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마일스 크리스토퍼 뎀프시 경(Sir Miles Christopher Dempsey, 1896년 12월 15일 - 1969년 6월 5일)은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영국의 고위 육군 장교이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 제2군을 지휘하며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이후 북서 유럽 전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현역 군인으로서 뛰어난 평판을 쌓은 그는 부하들과 상급자들, 특히 버나드 몽고메리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대중적으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다. 1915년 샌드허스트 왕립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왕립 버크셔 연대의 소위로 임관한 뎀프시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서부 전선에서 복무하며 부상을 입고 무공 십자 훈장을 받았다. 전후에는 이라크, 이란, 인도 등지에서 복무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몽고메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1940년 프랑스 공방전에서 제13여단을 지휘했고, 이후 2년간 영국에서 부대 훈련을 담당했다. 1943년에는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침공에서 제13군단을 지휘했다. 전후에는 극동에서 제14군을, 중동에서는 중동 사령부를 지휘했다. 1947년 육군에서 은퇴한 후에는 경마 관련 활동에 참여하며 경마 베팅 통제 위원회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마일스 뎀프시는 1896년 12월 15일 체셔주 월러시의 뉴 브라이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기 생애와 교육 과정은 그의 군 경력의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시기였다.
2.1. 어린 시절과 가족
뎀프시는 해상 보험 중개인 아서 프랜시스와 헨리 드 라 포스 소장의 딸인 마거릿 모드 드 라 포스의 셋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일랜드 오팔리주와 레이시주의 한 씨족의 후손이었다. 그의 조상인 테렌스 오뎀프시는 1599년 5월 22일 로버트 데버루 제2대 에식스 백작에게 전장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고, 1631년 클랜말리어 자작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오뎀프시 제3대 클랜말리어 자작은 가톨릭 교도인 제임스 2세에게 충성한 결과 1691년에 작위를 박탈당하고 가족의 모든 토지를 잃었다. 뎀프시의 가족은 아일랜드를 떠나 19세기 중반까지 체셔에 정착했다. 뎀프시가 여섯 살 때 그의 아버지가 자살했고, 이후 가족은 서식스주 크롤리로 이주했다.
2.2. 교육
뎀프시는 1911년 스류뷰리 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다. 그는 1914년 시즌에 크리켓 1군 팀의 주장을 맡아 무패 기록을 세웠다. 그는 또한 학교 및 기숙사 감시원이었고, 축구 2군 팀에서 뛰었다. 1914년에는 루글리에서 장교 훈련단 캠프에 참여하여 병장 계급에 도달했다. 같은 해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10월에는 17세의 나이로 스류뷰리 학교를 떠나 샌드허스트 왕립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915년 2월에 졸업하고 왕립 버크셔 연대의 소위로 임관했다.
3. 군 경력
뎀프시의 군 경력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아우르며, 그의 지휘 능력과 전술적 통찰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다양한 전역에서 복무하며 경험을 쌓았고, 이는 그의 리더십 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3.1. 제1차 세계 대전
1915년 8월 중위로 진급한 뎀프시는 19세가 되어 해외 파병 자격을 얻을 때까지 훈련 과정을 이수했다. 그는 1916년 6월부터 왕립 버크셔 연대 제1대대 소속으로 서부 전선에서 복무했다. 이 대대는 제2사단의 제99여단 소속이었다. D중대 소대장으로 복무하던 뎀프시는 1916년 7월 말 더 큰 솜 전투의 일부였던 델빌 우드 전투에서 처음으로 전투를 경험했다. 이 전투는 성공적이었지만 대대는 8명의 장교를 포함하여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대대는 전선에서 교체되었고 그해에는 더 이상의 전투가 거의 없었다. 뎀프시는 대위 대리 계급으로 진급하여 D중대, 이후 B중대를 지휘했다. 11월에는 세르강 근처 뮌헨 참호 공격에 참여했다. 델빌 우드 전투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공격은 성공적이었지만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뎀프시는 다시 한번 무사했고 곧 영국으로 휴가를 떠났다. 1917년 2월 8일, 그는 대대의 부관이 되었다.
4월 미라몽과 오피 근처에서의 공격 이후, 병력이 부족했던 대대는 그해 대부분 조용한 전선에 머물렀고, 왕립 퓨질리어 연대 제23(근무)대대와 일시적으로 합병되었다. 뎀프시는 제2군단 본부의 참모 장교로 발령받았다가, 이번에는 A중대 지휘관으로 왕립 버크셔 연대 제1대대로 복귀했다. 11월 말, 대대는 1917년 캉브레 전투의 일부로 불롱 숲을 공격했다.
1918년 3월 12일, 독일군이 춘계 공세를 준비하면서 뎀프시의 대대(당시 라바케리에 주둔하며 D중대를 지휘)에 심한 겨자 가스 포격을 가했다. 뎀프시는 10명의 다른 장교와 250명의 사병과 함께 가스에 중독되어 영국으로 후송되었고, 폐 하나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는 7월 6일 대대로 복귀했고, 전세가 역전되면서 왕립 버크셔 연대 제1대대는 11월 11일 휴전 협정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백일 공세에 참여했다. 뎀프시는 10월 5일부터 11월 4일까지 다시 부관으로 복무했다. 뎀프시는 1918년 11월 8일 공로 언급되었고, 1919년 6월 3일 국왕 탄생 기념 훈장 목록에 게재된 무공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3.2. 전쟁 간 시기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왕립 버크셔 연대 제1대대는 라인란트 연합군 점령 지역에서 복무했다. 1919년 2월 16일, 뎀프시는 휴가를 받아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해 여름 그는 서식스 소속으로 옥스퍼드 대학교와 노샘프턴셔를 상대로 두 차례의 일류 크리켓 경기에 출전했다.
