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반과 가족 관계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는 불화했던 부모의 관계 속에서 친할머니의 손에 자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1. 출생과 유년기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는 1667년 8월 11일 피렌체에서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3세와 그의 부인 오를레앙의 마르게리타 루이사의 둘째 자녀이자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외숙모인 몽팡시에 여공작 마리 루이즈 도로를랑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녀에게는 오빠 페르디난도와 남동생 잔 가스토네가 있었다.
1.2. 가족과의 관계 및 초기 영향
그녀의 부모의 관계는 불화했으며, 어머니 마르게리타 루이사는 기회만 있으면 코시모를 모욕하려 들었다. 한 번은 교황대사가 있는 자리에서 그를 "가련한 마부"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들 부부 간의 적대감은 1674년 12월 26일까지 이어졌다. 모든 화해 시도가 실패한 후,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코시모는 아내가 프랑스 몽마르트르 수녀원으로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 그날 작성된 계약서에는 그녀의 '프랑스의 쁘띠트 피유'로서의 특권이 박탈되었고, 그녀의 사망 시 모든 자산이 자녀들에게 상속될 것이라고 명시되었다. 코시모는 보상금으로 연 80,000 리브르의 연금을 지급했다. 마르게리타 루이사는 1675년 6월 토스카나를 떠났고, 당시 8세가 채 되지 않았던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다시는 어머니를 보지 못했다. 코시모 3세는 딸을 매우 아꼈지만,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친할머니인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의 손에서 자랐다. 동시대인들은 그녀의 기질이 부친과 친할머니의 특징을 혼합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2. 팔츠 선제후비 시절
팔츠 선제후 요한 빌헬름과의 결혼 후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뒤셀도르프로 이주하여 예술과 문화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궁정을 중요한 중심지로 만들었다.
2.1. 결혼과 뒤셀도르프로의 이주

1669년,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프랑스 왕세자 루이의 잠재적인 신부 후보로 고려되었다. 그러나 코시모 3세는 프랑스와의 결혼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이 문제에 전적으로 매달리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거부되었다). 대신 코시모는 그녀를 자신의 첫 번째 선택이었던 포르투갈의 페드루 2세에게 제안했다. 페드루의 대신들은 안나 마리아 루이자가 어머니의 기질을 물려받아 페드루 2세를 지배하려 들고 자신이 고집불통이 될까 우려하여 거절했다.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는 그의 처남인 모데나 공작 프란체스코 2세 데스테를 추천했지만, 공주는 대공의 딸로서 공작의 지위가 의례상 너무 낮다고 여겼다. 마침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가 팔츠 선제후 요한 빌헬름을 제안했다. 선제후는 1691년 2월 코시모 3세를 위해 신성 로마 황제로부터 '전하(Royal Highness)'의 칭호를 얻어주었다 (코시모는 당시 키프로스 왕국의 폐지된 왕위에 대한 성공적인 주장으로 '왕실' 지위를 얻은 사보이아 공작보다 낮은 서열에 있어 매우 분노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요한 빌헬름이 최종적으로 선택되었다. 그와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1691년 4월 29일 대리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과 함께 열린 축제에서 한 동시대인은 선제후비의 신체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녀는 키가 크고, 안색은 희며, 눈은 크고 표정이 풍부했으며, 눈과 머리카락 모두 검은색이었다. 입은 작았고, 입술은 도톰했으며, 치아는 상아처럼 하얗다..."
