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마르그리트 루이즈 도를레앙(Marguerite Louise d'Orléans프랑스어, 이탈리아식 이름: Margherita Luisa di Borbone-Orléans이탈리아어)은 1645년 7월 28일 프랑스의 블루아 성에서 태어나 1721년 9월 17일 파리에서 사망한 프랑스 공주이다. 그녀는 오를레앙 공 가스통과 로렌의 마르그리트의 딸로, 토스카나 대공국의 코시모 3세와 결혼하여 토스카나 대공비가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으로 알려진 그녀는 남편과 시댁과의 관계가 매우 파란만장하고 종종 쓰라렸다. 특히 남편과의 불화는 여러 차례 루이 14세의 중재를 요청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 사이에서는 페르디난도 대공자, 안나 마리아 루이자 팔츠 선제후비, 그리고 잔 가스토네 대공 등 세 자녀가 태어났다.
1675년 6월, 남편이 대공위를 계승한 지 5년, 막내아들이 태어난 지 4년 만에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남편과 별거하고 파리 외곽의 한 수녀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프랑스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지위에 걸맞은 사회적 관습을 거의 존중하지 않았으며, 토스카나 당국과 프랑스 왕실에게 골칫거리가 되었다. 말년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보다 전통적인 행동을 보이며 독실한 신앙 활동에 전념했고, 심지어 파리 외곽에 위치한 두 번째 거처인 수녀원을 개혁하기도 했다. 그녀의 삶은 개인적인 자유를 추구하며 당시의 엄격한 궁정 사회에 끊임없이 도전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2. 출생 및 가계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1645년 7월 28일 블루아 성에서 프랑스의 오를레앙 공 가스통과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로렌의 마르그리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가스통 공작의 두 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다섯 자녀 중 장녀였다. 그녀의 다른 자매로는 훗날 기즈 공작부인이 되는 엘리자베트 마르그리트 도를레앙과 사부아 공작부인이 있다. 그녀는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의 조카이자 앙리 4세의 손녀였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아버지의 궁정인 블루아에서 기초적인 교육을 받았다. 그녀의 아버지 가스통은 조카인 루이 14세에 대항한 프롱드의 난이 실패한 후 블루아로 물러나 있었다.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이복 언니인 안 마리 루이즈 도를레앙(Anne Marie Louise d'Orléans프랑스어), 즉 '라 그랑드 마드모아젤'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몽팡시에 공작부인은 그녀와 친구들을 극장과 왕실 무도회에 데려가곤 했다.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언니의 애정에 보답하여 매일 몽팡시에 공작부인의 살롱을 방문하고 궁정 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마담 드 슈아지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궁정 문제에 대해 잘못 조언하여 사부아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 2세와의 결혼 협상을 망쳤다고 확신했다. 결국 1663년 카를로 에마누엘과 결혼한 것은 그녀의 여동생 프랑수아즈 마들렌 도를레앙이었다.
1658년,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3세의 제안이 들어왔을 때,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이복 언니에게 결혼을 성사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에는 결혼할 생각에 기뻐했지만, 이복 언니가 처음에는 토스카나와의 혼사를 지지하다가 마음을 바꾸자 그녀의 기쁨은 실망으로 변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행동은 파격적으로 변했다. 그녀는 사촌인 로렌 공자 샤를과 동행자 없이 외출하여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는 심각한 위반 행위로 궁정을 충격에 빠뜨렸고, 샤를은 곧 그녀의 연인이 되었다. 1661년 4월 19일 대리 결혼식은 그녀의 태도를 전혀 바꾸지 못했고, 이는 루이 14세의 대신들을 매우 짜증 나게 했다. 결혼 축하를 위해 외교관들을 만나기로 한 날, 그녀는 대신 사냥을 가려 했으나 몽팡시에 공작부인에게 제지당했다.
3. 토스카나에서의 삶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토스카나에서의 삶은 약혼과 결혼을 시작으로 대공비로서의 파란만장한 생활, 그리고 프랑스 왕실의 개입으로 점철되었다.
