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데카르트의 생애는 그의 철학적 사유와 학문적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예수회 교육을 받았고, 군 복무와 유럽 여행을 통해 다양한 학자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사상을 형성했다. 특히 네덜란드에서의 오랜 거주 기간 동안 그의 주요 저술들이 탄생했으며, 말년에는 스웨덴 여왕의 초청을 받아 스톡홀름에서 생을 마감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르네 데카르트는 1596년 3월 31일 프랑스 투렌 지방(현재 앵드르에루아르 데카르트 시)의 라에라는 작은 도시에서 법관 귀족 가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조아킴은 렌의 브르타뉴 의회 의원이었고, 어머니 잔느 브로샤르는 그가 태어난 지 14개월 만에 사망했다. 이후 데카르트는 외할머니와 외삼촌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고, 어린 시절에는 몸이 매우 허약하여 자주 병치레를 했다. 그는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지만, 그의 출생지인 푸아투 지방은 개신교 위그노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이었다.
데카르트는 주변 사물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보였고, 어려서부터 조용한 곳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그에게 '꼬마 철학가'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부친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으며, 그는 자신이 형제들 중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아이였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자주 집을 떠나 혼자 여행을 다녔고, 친구들과의 교류에 더 많은 마음을 쏟았다.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장난감은 사팔뜨기 인형이었는데, 이는 그가 성장 후에도 유독 장애인들에게 호감을 보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1607년, 허약한 체질 탓에 또래보다 늦은 11세의 나이로 예수회가 운영하는 라 플레슈 콜레주(Collège Royal Henry-Le-Grand)에 입학하여 1614년까지 8년간 교육을 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연구를 포함한 수학과 물리학을 처음 접했으며, 논리학, 형이상학, 자연철학, 윤리학 등 철저한 중세식 인본주의 교육을 받았다. 또한 점성술과 마술 같은 비의적인 학문에도 관심을 가졌다. 데카르트는 학교의 구시대적 교육 방식에 불만을 표했지만, 수학에 특별한 재능을 보이며 철학적 토론에서도 수학적 방법을 활용하여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는 학문 중 수학을 가장 선호했으며, 신학 및 스콜라 철학의 비엄밀성과 개연성을 비판하며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학교에서의 교육과 교사들에게 평생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1614년 라 플레슈를 졸업한 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푸아티에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1616년 법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대학에서 수학, 자연과학, 법률학, 스콜라 철학 등을 배웠으나, 수학만이 명증한 지식이라고 확신했다. 졸업 후 그는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에서 실질적인 지식을 얻고자 학교 밖으로 나섰고, 다시는 제도권 교육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1617년 파리로 갔으나 화려한 도시 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수학 관련 도박에만 몰두했다. 같은 해 네덜란드 브레다에서 벽에 붙은 어려운 기하학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면서 자신의 수학적 재능을 깨닫게 되었다.
1.2. 군 복무와 여행
데카르트는 학업을 마친 후 '서재의 책'을 버리고 '세상이라는 큰 책' 속으로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1618년, 22세의 나이로 네덜란드 공화국의 마우리츠 휘하 네덜란드 국가군에 용병으로 입대했다. 당시 80년 전쟁은 휴전 상태였으나, 마우리츠의 군대는 시몬 스테빈과 같은 뛰어난 수학자 및 기술자들을 기용하여 신무기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자연과학자들과의 교류를 위해 이 군대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1618년 11월, 네덜란드 국경 요새 도시 브레다에서 의사이자 자연과학자, 수학자인 이삭 베이크만을 만났다. 베이크만은 원자, 진공, 운동 보존을 인정하는 근대 물리학에 가까운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지지자이기도 했다. 베이크만은 젊은 데카르트의 수학적 깊이에 놀랐고, 데카르트 또한 베이크만에게서 졸업 이후 오랜만에 지적인 자극을 받았다. 이 시기 그들은 물리학의 자유낙하 법칙, 수압의 분압 원리, 3차 방정식 해법, 각의 3등분을 위한 자 설계 등 다양한 주제를 연구했다. 데카르트의 첫 저서인 《음악 개론》은 베이크만에게 헌정되었다.
1619년 30년 전쟁이 발발하자, 데카르트는 참전하기 위해 독일로 떠났다. 이는 휴전 상태의 마우리츠 군대 생활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후, 바이에른 공 막시밀리안 1세의 군대에 입대했다. 1619년 11월에는 백산 전투에도 참전했다.
1619년 11월 10일에서 11일 밤, 노이부르크에 주둔하던 데카르트는 추위를 피해 '난로'가 있는 방에 틀어박혔다. 그 안에서 그는 세 가지 꿈을 꾸었고, 이 꿈들이 자신에게 새로운 철학을 계시해 주었다고 믿었다. 첫 번째 꿈에서 그는 강한 바람이 부는 거리 모퉁이에 서 있었고, 오른쪽 다리가 약해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두 번째 꿈에서는 미신에 물들지 않은 과학의 눈으로 무서운 폭풍을 지켜보며, 그 정체가 폭로되면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 번째 꿈에서는 테이블 위에 사전과 다른 책이 놓여 있었고, '나는 어떠한 생활을 보내야 할 것인가?'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이때 낯선 사람이 다가와 'Quiet Non'(그는 이를 인간 지식과 학문의 '참과 거짓'으로 해석했다)으로 시작하는 시를 보여주었다. 그는 이 꿈들을 통해 과학 추구가 자신의 삶의 진정한 지혜이자 핵심적인 사명이 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특히 두 번째 꿈은 현대 의학적으로는 폭발머리 증후군의 에피소스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해석 기하학과 철학에 수학적 방법을 적용하는 아이디어를 구체화했다. 그는 모든 진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근본적인 진리를 찾고 논리를 따라가면 모든 과학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근본적인 진리가 바로 그의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1620년 제대한 후, 데카르트는 로레토의 산타 카사 대성당을 방문하고 여러 나라를 여행한 뒤 프랑스로 돌아와 몇 년간 파리에서 지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첫 방법론 에세이인 《정신 지도의 규칙》(Regulae ad Directionem Ingenii라틴어)을 집필했다. 1623년 라에에 도착하여 모든 재산을 팔아 채권에 투자함으로써 평생 편안한 수입을 얻었다. 1627년 라로셸 공성전에서 리슐리외 추기경의 공성전을 참관하며, 리슐리외가 건설 중이던 거대한 제방의 물리적 특성에 관심을 갖고 공성전 중 목격한 모든 것을 수학적으로 연구했다. 또한 프랑스 수학자 지라르 데자르그를 만났다. 같은 해 가을, 교황 사절인 조반니 프란체스코 구이디 디 바뇨의 저택에서 마랭 메르센 등 여러 학자들과 함께 연금술사 니콜라 드 빌리에르의 강연을 들은 후, 피에르 드 베륄 추기경은 그에게 종교재판소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새로운 철학을 저술할 것을 강력히 권유했다.