대대 재편성 후 뎀프시는 6월 윌트셔주 치셀든 캠프에서 대대에 재합류했다. 9월에는 이라크로 파견되어 1920년 이라크 반란 진압을 도왔다. 다음 해 8월에는 이란으로 이동하여 러시아 내전 중 북페르시아군의 일부를 구성했다. 대대가 이란에 주둔하는 동안 뎀프시는 펠머니즘을 배웠다. 1921년 말에는 다시 이동하여 이번에는 인도 바레일리로 갔고, 뎀프시는 C중대를 지휘했다. 1922년 그는 거의 3년 만에 처음으로 휴가를 받아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해 말 다시 인도로 돌아갔다가 1923년에는 샌드허스트 왕립 군사학교에 임용되기 위해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샌드허스트에서 뎀프시는 제1중대 제1소대를 지휘했는데, 이 중대는 나중에 뎀프시 휘하에서 복무하게 될 리처드 오코너 소령이 지휘했다. 그가 나중에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된 또 다른 인물은 당시 대위이자 학교 부관이었던 프레더릭 브라우닝이었다. 뎀프시는 1927년까지 이 직책에 머물다가 자신의 연대 임무로 복귀했다. 이번에는 영국 라인군의 일부로 독일에 주둔하고 있던 제2대대로 발령받았다. 뎀프시는 B중대를 지휘했으며, 주로 자전거를 타고 유럽을 여행하며 오래된 전쟁터와 미래의 잠재적 전투 장소를 방문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제2대대는 1928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1926년부터 1932년까지 그는 버크셔 소속으로 마이너 카운티 챔피언십 크리켓 경기에 출전했다. 그는 또한 축구와 필드하키도 즐겨 했다.
1930년 1월, 뎀프시는 캠벌리 참모대학에 입학하여 1931년 12월에 졸업했다. 그의 동기생 중에는 윌리엄 곳, 조지 홉킨슨, 조지 사임즈, 모리스 칠턴, 월터 말라비, 스튜어트 롤린스, 존 니콜스를 포함한 수많은 미래의 장군들이 있었다. 1929년부터 1930년까지 상급 과정에는 닐 리치, 허버트 럼스덴, 조지 어스킨, 아이버 휴즈, 레지널드 데닝, 해럴드 레드먼, 이안 플레이페어가 있었고, 뎀프시의 2학년인 1931년부터 1932년까지 하급 과정에는 브라이언 호록스, 시드니 커크먼, 프랭크 심슨, 조셉 베일런, 아서 다울러, 토마스 리스, 키스 아버스노트, 카메론 니콜슨이 있었다. 뎀프시의 1학년 강사 중에는 헨리 메이틀랜드 윌슨과 트래퍼드 리 말로리도 있었다. 이들 중 거의 모두가 다가올 전쟁에서 고위 계급에 도달하게 되었다.
참모대학에서의 시간을 즐겼던 뎀프시는 대학 크리켓 팀의 주장을 맡았다. 그는 또한 승마술에도 뛰어나 포인트 투 포인트 경주에서 곳을 이겼다. 학생들은 그룹으로 나뉘어 연구했는데, 뎀프시의 그룹은 1914년 8월의 굼비넨 전투를 연구하기로 했다. 그들은 1930년 영국 육군에 2개월간 파견되었던 독일 육군 장교 안톤 라이하르트 폰 마우헨하임 게난트 베히톨스하임 대위와 함께 전장을 답사했다. 그룹은 통신 불량이 전투 결과에 미친 영향을 주목했고, 당시 장갑 전투 차량이 존재했다면 어떻게 활용되었을지 추측했다.
캠벌리 과정 수료 후에는 보통 졸업생이 기술을 연습할 수 있도록 참모직에 배치되었으며, 뎀프시의 첫 임지는 군사 비서인 시드니 클라이브 소장의 참모진에서 3급 참모 장교(GSO3)였다. 뎀프시는 대령 이하 모든 장교의 경력과 임무를 담당했으며, 그들의 연간 비밀 보고서에 접근할 수 있었다. 1932년 9월 22일 소령으로 진급한 뎀프시는 1934년 1월 말까지 이 직책을 맡았고, 제5보병여단의 여단장으로 임명되면서 호록스에게 직책을 인계했다.
빅터 포춘 준장(1935년부터는 프랜시스 노스워시)이 지휘하는 이 여단은 당시 아치볼드 웨이벌 소장이 지휘하는 제2사단의 일부였다. 이 여단은 올더숏 사령부에서 복무했으며, 뎀프시가 여단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수많은 대규모 군사 훈련에 참여했다. 1936년 2월 다시 호록스에게 직책을 인계한 후, 뎀프시는 자신의 연대 제1대대로 복귀하여 본부중대를 지휘했다. 제1대대는 당시 켄트주 숀클리프에 주둔하며 제4사단의 제10여단 소속이었다. 뎀프시가 복귀한 직후 에릭 마일스 중령이 지휘를 맡았다.
다음 해 뎀프시는 시어니스의 고급 장교 학교에서 짧은 과정을 수료한 후 남아프리카로 파견되어 프리토리아 근처 로버츠 하이츠에 있는 남아프리카 육군 대학에서 남아프리카 연방 방위군의 2급 참모 장교(GSO2)로 복무했으며, 이 임무를 즐겼다. 1938년 1월 말 그 직책을 포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으로 돌아와 왕립 버크셔 연대 제1대대의 지휘관으로 마일스의 후임이 되었고, 1938년 2월 11일 중령으로 진급했다.
제1대대는 여전히 제10여단 소속이었으며, 현대 장비가 부족하고 병력이 심각하게 부족했지만, 유럽에서 또 다른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상황은 서서히 변하여 새로운 장비와 예비군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1938년 10월, 뎀프시의 대대는 서리주 블랙다운 육군 캠프로 이동했다. 이 대대는 에블린 바커 준장의 제10여단에서 노엘 어윈 준장의 제6여단으로 전속되어 다시 한번 제2사단의 일부가 되었다.
