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루시아 메이 해리스(Lusia Mae Harris영어, 1955년 2월 10일 ~ 2022년 1월 18일)는 미국의 선구적인 농구 선수이자 여성 농구의 개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델타 주립 대학교에서 뛰면서 AIAW 전국 선수권 대회에서 1975년부터 1977년까지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으며, 국제적으로는 미국 여자 농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1975년 팬아메리칸 게임에서 금메달을,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여성 농구 토너먼트 사상 최초의 득점을 기록하며 은메달을 획득했다.
해리스는 NBA 역사상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드래프트된 여성 선수로, 1977년 뉴올리언스 재즈에 의해 지명되었다. 이후 WBL의 휴스턴 엔젤스에서 짧은 프로 경력을 쌓았다. 그녀의 뛰어난 업적을 인정받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과 여자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특히 1992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최초로 농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그녀의 삶과 경력은 2022년 아카데미상 단편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수상한 영화 《농구의 여왕》(The Queen of Basketball)을 통해 재조명되었다. 루시아 해리스는 스포츠 분야에서 성평등과 인종 평등의 중요한 상징이자, 미래 세대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로서 깊은 유산을 남겼다.
2. 생애 초반 및 교육
루시아 메이 해리스는 1955년 2월 10일 미시시피주 민터 시티에서 에델 해리스와 목화 농장에서 소작농으로 일하던 윌리 해리스의 11남매 중 10번째이자 5녀 중 4번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모든 형제들과 언니 재니 또한 농구를 즐겼다. 루시아를 포함한 모든 형제자매는 미시시피주 그린우드 근처의 아만다 엘지 고등학교에 다녔다.
고등학교에서 해리스는 콘웨이 스튜어트 코치의 지도로 농구를 했으며, 3년 연속 최우수 선수(MVP) 상을 수상하고 팀의 주장을 맡았으며 주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그녀는 한 경기에서 학교 기록인 46점을 득점하며 학교를 잭슨에서 열린 주 토너먼트로 이끌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해리스는 여자 농구팀이 없던 앨콘 주립 대학교에 진학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멜빈 헴필드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 미시시피주 클리블랜드에 위치한 델타 주립 대학교에서 마거릿 웨이드 코치가 재건하고 있던 여자 대학 농구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녀는 당시 성차별 금지법이 시행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학업 장학금과 근로 장학금을 조합하여 학비를 충당했다.

3. 대학 경력
델타 주립 대학교에서 루시아 해리스는 레이디 스테이츠멘 농구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팀을 AIAW 전국 선수권 대회에서 세 차례 우승으로 이끌고 개인적으로도 다수의 영예를 안았다.
1973-74 시즌, 델타 주립 대학교에서의 첫해에 해리스는 레이디 스테이츠멘이 16승 2패의 기록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으나, 지역 토너먼트에서 3위에 머물러 전국 토너먼트 진출에는 실패했다.
1974-75 시즌, 레이디 스테이츠멘은 버지니아주 해리슨버그에서 열린 전국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 그들은 직전 세 차례의 AIAW 챔피언십을 우승한 임마쿨라타 대학교의 마이티 맥스와 맞붙었다. 이 결승전에서 해리스는 32득점 1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델타 주립 대학교를 90-81 승리로 이끌었다. 1975년 챔피언십 경기는 전국적으로 방영되었으며, 이는 주요 네트워크에서 여성 농구 경기가 전국적으로 방영된 첫 해였다. 그 시즌 델타 주립 대학교는 28승 0패로 무패 기록을 달성했는데, 이는 그 해 대학 농구(남성 또는 여성)에서 유일한 무패 시즌이었다. 해리스는 전국 토너먼트 4경기에서 총 138득점 63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토너먼트 MVP로 선정되었다.
1975-76 시즌, 델타 주립 대학교와 임마쿨라타 대학교는 전국 토너먼트 결승에서 다시 맞붙었다. 해리스는 다시 30득점 18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델타 주립 대학교의 69-64 승리를 이끌었다。 그 시즌 그녀는 테네시 테크 골든 이글스 여자 농구팀을 상대로 58점 경기를 포함하여 1,060득점, 경기당 31.2득점을 기록하며 전국 득점 1위를 차지했다.