그녀는 1691년 5월 6일 남동생 잔 가스토네와 함께 남편의 수도인 뒤셀도르프로 떠났다. 요한 빌헬름은 인스브루크에서 그녀를 맞이했고, 그곳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안나 마리아 루이자가 도착한 팔츠는 당시 진행 중이던 9년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상태였다. 이 전쟁에서 루이 14세는 자신의 동생인 프랑스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를 위해 팔츠를 공격했으며, 그 과정에서 필립스부르크 시를 점령했다. 선제후비는 1692년 임신했지만 유산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녀가 뒤셀도르프에 도착한 직후 선제후에게서 매독에 감염되어 안나 마리아 루이자와 요한 빌헬름이 자녀를 낳지 못했다고 잘못 알려져 왔으나, 그녀의 유해가 발굴되었을 때 매독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나 마리아 루이자와 요한 빌헬름은 원만한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2.2. 예술과 문화 후원 활동
선제후비는 무도회, 음악 공연 및 기타 축제를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요한 빌헬름은 그녀를 위해 프랑스 극작가 몰리에르의 코미디가 공연되는 극장을 지어주었다. 안나 마리아 루이자가 수많은 음악가들을 후원했기 때문에, 당시 팔츠 궁정은 국제적인 음악 중심지로 명성을 얻었다. 그녀는 포르투나토 켈레리를 궁정으로 초청하여 '카펠라 악장(maestro di cappella)'으로 임명했다. 박식가였던 아고스티노 스테파니도 1703년 뒤셀도르프에 도착한 시점부터 그녀가 토스카나로 돌아올 때까지 선제후비의 후원을 받았다. 현재 피렌체 케루비니 음악원 도서관에는 스테파니의 실내 이중창 두 판본이 소장되어 있다.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부친의 종용으로 남동생 잔 가스토네의 결혼을 주선했다. 1697년 7월 2일 잔 가스토네는 뒤셀도르프에서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안나 마리아 프란치스카와 결혼했으나, 잔 가스토네는 아내를 혐오했고 1708년에 둘은 별거했다. 잔 가스토네의 결혼과 같은 해인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으로 9년 전쟁이 종결되어 프랑스 군대가 팔츠 선제후국에서 철수했고, 요한 빌헬름은 메겐 백작령을 받았다. 낭트 칙령이 1685년 폐지된 후, 2,000명의 프랑스 위그노들이 팔츠 선제후국으로 이주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부터 팔츠 개신교도들에 대한 대우에 대한 비판을 받은 요한 빌헬름은 1705년 종교의 자유를 승인하는 '종교 선언(Religionsdeklaration)'을 발표했다.
3. 토스카나 대공국 계승 위기
메디치 가문의 단절이 임박하자 토스카나 대공국 계승을 둘러싼 유럽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했으며, 안나 마리아 루이자의 계승권 확보 노력은 번번이 좌절되었다.
3.1. 계승 분쟁의 배경
코시모 3세는 남성 우선의 토스카나 계승법을 변경하여 남성 직계가 단절될 경우 딸 안나 마리아 루이자가 대공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유럽 강대국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토스카나의 명목상 봉건 군주였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는 자신이 그녀의 뒤를 잇는다는 조건 하에만 동의했다. 코시모와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이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다.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서 '토스카나 문제'는 잠정적으로 보류되었다.
3.2. 계승권 확보를 위한 노력
몇 년 후 계승 문제가 더욱 시급해지자, 코시모 3세의 동생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데 메디치 추기경은 1709년 그의 성직 서약을 파기하고 구아스탈라 공작 빈첸초 곤차가의 장녀 엘레오노라와 강제로 결혼하게 되었다. 선제후비는 그에게 건강 관리를 잘하여 "우리에게 작은 왕자의 위안을 달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2년 후, 그는 후사 없이 사망하여 후계자에 대한 모든 희망을 앗아갔다.
1713년 그의 후계자였던 페르디난도가 사망한 후, 코시모는 토스카나의 명목상 입법부인 상원에 법안을 제출하여 코시모와 새로운 후계자인 잔 가스토네가 선제후비보다 먼저 사망할 경우 그녀가 대공위에 오를 것이라고 선포했다. 카를 6세는 격분하여 토스카나 대공국이 제국 영지이므로 자신만이 계승법을 변경할 특권을 지니고 있다고 반박했다.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파르마 공국의 상속녀이자 스페인 왕 펠리페 5세의 둘째 부인인 엘리자베타 파르네세가 마르게리타 데 메디치의 증손녀로서 토스카나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한 것이었다. 1716년 5월,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끊임없이 바꾸던 카를 6세는 피렌체에 선제후비의 계승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통보했지만, 오스트리아와 토스카나가 메디치 가문 이후 어떤 왕가가 뒤를 이을지에 대해 곧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1717년 6월, 코시모는 에스테 가문이 선제후비의 뒤를 이어야 한다는 자신의 소망을 선언했다. 카를 6세는 이전에 그가 빨리 선택할 경우 프레시디 주 형태의 영토 보상을 제안했지만, 약속을 철회했다. 1718년, 카를 6세는 코시모의 결정을 부인하며 토스카나와 모데나 (에스테 영지)의 통합은 용납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후 양측 간의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다.
4. 피렌체 귀환과 말년
남편 요한 빌헬름의 사망 후 피렌체로 돌아온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남동생 잔 가스토네와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피티 궁전을 떠나 빌라 라 키에테에서 말년을 보냈다.
4.1. 미망인 생활과 고향으로의 귀환

팔츠 선제후 요한 빌헬름은 1716년 6월 사망했다. 그의 미망인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1717년 10월 피렌체로 돌아왔다. 남동생 페르디난도의 미망인이자 대공의 황태자비였던 비올란테 베아트릭스는 안나 마리아 루이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안나 마리아 루이자가 돌아올 의사를 밝히자 비올란테 베아트릭스는 오빠의 수도인 뮌헨으로 떠날 준비를 했지만, 잔 가스토네가 그녀가 머물기를 원했으므로 그녀는 남았다. 코시모 3세는 두 여인 간의 우선권 다툼을 막기 위해 선제후비가 도착하기 직전에 비올란테 베아트릭스를 시에나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그녀의 지위를 명확히 했다.
