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1.1. 출생 및 가족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1829년 2월 26일, 독일 연방 바이에른 왕국 프랑켄 지역의 부텐하임에서 유대인 가정에 '뢰프 슈트라우스'(Löb Strauß독일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아슈케나지 유대인 혈통이었다. 그는 아버지 히르시 슈트라우스와 그의 두 번째 아내 레베카 슈트라우스(결혼 전 성은 하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히르시는 직물 행상인이었으며, 뢰프가 16세 되던 해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스트라우스 가족은 2층집의 1층에 거주했으며, 바이에른에 살면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거주지 제한과 특별 세금 등 종교적 차별을 경험했다.

1.2. 미국 이주 및 초기 생활
아버지가 사망한 지 2년 후인 1847년, 18세의 뢰프 슈트라우스는 어머니 레베카와 두 명의 누이 마일라, 페겔라(패니)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뉴욕에서 이미 이주해 건조물 도매 사업을 시작한 그의 두 이복형제 요나스와 루이스(요나스 뢰프, 루이스 뢰프)와 재회했다. 형제들의 회사인 'J. 스트라우스 브라더 앤드 컴퍼니'는 맨해튼 리버티 스트리트 108번지에 위치해 있었다. 뉴욕에 도착한 후, 뢰프는 형들의 가게에서 냄비, 담요, 재봉 용품 등을 파는 행상인으로 일하며 초기 생활을 보냈다.
1850년경, 그는 미국인들이 발음하기 쉬운 '리바이 스트라우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는 1853년 1월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으며, 공식 서명은 여전히 '뢰프'로 남겼다. 이후 리바이는 켄터키주 루이빌로 옮겨 형들의 물품을 판매했다. 그의 누이 패니와 그녀의 남편 데이비드 스턴은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했다.
2. 사업 경력
2.1. 샌프란시스코 이전 및 리바이 스트라우스 앤드 컴퍼니 설립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의 상업 중심지였던 샌프란시스코에 서부 지점을 개설하기로 가족이 결정했다. 리바이는 가족의 대표로 선발되어 파나마를 경유하는 증기선을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그는 1854년 3월 초(일부 자료에서는 1853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누이 패니의 가족과 합류했다.
스트라우스는 자신의 도매 사업인 '리바이 스트라우스 앤드 컴퍼니'를 설립하고 뉴욕에 있는 형제들로부터 의류, 침구, 빗, 지갑, 손수건 등 고급 건조물품을 수입하여 판매했다. 그는 누이 패니의 늘어나는 가족과 함께 생활했다. 당시 골드 러시 시대에는 내구성이 강한 작업복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초기에 그는 천막과 마차 덮개용 질긴 천을 제작하여 판매했다.
어느 날, 스트라우스는 마차 덮개용 질긴 천 약 10만 장에 달하는 대규모 주문을 받았다. 이는 당시 그의 생산 가능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양이었고, 그는 대출을 받아 설비를 확장하면서까지 생산에 매달렸다. 그러나 주문자가 갑작스럽게 주문을 취소하면서 그가 생산한 엄청난 양의 마차 덮개용 천은 쓸모없게 되었다. 스트라우스는 잉여 재고 처리에 대해 고민하던 중, 이 질긴 천들을 '바지'로 만들면 좋겠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이를 사업에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이 아이디어는 당시 거친 작업을 하는 노동자와 광부들에게 획기적인 의류가 될 것이었다.
2.2. 청바지의 발명 및 특허
오늘날 우리가 아는 주머니에 금속 리벳이 박힌 청바지의 탄생은 네바다주 리노에서 재봉사로 일하던 제이콥 데이비스와의 협력으로 시작되었다. 데이비스는 라트비아 이민자(일부 자료에서는 러시아 이민자)였다. 그는 스트라우스의 고객 중 한 명이었는데, 1872년(일부 자료에서는 1871년) 스트라우스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이 발명한 혁신적인 작업복 바지 제작 방법을 알렸다. 당시 작업복 바지의 주머니는 자주 찢어지는 단점이 있었는데, 데이비스는 이 주머니를 금속 리벳으로 보강하여 내구성을 높이는 방법을 고안했다.
