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마이클 코플런(Michael Coughlan)은 1959년 2월 17일생의 영국 출신 엔지니어이자 자동차 디자이너이다. 그는 포뮬러 1 경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특히 맥클라렌과 윌리엄스 팀의 수석 디자이너 및 기술 이사로 활동했다. 코플런의 경력은 1981년 브루넬 대학교에서 기계 공학 학위를 취득한 후 티가와 로터스에서의 초기 설계 경험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존 바나드의 디자인 회사, 베네통, 티렐, 애로우즈 등 여러 유수의 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1990년대 초반 잡지 기사에서는 '마이크 코그란' 등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그의 경력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사건은 2007년 포뮬러 1 스파이게이트에 연루되어 맥클라렌 팀의 수석 디자이너 직에서 정직되고 계약이 해지된 일이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스테판 GP, 오셀롯 장갑차 설계, NASCAR 팀인 마이클 월트립 레이싱과 리처드 칠드레스 레이싱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윌리엄스 F1 팀의 수석 기술 책임자를 역임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마이클 코플런은 모터스포츠에 대한 깊은 열정을 바탕으로 엔지니어링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2.1. 출생 및 배경
마이클 코플런은 1959년 2월 17일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10살 때 아버지와 함께 브랜즈 해치에서 열린 경주를 관람한 후 레이스 팬이 되었고, 이 경험이 그가 모터스포츠 분야에서 일하겠다는 열정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2.2. 학력
코플런은 레이싱 팀에서 일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브루넬 대학교에서 기계 공학을 전공했다. 그는 1981년에 이 학위를 취득했으며, 졸업 직후부터 레이싱카 제작 분야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3. 모터스포츠 엔지니어링 경력
코플런은 모터스포츠 분야에서 다양한 팀을 거치며 설계 및 엔지니어링 역량을 발전시켰다.
3.1. 초기 경력 (티가, 로터스)
대학 졸업 후 마이클 코플런의 첫 직장은 레이싱카 제작사인 티가였다. 그는 이곳에서 주니어 포뮬러 차량을 다수 설계하며 경험을 쌓았다. 1984년, 그는 로터스 F1 팀에 합류하여 CART 인디카 디자인에 참여했으며, 타입 95 (97T) 차량을 통해 처음으로 F1에 관여하게 되었다. 1985년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아일톤 세나와 함께 로터스 97T로 F1 첫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로터스 팀의 전력이 약화되면서 1988년 100T의 실패 이후 제라르 뒤카루주가 팀을 떠났고, 팀의 기술 부서는 대대적인 재편을 겪었다. 프랭크 더니가 새로운 기술 이사로 부임했으며, 코플런은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되었다. 1988년 혼다 V6 터보 엔진과의 계약이 종료된 후, 팀은 저드 V8, 람보르기니 V12 엔진 등으로 엔진 공급사를 자주 변경해야 했고, 설계 부문의 운영은 더욱 어려워지면서 팀의 경쟁력은 급격히 하락했다.
3.2. 존 바나드 및 티렐과의 협력
1990년 말, 로터스 기술 부서의 대부분이 팀을 떠나면서 코플런 역시 고달밍에 위치한 존 바나드의 디자인 사무실로 이직했다. 그는 베네통에서 수석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B191 개발에 참여했다. 그러나 플라비오 브리아토레와의 불화로 바나드가 베네통에서의 업무를 중단하면서, 코플런은 1992년 초 티렐 팀으로 옮겨 조지 라이튼과 합류했다. 그는 1992년 시즌에 레이스 엔지니어로서 티렐 020B를 완성하는 데 기여했고, 티렐 020C 설계에 관여했으며, 1993년 시즌 후반에 사용된 티렐 021의 핵심 설계 인물로 활동했다.
1993년 8월, 코플런은 다시 존 바나드가 1992년 8월에 설립한 디자인 사무실인 페라리 디자인 개발(FDD)로 돌아가 페라리 차량 개발에 참여했다. 이 회사는 1997년 4월 B3 테크놀로지스로 이름을 변경한 후에도 코플런은 바나드와 꾸준히 협력했다.