3.3.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지휘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직후, 뎀프시는 자신의 대대와 함께 영국 원정군(BEF)의 일부로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11월, 뎀프시는 준장 대리 계급으로 진급하여 헨리 윌콕스 준장(1930년대 참모대학에서 뎀프시의 강사 중 한 명이었고, 진급)을 대신하여 제13보병여단의 지휘를 맡았다. 42세의 나이로 뎀프시는 영국 육군에서 가장 젊은 준장 중 한 명이었다. 이 여단은 당시 해럴드 프랭클린 소장의 제5사단의 일부를 구성했지만, 사단은 아직 완전히 편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여단은 독립 부대로 프랑스로 파견되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BEF 후방 지역에서 경계 임무를 수행했다. 호레이쇼 버니-피클린 준장의 제15보병여단과 몬태규 스톱포드 준장의 제17보병여단과 함께, 12월 말 사단 본부가 도착하자 제5사단에 재합류했다. 이후 제5사단은 앨런 브룩 중장이 지휘하는 제2군단의 일부가 되었다.
이 여단은 1940년 5월 딜 강에서의 퇴각 작전에서 전투를 벌였고, 스카르프 강에서의 방어 전투에 참여했다. 5월 말 벨기에군이 항복하자 여단은 이프르-코민 운하 전투에 참여하여 버나드 몽고메리 소장이 지휘하는 제3보병사단이 후방을 통과하여 벨기에 붕괴로 생긴 틈을 확보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었다. 됭케르크 철수 작전 중 여단은 됭케르크 철수 동안 BEF의 후위 부대의 일부를 담당한 후 해변에서 철수했다. 제13여단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원래 병력 3,000명 중 500명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프랑스에서의 공로로 뎀프시는 공로 언급되었고, 7월에는 수훈장 동반자로 임명되었으며, 이는 프랭클린에 의해 수여되었다. 얼마 후 프랭클린은 버니-피클린으로 교체되었다.

7월, 뎀프시는 새로 창설된 제7군단의 참모장(BGS)으로 임명되었고, 이 군단은 12월에 캐나다 군단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캐나다 육군의 앤드루 맥노턴 중장이 지휘했다. 새로운 군단의 고위 참모 장교로서 그는 캐나다 부대와 상급 부대의 훈련을 감독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이 시기에 그의 "조용한 능력, 뛰어난 친근함, 그리고 거만함의 부재는 캐나다인들에게 그를 사랑받게 만들었다." 그는 1941년 6월 15일까지 이 직책을 맡았고, 그 후 앨런 브룩 경 장군(당시 본토군 총사령관)의 주도로 소장 대리 계급으로 진급하여 제46보병사단의 지휘를 맡았다. 브룩은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뎀프시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 1년 전 프랑스에서 싸웠던 이 사단에서의 그의 체류는 길지 않았다. 4개월 후 그는 제42(이스트 랭커셔)보병사단의 지휘를 맡았는데, 이 사단은 기갑전 사단으로 전환 중이었다. 이는 그에게 막대한 훈련 프로그램을 실행하도록 요구했다. 제125보병여단과 제126보병여단은 제10기갑여단과 제11기갑여단으로 전환되었고, 보병대대는 왕립 기갑군단의 연대로 전환되었다. 1942년 5월 영국 기갑사단의 편제가 두 개의 기갑여단 대신 하나의 기갑여단과 하나의 보병여단을 갖도록 변경되면서 추가적인 난관이 발생했다. 제10기갑여단과 제11기갑여단은 사단에서 철수하고 제30기갑여단과 제71보병여단으로 대체되었다. 그해 말까지 뎀프시는 연합 기갑 및 보병 부대의 지휘에 능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숙련된 부대 훈련관이 되었다.
3.4. 제2차 세계 대전: 지중해 전역
1942년 12월 12일, 뎀프시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북아프리카 제8군의 일부인 제13군단의 지휘를 맡았다. 이는 제8군 사령관 몽고메리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뎀프시는 브라이언 호록스를 대신하여 제10군단을 맡았다. 몽고메리는 회고록에서 뎀프시가 자신이 참모대학 강사였을 때 자신의 학생이었다고 썼지만, 몽고메리가 참모대학을 떠난 것이 1929년이고 뎀프시가 도착한 것은 1930년이므로 그의 기억은 잘못된 것이었다.

고정된 구조를 가진 사단과 달리 군단은 필요에 따라 사단과 여단이 배정되는 유연한 편제였다. 카이로에 도착했을 때 뎀프시는 자신이 지휘하는 것이 본부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제8군 선봉대까지의 긴 보급선이 제10군단과 제30군단(올리버 리스 중장)만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뎀프시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계획에 참여했다. 이 계획은 찰스 가이드너 소장이 지휘하는 알제리의 포스 141(Force 141) 참모진에 의해 개발되었다. 뎀프시는 제8군 참모장인 프레디 드 깅강 소장이 맡을 수 있을 때까지 작전에서 제8군의 역할을 계획하는 책임이 있는 참모진인 포스 545(Force 545)의 참모장 역할을 임시로 맡았다.
뎀프시는 분산된 개별 상륙을 포함하는 이 계획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반응이 느리고 약할 것이라고 가정했는데, 전쟁에서 영국군의 경험으로는 이러한 예상을 뒷받침할 만한 것이 없었다. 뎀프시는 강력하고 활발한 독일군의 반응에 대비하여 연합군이 서로 지원할 수 있는 곳에 상륙하기를 원했다. 뎀프시는 1943년 3월 13일 몽고메리에게, 그리고 5일 후 가이드너에게 자신의 반대 의견을 전달했다. 몽고메리는 그에게 동의했지만 가이드너는 동의하지 않았다. 드 깅강은 4월 17일 지휘를 맡았고, 뎀프시는 제13군단 지휘관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드 깅강은 뎀프시와 계획을 논의했고, 뎀프시의 반대 의견에 동의하여 몽고메리를 위한 평가서를 작성했다. 몽고메리는 4월 24일 하롤드 알렉산더 장군(제15군집단 사령관)에게 그들의 반대 의견을 제기했다. 논의 끝에 연합군 최고사령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은 5월 3일 몽고메리의 수정된 계획을 수락했다.