3.1. 약혼과 결혼
마르그리트 루이즈와 토스카나 대공자 코시모 3세의 혼담은 1652년 쥘 마자랭 추기경의 주선으로 진행되었다. 1661년, 토스카나 대공이자 신랑의 삼촌인 마티아스 데 메디치는 9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마르그리트 루이즈를 토스카나로 데려왔다. 이 함대에는 토스카나 소유의 갤리선 3척, 제노바 공화국에서 빌린 3척, 그리고 교황령에서 빌린 3척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든 의전을 무시하고, 연인인 로렌 공자 샤를은 마르세유에서 그녀를 배웅했다. 일행은 6월 12일 토스카나에 도착했고, 신부는 리보르노에서 하선했다. 6월 20일, 성대한 의식과 함께 그녀는 피렌체에 공식적으로 입성했다. 그들의 결혼 축하 행사는 피렌체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화려한 광경으로, 300대가 넘는 마차가 동원된 행렬을 포함했다. 신랑의 아버지인 페르디난도 대공은 결혼 선물로 "작은 비둘기 알 크기"의 진주를 선물했다.
3.2. 대공비로서의 생활
마르그리트 루이즈와 코시모는 서로에게 무관심하게 인사했고, 하노버 선제후비 소피아에 따르면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만 함께 잠을 잤다. 결혼 이틀 후,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코시모에게 토스카나 왕실 보석의 소유권을 요구했지만, 코시모는 자신에게 그럴 권한이 없다고 답했다. 그녀가 코시모에게서 겨우 얻어낸 보석들은 토스카나 밖으로 밀반출하려 했으나, 대공에게 제지당했다. 이 사건 이후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무관심은 증오로 변했으며, 마르세유에서 헤어져야 했던 로렌 공자 샤를에 대한 지속적인 사랑이 이를 더욱 부추겼다. 한 번은 그녀가 코시모에게 자신의 방에서 나가라고 요구하며 병을 깨뜨리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명랑하고 활기 넘쳤으며 고집이 세고 이기적인 성격이었다. 자유분방한 프랑스 궁정 생활에 익숙했던 그녀에게 피렌체 궁정은 답답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금욕적인 성품으로 육체적인 관계를 싫어하는 남편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시아버지 페르디난도 2세는 며느리가 데려온 프랑스인 수행원들을 쫓아내고 갖은 압력을 가해 그녀의 가장 중요한 의무인 공국의 후계자 생산을 완수하도록 했다.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남편과의 동침을 거부했고, 임신 사실을 알고 유산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녀가 코시모 3세와의 동침을 거부하자 루이 14세는 올바르게 처신할 것을 종용해야 했으며, 코시모 3세는 잠시 떨어져 있는 편이 부부생활에 낫다는 생각으로 여러 번 해외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코시모에 대한 그녀의 증오는 자녀를 낳는 부부의 의무를 막지는 못했다. 그들은 1663년에 페르디난도 대공자, 1667년에 안나 마리아 루이자, 1671년에 잔 가스토네를 낳았다.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파격적인 행동은 가족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그녀는 비토리아 대공비와 서열 문제로 다투었고, 페르디난도 대공과는 지출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 그녀의 낭비벽은 대공과의 갈등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피렌체인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잃게 만들었다. 그녀의 자유분방한 행동, 예를 들어 두 명의 마부들이 그녀의 방을 수시로 드나들게 한 것 등이 이러한 비난을 더욱 심화시켰다.