1.3. 네덜란드에서의 활동

1628년 겨울, 데카르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이 강한 프랑스를 떠나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가 지배적인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프라네커 대학교에 입학하여 아드리안 메티우스 밑에서 공부했으며, 이후 '푸아투뱅'이라는 이름으로 개신교 대학인 레이던 대학교에 등록했다. 레이던에서는 수학자 야코부스 골리우스와 천문학자 마르틴 반 덴 호베에게서 배웠다. 1630년 10월에는 베이크만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표절했다고 비난하며 그와 불화를 겪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하녀 헬레나 얀스 반 데어 스트롬과 관계를 맺어 1635년 데번터르에서 딸 프랑신을 낳았다. 프랑신은 개신교 세례를 받았으나 1640년 5세의 나이로 성홍열로 사망했다. 데카르트는 딸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는데, 당시 도덕주의자들과는 달리 감정을 억누르지 않았다. 러셀 쇼토는 딸을 잃은 경험이 데카르트의 연구에 전환점이 되어, 의학에서 보편적 해답을 찾는 탐구로 초점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잦은 이사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는 네덜란드에서 20여 년간 머무는 동안 그의 주요 저작들을 모두 집필하며 수학과 철학에 혁명을 일으켰다. 1633년 갈릴레오가 이탈리아 종교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자, 데카르트는 지난 4년간 집필한 《세계론》(Treatise on the World영어)의 출판 계획을 포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37년, 그는 이 저작의 일부를 세 편의 에세이로 출판했다. 이들은 《기상학》(Les Météores프랑스어), 《굴절광학》(La Dioptrique프랑스어), 그리고 《기하학》(La Géométrie프랑스어)으로, 서론으로 그의 유명한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프랑스어)이 붙어 있었다. 《방법서설》에서 데카르트는 지식이 확고한 토대 위에 놓이도록 보장하는 네 가지 사고 규칙을 제시했다. 그중 첫 번째는 "결코 참이라고 알지 못하는 것은 어떤 것도 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즉 성급함과 편견을 신중히 피하고, 내 판단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명확하고 분명하게 제시된 것만을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기하학》에서 데카르트는 페르마와 함께 발견한 내용을 활용했는데, 이는 후에 데카르트 기하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남은 생애 동안 수학과 철학에 관한 저작들을 계속 출판했다. 1641년에는 라틴어로 쓰여 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형이상학 논문인 《제1 철학에 관한 성찰》(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라틴어)을 출판했다. 이어서 1644년에는 《방법서설》과 《성찰》을 종합한 형태의 《철학의 원리》(Principia Philosophiae라틴어)를 출판했다. 1643년에는 위트레흐트 대학교에서 데카르트 철학이 비난받았고, 데카르트는 헤이그로 피신하여 에그몬트빈넨에 정착해야 했다.
1643년부터 1649년까지 데카르트는 에그몬트빈넨의 한 여관에서 그의 여자친구와 함께 살았다. 그는 베르겐의 영주인 안토니 스튀들러 반 주르크와 친분을 맺고 그의 저택과 영지 설계에 참여했다. 또한 수학자이자 측량사인 디르크 렘브란츠 반 니에로프를 만났는데, 반 니에로프의 지식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를 콘스탄틴 하위헌스와 프란스 반 스호텐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크리스티아 머서는 데카르트가 스페인 작가이자 로마 가톨릭 수녀인 아빌라의 테레사에게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테레사는 50년 전에 지적 성장에 있어 철학적 성찰의 역할을 다룬 《내면의 성》을 출판한 바 있다.
데카르트는 네덜란드 군 복무 중이던 이탈리아 장군 알폰소 폴로티를 통해 엘리자베스 공주와 6년간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으며, 이 서신들은 주로 도덕적, 심리적 주제를 다루었다. 이 서신 교환과 관련하여 1649년 그는 《정념론》(Les Passions de l'âme프랑스어)을 출판하고 이 책을 공주에게 헌정했다. 클로드 피코트 수도원장이 번역한 《철학의 원리》 프랑스어 번역본은 1647년에 출판되었는데, 이 판본 또한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헌정되었다. 《철학의 원리》 프랑스어판 서문에서 데카르트는 진정한 철학을 지혜를 얻는 수단으로 칭송하며, 지혜에 도달하는 네 가지 일반적인 원천을 언급한 후, 첫 번째 원인을 탐구하는 다섯 번째, 더 좋고 안전한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1.4. 스웨덴에서의 말년과 죽음

1649년 무렵 데카르트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이자 과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 해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은 그를 자신의 궁정으로 초대하여 새로운 과학 아카데미를 조직하고 사랑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데카르트는 이를 수락하고 한겨울에 스웨덴 제국으로 이주했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데카르트의 사상에 관심을 보였고, 그에게 《정념론》을 출판하도록 독려했다.
데카르트는 스톡홀름의 트레 크로노르 성에서 500NaN 경 m도 채 떨어지지 않은 베스테르롱가탄에 위치한 피에르 샤뉘의 집에서 손님으로 머물렀다. 그곳에서 샤뉘와 데카르트는 토리첼리식 수은 기압계를 이용해 관측을 수행했다. 블레즈 파스칼에게 도전하며, 데카르트는 스톡홀름에서 최초로 기압 측정을 실시하여 대기압이 날씨 예측에 사용될 수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데카르트는 크리스티나 여왕의 생일 이후부터 일주일에 세 번, 새벽 5시에 여왕의 춥고 통풍이 잘 되는 성에서 강의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1650년 1월 15일까지 여왕은 데카르트를 겨우 네다섯 번밖에 만나지 않았다. 곧 그들은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여왕은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철학에 관심이 없었고, 데카르트 또한 여왕의 고대 그리스어와 고대 그리스 문학에 대한 관심사를 공유하지 않았다. 1650년 2월 1일, 데카르트는 폐렴에 걸려 2월 11일 샤뉘의 집에서 사망했다.
샤뉘에 따르면 사망 원인은 폐렴이었지만, 크리스티나의 주치의 요한 반 불렌에 따르면 흉막염이었다고 한다. (반 불렌은 데카르트의 출혈 치료를 허락받지 못했다.) 겨울은 온화했지만, 1월 하반기는 데카르트 자신이 묘사했듯이 혹독했다. 그러나 이 언급은 날씨에 대한 데카르트의 생각만큼이나 지적 분위기에 대한 그의 견해를 나타내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에이케 피스는 의사 반 불렌의 편지를 근거로 이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데카르트가 그의 치료를 거부했고, 이후 그 진실성에 대한 더 많은 반론이 제기되었다. 2009년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에베르트는 데카르트가 그의 종교적 견해에 반대했던 가톨릭 선교사 자크 비오귀에게 독살당했다고 주장했다. 에베르트는 증거로 르네 데카르트의 조카딸인 카트린 데카르트가 1693년 자신의 저서 철학자 데카르트의 사망 보고서에서 삼촌이 사망 이틀 전 '성찬'을 받았을 때 독살 행위에 대해 은밀히 언급했다고 제시한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내 영혼아, 너는 오랫동안 포로로 잡혀 있었다. 이제 너의 감옥을 떠나 이 육체의 족쇄를 벗어날 때가 왔다. 기쁨과 용기를 가지고 이 분리를 맞이하라!"