시칠리아 침공을 위해 제13군단은 호레이쇼 버니-피클린이 지휘하는 제5사단과 시드니 커크먼 소장이 지휘하는 제50사단이라는 두 개의 보병사단, 그리고 두 개의 기갑연대(제44왕립전차연대, 제3런던주 요먼리(샤프슈터스))만을 보유한 존 세실 커리 준장의 제4기갑여단을 보유했다. 그는 또한 조지 홉킨슨 소장의 제1공수사단에도 책임이 있었는데, 이 사단은 수륙 양용전 상륙 직전에 낙하산병과 군사용 글라이더로 투하될 예정이었다.
7월 10일 시칠리아 상륙은 처음에는 순조로웠고, 제13군단은 첫날 목표를 모두 달성했다. 그러나 7월 12일까지 제5사단이 독일 헤르만 괴링 사단의 일부와 조우하면서 진격 속도가 느려졌다. 몽고메리와 뎀프시는 낙하산병과 코만도를 이용해 카타니아를 점령하려 시도했다. 퓨스티안 작전은 부분적으로만 성공했고 카타니아는 점령되지 않았다. 뎀프시는 수륙 양용 작전을 제안했지만, 몽고메리는 에트나산 서쪽 내륙으로 제8군의 주 진격 축을 전환하는 것을 선호하여 이를 거부했다. 8월 3일 뎀프시는 버니-피클린을 지휘에서 해임했다. 그의 성과는 뎀프시와 몽고메리 모두에게 인상적이지 않았고, 몽고메리는 자신의 또 다른 부하인 제라드 버크널 소장으로 그를 교체하는 것을 기뻐했다.
해리 브로드허스트 공군 소장은 작전 중 한 사건을 회상했다. "당시 제13군단을 지휘하던 '빔보' 뎀프시(이 별명의 유래에 대한 질문은 항상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친한 친구나 오코너처럼 자신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의 서신에서 이 별명을 사용했다. 피터 캐딕-애덤스에 따르면, 이 별명은 그가 참모대학에 있을 때 그의 말의 이름이었다.)는 완전히 새로운 부대였다... 그들은 폭격선을 지정하고 근접 항공 지원을 요청했으며, 어딘가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독일군이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철수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에게 알리지 않고 진격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말한 곳을 공격했다. 물론 그것은 뎀프시의 부대였다. 그래서 뎀프시는 지독하게 무례했다. 프레디 드 깅강이 나에게 전화해서 말했다. '이건 끔찍해, 우리 부대를 공격하다니. 우리가 그런 실수는 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나는 '음, 내가 조사해볼게'라고 말했다. 물론 프레디는 몽고메리에게 신호를 보냈다. 내가 조사해보니 그들이 항공 지원을 요청한 후에 진격했고, 취소하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프레디에게 전화해서 말했다. '이번엔 네 부대야, 친구.' 몽티는 뎀프시를 불렀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뎀프시를 줄 세우고 내가 장군이 받는 것을 본 가장 큰 질책을 퍼부었다... 그에게 사과하게 만들었다."
8월 13일, 작전이 끝날 무렵, 제13군단 본부는 메시나 해협을 건너는 연합군의 이탈리아 침공에서 제8군의 역할인 베이타운 작전을 계획하기 위해 예비대로 철수했다. 제50사단은 영국으로 복귀할 예정이었고, 뎀프시가 친구로 여겼던 가이 시몬즈 소장의 캐나다 제1사단으로 교체되었다. 카시빌레 휴전 협상이 진행 중이었지만,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배치에 대한 정보는 불확실했기 때문에 강력한 저항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뎀프시는 보급품과 함께 3개 여단을 수송할 수 있는 충분한 상륙정이 제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로 인해 작전은 9월 3일까지 지연되었다.
제13군단의 상륙은 저항 없이 이루어졌고, 이후의 저항도 경미했지만, 독일군은 험난한 지형의 유일한 경로에 있는 다리와 수로를 파괴하여 그의 진격을 늦췄다. 살레르노에 상륙한 미국 제5군과 애벌랜치 작전의 일부로 연결되기 위해 북쪽으로 482802 m (300 mile) 이상 진격하는 데 거의 2주가 걸렸다. 연합군은 이후 아펜니노 산맥 서쪽의 제5군과 동쪽의 제8군과 함께 북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제13군단은 모로 강 전역에 참여했지만, 혹독한 겨울 날씨로 인해 더 이상의 진격은 불가능했다.
3.5. 제2차 세계 대전: 북서 유럽

시칠리아와 이탈리아에서 뎀프시는 연합 작전에 대한 전문성으로 명성을 얻었다. 몽고메리는 D-Day에 대비하여 제21군집단의 지휘를 맡기 위해 1943년 말 이탈리아를 떠났고, 그는 뎀프시를 주된 영국군 전력인 제2군의 지휘관으로 지명했다. 뎀프시는 몽고메리의 첫 번째 선택은 아니었다. 몽고메리는 리스에게 제2군을 맡기고 뎀프시에게 캐나다 제1군을 맡길 것을 추천했었다. 그러나 캐나다 정부는 영국 장교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었고, 제국 참모총장인 앨런 브룩 원수도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캐나다 제1군의 지휘는 캐나다군 해리 크레러 중장에게 주어졌다. 리스는 알렉산더의 추천으로 제8군 사령관으로 몽고메리를 대신했고, 뎀프시는 몽고메리의 추천으로 제2군을 맡게 되었다. 몽고메리는 뎀프시가 리스만큼 무자비함과 추진력이 부족하지만, 더 영리하고 유능한 전술가라고 믿었다.