3.3. 프랑스 왕실의 개입

로렌 공자 샤를이 피렌체의 대공 궁전인 팔라초 피티에서 대공 가족의 환대를 받으며 잠시 방문한 후, 마르그리트 루이즈가 샤를에게 보낸 편지의 어조는 대공 페르디난도 2세와 코시모 3세가 그녀를 감시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그녀는 루이 14세에게 개입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그녀의 프랑스인 수행원들이 해고된 후,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학대받고 있다고 불평했고, 대공은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행동을 제지하는 데 도움을 요청하며 둘 다 루이 14세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대공과 마르그리트 루이즈 양쪽을 달래기 위해 루이 14세는 생메므 백작을 파견했다. 대화 과정에서 마르그리트 루이즈가 프랑스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생메므는 프랑스 궁정의 많은 이들처럼 이에 공감했다. 따라서 그는 상속자의 가정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방문을 마쳤으며, 이는 페르디난도와 루이 14세 모두를 격분시켰다. 이제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가능한 모든 기회에 코시모를 모욕함으로써 문제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그녀는 메디치 가문이 자신을 독살하려 한다고 주장하며 프랑스인 요리사만 고용하겠다고 주장했고, 교황 대사 앞에서 코시모를 "불쌍한 마부"라고 낙인찍기도 했다.
몇 차례 더 프랑스의 화해 시도가 실패한 후, 1664년 9월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팔라초 피티의 자신의 거처를 떠나 돌아오기를 거부했다. 그 결과 코시모는 그녀를 라페지 빌라로 옮겼다. 그곳에서 그녀는 40명의 병사들에게 감시당했고, 코시모가 임명한 6명의 궁정 신하들이 그녀가 프랑스로 도망칠까 봐 두려워 어디든 따라다녀야 했다. 이듬해 그녀는 태도를 바꾸고 대공 가족과 화해했다. 그러나 1667년 안나 마리아 루이자가 태어난 후 그 화해는 깨졌다.
1670년 5월, 페르디난도 2세 대공의 사망으로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토스카나 대공비가 되었다. 코시모 3세의 즉위와 함께, 재임 중인 대공의 어머니를 '콘술타' 또는 추밀원에 입회시키는 오랜 전통이 재개되었다. 코시모와 자신을 대한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태도를 혐오했던 비토리아, 코시모 3세의 어머니는 마르그리트 루이즈가 '콘술타' 회원 자격을 얻지 못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정치에서 효과적으로 배제되었고, 아들 페르디난도 대공자의 교육을 감독하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자신의 배제에 분노한 대공비는 비토리아와 서열 문제로 다투었고, '콘술타'에 입회할 것을 요구했다. 코시모 3세는 어머니 편을 들었다. 1670년 여름, 또 다른 화해(비록 짧았지만)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증거는 1671년 5월 24일 부부의 마지막 자녀인 잔 가스토네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1671년 초까지 마르그리트 루이즈와 비토리아 사이의 싸움은 너무 격렬해져서 당시의 한 사람은 "팔라초 피티는 악마의 거처가 되었고, 아침부터 자정까지는 오직 다툼과 욕설 소리만 들린다"고 언급했다. 잔 가스토네의 탄생은 할아버지 페르디난도 2세의 사망 1주년이 되는 날이었기에, 아이는 1660년에 사망한 또 다른 외할아버지인 오를레앙 공 가스통의 이름을 받게 되었다. 그는 훗날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토스카나 대공이 되었다.
4. 프랑스로의 귀환 및 망명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토스카나에서의 별거를 결정하고 프랑스로 돌아와 몽마르뜨와 생망드 수녀원에서 파격적이면서도 결국은 절제된 말년을 보냈다.
1672년 초,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루이 14세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이 유방암이라고 묘사하며 의료 지원을 간청했다. 루이 14세는 그녀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안 도트리슈를 돌보았고, 같은 병으로 사망한 개인 주치의 알리오 르 비유를 보냈다. 알리오는 생메므와 달리 질병을 핑계로 마르그리트 루이즈를 프랑스로 보내려는 그녀의 소망에 완전히 따르지 않고, 종양이 "결코 악성이 아니다"라고 선언했지만, 온천수를 추천했다。계획의 실패에 좌절한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코시모를 화나게 하기 위해 자신의 하인인 요리사와 시시덕거리고, 간지럼을 태우고, 베개 싸움을 하기도 했다.
