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과 축구 입문
로비 얼은 1965년 1월 27일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태퍼드셔주 롱턴의 롱턴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81년부터 스토크 시티의 유소년 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다리 골절 부상을 당한 후, 스토크 시티에서 방출되었다.
이후 그는 스토크 시티의 지역 라이벌인 포트 베일의 눈에 띄어 영입되었다. 그는 1982년 포트 베일에서 프로 선수로 데뷔하며 본격적인 축구 경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포트 베일은 잉글랜드 축구 리그에서 그의 첫 프로팀이 되었다.
2. 클럽 경력
로비 얼은 포트 베일과 윔블던에서 각각 9년간 활동하며 선수 경력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는 두 클럽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2.1. 포트 베일
얼은 1982년 8월 28일 스윈던 타운과의 경기에서 존 맥그래스 감독 아래 포트 베일에서 프로 데뷔를 치렀다. 다음 경기인 올더숏과의 경기에서 첫 골을 기록하며 팀의 4대1 승리를 이끌었다. 1982-83 시즌에 그는 9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으며, 팀은 풋볼 리그 4부 디비전에서 승격했다. 1983-84 시즌에는 13경기에 출전했으나, 12월에 존 러지 감독이 부임했음에도 불구하고 팀은 다시 풋볼 리그 3부 디비전으로 강등되었다.
1984년 8월부터 주전 선수로 자리 잡은 얼은 1984-85 시즌에 56경기에 출전하여 19골을 기록했는데, 여기에는 2월 2일 헤리퍼드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기록한 해트트릭이 포함된다. 그는 앨리스터 브라운과 함께 총 40골을 합작했다. 1985-86 시즌 4부 디비전 승격 당시 전 경기 출전 기록을 세우며 58경기에서 17골을 넣었고, 앤디 존스와의 공격 조합으로 총 35골을 기록했다.
그는 1984년 9월부터 1987년 1월까지 142경기 연속 출전 기록을 세웠으나, 사타구니 부상으로 인해 이 기록은 중단되었다. 이 부상으로 1987년 가을에는 탈장 수술을 받았지만, 1988년 1월에 다시 1군으로 복귀했다. 1986-87 시즌에는 35경기에서 7골, 1987-88 시즌에는 11경기에서 4골을 기록했다. 1987-88 시즌 FA컵에서 포트 베일이 토트넘 홋스퍼를 꺾는 이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1988-89 시즌에는 주전 선수로 활약했으며, 러지 감독은 얼과 레이 워커의 미드필더 조합을 포트 베일 역사상 최고의 조합 중 하나로 평가했다. 그는 브리스톨 로버스와의 1989년 풋볼 리그 3부 디비전 플레이오프 결승전 2차전에서 두 골을 모두 기록하며 포트 베일을 풋볼 리그 2부 디비전으로 승격시켰다. 이 경기가 끝난 후 그는 감격에 겨워 터널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1988-89 시즌 동안 그는 57경기에 출전하여 19골을 기록했다.
1989-90 시즌에는 52경기에 출전하여 12골을 기록했는데, 9월 23일 스토크 시티와의 경기에서 1대1 무승부를 기록할 당시 골을 넣기도 했다. 1990-91 시즌에도 핵심 선수로 남아 37경기에 출전하여 11골을 기록했다. '검은 진주'라는 애칭으로 불린 얼은 포트 베일에서 총 357경기에 출전하여 90골을 기록하며 클럽의 '컬트 영웅'으로 평가받았고, 클럽 역사상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1991년 7월, 그는 77.50 만 GBP의 이적료(및 향후 이적료의 30%)로 윔블던으로 이적했다. 윔블던의 회장 샘 하맘이 이적 협상 중 얼을 방에 가두고 그가 윔블던으로 이적하는 데 동의할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클럽 | 시즌 | 디비전 | 리그 | FA컵 | 기타 | 총합 | ||||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
포트 베일 | 1982-83 | 풋볼 리그 4부 디비전 | 8 | 1 | 0 | 0 | 1 | 0 | 9 | 1 |
1983-84 | 풋볼 리그 3부 디비전 | 12 | 0 | 0 | 0 | 2 | 0 | 14 | 0 | |