대학 4학년인 1976-77 시즌, 델타 주립 대학교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경기를 가졌는데, 해리스는 이 경기에서 47점을 득점했다. 이는 그곳에서 열린 최초의 여자 농구 경기 중 하나였다. 1977년, 델타 주립 대학교는 3년 연속 전국 토너먼트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 해리스는 23득점 1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델타 주립 대학교가 루이지애나 주립 대학교를 68-55로 꺾고 세 번째 연속 전국 타이틀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
해리스는 전국 토너먼트 MVP로 선정되었으며, 델타 주립 대학교의 세 번의 우승 시즌 동안 올아메리칸 퍼스트 팀에 이름을 올렸다. 그녀의 대학 경력 기록은 109승 6패였으며, 임마쿨라타 대학교, 테네시 대학교 레이디 볼룬티어스 농구팀, 베일러 대학교 베어스 여자 농구팀, 미시시피 대학교, 루이지애나 주립 대학교, 루이지애나 테크 대학교와 같은 NCAA 디비전 I 강팀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해리스는 대학 경력을 2,981득점 1,662리바운드, 평균 25.9득점 14.5리바운드로 마쳤으며, 델타 주립 대학교의 팀, 단일 경기, 경력 기록 18개 중 15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1977년에는 농구 부문 초대 혼다 스포츠 어워드와 대학 여성 선수에게 수여되는 브로데릭 컵을 수상했다. 그녀는 델타 주립 대학교 팀에서 유일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였다.

3.1. 델타 주립 대학교 통계
GP | 출전 경기 수 | GS | 선발 출전 경기 수 | MPG | 경기당 출전 시간 |
FG% | 필드골 성공률 | 3P% | 3점 슛 성공률 | FT% | 자유투 성공률 |
RPG | 경기당 리바운드 수 | APG | 경기당 어시스트 수 | SPG | 경기당 스틸 수 |
BPG | 경기당 블록 수 | PPG | 경기당 득점 | 굵게 | 개인 최고 기록 |
년도 | 팀 | GP | 득점 | FG% | FT% | RPG | PPG |
---|---|---|---|---|---|---|---|
1974 | 델타 주립 | 자료 없음 | |||||
1975 | 델타 주립 | 자료 없음 | |||||
1976 | 델타 주립 | 34 | 1060 | 61.9% | 자료 없음 | 15.1 | 31.2 |
1977 | 델타 주립 | 자료 없음 | |||||
종합 | 115 | 2981 | 63.3% | 66.3% | 14.5 | 25.9 |
4. 국가대표 경력
1975년, 해리스는 콜롬비아에서 열린 FIBA 세계 여자 선수권 대회와 멕시코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1975년 팬아메리칸 게임의 미국 여자 농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스타 낸시 리버먼과 대학 스타 앤 마이어스, 팻 서밋 (당시 팻 헤드)과 팀을 이루었다. FIBA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미국은 4승 3패의 기록으로 8위에 머물렀다. 반면, 팬아메리칸 게임에서 미국팀은 7경기 무패를 기록하며 금메달을 획득했는데, 이는 1963년 이후 첫 금메달이었다. 이 대회에서 미국팀은 경기당 평균 86.7점을 득점하며 평균 34.4점의 승리 마진을 기록했다.
이듬해 해리스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1976년 하계 올림픽에 미국을 대표하여 출전했다. 이 대회는 올림픽 역사상 최초의 여자 농구 토너먼트였다. 그녀는 올림픽 저지 7번을 사용했다. 그녀는 1975년 팬아메리칸 게임에서 함께 뛰었던 리버먼, 마이어스, 헤드 등 대부분의 팀 동료들과 다시 한 팀이 되었다. 일본 여자 농구 국가대표팀과의 개막전에서 해리스는 여자 올림픽 농구 토너먼트 역사상 최초의 득점을 기록했다. 미국팀은 3승 2패의 기록을 세웠으며, 일본 여자 농구 국가대표팀과 소련 여자 농구 국가대표팀에 패배했다. 소련팀은 무패로 금메달을 획득했고, 미국팀은 은메달을 차지했다. 해리스는 5경기 모두 출전했으며, 경기당 평균 15.2득점 7.0리바운드를 기록했다.