가정의 화합을 회복하기 위해 코시모 3세는 이전에 대공 편을 들었던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어린 시절 가정교사였던 마리 안 드 비시 샹롱, 마르키즈 뒤 데팡을 불렀다. 그러나 오를레앙 가문의 잇따른 사망으로 인해 가정교사는 1672년 12월에 지연되어 도착했다. 그때쯤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고, 근처 성지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한 구실로 포조 아 카이아노 빌라를 방문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곳에 도착하자 그녀는 돌아오기를 거부했고, 이는 그녀와 대공 사이의 2년간의 대치로 이어졌다. 그녀는 그에게 보내는 작별 편지에서 프랑스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대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마담 뒤 데팡의 임무가 실패하자 루이 14세는 대공 부부를 화해시키기 위해 마지막 시도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따라서 모든 화해 시도가 실패하자 코시모는 1674년 12월 26일 서명된 계약에서 마르그리트 루이즈에게 굴복했다.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8.00 만 FRF의 연금을 받고 프랑스로 떠날 수 있었지만, 그녀는 몽마르뜨 생 피에르 수도원에 머물러야 했고 프랑스 왕실 공주로서의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기뻐한 대공비는 포조 아 카이아노 빌라의 비품과 가구를 가득 싣고 프랑스로 떠났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정당한 임금을 받지 않고는 떠날 의도가 없었다"고 했다.
4.1. 몽마르뜨 수녀원 생활

1675년 7월 12일 리보르노에서 마르그리트 루이즈가 떠났다는 소식은 피렌체인들에게 "큰 불쾌감"으로 받아들여졌다. 귀족들도 그녀에게 동정심을 보였는데, 코시모가 마르그리트 루이즈를 쫓아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몽마르뜨에서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처음에는 자선 사업을 후원하고 "경건한 태도"를 보였지만, 곧 파격적인 방식으로 돌아와 진한 루즈와 밝은 노란색 가발을 착용하고, 로비니 백작과, 나중에는 룩셈부르크 연대의 두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다. 루이 14세는 1674년 계약의 마르그리트 루이즈가 수녀원 밖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을 무시하고 대공비를 궁정에 받아들였고, 그곳에서 그녀는 큰 돈을 걸고 도박을 했다.
그녀의 "초라한" 수행원들과 짧은 방문 때문에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베르사유 궁정의 신하들 사이에서 보헤미안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따라서 "미천한 출신"의 사람들을 자신의 사교계에 받아들여야 했다. 토스카나 특사 곤디는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행동에 대해 프랑스 궁정에 자주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몽마르뜨의 원장 프랑수아즈 르네 드 로렌 (1621-1682)은 루이 14세가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마부와의 최근 연애에 대해 질문했을 때 "침묵의 공모가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타락과 과도함에 대한 유일한 해독제이다"라고 답했다. 이것이 아마도 당시 회고록에 마르그리트 루이즈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피렌체로 돌아온 코시모 3세는 프랑스에 있는 토스카나 특사가 보낸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모든 움직임에 대한 보고서를 면밀히 조사했다. 만약 그녀의 특정 행동이 불쾌하다고 판단되면, 그는 루이 14세에게 서한을 보내 설명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코시모에게 동정적이었던 루이 14세는 그의 끊임없는 항의에 지쳐 "코시모가 아내의 프랑스 은퇴에 동의했으므로, 그는 사실상 아내의 행동에 간섭할 권리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이것이 코시모 3세가 아내의 행동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 계기였다.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남편의 임박한 죽음을 확신하며 프랑스 궁정에 "혐오스러운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는 즉시 피렌체로 날아가 모든 위선자들과 위선을 추방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고, 코시모 3세는 실제로 그녀보다 2년 더 오래 살았다.