3.3. 애로우즈 포뮬러 1 팀
1998년 B3 테크놀로지스가 애로우즈와 협력하기 시작하면서 코플런은 애로우즈 팀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다. 이후 바나드가 팀 대표 톰 워킨쇼와의 불화로 팀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코플런은 애로우즈에 잔류했다. 1999년 8월에는 에그발 하미디의 후임으로 기술 이사직을 맡아 팀의 디자인 부문을 총괄했다. 2000년에 그가 개발한 A21은 풀로드 서스펜션을 다시 도입하여 주목받았다. 코플런이 2002년 애로우즈 팀이 해체되기 전 개발했던 A23 차량은 4년 후 슈퍼 아구리 팀의 SA05 경주차로 사용되기도 했다. 애로우즈 팀은 2002년에 결국 해체되었다.
4. 맥클라렌 레이싱

애로우즈 팀의 해체 이후, 코플런은 포뮬러 1의 명문 팀인 맥클라렌에 합류하게 된다.
4.1. 수석 디자이너 역할
2002년 8월, 마이클 코플런은 맥클라렌의 수석 디자이너로 합류하여, 팀의 차량 설계 및 개발 팀 운영을 책임졌다. 그는 기술 이사 에이드리언 뉴이와 함께 차량 개발에 기여했다.
4.2. 2007년 포뮬러 1 스파이게이트 사건
2007년, 마이클 코플런은 페라리 팀의 기밀 정보 유출 혐의에 연루되면서 그의 경력에 큰 전환점을 맞았다. 2007년 7월 3일, 페라리는 코플런이 전 페라리 미케닉인 나이젤 스텝니로부터 페라리 F2007 차량의 지적 재산권에 관한 780페이지 분량의 기밀 문서를 입수하여 인쇄업자에게 복사를 의뢰했으며, 이 인쇄업자가 페라리에 제보하면서 산업 스파이 의혹이 불거졌다. 이 사건은 F1 역사상 가장 큰 스캔들 중 하나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맥클라렌 팀은 이 사실을 확인한 즉시 코플런을 정직 처분했다. 페라리는 모데나 법원에 스텝니와 맥클라렌 엔지니어(코플런)에 대한 기술 정보 절도 혐의로 소송을 제기했으며, 영국에서도 법적 조치가 취해져 코플런의 자택에 대한 수색 영장이 발부되었다. 이 수색을 통해 페라리의 마라넬로 공장에서 유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가 발견되었다. 스텝니는 같은 날 페라리에서 해고되었다. 7월 6일, 혼다 F1은 스텝니와 코플런이 2007년 6월 자신들의 팀에 "구직 기회"를 문의해왔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코플런의 연루 사실이 밝혀진 이후, 맥클라렌은 4월 말 사건 발생 이후 팀의 섀시에 적용된 모든 업데이트를 상세히 설명하는 도면 및 개발 문서를 FIA에 제출했다.
FIA는 2007년 7월 26일 파리에서 세계 모터스포츠 평의회(WMSC) 임시 회의를 개최했다. 회의 결과, 맥클라렌이 페라리의 기밀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음이 국제 경기 규정 제151c조 위반임을 인정했지만, 해당 정보가 맥클라렌의 MP4-22 차량에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당시에는 처벌을 부과하지 않았다. 코플런과 스텝니에게는 장기간 국제 모터스포츠에서 추방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변명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2007년 9월 13일, 새로운 증거가 제시되면서 WMSC가 재소집되었다. 새로운 증거에는 코플런과 테스트 드라이버 페드로 데 라 로사 간의 전자우편 내용, 그리고 코플런과 스텝니 간의 통신 기록이 포함되었다. 이 재심의 결과, 맥클라렌은 2007년 컨스트럭터 챔피언십 포인트 박탈, 1.00 억 USD의 벌금, 그리고 2008년 차량에 대한 엄격한 기술 검사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다만, 드라이버들은 증거 제출에 협조한 대가로 페널티를 받지 않았다. 맥클라렌은 9월 22일 이 결정에 대해 항소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코플런은 이 사건의 여파로 2008년에 맥클라렌을 떠났다.
5. 맥클라렌 퇴사 이후 경력
맥클라렌 퇴사 이후, 마이클 코플런은 모터스포츠뿐만 아니라 다른 산업 분야에서도 경력을 이어갔다.