개신교 국가에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스톡홀름의 아돌프 프레드릭 교회가 될 교회 묘지에 묻혔는데, 주로 고아들이 묻히던 곳이었다. 그의 원고는 샤뉘의 처남이자 "데카르트를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의 편지를 선택적으로 자르고, 추가하고, 출판하기 시작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클로드 클레르슬리에의 소유가 되었다. 1663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데카르트의 저작들을 금서 목록에 올렸다. 1666년, 그가 사망한 지 16년 후, 그의 유해는 프랑스로 옮겨져 생테티엔 뒤 몽 교회에 안치되었다. 1671년 루이 14세는 데카르트주의에 대한 모든 강의를 금지했다. 1792년 국민공회는 그의 유해를 팡테옹으로 이전할 계획이었으나, 1819년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에 다시 안치되었는데, 이때 손가락 하나와 두개골이 없었다. 그의 것으로 알려진 두개골은 파리의 인류 박물관에 있지만, 2020년 일부 연구에서는 위조품일 수 있다고 확인되었다. 원래 두개골은 스웨덴에서 조각으로 나뉘어 개인 소장가들에게 주어졌으며, 그 조각 중 하나는 1691년 룬드 대학교에 도착하여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2. 철학적 기여
데카르트의 철학은 근대 서양 사상의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했다. 그는 기존의 지식을 회의하고, 명확하고 분명한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했으며, 이를 통해 합리론의 기초를 다졌다. 그의 사상은 심신 이원론, 신 존재 증명, 그리고 윤리학과 정념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2.1. 방법적 회의와 코기토

데카르트는 어떤 의심도 없이 참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근본적인 원리들을 찾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방법적 회의라고도 불리는 형이상학적 회의를 사용했다. 이는 의심할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를 거부한 다음, 진정한 지식을 위한 확고한 토대를 얻기 위해 그 아이디어들을 재확립하는 방법이다. 데카르트는 이를 건축에 비유하며,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 흙을 파내는 것에 비유했다. 데카르트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토대주의는 불완전했으며, 그의 회의 방법은 토대주의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데카르트는 단 하나의 근본 원리에 도달했다. 바로 '그가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는 《방법서설》에 나오는 라틴어 문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틴어)로 표현된다. 데카르트는 만약 그가 의심한다면, 무언가 또는 누군가가 의심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따라서 그가 의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 문구의 단순한 의미는 만약 어떤 사람이 존재에 대해 회의적이라면, 그 자체로 그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근본 원리, 즉 '나는 생각한다'와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성찰》 제3성찰에서 명확하고 분명한 지각을 통해 나중에 확증되었다. 데카르트는 이 두 원리를 명확하고 분명하게 지각함으로써 그들의 의심할 수 없음을 확신했다.
데카르트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 그는 감각을 통해 자신의 몸을 지각하지만, 감각은 이전에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유일하게 의심할 수 없는 지식은 그가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생각하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이며, 그의 능력은 그의 본질에서 나와야 한다. 데카르트는 '생각'(cogitatio라틴어)을 "내가 그것을 의식하는 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생각은 사람이 즉시 의식하는 모든 활동이다. 그는 깨어 있는 생각이 꿈과 구별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했으며, 자신의 마음이 악의적인 악마에 의해 감각 앞에 환상적인 외부 세계가 놓여 있는 방식으로 "납치"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데카르트는 지식 체계를 구축해 나갔으며, 지각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오직 연역만을 방법으로 인정했다.
2.2. 심신 이원론
데카르트는 파리 근처 생제르맹앙레성에 전시된 자동인형에서 영감을 받아 정신과 신체의 관계 및 상호작용 방식을 탐구했다. 그의 심신 이원론의 주요 영향은 신학과 물리학이었다.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은 데카르트의 대표적인 학설이며, 그가 제시한 다른 이론들에도 스며들어 있다. 데카르트적 이원론(또는 심신 이원론)으로 알려진 그의 정신과 신체의 분리 이론은 이후 서양 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제1 철학에 관한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와 인간 영혼과 신체의 구별을 증명하려 했다. 인간은 정신과 신체의 결합체이므로,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정신과 신체가 구별되지만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생각을 포용했다.
데카르트는 '양태'라는 개념을 사용했는데, 이는 실체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철학의 원리》에서 데카르트는 "우리는 어떤 양태와 다르다고 말하는 실체를 그 양태와는 별개로 명확하게 지각할 수 있지만, 반대로 양태를 실체와 별개로 이해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양태를 실체와 별개로 지각하는 것은 지적 추상화를 필요로 하며, 데카르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적 추상화는 내가 더 풍부한 이념의 내용 중 한 부분에서 생각을 돌려 다른 부분에 더 큰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내가 어떤 형태를 그 형태의 실체나 연장을 생각하지 않고 고려할 때, 나는 정신적 추상화를 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두 실체는 각각 다른 실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구별된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신이 인간과 구별되며, 인간의 신체와 정신 또한 서로 구별된다고 추론했다. 그는 신체(연장된 것)와 정신(연장되지 않은 비물질적인 것) 사이의 큰 차이가 둘을 존재론적으로 구별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의 불가분성 논증에 따르면, 정신은 완전히 불가분적이다. 왜냐하면 "내가 정신, 또는 내가 단지 생각하는 존재인 한의 나 자신을 고려할 때, 내 안에서 어떤 부분도 구별할 수 없으며, 나는 나 자신을 완전히 단일하고 완전한 것으로 이해한다."