1984-85 | 4부 디비전 | 46 | 15 | 3 | 1 | 7 | 3 | 56 | 19 | |
1985-86 | 4부 디비전 | 46 | 15 | 4 | 1 | 8 | 1 | 58 | 17 | |
1986-87 | 3부 디비전 | 35 | 6 | 2 | 1 | 7 | 0 | 44 | 7 | |
1987-88 | 3부 디비전 | 25 | 4 | 4 | 0 | 1 | 0 | 30 | 4 | |
1988-89 | 3부 디비전 | 44 | 13 | 3 | 1 | 10 | 5 | 57 | 19 | |
1989-90 | 풋볼 리그 2부 디비전 | 43 | 12 | 3 | 0 | 6 | 0 | 49 | 12 | |
1990-91 | 2부 디비전 | 35 | 11 | 2 | 0 | 0 | 0 | 37 | 11 | |
총합 | 294 | 77 | 21 | 4 | 42 | 9 | 357 | 90 |
2.2. 윔블던
윔블던으로 이적한 얼은 1990년대 남런던 클럽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팀워크를 다지고 상대 선수를 위협하는 클럽의 'Crazy Gang크레이지 갱영어' 정신의 핵심 일원이었다. 그는 에이든 뉴하우스, 존 파샤누, 비니 존스, 로리 산체스, 제이슨 유엘, 딘 홀즈워스, 마커스 게일, 앤디 클라크, 에판 에코쿠와 같은 상징적인 선수들과 함께 뛰었다. 얼은 페널티 박스 안으로 뒤늦게 침투하는 능력, 득점력, 그리고 헤딩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윔블던에서의 첫 시즌인 1991-92 시즌은 파란만장했는데, 레이 하포드 감독이 피터 위드로 교체된 후 다시 조 키니어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은 14골을 기록하며 팀이 1부 리그 잔류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1992-93 시즌에는 새롭게 출범한 프리미어 리그에서 7골을 기록했는데, 여기에는 안필드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3대2 승리를 거둔 경기에서 기록한 두 골이 포함된다. 1993-94 시즌에는 9골을 기록하며 윔블던이 클럽 역사상 최고 기록인 리그 6위로 시즌을 마치는 데 일조했다.
1994-95 시즌에는 부상으로 인해 9경기 무득점에 그쳤지만 (팀은 여전히 9위를 기록), 다음 시즌인 1995-96 시즌에는 다시 건강을 회복했다. 그는 클럽의 주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1골을 기록하여 윔블던이 리그 15위로 잔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시즌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토트넘 홋스퍼, 첼시, 아스널, 맨체스터 시티, 블랙번 로버스, 볼턴 원더러스를 상대로 득점을 기록했다.
1996-97 시즌 그의 주장 아래 윔블던은 FA컵과 리그컵 모두 준결승전에 진출했지만, 각각 우승팀인 첼시와 레스터 시티에게 패했다. 1997년 2월, 그는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1997-98 시즌에도 클럽은 강등을 피하며 잔류했지만, 12월의 4위에서 시즌 종료 시점에는 15위로 떨어졌다. 1998-99 시즌에는 모든 대회에서 7골을 기록하며 윔블던이 다시 리그컵 준결승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지만, 프리미어 리그 강등권에서 겨우 두 단계, 6점 차이로 앞서며 시즌을 마쳤다. 이후 에길 올센 신임 감독 체제에서 윔블던은 고전했고, 1999-2000 시즌 마지막 날 사우샘프턴에 0대2로 패하며 강등되었다.
2000년 윔블던 리저브팀 경기 도중 얼은 복부에 강한 충격을 받고 췌장이 파열되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그는 이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겪었고, 체중이 25.4 kg이나 감소했으며, 불규칙한 호흡을 보였다. 그는 이러한 극심한 고통 때문에 '죽음이 차라리 나은 선택이라고 여길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35세의 나이에 그는 2000년 11월 선수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은퇴는 '크레이지 갱' 시대의 종말과도 일치했다. 윔블던 선수로 9년간 활약하며 그는 244번의 리그 경기에 출전하여 59골을 기록했다. 클럽 생활 막바지에는 리저브팀 코칭도 시작했다.