뎀프시는 1944년 1월 26일 런던 애슐리 가든에 제2군 본부를 설립했다. 캠벌리에서 그의 그룹에 속했던 참모장 모리스 칠턴 준장과 해군 및 공군 상대역인 필립 비안 경 해군 소장, 그리고 브로드허스트와 함께 뎀프시는 노르망디의 영국 및 캐나다 해변 공격을 위한 상세한 계획을 수립했다. 제2군은 1944년 6월 6일 D-Day에 골드 해변, 주노 해변, 스워드 해변에서 성공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뎀프시는 그날 저녁 상륙하여 칼바도스주 방빌에 전술 본부(Tac HQ)를 설치했다. 몽고메리처럼 그는 Tac HQ에서 생활했으며, 소수의 참모와 일부 부관 및 연락 장교를 두었다. 이곳에는 캐러밴, 무전기, 일부 차량이 있었고, 짧은 시간 내에 이동할 수 있었다. 그는 전장을 이동하기 위해 지프차와 "휘저(whizzer)"라고 부르는 오스터 항공기 경비행기를 사용했다. 주 본부(Main HQ)는 6월 12일 노르망디로 이동하여 몽고메리의 제21군집단 본부가 있던 크루이에 개설되었다. Tac HQ보다 보통 더 후방에 위치했지만, 여전히 야전 본부였고 건물이나 고정된 통신 연결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곳에는 작전, 정보 및 항공 지원 부서가 있었다.

가능한 경우, 주 본부는 브로드허스트의 제83(복합)집단 RAF 및 GHQ 연락 연대 (팬텀으로 알려짐) A비행대와 함께 위치했다. 브로드허스트는 이탈리아에서의 관계가 긴장되었기 때문에(브로드허스트는 이를 뎀프시의 군단장으로서의 경험 부족 탓으로 돌렸다) 뎀프시의 상대역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불안해했다. 브로드허스트는 뎀프시가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육군과 RAF를 성공적인 팀으로 만드는 데 노력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뎀프시는 브로드허스트와 상의하지 않고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두 사람은 점차 친구가 되었다. 주 본부는 칠턴이 주재했다. 칠턴과 뎀프시는 매일, 보통 Tac HQ에서 만났다. 칠턴은 나중에 제21군집단 본부의 부관장이 되었고, 1945년 1월 23일 해럴드 파이먼 준장으로 교체되었다. 후방 본부(Rear HQ)는 보통 약 16093 m (10 mile) 더 후방에 위치했으며, 제2군 본부의 나머지 부분을 포함했다. 이곳은 병참감인 제프리 하디-로버츠 준장이 주재했다. 총체적으로 제2군 본부는 189명의 장교와 970명의 사병으로 구성되었다.
캉 전투는 소모전으로 변질되었고, 이 기간 동안 영미-캐나다군은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에 좌절했다. 이 전투는 독일군의 핵심 부대, 특히 기갑 전력의 대부분을 캉 전선으로 끌어들였고, 이는 오마 브래들리 중장의 미국 제1군이 서쪽으로 돌파하는 코브라 작전을 용이하게 했다. 뎀프시는 몽고메리를 설득하여 3개 기갑사단을 이용하고 7000 t의 폭탄을 투하하는 중폭격기의 지원을 받아 돌파를 시도하도록 허락받았다. 이것이 굿우드 작전이었다. 7월 18일 시작된 이 작전은 11265 m (7 mile)의 진격에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 굿우드 작전은 독일군에 대한 압박을 증가시키고 막대한 사상자를 입혔다. 몽고메리는 브래들리의 전선에서 독일군 예비대를 끌어내는 주요 목표를 달성했다. 7월 25일, 날씨로 인해 7월 18일에서 연기되었던 코브라 작전이 실제로 시작되었을 때, 독일군은 제2군 전선에 티거 1, 티거 2 전차를 포함한 600대의 전차를 배치했고, 미국 제1군 전선에는 100대만을 배치했다. 뎀프시는 전쟁 후 굿우드 작전이 돌파는 없었지만 많은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다고 주장했다. 몽고메리를 해고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지만, 이는 가능성이 낮았고, 뎀프시가 작전의 설계자이자 일부 전술적 결함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비판은 거의 없었다.
뎀프시의 전술은 사막과 이탈리아에서의 전투 경험에 기반을 두었지만, 노르망디에서는 항상 적용 가능하거나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교리는 기갑과 보병을 별도의 여단으로 운용하도록 요구했지만, 노르망디에서는 둘 사이의 더 긴밀한 협력이 필요했다. 굿우드 작전 이후, 기갑사단은 보병대대와 기갑연대가 짝을 이루어 함께 작전하도록 재편성되었다. 오코너는 보병을 위한 장갑차 도입을 촉구했지만, 뎀프시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독일군 방어선을 무력화하기 위한 공중 폭격과 포병 사용은 건전한 전술이었지만, 독일군은 이전보다 더 깊이 배치되어 있었고 폭격은 충분히 멀리 미치지 못했다. 대전차 방어선을 제압하기 위한 포병 사용도 마찬가지였지만, 독일군이 당시 사용하던 기갑 자주포에는 덜 효과적이었다. 몽고메리는 모든 비난을 자신에게 돌렸고, 뎀프시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하지 않았다.