더 나아가,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밀랍 조각을 논하며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가장 특징적인 교리, 즉 우주가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실체, 즉 '생각하는 것'으로 정의되는 정신 또는 영혼과 물질이자 비사유적인 것으로 정의되는 신체를 포함한다고 설명한다. 데카르트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은 우주가 본질적으로 목적론적이라고 보았다. 별의 움직임이든 나무의 성장이든, 자연 내에서 작동하는 특정한 목적, 목표 또는 최종 원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최종 원인'이라고 불렀고, 이러한 최종 원인들은 자연이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새로운 과학(자연을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신성한 힘과 '최종 원인'의 역할을 부정했다)과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 과학 사이의 구별을 지지했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최종 원인을 물리적 우주(res extensa라틴어)에서 정신(res cogitans라틴어)으로 추방함으로써 후자에 대한 철학적 근거를 제공했다. 따라서 데카르트적 이원론은 현대 물리학의 길을 열었지만, 동시에 영혼의 불멸에 대한 종교적 믿음을 위한 문도 열어두었다.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은 인간에 대한 개념을 내포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은 정신과 신체의 복합적인 존재였다. 데카르트는 정신에 우선순위를 두었으며, 정신은 신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신체는 정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정신이 실체인 반면, 신체는 단지 '우유성'으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정신과 신체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자연은 또한 통증, 배고픔, 갈증 등과 같은 감각을 통해 내가 배에 있는 선장처럼 단순히 내 몸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고, 마치 그것과 뒤섞여 있어 나와 몸이 하나의 단위를 이룬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생각하는 존재일 뿐인데도 몸이 다쳤을 때 통증을 느끼지 않고, 선원이 배에 부서진 것이 있는지 시각으로 지각하는 것처럼 순전히 지성으로 손상을 지각할 것이다."
데카르트의 육화에 대한 논의는 그의 이원론 철학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문제 중 하나를 제기했다. 즉, 인간의 정신과 신체 사이의 결합 관계는 정확히 무엇인가? 따라서 데카르트적 이원론은 데카르트 사망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심신 문제에 대한 철학적 논의의 의제를 설정했다. 데카르트는 또한 합리주의자였으며 본유 관념의 힘을 믿었다. 데카르트는 본유 지식 이론과 모든 인간이 신의 더 높은 힘을 통해 지식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이 본유 지식 이론은 나중에 존 로크와 같은 경험주의자 철학자들에 의해 반박되었다. 경험론은 모든 지식이 경험을 통해 획득된다고 주장한다.
《정념론》은 1649년에 출판되었는데, 데카르트는 당시 통용되던 인간 신체에 '동물 정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믿음을 논했다. 이 동물 정기는 뇌와 근육 사이의 신경계를 빠르게 순환하는 가볍고 떠다니는 유체로 여겨졌다. 이 동물 정기는 인간의 영혼, 즉 영혼의 정념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어졌다. 데카르트는 여섯 가지 기본 정념을 구별했는데, 경이, 사랑, 증오, 욕망, 기쁨, 슬픔이다. 이 모든 정념은 원래 정기의 다른 조합을 나타내며, 영혼이 특정 행동을 의지하거나 원하도록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두려움은 영혼이 신체에 반응을 생성하도록 움직이는 정념이라고 주장했다. 영혼과 신체의 분리에 대한 그의 이원론적 가르침에 따라, 그는 뇌의 일부가 영혼과 신체 사이의 연결자 역할을 한다고 가설을 세웠고, 송과선을 연결자로 지목했다. 데카르트는 신호가 귀와 눈에서 송과선으로 동물 정기를 통해 전달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송과선에서의 다른 움직임은 다양한 동물 정기를 유발한다. 그는 송과선에서의 이러한 움직임이 신의 의지에 기반하며, 인간은 자신에게 유용한 것을 원하고 좋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신체를 움직이는 동물 정기가 송과선으로부터의 명령을 왜곡할 수 있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정념을 통제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는 외부 사건에 대한 신체의 자동적인 반응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으며, 이는 19세기 반사 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접촉과 소리와 같은 외부 움직임이 신경 말단에 도달하여 동물 정기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불의 열은 피부의 한 지점에 영향을 미쳐 일련의 반응을 일으키고, 동물 정기가 중추 신경계를 통해 뇌에 도달하며, 차례로 동물 정기가 근육으로 다시 보내져 손을 불에서 멀리 움직이게 한다. 이러한 일련의 반응을 통해 신체의 자동적인 반응은 사고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는 영혼이 과학적 조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최초의 과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영혼이 신성하다는 동시대인들의 견해에 도전했으며, 따라서 종교 당국은 그의 책을 위험하다고 여겼다. 데카르트의 저작들은 감정에 대한 이론과 인지적 평가가 정서적 과정으로 어떻게 번역되는지에 대한 기초를 형성했다. 데카르트는 뇌가 작동하는 기계와 유사하며, 수학과 역학이 뇌의 복잡한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20세기에는 앨런 튜링이 데카르트에게 영감을 받아 수리생물학에 기반한 컴퓨터 과학을 발전시켰다. 그의 반사 이론은 사망 후 200년 이상이 지나서도 발전된 생리학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생리학자 이반 파블로프는 데카르트를 크게 존경했다.
2.3. 신 존재 증명
데카르트는 《성찰》 제3성찰과 제5성찰에서 자비로운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는 신이 자신에게 작동하는 정신과 감각 신경계를 부여했으며 자신을 속이려 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감각이 제공하는 현실에 대한 설명에 믿음을 가졌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로부터 데카르트는 궁극적으로 연역과 지각에 기반한 세상에 대한 지식 획득의 가능성을 확립한다. 따라서 인식론과 관련하여 데카르트는 토대주의 개념과 이성이 지식 획득의 유일한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가능성 같은 아이디어를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론을 검증하고 입증하기 위해 실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상표 논증을 지지하기 위해 루크레티우스를 인용하며 "무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Ex nihilo nihil fit라틴어)는 인과적 충분성 원리를 언급한다. 옥스퍼드 레퍼런스는 이 논증을 "완벽함에 대한 우리의 아이디어가 완벽한 기원(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 마치 제조자가 작품에 도장이나 상표를 남기는 것과 같다"고 요약한다. 제5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최고로 완벽하고 무한한 존재의 아이디어"를 생각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반한 존재론적 증명의 한 버전을 제시하며, "내 안에 있는 모든 아이디어 중에서 신에 대한 나의 아이디어가 가장 참되고, 가장 명확하고 분명하다"고 제안한다.
데카르트는 자신을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여겼으며, 《성찰》의 목적 중 하나는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학적 믿음을 이성에 기반하려는 그의 시도는 당대에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블레즈 파스칼은 데카르트의 견해를 합리주의적이고 기계론적이라고 보았으며, 그를 이신론자로 비난했다. "나는 데카르트를 용서할 수 없다. 그의 모든 철학에서 데카르트는 신 없이 지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신이 그의 위엄 있는 손가락 한 번으로 세상을 움직이도록 재촉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지만, 그 후 그는 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또한 강력한 동시대인 마르틴 스호크는 그를 무신론적 믿음을 가졌다고 비난했지만,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무신론에 대한 명시적인 비판을 제공했다. 가톨릭교회는 1663년에 그의 책들을 금지했다.