5.1. 스테판 GP 및 기타 설계 프로젝트
2009년 말, 코플런은 2010년 시즌 F1 참가를 목표로 했던 스테판 GP의 기술 이사로 합류했다. 그는 철수한 도요타 팀의 TF110을 기반으로 자체 제작한 "S-01" 머신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스테판 GP는 결국 F1 참가에 실패했으며, US F1 팀의 참전 기회를 노리기도 했으나 실패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스파이게이트 사건의 핵심 인물이었던 코플런이 다시 F1으로 돌아오는 것에 대한 일부 관계자들의 반대가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었다. 2011년 시즌 참가를 위한 팀 사진에는 코플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그가 팀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었다.
F1을 잠시 떠나 있던 동안, 코플런은 오셀롯 장갑차의 복합 차체 설계를 주도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BBC 라디오 5 라이브에서 F1 해설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5.2. NASCAR 경력
2011년 3월 31일, 코플런이 NASCAR 팀인 마이클 월트립 레이싱에 차량 디자인 디렉터로 고용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이곳에서 모든 디자인, 생산, 엔지니어링 및 품질 관리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에 윌리엄스 F1 팀에 합류하기 위해 마이클 월트립 레이싱을 떠났다. 이에 마이클 월트립 레이싱은 코플런이 계약을 위반하고 윌리엄스 F1 팀이 계약에 개입했다며 샬럿의 미국 지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코플런의 이탈이 팀의 성과에 영향을 미쳐 상금 및 잠재적 후원 손실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마이클 월트립 레이싱, 코플런, 그리고 윌리엄스 F1 팀은 2011년 10월 18일 합의에 도달했으며, 합의 조건은 공개되지 않은 채 소송은 기각되었다.
이후 코플런은 2013년 11월 9일 리처드 칠드레스 레이싱의 새로운 기술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그는 2017년 4월 리처드 칠드레스 레이싱에서 해고되었다.
6. 윌리엄스 F1 팀

마이클 코플런은 포뮬러 1로 복귀하여 윌리엄스 팀에서 중요한 기술 직책을 맡았다.
6.1. 수석 엔지니어 및 기술 이사
2011년 5월 3일, 코플런은 윌리엄스 팀의 수석 엔지니어로 고용되었다고 발표되었다. 이는 당시 기술 이사였던 샘 마이클과 수석 공기역학자 존 톰린슨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2011년 10월에는 기술 이사로 승진했다. 윌리엄스 팀은 2012년 시즌에 비교적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6.2. 퇴사
그러나 윌리엄스 팀은 2013년 시즌에 FW35 차량으로 단 한 점도 획득하지 못하는 등 어려운 시작을 겪었다. 결국 2013년 7월 16일, 윌리엄스 팀은 코플런이 즉시 교체되었으며 팻 사이먼즈가 새로운 수석 기술 책임자로 부임했다고 발표했다. 코플런의 윌리엄스 재직 기간은 "재앙적인 기술적 시도"로 묘사된 배기 가스 구동 디퓨저에 대한 조사가 지배적이었다.
7. 평가 및 영향력
마이클 코플런은 30년 이상 모터스포츠 분야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팀의 차량 설계 및 개발에 기여한 베테랑 엔지니어이다. 그는 티가, 로터스, 베네통, 티렐, 애로우즈, 맥클라렌, 윌리엄스 등 유수의 포뮬러 1 팀에서 핵심적인 기술 직책을 역임하며 여러 혁신적인 디자인에 참여했다. 특히 애로우즈 A21의 풀로드 서스펜션 도입과 애로우즈 A23이 슈퍼 아구리의 기반이 된 사례는 그의 설계 역량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경력은 2007년 스파이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 사건은 그에게 개인적인 정직과 맥클라렌에서의 해고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맥클라렌 팀에게는 막대한 벌금과 컨스트럭터 챔피언십 포인트 박탈이라는 전례 없는 징계를 안겨주며 F1 역사상 가장 큰 스캔들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 사건은 F1 팀 간의 기술 정보 보호와 윤리적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맥클라렌 퇴사 이후, 그는 NASCAR와 같은 다른 모터스포츠 분야로 전환하거나 장갑차 설계와 같은 이색적인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폭넓은 경험을 쌓았다. 윌리엄스 F1 팀으로 복귀했을 때 2012년 팀의 성과에 기여하기도 했으나, 2013년의 부진과 "재앙적인 기술적 시도"라는 평가는 그의 기술 리더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낸다. 전반적으로 코플런은 뛰어난 설계 능력을 가졌지만, 스파이게이트 사건과 이후의 일부 기술적 실패가 그의 명성과 경력에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