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레지 파크스는 1934년 8월 27일 캐나다 앨버타주 에드먼턴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도시 외곽의 농장에서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에는 아이스 하키를 즐겼으나 가족이 도심으로 이주하면서 그만두었다. 13세부터 역도를 시작했으며, 곧이어 프로레슬링 쇼의 티켓 안내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열렬한 레슬링 팬으로서 조지 스캇과 샌디 스캇 형제, 그리고 타이니 밀스를 존경했다.
2. 프로레슬링 경력
레지 파크스는 스튜 하트의 지도를 받아 레슬링 경력을 시작했으며, 미국 전역의 다양한 프로레슬링 단체에서 활동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페르소나를 구축했다. 또한 일본과 한국을 포함한 해외 투어를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으며, 말년에는 '디 어벤저'라는 복면 레슬러로도 활약했다.
2.1. 초기 경력 및 훈련
레지 파크스는 에드먼턴의 한 복싱 클럽에서 훈련을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스탬피드 레슬링 프로모터인 스튜 하트를 1955년에 만났다. 하트는 파크스를 훈련시키고 미국 내 다양한 레슬링 지역에 그를 소개하며, 시애틀, 로스앤젤레스, 텍사스주 전역에서 레슬링 활동을 펼치게 했다. 초기 경력에는 순회 서커스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는데, 이곳에서는 관중 도전자들과 대본 없는 실제 경기를 치르며 자신의 스태미나와 컨디셔닝 능력에 의존하여 상대를 제압했다.
2.2. 주요 단체 및 활동 지역
1950년대 후반부터 레지 파크스는 캘거리, 밴쿠버, 오리건주 포틀랜드 등 태평양 연안 북서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1960년부터는 미국 본토로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1961년 8월 8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엔리케 토레스와 팀을 이루어 해당 지역의 NWA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이후 프리츠 폰 에릭, 프레드 블래시, 번 가냐, 닉 보크윙클과 같은 강자들과 여러 지역에서 대결했다.
1963년부터 1973년까지는 AWA에 주로 소속되어 활동했으며, 네브래스카주에서도 경기에 출전했다. 그는 인상적인 신체와 힘의 과시로 유명해졌으며, "조용한 슈퍼맨"으로 불렸다. 한때는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복부 위로 폭스바겐 비틀이 지나가게 하는 시연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레그 올리버에 따르면, 파크스는 전성기 때 키가 0.2 m (6 in)에 몸무게가 102 kg (225 lb)에서 104 kg (230 lb)에 달했으며, 0.4 m (17 in)의 이두박근과 1.3 m (50 in)의 가슴둘레를 자랑했다.
1965년 10월 16일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대니 호지와 팀을 이뤄 매드독 바숑과 하울 사사키로부터 네브래스카 태그팀 챔피언십을 빼앗았다. 이후 AWA 미드웨스트 지역을 주 활동 무대로 삼아, 1966년 3월에는 팀 우즈와 팀을 이뤄 사사키와 미츠 아라카와를 꺾고 네브래스카 태그팀 챔피언십의 후계 타이틀인 AWA 미드웨스트 태그팀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그는 이 타이틀을 여러 번 더 차지했다. 1968년에는 조 블랜처드의 텍사스 지역에서 활동할 때 더스티 로즈의 데뷔전 상대로 나섰다.
1976년 1월부터는 더 펑크스가 주최하는 아마릴로 지역에 참전했다. 5월 12일 스콧 케이시와 팀을 이뤄 보비 재거스와 랜디 타일러로부터 NWA 웨스턴 스테이츠 태그팀 챔피언십을 탈환했다. 1977년 2월 12일에는 조니 위버를 꺾고 텍사스 서부 버전의 NWA 인터내셔널 헤비급 챔피언십을 획득했으며, 다음 달 사이클론 네그로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이 타이틀을 보유했다. 그는 경력의 대부분을 팬들에게 친근한 선역으로 활동했는데, 자신의 호감 가는 성격이 캐나다에서의 성장 배경 덕분이라고 말했다.
2.3. 해외 투어
레지 파크스는 두 차례 일본 투어에 참여했다. 첫 번째는 1970년 7월 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안토니오 이노키, 오키 긴타로, 사카구치 세이지, 다카치호 아키히사와 싱글 매치를 치렀다. 또한 브루트 버나드나 무스 쇼락의 파트너가 되어 자이언트 바바와 이노키의 BI포와도 대결했다. 일본 시리즈가 끝난 후에는 대한민국 원정에도 참여하여, 8월 8일 서울에서 오키 긴타로가 보유하고 있던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십에 도전하기도 했다.
두 번째 일본 투어는 1974년 5월 AWA의 섭외로 국제 프로레슬링 소속으로 이루어졌다. 이 투어에서는 그레이트 구사츠, 러셔 키무라, 마이티 이노우에, 애니멀 하마구치 등과 싱글 매치를 가졌다.