8월 2일, 뎀프시는 몽고메리에게 제30군단장 버크널과 제7기갑사단장 조지 어스킨 소장에게 질렸으니 둘 다 해임하고 싶다고 말했다. 군단장 해임은 항상 민감한 문제였고, 버크널은 브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몽고메리의 요청으로 임명되었었다. 몽고메리는 이제 브룩에게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고 버크널이 기동 작전에서 군단을 지휘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버크널은 호록스로 교체되었다. 어스킨도 제럴드 로이드-버니 소장으로 교체되었다. 이는 제21군집단 소속 영국군 4개 군단장 중 3명(호록스(제30군단), 존 크로커(제1군단), 오코너(제8군단))이 뎀프시보다 먼저 군단을 지휘했음을 의미했지만, 호록스와 크로커는 부상을 입었고, 오코너는 전쟁 포로였다. 네 번째인 리치(제12군단)는 1942년 6월 가잘라 전투에서 패배한 후 강등되기 전에는 제8군 사령관이었다.
호록스는 뎀프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그림자 같은 인물로 남아있으며 일반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장군이다. 이는 주로 그가 어떤 종류의 홍보도 싫어했기 때문이다. 또한 제2군의 규모가 작았던 제8군만큼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현명했고, 결코 당황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그의 제2군 본부는 매우 효율적이었고 사령관에게 헌신적이었다. 나는 그 누구도 몽고메리와 그만큼 조화롭고 성공적으로 일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두 사람은 상호 보완적이었다. 몽고메리는 헤드라인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사람이었고, 뎀프시는 홍보를 피했지만 소란 없이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내향적인 사람이었다."

제2군은 이후 북프랑스를 가로질러 벨기에로 빠르게 진격하여 9월 3일 브뤼셀을, 다음 날 안트베르펜을 해방했다. 뎀프시의 Tac HQ는 11일 만에 321868 m (200 mile)를 이동하며 다섯 번이나 재배치되었다. 제2군은 마켓 가든 작전에 참여했는데, 이는 라인강을 조기에 건너기 위한 시도였다. 뎀프시는 이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고 믿었고 몽고메리에게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뎀프시는 마스강 근처 펜로와 베젤의 라인강을 건너는 대안 계획을 제안했는데, 이는 브래들리의 미군과 64374 m (40 mile) 더 가까운 곳이었다. 뎀프시에 따르면, 몽고메리의 마음은 네덜란드에서 런던으로 발사되는 독일 V-2 로켓에 대한 런던발 신호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한다. 몽고메리의 주장은 군사 전략에 뿌리를 두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책임이었고, 뎀프시의 주장은 작전술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책임이었다. 또한 몽고메리는 항상 합리적인 군사 논리를 사용했기 때문에 논쟁하기 어려웠고, 같은 논리가 아니면 흔들리지 않았다. 뎀프시는 몽고메리를 설득하여 작전을 확대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호록스의 제30군단이 선봉대가 되는 동안, 왼쪽에는 리치의 제12군단이, 오른쪽에는 오코너의 제8군단이 동행하고, 단 하나의 공수사단 대신 세 개의 공수사단을 투입하기로 했다.
마켓 가든 작전은 9월 17일에 시작되었다. 공수부대는 운하와 강을 연속적으로 건너 제30군단이 네더라인강의 아른험에 도달하여 독일로 진격할 수 있도록 했다. 정보는 해당 지역에 예상치 못한 독일군 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고, 저항은 예상보다 강하여 제30군단의 최종 목표 달성 시도를 좌절시켰다. 작전 중 뎀프시는 Tac HQ와 함께 전선 근처에서 미국 제82공수사단의 제504낙하산연대가 발강을 강습 도하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나중에 제82사단이 "서부 전선에서 단연 최고의 사단"이라고 썼다. 뎀프시는 제82사단장 제임스 M. 개빈 준장을 만나 악수하며 "오늘날 세계 최고의 사단장을 만나게 되어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말했다. 뎀프시는 또한 그의 태도로 미국 낙하산병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한 낙하산병이 그에게 분대장이 모두 죽었다고 말하자 뎀프시는 "네가 지휘해라"라고 답했다. 작전이 더 이상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명확해지자, 뎀프시와 호록스는 작전을 종료하고 제1공수사단을 네더라인강 북쪽 강변에서 철수시키기로 합의했다. 10월 15일, 제2군 방문 중 조지 6세 국왕은 뎀프시에게 바스 훈장의 기사 사령관 훈장을 야전에서 수여했는데, 이 훈장은 6월 27일에 공표되었다.

제2군은 제12군단과 제30군단을 선봉으로, 시몬즈의 캐나다 제2군단을 지휘하에 두고, 제8군단을 예비대로 하여 1945년 3월 23일 마침내 라인강을 건넜다. 뎀프시는 이를 수행한 최초의 영국군 사령관이었다. 이 작전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한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도하 후 일주일 만에 뎀프시는 8개 보병사단, 4개 기갑사단, 2개 공수사단, 그리고 4개 독립 기갑여단을 이끌고 64374 m (40 mile)를 진격했다. 세심한 계획과 압도적인 공군 및 포병 화력의 적용 덕분에 3월 24일부터 31일까지 제2군의 사상자 3,174명은 상대적으로 경미했다. 처음 사흘 동안의 공수부대 손실 2,888명은 상대적으로 더 많았지만, 플런더 작전의 규모를 고려할 때 지나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고려할 때, 플런더 작전은 흥미진진한 승리였고, 됭케르크의 암울한 시절부터 싸워온 뎀프시가 개인적으로 만끽했을 승리였다."
4월 7일,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는 아서 판(Arthur Pan) 화가가 특별히 의뢰받아 그린 뎀프시의 초상화 전면을 실었다. 5월, 뎀프시의 부대는 브레멘과 킬을 점령했다. 5월 3일, 한스-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 제독이 이끄는 독일 고위 장교 대표단이 뎀프시의 Tac HQ에 도착했고, 질의응답 후 프리데부르크가 빌헬름 카이텔 원수의 대표로 몽고메리에게 항복하기를 원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뎀프시는 그들을 몽고메리에게 보냈고, 이는 다음 날 뤼네부르크 히스에서의 독일 항복으로 이어졌다. 그 동안 뎀프시는 알빈 볼츠 소장과 함부르크 주둔군의 항복을 협상했다.
