.2. 밸 루이튼과의 작업
로브슨과 로버트 와이즈는 모두 프로듀서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밸 루이튼과의 작업을 통해 큰 영향을 받았다. 루이튼은 당시 RKO에서 저예산 공포 영화 시리즈를 감독하고 있었으며, 이 영화들은 이후 전설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로브슨이 편집자로 참여한 첫 루이튼 작품은 자크 투르뇌르가 연출한 《캣 피플》(1942)이었다. 그는 이어서 투르뇌르가 감독한 루이튼의 다음 두 영화, 즉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1943)와 《더 레오파드 맨》(1943)의 편집을 맡았다.
3.3. 감독

밸 루이튼은 로브슨의 작업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를 《일곱 번째 희생자》(1943)의 감독으로 승진시켰다. 루이튼은 그 결과에 만족하여 로브슨에게 《더 고스트 쉽》(1943)의 연출도 맡겼다. 루이튼은 또한 로버트 와이즈에게도 《더 커스 오브 더 캣 피플》(1944)을 통해 첫 감독 기회를 주었다.
루이튼은 공포 영화가 아닌 다른 장르의 영화를 만들고자 했고, RKO는 그에게 청소년 비행을 다룬 《유스 런스 와일드》(1944)를 제작하도록 허락했다. 로브슨이 이 영화를 연출했지만,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보리스 칼로프가 주연한 《아일 오브 더 데드》(1945)는 더 큰 인기를 얻었다. 루이튼, 칼로프, 로브슨은 《베들램》(1946)에서 다시 뭉쳤으나,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루이튼이 제작한 마지막 공포 영화가 되었다. 로브슨은 1948년에 RKO를 떠났다.
RKO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로브슨은 주요 영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1949년에는 스탠리 크레이머가 제작한 필름 누아르 《챔피언》으로 미국 감독 조합의 영화 부문 우수 감독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로브슨은 크레이머를 위해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 최초의 영화 중 하나인 《홈 오브 더 브레이브》(1949)를 연출하기도 했다.
다음으로 로브슨은 RKO에서 서부 영화 《러프쇼드》(1949)를, 프로듀서 새뮤얼 골드윈을 위해 멜로드라마 《마이 풀리시 하트》(1949)를 연출했다. 골드윈은 이후 로브슨에게 《엣지 오브 둠》(1950)과 《아이 원트 유》(1951)를 맡겼다. 로브슨은 훗날 골드윈과의 작업 시기를 "내 경력 중 최악의 시기 중 하나"라고 회고했다.
유니버설 픽처스에서는 《브라이트 빅토리》(1951)를 만들었다. 로브슨은 잠시 밸 루이튼과 로버트 와이즈를 영화 및 텔레비전 제작 파트너십에 끌어들였으나, 몇 달 후 병든 루이튼을 아무런 설명 없이 제외시켰다. 로브슨과 와이즈는 게리 쿠퍼 주연의 《리턴 투 파라다이스》(1953)를 제작했다. 워윅 필름스를 위해서는 앨런 래드 주연의 《헬 빌로우 제로》(1954)를 연출했다. 콜럼비아 픽처스에서 코미디 영화 《프프트》(1954)를 만든 후, 그의 경력에서 가장 큰 흥행작 중 하나인 《원한의 도곡리 다리》(1954)를 연출했다. 이 영화로 그는 또 한 번 미국 감독 조합상 후보에 올랐다. 워윅 필름스는 그를 다시 《어 프라이즈 오브 골드》(1955)에 기용했다. 그는 MGM으로 가서 《재판》(1955)을 만들었다. 그의 권투 영화인 《하더 데이 폴》(1956)은 버드 슐버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MGM의 《더 리틀 헛》(1957)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보다 더 큰 흥행을 기록한 것은 20세기 폭스의 《페이튼 플레이스》(1957)였다. 로브슨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이듬해에는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여섯번째 행복의 여관》(1958)을 연출하여 다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이 두 영화로 그는 세 번째와 네 번째 미국 감독 조합상 후보 지명을 받았다.