5. 프로 경력
1977년 NBA 드래프트 7라운드에서 뉴올리언스 재즈는 전체 137번째 픽으로 루시아 해리스를 지명했다. 그녀는 1969년 드래프트에서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에 의해 지명되었던 데니스 롱에 이어 NBA 팀에 드래프트된 역사상 두 번째 여성이었다. 그러나 리그가 워리어스의 데니스 롱 지명을 무효화했기 때문에, 루시아 해리스는 NBA에서 공식적으로 드래프트된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선수가 되었다.
해리스는 NBA에서 뛰는 것에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고 재즈의 훈련 캠프에 참가하는 것을 거절했다. 나중에 그녀가 당시 임신 중이어서 재즈의 훈련 캠프에 참석할 수 없었음이 밝혀졌다. 그녀는 털리도 대학교의 데이브 스파이처를 포함한 33명의 남성 선수보다 앞서 지명되었다.
해리스는 NBA나 다른 남자 농구 리그에서 실제로 뛰지는 않았지만, 1979-80 시즌에 WBL의 휴스턴 엔젤스에서 짧게 프로 농구 경력을 쌓았다. 그녀는 1978년 WBL의 창립 시즌에 엔젤스에 의해 넘버원 자유 계약 선수로 처음 지명되었다.
6. 선수 은퇴 후 경력 및 개인 생활
해리스는 1977년 델타 주립 대학교에서 건강, 체육 교육, 레크리에이션 분야 학사 학위를 취득하며 졸업했다. 졸업 후 그녀는 델타 주립 대학교에서 입학 상담사이자 농구 보조 코치로 일했다. 1984년에는 델타 주립 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델타 주립 대학교에서 보조 코치직을 떠난 후, 그녀는 텍사스 서던 대학교에서 2년 동안 헤드 코치로 재직했다. 이후 그녀는 고향인 미시시피주로 돌아와 그린우드의 모교 아만다 엘지 고등학교와 그린빌 공립학교 학군, 룰빌 중앙 고등학교에서 고등학교 교사이자 코치로 일했다.
해리스는 1977년 2월 4일 조지 E. 스튜어트와 결혼했다. 그들은 두 아들과 쌍둥이 딸을 포함한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녀는 델타 시그마 세타 여성 사교 클럽의 회원이기도 했다.
7. 사망
루시아 해리스는 2022년 1월 18일, 66세의 나이로 미시시피주 마운드 바이유에 위치한 치료 시설에서 사망했다.
8. 유산과 평가
루시아 해리스는 농구와 여성 스포츠 분야에 지대한 공헌과 영향력을 미치며 스포츠 역사에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8.1. 수상 및 영예
델타 주립 대학교에 대한 그녀의 업적과 공헌을 기려, 해리스는 1983년 델타 주립 대학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92년에는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이 되었다. 1999년, 해리스는 대학 코치였던 마거릿 웨이드, 그리고 국가대표팀 동료였던 낸시 리버먼, 앤 마이어스, 팻 서밋과 함께 여자 농구 명예의 전당의 초대 헌액자 26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그녀는 또한 국제 여성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8.2. 문화적 영향
해리스의 삶을 다룬 영화 《농구의 여왕》(The Queen of Basketball영어)은 2022년 아카데미상 단편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수상했다. 이 영화는 캐나다 영화 제작자 벤 프라우드풋이 제작 및 감독했으며, 샤킬 오닐과 스테판 커리가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이 영화는 그녀의 사망 7개월 전인 2021년 6월 10일에 개봉되었다.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루시아 해리스의 이야기는 대중적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녀의 삶은 스포츠와 사회 전반에 걸쳐 미래 세대에게 영감을 주는 중요한 문화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