북서 유럽에서의 공로로 뎀프시는 두 번 더 공로 언급되었고, 7월에는 대영 제국 훈장의 기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미국은 그에게 육군 공로 훈장과 공로 훈장의 사령관 훈장을 수여했다. 벨기에 정부는 그에게 벨기에 무공 십자 훈장과 레오폴드 훈장의 대장 훈장을 수여했으며, 네덜란드 정부는 그에게 오라녜 나사우 훈장의 기사 대장 훈장을 수여했다.
3.6. 제2차 세계 대전: 극동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뎀프시는 오스트리아 주둔 영국군 총사령관으로 지명되었으나, 이는 갑자기 취소되었다. 1945년 7월 4일, 뎀프시는 브룩과의 회의에 소환되었고, 브룩은 뎀프시가 극동 제14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고 알렸다. 브룩은 뎀프시의 태도에 실망했으며, 일기장에 "머리가 커져서, 그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고 기록했다. 이 임명은 윌리엄 슬림 경 중장(승리한 제14군 사령관)을 부당하게 배제하려 했던 동남아시아 연합군 지상군 (ALSEA) 총사령관 리스의 행동 때문이었고, 이는 리스의 해임과 슬림의 후임으로 이어졌다.
뎀프시는 8월 10일 제14군 지휘를 맡았다. 전쟁은 곧 끝났고, 제14군은 영국령 말라야를 재점령했다. 계획되었던 수륙 양용 상륙 작전인 지퍼 작전은 어쨌든 실행되었다. 뎀프시는 전시 상황이었다면 재앙으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믿었던 이 작전의 형편없는 계획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이었다. 동남아시아 사령부 내에는 122,700명의 영국 연방 및 네덜란드인 전쟁 포로와 733,000명의 일본군 병사가 있었다. 뎀프시는 이들의 송환을 담당했다. 그는 또한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도 대처해야 했다. 제14군은 11월 1일에 해체되었고, 본부의 일부는 말라야 사령부를 구성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뎀프시가 지휘하고 본부는 쿠알라룸푸르에 있었다. 11월 8일 그는 프랭크 메서비 경 중장에게 지휘권을 인계했고, 영국으로 돌아간 슬림을 대신하여 ALSEA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4. 전후 경력 및 은퇴
군 복무를 마친 후, 마일스 뎀프시는 다양한 민간 및 명예직을 수행하며 그의 경험과 리더십을 계속 발휘했다.
4.1. 중동 사령부
1946년 4월 19일, 뎀프시는 중동 사령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처음에는 그리스 내전이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이는 1946년 말에 진정되었고, 영국군은 철수하고 책임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또 다른 주요 관심사는 팔레스타인 비상사태였다. 영국군은 전면적인 대반란 작전에 휘말렸다. 뎀프시는 당시 제국 참모총장이었던 몽고메리에게 정부가 필요한 자원을 투입할 의사가 없다면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에서 철수를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경험은 뎀프시에게 평시 고위 장교 역할에 대한 혐오감을 남겼다. 그는 1946년 6월 장군 대리 계급으로 진급했고, 10월 14일에는 정식 장군이 되었다. 그는 또한 국왕의 의례적인 부관장 직책에 임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루이 마운트배튼 경에게 제2군 지휘가 자신의 경력의 정점이었다고 말했다. 몽고메리는 뎀프시가 자신의 후임으로 제국 참모총장이 되기를 원했지만, 뎀프시는 대신 은퇴를 선택했다.
4.2. 민간 생활 및 기타 직책

뎀프시는 1947년부터 1951년까지 경마 베팅 통제 위원회의 의장을 역임했으며, 직접 말을 사육하고 경주에 참여했다. 그는 1953년부터 1963년까지 H&G 시몬즈(H&G Simonds)의 회장, 1955년부터 1967년까지 그린 킹 앤 선즈(Greene King and Sons)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커리지, 바클레이, 시몬즈 앤 코(Courage, Barclay, Simonds & Co)의 첫 비가족 회장 겸 부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자신의 군사 경험에 대한 회고록을 쓰는 것을 거부했으며, 자신의 일기를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의 일부 일기와 편지는 살아남아 영국 국립 문서 보관소와 리델 하트 군사 문서 센터에 보관되어 있다. 1944년 상반기 그의 약속 일기는 2014년 경매에서 1125 GBP에 팔렸다. 그는 1947년 7월 유럽 제2군 작전 기록 1944-1945(An Account of the Operations of Second Army in Europe 1944-1945) 출판을 감독했으며, 서문을 쓰고 파이먼이 편집했다. 그러나 48부만 인쇄되었으며, 2012년 경매에서 한 부가 8750 GBP에 팔렸다. 그는 1950년 버크셔주 부부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46년부터 1956년까지 왕립 버크셔 연대의 연대장이었고, 1947년부터 1957년까지 왕립 군사 경찰의 연대장을, 1951년부터 1960년까지 특수공수부대(SAS)의 연대장을 역임했다. 그는 또한 1948년부터 1951년까지 영토군 제21 SAS 연대(아티스트 라이플스)의 명예 연대장이었다. SAS를 해체하고 낙하산 연대나 육군 항공대와 같은 다른 조직에 흡수시키자는 제안이 있었다. 몽고메리는 낙하산 연대를 육군의 영구적인 일부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뎀프시의 로비 덕분에 1950년 5월 SAS도 같은 지위를 얻었다.
4.3. 은퇴
뎀프시는 1947년 8월 육군에서 은퇴했다. 1950년 그는 본토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또 다른 대규모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만 활성화되는 "그림자" 직책이었다. 그는 1956년에 이 직책을 포기했다. 그는 1956년 신년 서훈에서 대영 제국 훈장의 대십자 기사로 승급되었다.