3.4. 프로듀서
로브슨은 폴 뉴먼 주연의 《프롬 더 테라스》(1960)를 제작 및 감독했다. 그는 《더 인스펙터》(1962)와 《나인 아워스 투 라마》(1963)를 제작했으며, 후자는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이 영화를 마친 후 로브슨은 5년간의 관계를 끝내고 폭스사를 떠났다.
로브슨과 뉴먼은 MGM의 《더 프라이즈》(1963)에서 다시 만났는데,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폭스사로 돌아와 프랭크 시나트라가 주연한 《탈주 특급》(1965)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로브슨은 프랑스 외인부대 이야기를 다룬 《로스트 커맨드》(1966)를 제작 및 감독했으며, 1967년에는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았지만 흥행에는 성공한 《인형의 계곡》을 연출했다.
3.5. 후기 작품 활동
로브슨은 경력 후반기에 상업적으로 실망스러운 일련의 영화들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대디스 곤 어-헌팅》(1969), 《해피 버스데이, 완다 준》(1971), 《림보》(1972) 등이 포함된다. 1974년에는 "센서라운드" 기술을 도입한 영화 《대지진》을 연출했다.
4. 개인 생활
마크 로브슨은 1936년부터 1978년 사망할 때까지 사라 나오미 리스킨드와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부부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다. 로브슨은 1978년 6월 20일, 64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아바란체 익스프레스》는 그가 사망한 지 1년 후인 1979년에 개봉되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마운트 시나이 기념 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5. 수상 및 인정
마크 로브슨은 영화 산업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1960년 1722 바인 스트리트(Vine Street)에 위치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되었다. 그는 《페이튼 플레이스》와 《여섯번째 행복의 여관》으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두 차례 지명되었으며, 미국 감독 조합상 장편 영화 부문 감독상 후보에도 네 차례 이름을 올렸다. 또한 그의 영화 두 편은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 후보로 선정되기도 했다.
6. 필모그래피
다음은 마크 로브슨이 참여한 영화 작품 목록이다.
6.1. 편집
- 시민 케인 (1941, 보조 편집자, 비공개)
- 위대한 앰버슨가 (1942, 보조 편집자, 비공개)
- Mail Trouble영어 (1942)
- 더 팰콘스 브라더 (1942)
- 캣 피플 (1942)
- 저니 인투 피어 (1943)
-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1943)
- 더 레오파드 맨 (1943)
6.2. 감독
- 일곱 번째 희생자 (1943)
- 더 고스트 쉽 (1943)
- 유스 런스 와일드 (1944)
- 아일 오브 더 데드 (1945)
- 베들램 (1946, 각본가 겸임)
- 챔피언 (1949)
- 러프쇼드 (1949)
- 홈 오브 더 브레이브 (1949)
- 마이 풀리시 하트 (1949)
- 엣지 오브 둠 (1950)
- 브라이트 빅토리 (1951)
- 아이 원트 유 (1951)
- 리턴 투 파라다이스 (1953, 프로듀서 겸임)
- 헬 빌로우 제로 (1954)
- 프프트 (1954)
- 원한의 도곡리 다리 (1954)
- 어 프라이즈 오브 골드 (1955)
- 재판 (1955)
- 하더 데이 폴 (1956)
- 더 리틀 헛 (1957, 프로듀서 겸임)
- 페이튼 플레이스 (1957)
- 여섯번째 행복의 여관 (1958)
- 프롬 더 테라스 (1960, 프로듀서 겸임)
- 더 인스펙터 (1962, 프로듀서만 참여)
- 나인 아워스 투 라마 (1963, 프로듀서 겸임)
- 더 프라이즈 (1963)
- 탈주 특급 (1965)
- 로스트 커맨드 (1966, 프로듀서 겸임)
- 인형의 계곡 (1967, 프로듀서 겸임)
- 대디스 곤 어-헌팅 (1969, 프로듀서 겸임)
- 해피 버스데이, 완다 준 (1971, 프로듀서 겸임)
- 림보 (1972)
- 대지진 (1974, 프로듀서 겸임)
- 아바란체 익스프레스 (1979, 프로듀서 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