데카르트는 또한 외부 세계 회의론에 대한 답변을 작성했다. 그는 의심을 위한 의심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 즉 확실성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회의의 방법을 사용한다. 그는 감각적 지각이 자신에게 비자발적으로 오며,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그의 감각 외부에 존재하며,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는 그의 마음 외부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증거이며, 따라서 외부 세계가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데카르트는 신이 자신에게 전달되는 아이디어에 대해 자신을 속이지 않을 것이며, 신이 자신에게 그러한 아이디어가 물질적인 것에 의해 야기된다고 믿는 "경향성"을 주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외부 세계의 사물들이 물질적이라고 주장한다. 데카르트는 또한 실체는 기능하거나 존재하기 위해 어떤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 데카르트는 오직 신만이 진정한 "실체"일 수 있다고 더 설명한다. 그러나 마음은 실체이며, 이는 기능하기 위해 오직 신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은 생각하는 실체이다. 생각하는 실체의 수단은 아이디어에서 비롯된다.
데카르트는 신학적 질문을 피하고, 자신의 형이상학과 신학적 정통성 사이에 불일치가 없음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그는 신학적 교리를 형이상학적으로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영혼과 신체가 구별되는 실체임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영혼의 불멸성을 확립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을 때, 그는 "나는 인간 이성의 힘을 사용하여 신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2.4. 윤리학과 정념
데카르트에게 윤리학은 최고의, 가장 완벽한 과학이었다. 다른 과학들과 마찬가지로 윤리학은 형이상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자연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탐구하며, 심신 이원론을 공식화하고, 자유 의지를 옹호한다. 그러나 그는 확신에 찬 합리주의자였으므로, 데카르트는 이성이 개인이 추구해야 할 선을 탐구하는 데 충분하며, 덕은 행동을 안내해야 할 올바른 추론에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추론의 질은 지식과 정신 상태에 달려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완전한 도덕 철학은 신체 연구를 포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엘리자베스 공주와의 서신 교환에서 이 주제를 논의했고, 그 결과 인간의 심신 과정과 반응, 특히 감정 또는 정념에 대한 연구를 담은 그의 저서 《정념론》을 집필했다. 인간의 정념과 감정에 대한 그의 저작들은 그의 추종자들(데카르트주의 참조)의 철학의 기초가 되었고, 문학과 예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특히 감정을 어떻게 불러일으켜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데카르트와 제논은 모두 최고선을 덕과 동일시했다. 에피쿠로스에게 최고선은 쾌락이었고, 데카르트는 사실 이것이 제논의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덕은 육체적 쾌락보다 더 나은 영적인 쾌락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eudaimonia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이 도덕적 덕과 적당한 부와 같은 운명의 선에 모두 달려 있다는 의견에 대해, 데카르트는 운명이 행복에 기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들이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는 반면, 자신의 마음은 완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있다고 말한다. 데카르트의 도덕적 저작들은 그의 생애 마지막 부분에 나왔지만, 그 이전에 《방법서설》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생각을 의심하는 동안 행동할 수 있도록 세 가지 격률을 채택했다. 이 격률들은 그의 "임시 도덕률"로 알려져 있다.
2.5. 종교관 및 동물관
데카르트의 종교적 믿음은 학계에서 엄밀히 논쟁되어 왔다. 그는 《제1 철학에 관한 성찰》의 목적 중 하나가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서 데카르트는 이신론 또는 무신론을 믿은 것으로 비난받았다. 그가 말년에 비교적 사상적으로 자유로운 스웨덴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것 또한 이러한 종교적 신념을 비난받은 것과 관련 있다.
동시대의 블레즈 파스칼은 "그의 철학에서 데카르트를 용서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신 없이 지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신이 그의 위엄 있는 손가락 한 번으로 세계를 움직이도록 재촉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지만, 그 후에 그는 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스티븐 고크로져의 데카르트 전기에서는 그가 죽는 날까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단호하고, 열정적인 열망과 함께 로마 가톨릭교회에 깊은 종교적 믿음을 가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스웨덴에서 죽은 후, 스웨덴 법에 의하면 지도자는 개신교도이어야 했기 때문에 크리스티나 여왕이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하기 위해서 왕위에서 물러났는데,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서 그녀가 장기적으로 접촉한 사람은 개인 지도 교사인 데카르트뿐이었다.
데카르트는 동물이 이성이나 지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물이 감각이나 지각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들은 기계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에게는 영혼, 즉 정신이 있어 고통과 불안을 느낄 수 있는 반면, 동물은 영혼이 없으므로 고통이나 불안을 느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만약 동물이 고통의 징후를 보인다면, 이는 신체를 손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고통을 겪기 위한 본유적인 상태는 없다고 보았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견해는 널리 받아들여져 유럽과 북미에서 인간이 동물을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19세기 중반까지 법과 사회 규범으로 동물 학대를 정당화했다. 특히 그는 의식이 있는 동물(주로 개)을 생체 해부하면서, 동물이 몸부림치고 비명을 질러도 관찰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며, 이러한 반응은 단순히 프로그램된 반응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사상과 행위는 후대의 동물 복지 운동과 동물권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찰스 다윈의 저작들은 결국 데카르트의 동물관을 약화시켰다. 다윈은 인간과 다른 종들 사이의 연속성이 동물 고통의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주장했다.
3. 수학적 기여
데카르트는 수학 분야에서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그의 수학적 방법론은 후대 수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해석 기하학의 창시와 현대적인 수학 표기법의 도입은 그의 가장 중요한 기여로 평가된다.
3.1. 해석 기하학
데카르트의 가장 지속적인 유산 중 하나는 대수학을 기하학에 적용한 해석 기하학의 개발이었다. 데카르트 좌표계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는 지식 체계에서 대수학에 근본적인 위치를 부여한 최초의 인물로, 특히 추상적이고 알려지지 않은 양에 대한 추론을 자동화하거나 기계화하는 방법으로 대수학을 사용했다. 유럽 수학자들은 이전에는 기하학을 대수학의 기초가 되는 더 근본적인 수학 형태로 보았다. 루카 파치올리, 제로니모 카르다노, 니콜로 폰타나 타르탈리아, 루도비코 페라리와 같은 수학자들은 대수학 규칙에 기하학적 증명을 부여했다. 3차 이상의 방정식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이는 입방체와 같은 3차원 형태가 현실의 가장 큰 차원을 차지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추상적인 양인 a2이 넓이뿐만 아니라 길이를 나타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2차 거듭제곱이 반드시 넓이를 나타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프랑수아 비에트와 같은 수학자들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비록 데카르트가 이 주제를 더 깊이 다루지는 않았지만, 그는 수리 논리학의 전신으로서 논리적 원리와 방법을 상징적으로 포함하고 일반적인 추론을 기계화할 수 있는 더 일반적인 대수학 또는 "보편 수학"을 구상하는 데 라이프니츠보다 앞섰다.