5. 개인 생활
마일스 뎀프시는 군인으로서의 삶 외에도 개인적인 관심사와 가족 관계를 통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5.1. 결혼과 가족
1948년 뎀프시는 아일랜드 웨스트미스주 콜람버의 퍼시 오라일리 대위의 막내딸인 비올라 오라일리와 결혼했는데, 그는 그녀를 "터페니"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뎀프시가 국왕의 경마 조련사인 세실 보이드-록포트의 마구간을 방문했을 때 만났는데, 그곳에서 그녀가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말에 대한 공통된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결혼은 많은 친구와 친척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는 오랫동안 독신이었고, 신부는 가톨릭이었으며 뎀프시는 영국 성공회 신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때때로 그녀와 함께 그녀의 교회에서 종교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들은 그의 옛 연대의 고향이자 경마 장소와 편리하게 가까운 버크셔주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그린햄의 올드 비카리지로 이사했고, 그 다음에는 야텐든의 쿰 하우스로 이사했다.
5.2. 관심사와 취미
그의 개인적인 취미와 관심사는 경마, 그리고 직접 말을 사육하고 경주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6. 사망
케냐에 있는 조카 마이클을 방문하던 중, 뎀프시는 등에 통증을 느꼈다.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1969년 6월 5일 야텐든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작가이자 역사가인 피터 캐딕-애덤스는 "빔보(Bimbo)는 상대적인 무명 속에서 살았던 방식 그대로 죽었다"고 썼다. 그는 야텐든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팜 스트리트 교회에서 추도식이 거행되었으며, 몽고메리와 마운트배튼이 참석했다.
7. 유산 및 평가
마일스 뎀프시는 겸손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그의 리더십은 군사 역사가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7.1. 군사적 평가 및 대중적 인식
겸손하고 겸허했지만, 뎀프시는 매우 유능한 장교로 평가받았다. 그는 주목을 받지 않으면서도 제2군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력을 발휘했다. 군사 역사가 카를로 데스테는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직업 보병 장교였던 뎀프시는 군사 역사의 열렬한 학생이었고, 전간기 동안 유럽을 자주 방문하여 전장을 직접 연구했다. 활발하고 예리한 정신, 경이로운 기억력, 그리고 지도를 읽는 독특한 기술을 가진 뎀프시는 자신이 지도에서 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실제로는 본 적이 없더라도 풍경을 문자 그대로 마음속에서 생생하게 되살려내는 능력으로 곧 그의 참모진을 경외하게 만들었다. 이 재능은 1944년 6월과 7월 캉 주변의 중요한 전투에서 특히 중요했다. 뎀프시는 제8군의 연합 작전 최고 전문가로 여겨졌고, 경험이 쌓이면서 몽고메리는 곧 그의 군 사령관으로서의 잠재력을 인정했다. 두 사람은 서류 작업을 경멸하고, 제1차 세계 대전 경험을 바탕으로 병사들의 생명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포함하여 많은 자질을 공유했다."
호록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그림자 같은 인물로 남아있으며 일반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장군이다. 이는 주로 그가 어떤 종류의 홍보도 싫어했기 때문이다. 또한 제2군의 규모가 작았던 제8군만큼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현명했고, 결코 당황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그의 제2군 본부는 매우 효율적이었고 사령관에게 헌신적이었다. 나는 그 누구도 몽고메리와 그만큼 조화롭고 성공적으로 일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두 사람은 상호 보완적이었다. 몽고메리는 헤드라인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사람이었고, 뎀프시는 홍보를 피했지만 소란 없이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내향적인 사람이었다."
뎀프시의 리더십 스타일은 현명하고 침착하며, 그의 제2군 본부는 매우 효율적이었고 사령관에게 헌신적이었다고 평가된다. 그는 몽고메리와 조화롭고 성공적으로 협력할 수 있었는데, 몽고메리가 헤드라인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인물이었던 반면 뎀프시는 홍보를 피하고 소란 없이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내향적인 인물로서 서로 보완적인 관계였다.
7.2. 기념물 및 영예
싱가포르에서는 뎀프시 로드(Dempsey Road)와 뎀프시 힐(Dempsey Hill)이 탕린 지역의 옛 탕린 막사 부지에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옛 영국군 주둔 건물들은 현재 상점, 카페, 레스토랑 등 민간 용도로 전환되었다.
프랑스에서는 1944년 9월 캉 시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1990년경 캉의 한 거리(아브뉘 제네랄 뎀프시, Avenue Général Dempsey아브뉘 제네랄 뎀프시프랑스어)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는데, 이 거리는 메모리알 푸르 라 페 박물관과 가까운 지역에 있으며, 이 지역의 많은 거리들은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인물들을 기념한다. 이 거리는 몽고메리 원수 거리와 마운트배튼 제독 거리를 연결한다. 네덜란드의 랑겐붐 마을에도 그의 이름을 딴 뎀프시스트라트(Dempseystraat)라는 거리가 있다.
그가 받은 주요 훈장 및 영예는 다음과 같다.
- 무공 십자 훈장 (MC)
- 수훈장 (DSO)
- 바스 훈장의 기사 사령관 (KCB)
- 대영 제국 훈장의 기사 사령관 (KBE)
- 대영 제국 훈장의 대십자 기사 (GBE)
- 미국 육군 공로 훈장
- 미국 공로 훈장 사령관
- 벨기에 무공 십자 훈장 (야자잎 포함)
- 벨기에 레오폴드 훈장 대장 (야자잎 포함)
- 네덜란드 오라녜 나사우 훈장 기사 대장 (칼 포함)
- 공로 언급 (제1차 세계 대전 1회, 제2차 세계 대전 2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