클럽 | 시즌 | 디비전 | 리그 | FA컵 | 기타 | 총합 | ||||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
윔블던 | 1991-92 | 풋볼 리그 1부 디비전 | 40 | 14 | 2 | 0 | 3 | 1 | 45 | 15 |
1992-93 | 프리미어 리그 | 42 | 7 | 5 | 1 | 4 | 0 | 51 | 8 | |
1993-94 | 프리미어 리그 | 42 | 9 | 3 | 0 | 6 | 3 | 51 | 12 | |
1994-95 | 프리미어 리그 | 9 | 0 | 4 | 1 | 0 | 0 | 13 | 1 | |
1995-96 | 프리미어 리그 | 37 | 11 | 7 | 1 | 2 | 2 | 46 | 14 | |
1996-97 | 프리미어 리그 | 32 | 7 | 7 | 4 | 6 | 0 | 45 | 11 | |
1997-98 | 프리미어 리그 | 22 | 3 | 3 | 0 | 1 | 0 | 26 | 3 | |
1998-99 | 프리미어 리그 | 35 | 5 | 3 | 1 | 5 | 1 | 43 | 7 | |
1999-00 | 프리미어 리그 | 25 | 3 | 1 | 0 | 4 | 2 | 30 | 5 | |
총합 | 284 | 59 | 35 | 8 | 31 | 9 | 350 | 76 | ||
커리어 총합 | 578 | 136 | 56 | 12 | 73 | 18 | 707 | 166 |
3. 국가대표 경력
잉글랜드에서 태어났지만, 로비 얼은 자메이카 혈통의 부모 덕분에 자메이카 국가대표로 뛸 자격이 있었다. 그는 한때 잉글랜드 국가대표에 소집되기를 바랐으나, 32세가 되어서야 자메이카의 부름을 받아들였다. 얼은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자메이카 국가대표로 8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다.
그는 1998년 프랑스에서 열린 1998 FIFA 월드컵에 참가하여 H조의 세 경기 모두에 출전했다. 특히, 렌스의 스타드 펠릭스 볼라르에서 열린 크로아티아와의 경기(1대3 패배)에서 자메이카 역사상 최초의 FIFA 월드컵 본선 득점을 기록하며 이정표를 세웠다. 자메이카는 또한 파르크 데 프랭스에서 아르헨티나에 0대5로 패했지만, 스타드 드 제를랑에서 일본을 상대로 2대1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전 | 득점 |
---|---|---|---|
자메이카 | 1997 | 4 | 0 |
1998 | 4 | 1 | |
총합 | 8 | 1 |
No. | 날짜 | 장소 | 상대팀 | 스코어 | 결과 | 대회 |
---|---|---|---|---|---|---|
1 | 1998년 6월 14일 | 스타드 펠릭스 볼라르, 렌스, 프랑스 | 크로아티아 | 1-1 | 1-3 | 1998 FIFA 월드컵 |
4. 플레이 스타일
로비 얼은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그는 페널티 박스 안으로 뒤늦게 침투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정확한 슈팅으로 득점을 마무리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민첩한 헤딩 능력으로 공중볼 경합에서도 강점을 보였다. 이러한 다재다능한 능력 덕분에 그는 팀의 공격 전개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5. 선수 은퇴 후 경력
로비 얼은 프로 축구 선수 생활을 마친 후에도 축구계와 깊이 연결되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주로 미디어 분야에서 축구 해설가 및 저널리스트로 활약하며 축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대중에게 전달했다.
5.1. 미디어 활동 및 저널리즘
선수 은퇴 후, 얼은 스포츠 저널리즘 분야로 진출했다. 그는 캐피털 라디오, BBC 라디오 5 라이브, BBC 스포츠, ESPN, ITV, 스카이 스포츠, 온디지털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했다. 얼은 ITV의 축구 중계에서 정기적인 축구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World Football Daily월드 풋볼 데일리영어'에도 출연했다. 또한 'PressPass프레스패스영어'에서는 가끔 팀에 합류하기도 했다. 그는 런던의 '이브닝 스탠더드'(Evening Standard이브닝 스탠더드영어)와 스토크온트렌트의 '이브닝 센티넬'(The Sentinel더 센티넬영어)에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2005년에는 BBC의 '아프리카 라이브스' 시즌의 일환으로 'Strictly African Dancing스트릭틀리 아프리칸 댄싱영어'에 참여하여 33점을 얻어 우승했다. 2007년에는 '마스터셰프'(MasterChef마스터셰프영어)에도 출연했다.