《기하학》에서 데카르트는 페르마와 함께 발견한 내용을 활용했다. 이는 나중에 데카르트 기하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방법서설》에 포함된 소논문 《기하학》은 수학의 역사에 큰 공헌을 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곡선에 대수 방정식을 부여하는 방법을 발견하여, 모든 원추곡선을 단 한 종류의 2차 방정식으로 표시하는 데 성공하고 이를 제시함으로써 과학과 수학을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그의 직교좌표계는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유클리드 기하학적 공간을 대체했으며, 이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새로운 공간 개념을 도입할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3.2. 표기법과 법칙
데카르트는 방정식에서 미지수를 x, y, z로, 알려진 값을 a, b, c로 나타내는 관례를 만들었다. 그는 또한 거듭제곱이나 지수를 나타내기 위해 위첨자를 사용하는 표준 표기법을 개척했다. 예를 들어, x2에서 2는 x 제곱을 나타낸다.
그의 부호 법칙은 다항식의 양수 및 음수 근의 수를 결정하는 데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다. "실계수의 n차 방정식의 양의 실근의 개수는 다항식 f(x)의 실수의 열 사이에서 일어나는 부호 변화의 수와 같거나 그 수보다 짝수 개만큼 적다"는 데카르트의 부호 법칙은 다항식의 근의 개수를 구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된다.
3.3. 미적분학의 기초
데카르트의 연구는 라이프니츠와 뉴턴이 개발한 미적분학의 기초를 제공했으며, 이들은 접선 문제에 무한소 미적분학을 적용하여 현대 수학의 해당 분야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뉴턴은 데카르트의 삼차 방정식 연구를 이어받아 이 주제를 그리스적 관점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했다. 가장 중요한 개념은 단일 변수에 대한 그의 매우 현대적인 처리 방식이었다. 뉴턴은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를 열렬히 읽었다.
4. 과학적 기여
데카르트는 자연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이성의 사용을 강조한 최초의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그에게 철학은 모든 지식을 포괄하는 사유 체계였으며, 프랑스어 번역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따라서 모든 철학은 나무와 같으며, 형이상학은 뿌리이고, 물리학은 줄기이며, 다른 모든 과학은 이 줄기에서 자라나는 가지들이다. 이 가지들은 의학, 역학, 윤리학의 세 가지 주요 분야로 귀결된다. 윤리학이라는 과학은 다른 과학들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전제로 하는 가장 높고 완벽한 지혜의 마지막 단계이다."
데카르트의 물리학에 대한 관심은 1618년에 만난 아마추어 과학자이자 수학자인 이삭 베이크만 덕분으로 여겨지는데, 베이크만은 기계론적 철학으로 알려진 새로운 사조의 선두에 있었다. 이러한 추론의 토대 위에 데카르트는 기계적 및 기하학적 물리학에 대한 많은 이론을 공식화했다. 그들이 만난 것은 브레다 시장에 게시된 수학 문제 해결을 위한 광고판을 함께 보던 중이었다고 전해진다. 데카르트는 베이크만에게 문제를 네덜란드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만남에서 베이크만은 데카르트를 기계론적 이론에 대한 자신의 미립자적 접근 방식에 관심을 갖게 했고, 그에게 자연에 대한 수학적 접근 방식에 연구를 전념하도록 설득했다. 1628년 베이크만은 또한 그에게 갈릴레오의 많은 아이디어를 소개했다. 그들은 함께 자유 낙하, 현수선, 원추 곡선, 유체 정역학을 연구했다. 둘 다 수학과 물리학을 철저히 연결하는 방법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일'이라는 개념은 1826년에야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유사한 개념은 그 이전에도 존재했다. 1637년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썼다.
"100파운드를 1피트 두 번 들어 올리는 것은 200파운드를 1피트 들어 올리는 것과 같거나, 100파운드를 2피트 들어 올리는 것과 같다."
1644년 《철학의 원리》에서 데카르트는 우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설명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세 가지 운동 법칙을 설명했다. (뉴턴의 운동 법칙은 나중에 데카르트의 설명을 본따 만들어졌다.) 데카르트는 "운동량"(quantitas motus라틴어)을 크기와 속도의 곱으로 정의했으며, 우주 전체의 총 운동량은 보존된다고 주장했다.
"만약 x가 y의 두 배 크기이고 절반 속도로 움직인다면, 각각에 동일한 양의 운동이 있다."
"신은 물질과 그 운동을 창조했다... 단지 사물들이 제 길을 가도록 내버려둠으로써, 그는 처음에 그곳에 두었던 것과 동일한 양의 운동을 보존한다."
데카르트는 운동량 보존 법칙의 초기 형태를 발견했다. 그는 운동량이 갈릴레오가 구상했던 완전한 원형 운동과 달리 직선 운동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데카르트의 발견은 무게나 크기와 구별되는 질량 개념이 없었고, 속도보다는 속력이 보존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현대적인 운동량 보존 법칙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데카르트의 행성 운동에 대한 소용돌이 이론은 나중에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 거부되었으며,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제2권의 대부분은 그의 반론에 할애되었다.
4.1. 광학 및 기상학
데카르트는 광학 분야에도 기여했다. 그는 기하학적 구성과 굴절 법칙(프랑스에서는 데카르트의 법칙으로도 알려져 있다)을 사용하여 무지개의 각 반지름이 42도임을 보였다. 그는 또한 독립적으로 반사의 법칙을 발견했으며, 그의 광학 에세이는 이 법칙을 처음으로 언급한 출판물이었다.
