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Life
마리야 키릴로브나 여대공의 삶은 유년 시절부터 망명과 혁명, 그리고 전쟁의 영향을 받으며 개인적인 고난을 겪었다.
1.1. Early life and upbringing
마리야 키릴로브나 여대공은 1907년 2월 2일, 부모님이 니콜라이 2세 황제의 승인을 받지 못한 결혼으로 인해 독일 코부르크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태어났다. 그녀는 일반적으로 프랑스어 형태인 Marie마리프랑스어 또는 러시아어 별명인 Masha마샤러시아어로 불렸다. 마리야는 유년 시절을 코부르크와 프랑스의 생브리아크에서 보냈다.

그녀의 가족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러시아로 돌아왔으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발발로 인해 다시 강제로 망명길에 올랐다. 태어날 당시에는 러시아의 공녀 칭호를 사용했으나, 1921년(일부 자료에서는 1924년)에 그녀의 아버지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이 스스로 러시아 제위의 수호자를 선언하면서 마리야에게도 여대공 칭호와 함께 황실 전하의 호칭이 부여되었다.
어릴 적부터 마리야는 짙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을 가졌으며, 외모상으로는 외할머니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을 닮아 얼굴이 넓고 둥근 편이었다. 또한 체중이 쉽게 늘어나는 경향이 있어 십대 시절에도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일반적으로 "수줍음이 많고 느긋한 성격"으로 묘사되었으나, 일부에서는 "변덕스러운" 면모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1922년, 열다섯 살이었던 마리야는 숙모인 루마니아의 마리야 왕비를 방문했을 때, 루마니아 궁정의 한 시녀의 사위와 어울리며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이 소문은 당시 열세 살이었던 사촌 일레아나 공주에 의해 마리야가 귀국한 후 확산되었고, 이로 인해 루마니아의 마리야 왕비와 마리야 여대공의 어머니 빅토리아 멜리타 사이에 관계가 한때 소원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갈등은 시간이 지나면서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1.2. Marriage and family
1925년 2월 24일, 마리야는 라이닌겐의 카를 6세 공작 (1898년 2월 13일 ~ 1946년 8월 2일)과 약혼했으며, 같은 해 11월 25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총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첫 아이인 에미히 키릴을 낳을 당시부터 어머니 빅토리아가 그녀의 옆을 지켰고, 이후 다른 자녀들의 출산에도 함께 했다. 하지만 일곱 자녀 중 한 명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아기에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q=러시아 강제 수용소|position=right
남편 카를 공작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독일군에 강제로 징집되었고, 전쟁이 끝날 무렵 소련군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 그는 1946년 러시아의 한 강제 수용소에서 기아로 인해 사망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이처럼 남편의 죽음은 전쟁과 이념 갈등이 한 개인의 삶에 얼마나 잔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남편의 사망으로 인해 마리야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남은 여섯 명의 자녀들을 홀로 양육하며 고군분투해야 했다.
1.3. Later life and death
남편 카를 공작이 1946년 소련군 강제 수용소에서 비극적으로 사망한 후, 마리야 여대공은 미망인으로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며 남은 여섯 자녀를 홀로 양육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그녀는 극심한 재정적 압박과 양육의 부담 속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마리야는 남편의 사망 후 5년 뒤인 1951년 10월 25일, 향년 44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녀의 짧고 힘든 생애는 러시아 혁명과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가져온 혼란 속에서 황족으로서 겪어야 했던 개인적인 비극과 고난을 상징한다.
2. Ancestry
마리야 키릴로브나 여대공의 혈통은 유럽의 여러 왕실 및 귀족 가문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녀는 로마노프 왕조의 일원이자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이기도 하다. 다음은 그녀의 주요 계보이다.
번호 | 이름 | 관계 |
---|---|---|
1 | 마리야 키릴로브나 여대공 | 본인 |
2 |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 아버지 |
3 | 빅토리아 멜리타 폰 작센코부르크고타 공녀 | 어머니 |
4 |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 친할아버지 |
5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녀 마리 | 친할머니 |
6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 | 외할아버지 |
7 |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 외할머니 |
8 |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 | 친증조할아버지, 외증조할아버지 |
9 | 헤센 대공녀 마리 | 친증조할머니, 외증조할머니 |
10 |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 친외증조할아버지 |
11 | 로이스쾨스트리츠 공녀 아우구스테 | 친외증조할머니 |
12 | 앨버트 공 | 외외증조할아버지 |
13 | 빅토리아 (영국) | 외외증조할머니 |
3. Descendants and legacy
마리야 키릴로브나 여대공은 라이닌겐의 카를 6세 공작과의 결혼을 통해 총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이들은 그녀의 직계 후손으로서 가계의 명맥을 이었다. 그녀의 후손들은 유럽의 다양한 귀족 가문과 혼인하여 현재까지도 그 혈통을 이어오고 있다.
- 에미히 키릴 페르디난트 헤르만 공자 (1926년 10월 18일 ~ 1991년 10월 30일): 1950년 8월 10일 올덴부르크 공녀 아일리카와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 카를 블라디미르 에른스트 하인리히 공자 (1928년 1월 2일 ~ 1990년 9월 28일): 1957년 2월 20일 불가리아의 마리 루이즈 공주와 결혼했으나, 1968년 12월 4일 이혼했다. 두 아들을 두었다.
- 키라 멜리타 페오도라 마리 빅토리아 알렉산드라 공녀 (1930년 7월 18일 ~ 2005년 9월 23일): 1963년 9월 18일 유고슬라비아의 안드레이 공자와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1972년 이혼)
- 마르가리타 일레아나 빅토리아 공녀 (1932년 5월 9일 ~ 1994년 6월 16일): 1951년 1월 5일 호엔촐레른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공자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 메히틸데 알렉산드라 공녀 (1936년 1월 2일 ~ 2021년 2월 12일): 1961년 11월 25일 카를 안톤 바우셔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베르톨트 공자 (1938년 6월 18일 ~ 1999년 8월 29일): 1960년 카린-에블린 게스와 결혼했으나 1962년 이혼했고, 1971년 헬가 에셴바허와 재혼했다.
- 페터 빅토르 공자 (1942년 12월 23일 ~ 1943년 1월 12일): 유아기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