4.2. 잔 가스토네와의 관계 및 궁정 생활
1718년 4월 4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공화국 (이후 오스트리아도 참여)은 엘리자베타 파르네세와 스페인 왕 펠리페 5세의 장남인 스페인 왕자 카를을 토스카나의 후계자로 선정했다 (안나 마리아 루이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1722년경에는 선제후비는 더 이상 상속녀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코시모는 토스카나의 미래에 대한 회의에서 관객으로 전락했다. 이 와중에 안나 마리아 루이자의 어머니인 마르게리타 루이사가 사망했다. 1674년의 합의에 따라 그녀의 귀중품은 자녀들에게 유증되어야 했으나, 멀리 떨어진 친척인 에피누아 공주에게 돌아갔다.
1723년 10월 25일, 사망 6일 전, 코시모 3세는 토스카나가 독립을 유지해야 하며, 잔 가스토네 사후 안나 마리아 루이자가 방해받지 않고 계승하며, 대공은 후계자를 선택할 권리를 보유한다는 최종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유럽은 이를 완전히 무시했다. 이제 대공이 된 잔 가스토네와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불행한 결혼을 주선한 선제후비를 싫어했으며, 그녀는 그의 자유주의 정책을 혐오했다. 잔 가스토네는 부친의 모든 반유대주의 법규를 폐지하고 그녀를 화나게 하는 것을 즐겼다. 결과적으로 선제후비는 피티 궁전의 왼쪽 날개에 있는 자신의 거처를 포기하고 빌라 라 키에테로 옮겨야 했다. 그녀는 보볼리 정원의 정원사 세바스티아노 라피와 건축가 조반니 바티스타 포기니 및 파올로 조바노치의 도움을 받아 빌라 라 키에테의 집과 정원을 재정비했다. 1722년부터 1725년 사이, 선제후비는 다양한 종교적 인물들의 조각상 12개를 의뢰하여 빌라를 더욱 아름답게 꾸몄다.
서로에 대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선제후비와 비올란테 베아트릭스는 함께 잔 가스토네의 좋지 않은 대중 이미지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대공이 사망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대중이 그를 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러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선제후비는 1729년 피렌체의 수호성인인 세례자 요한의 축일에 그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도록 강요했다. 이는 그의 마지막 공식 석상이었다. 잔 가스토네의 도덕적으로 타락한 측근들인 '루스판티'(Ruspanti)는 선제후비를 싫어했고, 그녀 역시 그들을 혐오했다. 비올란테 베아트릭스는 잔 가스토네를 그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연회를 조직했지만, 그의 행동은 참석자들이 서둘러 마차를 찾게 만들었다. 그는 반복적으로 냅킨에 토하고, 트림을 하며, 무례한 농담을 했다. 이러한 방해는 1731년 비올란테 베아트릭스의 사망으로 중단되었다. 1736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중, 왕자 카를은 영토 교환의 일환으로 토스카나에서 추방되었고, 로렌의 프란츠 3세가 대신 후계자가 되었다. 1737년 1월, 1731년부터 토스카나를 점령하고 있던 스페인 군대가 철수하고 6,000명의 오스트리아 군인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5. 사망과 유산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1743년 사망하며 메디치 대공 가문의 종말을 고했지만, '가문의 협약'을 통해 방대한 메디치 컬렉션을 피렌체에 영구히 보존하여 가장 중요한 문화적 유산을 남겼고, 자선 활동에도 크게 기여했다.
5.1. 사망 경위
잔 가스토네는 1737년 7월 9일 "질병의 축적"으로 사망했으며, 성직자들과 누이인 안나 마리아 루이자가 임종을 지켰다.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크라옹 공작 (대공의 사절)으로부터 프란츠 3세가 피렌체에 도착할 때까지 명목상의 섭정직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1743년 2월 18일,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 팔츠 선제후비는 "가슴 답답함(oppression on the breast)"으로 사망했다. 피렌체에 거주하던 영국 대표 호러스 맨 경은 편지에서 "일반 대중은 그녀가 폭풍과 함께 떠났다고 확신합니다. 오늘 아침 가장 격렬한 폭풍이 시작되어 약 두 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지금은 해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녀의 사망과 함께 메디치 가문의 대공 직계는 단절되었다.