2011년 3월부터는 미국 메이저 리그 사커의 포틀랜드 팀버스에서 방송 분석가로 활동했다. 2013년에는 NBC 스포츠의 프리미어 리그 중계에서 선임 스튜디오 분석가 중 한 명으로 합류했으며, '매치 오브 더 데이'(Match of the Day매치 오브 더 데이영어)와 'Premier League Download프리미어 리그 다운로드영어' 프로그램의 공동 해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5.2. FIFA 월드컵 티켓 사건
2010년 6월, 얼은 FIFA 월드컵 티켓을 제3자에게 넘겨주어 ITV와의 15.00 만 GBP 상당의 연간 계약이 취소되는 사건을 겪었다. 이 티켓은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것이었으나, 그는 이 티켓을 한 친구에게 넘겼고, 그 친구는 이 티켓을 바바리아 맥주 회사에 판매했다. 이 맥주 회사는 FIFA 규정을 위반하는 앰부시 마케팅 이벤트를 기획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잉글랜드의 2018년 월드컵 유치 대사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얼은 자신의 행동을 "순진했다"고 표현하며 "어떤 식으로든 이득을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ITV는 얼에게 결승전 티켓 40장을 포함하여 총 400장의 월드컵 무료 티켓을 제공했으며, 이 티켓의 정가는 약 7.00 만 GBP에 달했다. 티켓 판매가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얼은 자신의 '가까운 친구'가 상당수의 티켓을 네덜란드 회사에 팔 줄은 몰랐다고 진술했다.
5.3. 기타 활동
얼은 2004년에 '인종차별 반대 카드 보여주기(Show Racism the Red Card)'(Show Racism the Red Card쇼 레이시즘 더 레드 카드영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또한 그는 헌혈 캠페인을 홍보하는 텔레비전 광고에도 출연하여 사회 공헌 활동을 이어갔다.
6. 개인 생활
로비 얼은 스토크온트렌트 롱턴에 위치한 롱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영국 잡지 '베지테리언 소사이어티'에 따르면 그는 채식주의자이다.
그는 1989년 여름에 결혼했다. 그의 아들 오티스 얼 또한 축구 선수이며, 2015년 MLS 슈퍼드래프트에서 FC 댈러스에 지명되었다.
7. 수상 및 영예
로비 얼은 선수 경력과 은퇴 후 활동 기간 동안 다양한 개인 및 팀 수상과 영예를 받았다.
- 1999년 축구에 대한 공헌으로 대영 제국 훈장 MBE를 수훈했다.
- 2007년 포트 베일의 PFA 팬스 페이보릿 선수로 선정되었다.
- 2009년에는 '풋볼 파운데이션 커뮤니티 챔피언'으로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2018년 5월에는 스토크온트렌트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2019년 5월에는 'OneValeFan원 베일 팬영어' 서포터즈 웹사이트 회원들에 의해 "궁극의 포트 베일 XI"에 선정되었다.
포트 베일
- 풋볼 리그 4부 디비전 3위 승격: 1982-83
- 풋볼 리그 4부 디비전 4위 승격: 1985-86
- 풋볼 리그 3부 디비전 플레이오프 우승: 1989
개인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상: 1997년 2월
- PFA 팬스 페이보릿 선수 (포트 베일): 2007년
8. 유산 및 평가
로비 얼은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오랜 기간 동안 두 주요 클럽인 포트 베일과 윔블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컬트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 포트 베일에서는 여러 차례의 승격을 이끌며 클럽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윔블던에서는 'Crazy Gang크레이지 갱영어'의 정신을 구현하며 팀의 프리미어 리그 잔류와 FA컵 및 리그컵 준결승 진출에 기여했다.
국가대표팀 경력에서는 잉글랜드 태생임에도 불구하고 자메이카를 선택하여 1998 FIFA 월드컵 본선에서 자메이카의 첫 월드컵 골을 기록하며 국가적인 영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이 골은 자메이카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순간으로 평가받는다.
선수 은퇴 후에는 스포츠 저널리즘 분야로 성공적으로 전환하여 ITV, NBC 스포츠 등 주요 방송사의 해설가로 활동하며 축구 팬들에게 그의 지식과 통찰력을 전달했다. 비록 2010년 월드컵 티켓 사건으로 한 차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는 다시 성공적으로 복귀하여 현재까지 활발한 미디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인종차별 반대 운동 참여와 헌혈 캠페인 홍보 등 사회 공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축구계 안팎에서 다방면으로 기여한 인물로 평가되며, 그의 유산은 선수로서의 뛰어난 활약뿐만 아니라 축구 해설가, 그리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까지 아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