데이비스는 이 아이디어에 대한 특허를 취득할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스트라우스에게 동업을 제안했다. 스트라우스는 데이비스의 아이디어를 채택하고 특허 취득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며 파트너십을 맺었다. 특허 신청 시 절반의 권리는 리바이 스트라우스 앤드 컴퍼니에 할당되었다. 1873년 5월 20일, 스트라우스와 데이비스는 구리 리벳으로 데님 작업복 바지의 주머니를 강화하는 방법에 대한 특허(특허 번호 139121호)를 성공적으로 취득했다. 이로써 오늘날 우리가 입는 완벽한 형태의 블루진이 탄생했다.
최초의 블루진은 뉴햄프셔주 맨체스터의 아모스키그 제조 회사에서 생산된 캔버스 천을 사용하여 제작되었다. 리바이 스트라우스 앤드 컴퍼니는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과 이어진 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성공적으로 재건되었다. 제이콥 데이비스는 훗날 자신의 회사 지분을 다시 회사에 매각했다.
3. 개인적인 삶
3.1. 가족 관계 및 사생활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그의 누이 패니와 그녀의 남편 데이비드 스턴에게는 제이콥, 지그문트, 루이스, 에이브러햄 스턴이라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 네 조카들이 리바이 사망 후 회사를 물려받아 이끌었다. 특히 지그문트 스턴의 외동딸 엘리스 패니 스턴은 월터 A. 하스와 결혼했으며, 그들의 후손들이 현재 리바이 스트라우스 앤드 컴퍼니의 소유주이다.
4. 사망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1902년 9월 26일, 73세의 나이로 샌프란시스코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캘리포니아주 콜마에 위치한 홈 오브 피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망 당시 그의 재산은 약 3000.00 만 USD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일부 자료에서는 약 600.00 만 USD로 언급됨), 이는 2020년 기준 약 1.49 억 USD 또는 2014년 기준 약 1.64 억 USD에 해당하는 가치였다. 그의 사후, 조카 제이콥 스턴이 회사 사장직을 맡아 기업을 이끌었다. 그가 창조하는 데 기여한 전설적인 바지인 리바이스는 수십 년간 꾸준히 인기를 유지하며 패션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5. 유산 및 자선 활동
5.1. 리바이 스트라우스 앤드 컴퍼니의 영향력
리바이 스트라우스가 설립한 리바이 스트라우스 앤드 컴퍼니는 의류 산업, 특히 작업복 및 캐주얼 의류 시장에 혁신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가 탄생시킨 청바지는 전 세계적으로 대중문화의 상징이 되었으며, 수십 년 동안 패션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5.2. 자선 활동 및 사회 공헌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개혁 유대교의 일원으로서 다양한 종교적 및 사회적 문제들을 지지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최초의 유대인 시나고그인 에마누-엘 회당을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그는 여러 자선 단체에 기부했으며, 특히 고아들을 위한 특별 기금을 마련했다. 여기에는 태평양 히브리 고아원과 로마 가톨릭 고아원이 포함된다. 리바이 스트라우스 재단은 1897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 28개의 장학금을 위한 기금을 기부하면서 시작되었다.
5.3. 명예 및 기념
리바이 스트라우스가 태어난 독일 부텐하임의 1687년에 지어진 생가는 현재 리바이 스트라우스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리바이 스트라우스 앤드 컴퍼니의 글로벌 본사에는 역사적인 전시물들을 갖춘 방문객 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1994년, 그는 국립 카우보이 & 서부 유산 박물관의 위대한 서부인 명예의 전당(Hall of Great Westerners)에 헌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