《굴절광학》에서 그는 눈의 해부학적 구조를 설명하며 빛이나 외부 이미지가 동공과 내부 유리체를 거쳐 굴절되고 상이 뒤집혀 망막에 맺히고 시신경을 통해 자극이 전달되는 과정뿐 아니라 눈이 얼마나 상을 최대화하고 또렷하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과정을 현미경과 망원경의 개념에까지 확대시켰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렌즈 깎는 법을 설명하며 망원경과 현미경의 유용성을 언급했다. 데카르트가 빛을 고체 매질에 가해지는 압력으로 본 것은 빛의 파동설로 이어졌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의 부록인 《기상학》(Les Météores프랑스어)에서 자신의 기상학 이론을 논했다. 그는 처음으로 원소들이 불완전하게 결합된 작은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어 그 사이에 작은 공간이 남고, 이 공간들은 더 작고 훨씬 빠른 "미묘한 물질"로 채워진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이 입자들은 구성하는 원소에 따라 달랐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는 물 입자가 "작은 장어처럼 서로 결합하고 뒤틀리지만, 쉽게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묶이거나 걸리지 않는다"고 믿었다. 반대로 더 단단한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들은 불규칙한 모양을 생성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입자의 크기도 중요했다. 입자가 작을수록 더 빠르고 끊임없이 움직일 뿐만 아니라, 느리지만 더 큰 힘을 가진 더 큰 입자들에 의해 더 쉽게 교란되었다. 조합과 모양과 같은 다른 특성들은 온도와 같은 물질의 다른 2차적 특성을 야기했다. 이 첫 번째 아이디어는 데카르트의 나머지 기상학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상학 이론 대부분을 거부했지만, 증기와 발산과 같은 일부 용어는 유지했다. 이러한 "증기"는 태양에 의해 "지상 물질"에서 하늘로 끌어올려져 바람을 생성할 것이라고 보았다. 데카르트는 또한 떨어지는 구름이 그 아래의 공기를 밀어내어 바람을 생성할 수 있다고 이론화했다. 떨어지는 구름은 또한 천둥을 생성할 수 있었다. 그는 구름이 다른 구름 위에 놓여 있고 위쪽 구름 주변의 공기가 뜨거울 때, 위쪽 구름 주변의 증기를 응축시켜 입자들이 떨어지게 한다고 이론화했다. 위쪽 구름에서 떨어지는 입자들이 아래쪽 구름의 입자들과 충돌할 때 천둥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천둥 이론을 눈사태 이론과 비교했다. 데카르트는 눈사태가 만들어내는 굉음이 가열되어 더 무거워진 눈이 아래의 눈 위로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이 이론은 "겨울보다 여름에 천둥이 더 드물게 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때는 가장 높은 구름에 충분한 열이 도달하지 않아 구름을 붕괴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경험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데카르트가 가졌던 또 다른 이론은 번개 생성에 관한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번개가 충돌하는 두 구름 사이에 갇힌 발산에 의해 발생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발산이 번개를 생성할 수 있으려면 뜨겁고 건조한 날씨에 의해 "미세하고 가연성"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구름이 충돌할 때마다 발산이 점화되어 번개를 생성하며, 만약 위쪽 구름이 아래쪽 구름보다 무거우면 천둥도 발생한다고 보았다.
데카르트는 또한 구름이 물방울과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으며, 공기가 더 이상 물방울을 지탱할 수 없을 때 비가 내릴 것이라고 보았다. 공기가 물방울을 녹일 만큼 충분히 따뜻하지 않으면 눈으로 내릴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우박은 구름 방울이 녹았다가 차가운 공기에 의해 다시 얼어붙을 때 발생한다고 보았다.
데카르트는 기상학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학이나 도구(당시에는 없었음)를 사용하지 않고, 가설을 추론하기 위해 질적 추론을 사용했다.
5. 역사적 영향 및 평가
데카르트의 사상은 후대 서양 철학과 과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철학은 근대 사상의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했다. 그의 사상은 근대 철학, 과학, 계몽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지만, 동시에 다양한 비판과 논쟁에 직면하기도 했다.
5.1. 근대 사상에 미친 영향
데카르트는 종종 근대 서양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의 접근 방식은 서양 철학의 흐름을 심오하게 바꾸고 근대성의 기초를 놓았다고 평가된다. 그의 《제1 철학에 관한 성찰》 중 유명한 방법적 회의를 공식화한 처음 두 성찰은 데카르트의 저작 중 가장 현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데카르트 자신은 이러한 혁명적인 변화의 정도를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논의를 "무엇을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논의로 전환함으로써, 데카르트는 진리의 권위 있는 보증인을 신에서 인간으로 옮겼(비록 데카르트 자신은 신으로부터 환상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전통적인 "진실" 개념이 외부 권위를 암시하는 반면, "확실성"은 개인의 판단에 의존한다.
인간 중심주의 혁명에서 인간은 이제 주체, 행위자, 자율적인 이성을 갖춘 해방된 존재의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이는 근대성의 기초를 확립한 혁명적인 단계였으며, 그 여파는 여전히 느껴지고 있다. 즉, 기독교적 계시 진리와 가톨릭교회 교리로부터 인류의 해방, 그리고 인류가 스스로 법을 만들고 스스로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근대에서는 진리의 보증인이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인간이며, 각 개인은 자신의 현실을 "자각적으로 형성하고 보증하는 자"가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각 개인은 신에게 순종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이성적인 성인, 즉 주체이자 행위자가 된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기독교적 중세 시대에서 근대 시대로의 전환을 특징짓는 것이었으며, 다른 분야에서도 예상되었던 것이지만, 데카르트에 의해 철학 분야에서 구체화되었다.
인간 이성을 자율적인 것으로 확립한 데카르트의 이러한 인간 중심적 관점은 계몽주의가 신과 교회로부터 해방되는 기초를 제공했다. 마르틴 하이데거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관점은 이후 모든 인류학의 기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데카르트의 철학적 혁명은 때때로 현대 인간 중심주의와 주관주의를 촉발했다고도 일컬어진다.
5.2. 수용과 비판
상업적인 측면에서 《방법서설》은 데카르트 생전에 단 한 번 500부가 출판되었고, 그 중 200부는 저자를 위해 따로 보관되었다. 《성찰》의 프랑스어판도 비슷한 운명을 겪어 데카르트 사망 시점까지도 완판되지 못했다. 그러나 《성찰》의 라틴어판은 유럽 학계에서 열렬히 찾았고, 데카르트에게 상업적인 성공을 안겨주었다.
데카르트는 생애 말년에 학계에서 잘 알려져 있었지만, 그의 저작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위트레흐트 대학교 의학 교수였던 헨리쿠스 레기우스는 데카르트의 물리학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대학 총장 히스베르투스 부티우스에게 비난을 받았다.
철학 교수 존 코팅엄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제1 철학에 관한 성찰》은 "서양 철학의 핵심 텍스트 중 하나"로 간주된다. 코팅엄은 《성찰》이 "데카르트의 모든 저작 중 가장 널리 연구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이코노미스트의 전 선임 편집자이자 《이성의 꿈》과 《계몽의 꿈》의 저자인 앤서니 고틀립에 따르면, 데카르트와 토머스 홉스가 21세기에도 계속 논의되는 이유 중 하나는 "과학의 발전이 우리 자신과 신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정부는 종교적 다양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와 같은 질문에 대해 그들이 여전히 관련성 있는 답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2018년 타일러 코웬과의 인터뷰에서 애그니스 칼라드는 데카르트의 《성찰》에 나오는 사고 실험을 설명하며, 그가 믿는 모든 것을 완전히, 체계적으로 의심하여 "무엇에 도달하는지"를 보라고 권유했다. 그녀는 "데카르트가 도달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구축할 수 있는 일종의 진정한 진실"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햄릿의 독백("삶과 감정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데카르트의 사고 실험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햄릿/데카르트는 마치 자신의 머리 속에 "갇힌" 것처럼 "세상과 떨어져 있었다." 코웬은 칼라드에게 데카르트가 그의 사고 실험을 통해 실제로 어떤 진실을 발견했는지, 아니면 그것이 단지 "우리가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다는 현대 논증의 초기 버전일 뿐인지" 물었다. 칼라드는 이 논증이 데카르트에게서 비롯되었으며, 데카르트가 이를 반박했다고 동의했다. 그녀는 데카르트의 추론에서 "결국 신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설명했다. 즉, "신이 창조한 우주"가 "진정한 세계"라는 것이다. 전체 질문은 현실과 연결되는 것과 환상에 불과한 것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만약 당신이 신이 창조한 세상에 살고 있다면, 신은 실제 사물을 창조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실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5.3. 논쟁
데카르트의 장미십자회 가입 여부는 논란의 대상이다. 그의 라틴어 이름의 이니셜이 장미십자회 회원들이 널리 사용하던 약어 R.C.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1619년 그가 장미십자회 운동의 유명한 국제적 중심지였던 울름으로 이주했다는 점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더욱이 그는 독일 여행 중 장미십자회 형제단에 가입하겠다는 개인적인 의지를 표명했던 요하네스 파울하버를 만났다.