1688년, 빚에 시달리던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코시모에게 2만 크라운을 간청하는 편지를 썼다. 코시모가 처음에는 선뜻 나서지 않자, 그녀는 아들인 대공자에게 초점을 맞춰 도움을 받기를 희망했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도와줄 수 없다고 가장했다. 결국 코시모는 그녀의 빚을 갚아주었고, 1696년 친척으로부터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아 그녀의 재정적 안정이 보장되었다.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행동은 이전 몽마르뜨 원장에게는 용인되었지만, 새로운 원장인 아르쿠르 부인은 그녀에 대해 대공과 국왕에게 자주 불평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도끼와 권총으로 원장을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그녀에 대항하는 파벌을 형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시모 3세는 그녀의 소원에 따라 파리 동부 외곽의 새로운 수녀원인 생망드로 마르그리트 루이즈가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 단, 루이 14세의 명시적인 허가 없이는 외출할 수 없고, 그가 선택한 시종의 보좌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녀가 동의하지 않자 연금이 중단되었고, 루이 14세가 그녀를 강제로 굴복시킨 후에야 연금이 재개되었다.
4.2. 생망드 수녀원 생활
생망드에서 나이 든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보다 절제된 삶을 살았고, 자신이 "영적인 매음굴"이라고 부른 수녀원을 개혁하는 데 몰두했다. 결석이 잦았던 수녀원장은 남자 옷을 입고 다녔는데, 그녀는 쫓겨났고, 규율을 어긴 수녀들은 제거되었다. 이런 식으로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행동은 피렌체와의 논쟁거리가 되지 않았다.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건강은 1712년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뇌졸중 발작으로 인해 왼쪽 팔이 마비되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녀는 곧 회복되었지만, 이듬해 또 다른 발작을 겪었다. 그녀의 세 자녀 중 유일하게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페르디난도 대공자의 죽음은 두 번째 뇌졸중 발작에 기여했으며, 이로 인해 잠시 눈이 마비되고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프랑스의 섭정 필리프 도를레앙은 마르그리트 루이즈가 보주 광장 15번지에 있는 파리의 집을 살 수 있도록 허락했고, 그녀는 그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녀는 섭정의 어머니인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자선 활동에 꾸준히 기부했다.
5. 말년과 죽음
프랑스 공주이자 토스카나 대공비였던 마르그리트 루이즈 도를레앙은 1721년 9월 17일 사망했으며, 파리의 피크퓌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6. 자녀
코시모 3세와 마르그리트 루이즈 사이에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다.
-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 (1663-1713): 토스카나 대공자. 바이에른의 비올란테 베아트릭스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 (1667-1743): 팔츠 선제후비. 팔츠 선제후 요한 빌헬름과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 (1671-1737): 토스카나 대공.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안나 마리아 프란치스카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7. 가계도

1세대 | 2세대 | 3세대 | 4세대 | 5세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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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그리트 루이즈 도를레앙 | ||||
2. 오를레앙 공 가스통 | ||||
4. 앙리 4세 | ||||
8. 방돔 공 샤를 | ||||
16. 방돔 백작 프랑수아 | ||||
17. 피에르 드 브로스의 딸 마리 드 뤽상부르 | ||||
9. 알랑송의 프랑수아즈 | ||||
18. 알랑송 공 르네 | ||||
19. 로렌의 마르그리트 | ||||
5. 마리 드 메디시스 | ||||
10.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 | ||||
20.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 | ||||
21. 톨레도의 엘레오노라 | ||||
11. 오스트리아의 요안나 (토스카나 대공비) | ||||
22.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1세 | ||||
23.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안나 | ||||
3. 로렌의 마르그리트 | ||||
6. 로렌 공 프랑수아 2세 | ||||
12. 로렌 공 샤를 3세 | ||||
24. 로렌 공 프랑수아 1세 | ||||
25. 덴마크의 크리스티나 | ||||
13. 프랑스의 클로드 (1547년) | ||||
26. 앙리 2세 (프랑스) | ||||
27. 카트린 드 메디시스 | ||||
7. 잘름의 크리스티나 | ||||
14. 잘름-브란덴부르크 백작 파울 | ||||
28. 잘름-바덴바일러 백작 요한 7세 | ||||
29. 루이즈 드 스탱빌 | ||||
15. 마리 르 브뇌르 드 티예르 | ||||
30. 티예르 백작 탄게 르 브뇌르 | ||||
31. 마들렌 엘리 드 퐁파두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