5.2. 가문의 협약과 메디치 컬렉션 보존
잔 가스토네의 사망으로 현금 200.00 만 GBP와 방대한 예술품 컬렉션, 국가 의복, 이전 우르비노 공국 영지 등 메디치 가문의 모든 알로디움 소유물은 안나 마리아 루이자에게 귀속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녀의 가장 주목할 만한 행동은 1737년 10월 31일 서명된 '가문의 협약'(Patto di Famiglia)이었다. 그녀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및 로렌의 프란츠와 협력하여, 메디치 가문의 모든 개인 소유물을 토스카나 주에 유증하되, 어떠한 것도 피렌체에서 반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것이 그녀의 가장 중요한 유산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에 의해 파견된 '로렌인들'(Lorrainers)은 대중에게 혐오받았다. 선제후비가 "천박한" 궁정이라고 싫어했던 부왕 크라옹 공작은 선제후비가 피티 궁전의 그녀만의 동에서 방해받지 않고 살도록 허용했으며, 사실상 은둔 생활을 하며 가끔 선별된 소수의 손님들을 검은색 천개 아래 은빛 장식의 접견실에서 맞이했다. 안나 마리아 루이자에게는 이 '가문의 협약'이 가장 영구적인 유산이었다. 이 협약은 거의 3세기에 걸친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우위 동안 수집된 모든 예술품과 보물이 피렌체에 남아 있도록 보장했다. 미국 미술사학자 신시아 밀러 로렌스는 안나 마리아 루이자가 이를 통해 관광을 통한 토스카나의 미래 경제를 대비했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사망한 지 16년 후, 대공국의 설립자 코시모 1세가 건설한 우피치 미술관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5.3. 자선 활동과 마지막 기여
그녀는 페르디난도 1세가 1604년에 시작한 카펠라 데이 프린치피의 건설 자금을 조달하고 감독하는 데 몰두했으며, 매주 1,000 크라운의 비용을 지불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재산 중 많은 부분을 자선 단체에 기부했으며, 연간 4000 GBP에 달했다. 그녀의 유언장은 사망 불과 몇 달 전에 완성되었는데, 호러스 맨 경에 따르면 50.00 만 GBP 상당의 보석을 프란츠 대공에게, 그리고 이전 우르비노 공국 영지를 그녀의 주요 유언 집행인이자 부친 코시모 3세 시절의 대신이었던 리누치니 후작에게 남겼다. 그녀는 자신이 완성을 도운 산 로렌초 성당의 납골당에 안장되었다. 비록 그녀의 사망 당시 완전히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유언에는 재산 수입의 일부가 "위에서 언급된 유명한 산 로렌초 예배당을 계속하고, 완성하며, 완벽하게 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6. 역사적 평가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가문의 협약'을 통해 문화유산 보존에 크게 기여하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유골 발굴을 통해 매독 사망설 등 오랜 오해도 바로잡히며 현대적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6.1. 긍정적 평가와 문화적 영향
안나 마리아 루이자의 가장 지속적인 단일 행동은 '가문의 협약'이었다. 이것은 거의 3세기에 걸친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우위 동안 수집된 모든 예술품과 보물이 피렌체에 남아 있도록 보장했다. 미국 미술사학자 신시아 밀러 로렌스는 안나 마리아 루이자가 이를 통해 관광을 통한 토스카나의 미래 경제를 대비했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사망한 지 16년 후, 대공국의 설립자 코시모 1세가 건설한 우피치 미술관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그녀의 예술 후원과 문화유산 보존에 대한 기여는 토스카나 및 유럽 문화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6.2. 오해와 현대적 재평가
2012년 1966년 아르노 강 홍수로 인한 유골 보존 우려 이후, 그녀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과학적 검사 결과 그녀가 오랫동안 사망 원인으로 알려졌던 매독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과거의 오해를 바로잡고 그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재평가를 가능하게 했다.
7. 가계
관계 | 이름 |
---|---|
자신 |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 |
부 | 코시모 3세 데 메디치 |
모 | 오를레앙의 마르게리타 루이사 |
친조부 | 페르디난도 2세 데 메디치 |
친조모 |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 |
외조부 | 가스통 (오를레앙 공작) |
외조모 | 로렌의 마르그리트 |
친증조부 | 코시모 2세 데 메디치 |
친증조모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마달레나 |
친외증조부 | 페데리코 우발도 델라 로베레 |
친외증조모 | 클라우디아 데 메디치 |
외증조부 | 프랑스의 앙리 4세 |
외증조모 | 마리 데 메디치 |
외외증조부 | 프란츠 2세 (로렌 공작) |
외외증조모 | 살름의 크리스티나 |
8. 같이 보기
- 메디치 가문
- 토스카나 대공국
- 코시모 3세 데 메디치
- 요한 빌헬름 (팔츠 선제후)
-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
- 피티 궁전
- 우피치 미술관
- 산 로렌초 성당 (피렌체)
- 카펠라 데이 프린치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