데카르트는 "세계 시민 폴리비우스의 수학적 보물"이라는 제목의 저작을 "전 세계의 학식 있는 사람들, 특히 독일의 저명한 B.R.C.(장미십자회 형제단)"에게 헌정했다. 이 저작은 미완성이며 출판 여부도 불확실하지만, 장미십자회와의 연관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다. 샤뉘에 따르면 폐렴이었지만, 크리스티나의 주치의 요한 반 불렌에 따르면 흉막염이었다고 한다. 2009년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에베르트는 데카르트가 그의 종교적 견해에 반대했던 가톨릭 선교사 자크 비오귀에게 독살당했다고 주장했다. 에베르트는 증거로 르네 데카르트의 조카딸인 카트린 데카르트가 1693년 자신의 저서 철학자 데카르트의 사망 보고서에서 삼촌이 사망 이틀 전 '성찬'을 받았을 때 독살 행위에 대해 은밀히 언급했다고 제시한다.
데카르트의 것으로 알려진 두개골은 파리의 인류 박물관에 있지만, 2020년 일부 연구에서는 위조품일 수 있다고 확인되었다. 원래 두개골은 스웨덴에서 조각으로 나뉘어 개인 소장가들에게 주어졌으며, 그 조각 중 하나는 1691년 룬드 대학교에 도착하여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6. 저술
데카르트는 그의 생애 동안 다양한 분야에 걸쳐 중요한 저술들을 남겼다. 그의 저작들은 철학, 수학, 과학 등 여러 학문 분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그의 대표작들은 근대 서양 사상의 초석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6.1. 주요 저서


데카르트가 남긴 주요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 1618년: 《음악 개론》(Musicae Compendium라틴어)
- 이 책은 1650년 데카르트 사망 후에 출판되었다.
- 1626년-1628년: 《정신 지도의 규칙》(Regulae ad directionem ingenii라틴어)
- 미완성 저작으로, 1684년 네덜란드어 번역본으로 처음 출판되었고, 원본 라틴어는 1701년 암스테르담에서 사후 출판되었다.
- c. 1630년: 《고체의 원소에 관하여》(De solidorum elementis라틴어)
- 정다면체와 3차원 도형수의 분류에 관한 내용으로, 일부 학자들은 오일러의 다면체 정리를 예견했다고 평가한다. 출판되지 않았으며, 1650년 스톡홀름에 있는 데카르트의 유산에서 발견되었으나 파리로 운송 중 난파되어 센강에 3일간 잠겼다. 1676년 라이프니츠가 필사했으나 이 필사본 또한 분실되었다가 1860년경 하노버에서 재발견되었다.
- 1630년-1631년: 《자연의 빛에 의한 진리 탐구》(La recherche de la vérité par la lumière naturelle프랑스어)
- 미완성 대화록으로, 1701년에 출판되었다.
- 1630년-1633년: 《세계론》(Le Monde프랑스어) 및 《인간론》(L'Homme프랑스어)
- 데카르트의 자연 철학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첫 저작이다. 《인간론》은 1662년 라틴어 번역본으로, 《세계론》은 1664년에 사후 출판되었다.
- 1637년: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프랑스어)
- 《굴절광학》(Dioptrique프랑스어), 《기상학》(Météores프랑스어), 《기하학》(Géométrie프랑스어)을 포함하는 《시론》의 서론이다.
- 1637년: 《기하학》(La Géométrie프랑스어)
- 데카르트의 주요 수학 저작이다.
- 1641년: 《제1 철학에 관한 성찰》(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라틴어)
- '형이상학적 성찰'로도 알려져 있다. 라틴어로 쓰였으며, 이듬해 출판된 제2판에는 추가적인 반론과 답변, 그리고 '디네에게 보내는 편지'가 포함되었다.
- 루이네 공작이 번역한 프랑스어 번역본은 1647년에 출판되었는데, 이는 데카르트의 감독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1644년: 《철학의 원리》(Principia philosophiae라틴어)
- 데카르트가 대학에서 사용되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교과서를 대체하기 위해 의도했던 라틴어 교과서이다. 클로드 피코가 번역하고 데카르트가 감독한 프랑스어 번역본 《철학의 원리》(Principes de philosophie프랑스어)는 1647년에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헌정하는 서문과 함께 출판되었다.
- 1647년: 《어떤 비방문에 대한 주석》(Notae in programma라틴어)
- 데카르트의 한때 제자였던 헨리쿠스 레기우스에 대한 답변이다.
- 1648년: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La description du corps humain프랑스어)
- 1667년 클레르슬리에에 의해 사후 출판되었다.
- 1648년: 《뷔르만과의 대화》(Responsiones Renati Des Cartes...라틴어)
- 1648년 4월 16일 데카르트와 프란스 뷔르만 사이의 질의응답을 기록한 노트이다. 1895년에 재발견되어 1896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 1649년: 《정념론》(Les passions de l'âme프랑스어)
-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헌정되었다.
- 1657년: 《서한집》(Correspondance프랑스어)
- 데카르트의 문학 유언 집행인 클로드 클레르슬리에에 의해 3권(1657년, 1659년, 1667년)으로 출판되었다. 1667년 제3판이 가장 완벽했지만, 클레르슬리에는 수학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생략했다.
2010년 1월,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데카르트의 편지(1641년 5월 27일자)가 네덜란드 철학자 에릭-얀 보스에 의해 구글 검색 중 발견되었다. 보스는 하버퍼드 칼리지에 보관된 자필 문서 요약에서 이 편지가 언급된 것을 발견했다. 대학 측은 이 편지가 한 번도 출판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는 지난 25년간 발견된 데카르트의 세 번째 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