2.4. 디 어벤저 페르소나 및 말년 경력
1979년 10월부터 레지 파크스는 캔자스주 지역(하트 오브 아메리카 스포츠 어트랙션스)에서 '디 어벤저'(The Avenger영어)라는 복면 레슬러로 변신하여 활동했다. 같은 해 11월 22일에는 터키인 기믹의 '더 터크'로부터 NWA 센트럴 스테이츠 헤비급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이듬해인 1980년에는 디 어쌔신과 해당 타이틀을 놓고 복면 레슬러 간의 대립을 펼쳤다.
경력 말기인 1981년에는 플로리다 지역의 언더카드 경기에 출전했다. 1982년 7월 18일에는 고향인 에드먼턴에서 열린 스탬피드 레슬링 흥행에서 배드 뉴스 앨런과 대결했다. 이 경기를 끝으로 현역에서 사실상 은퇴했으나, 등 부상으로 심판으로 활동하다가 1999년 뉴멕시코주에서 호세 로타리오와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은퇴 후에도 WWF의 하우스 쇼나 TV 쇼에 가끔 출연하여 더 문독스나 부치 리드의 잡버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2.5. 주요 기술
레지 파크스가 사용했던 주요 레슬링 기술은 다음과 같다.
- 에어플레인 스핀(Airplane Spin영어)
- 스탠딩 클러치(Standing Clutch영어)
3. 챔피언십 벨트 디자인 경력
레지 파크스는 프로레슬러로서의 명성 외에도, 챔피언십 벨트 디자이너이자 제작자로서 매우 영향력 있는 업적을 남겼다. 그는 "벨트의 왕"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WWE의 상징적인 벨트를 비롯해 다양한 단체 및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그의 장인정신을 널리 알렸다.

3.1. 벨트 제작의 시작
레지 파크스는 1962년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활동하던 중 벨트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당시 프로모터 조 듀섹이 챔피언십을 상징하는 거대한 트로피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트로피가 망가지는 것을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도금된 구리와 가죽 끈을 사용하여 대체 벨트를 만들었는데, 제작 비용은 약 75 USD 정도로 추정된다.
그의 솜씨를 알아본 AWA의 태그팀 챔피언인 할리 레이스와 래리 헤닝이 그에게 챔피언십 벨트 제작을 의뢰했다. 또한 일본 프로레슬링 단체들의 투어를 통해 그의 벨트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그의 벨트 제작 사업은 크게 확장되었다.
3.2. 주요 디자인 및 협업
레지 파크스는 WWE, NWA, WCW, AWA, 쉬머 위민 애슬리츠 등 다양한 단체의 챔피언십 벨트를 디자인하고 새긴 것으로 유명하다. WWE는 그의 벨트 디자인을 가장 유명한 디자인 중 일부로 묘사했으며, 그의 디자인 작업으로 "벨트의 왕"(the King of Belts영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WWF 챔피언십을 상징하는 '윙드 이글' 벨트와 같은 시대의 WWF 인터컨티넨탈 헤비급 챔피언십 벨트이다.
그의 벨트는 다른 레슬링 단체뿐만 아니라 태권도 및 복싱 협회, UFC에서도 사용되었고, 마돈나의 2008년 앨범인 하드 캔디의 앨범 커버에도 등장했다.
3.3. '벨트의 왕'과 장인정신
레지 파크스는 벨트 디자인 작업으로 "벨트의 왕"(The King of Belts영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벨트는 일반적으로 사진 조각 기법을 사용하여 아연 베이스에 조각한 다음, 니켈이나 금으로 도금하여 제작되었다. 완성된 디자인은 추가적인 보석과 가죽 공예로 장식되어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이는 그의 뛰어난 기술과 장인정신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4. 개인 생활
레지 파크스는 프로레슬링에서 은퇴한 후 애리조나주에 거주하면서 벨트 디자인 작업 외에 카펫 청소 회사를 운영했다. 그는 동료 레슬링 인물인 고든 솔리를 통해 카펫 청소 업계에 발을 들였다.
그는 한 번 결혼했으나 이혼했으며, 파트너 트리시와 22년간 동거하다가 2006년에 그녀가 사망했다. 그는 자녀가 없었다.
5. 사망
레지 파크스는 2021년 10월 7일 애리조나주 투손에 있는 자택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6. 획득 타이틀 및 업적
레지 파크스는 프로레슬링 경력 동안 다음과 같은 챔피언십 타이틀을 획득했다.
타이틀 | 획득 횟수 | 파트너 (태그팀 타이틀의 경우) |
---|---|---|
AWA - AWA 미드웨스트 태그팀 챔피언십 | 8회 | 에릭 포메로이 (4회), 더그 개스하우스 길버트 (2회), 팀 우즈 (1회), 우디 파머 (1회) |
센트럴 스테이츠 레슬링 - NWA 센트럴 스테이츠 헤비급 챔피언십 | 1회 | |
NWA 샌프란시스코 - NWA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 (샌프란시스코 버전) | 2회 | 엔리케 토레스 (2회) |
올스타 레슬링 - 네브래스카 태그팀 챔피언십 | 1회 | 대니 호지 |
NWA 웨스턴 스테이츠 스포츠 - NWA 웨스턴 스테이츠 태그팀 챔피언십 | 1회 | 스콧 케이시 |
NWA 웨스턴 스테이츠 스포츠 - NWA 인터내셔널 헤비급 챔피언십 (아마릴로 버전) | 1회 |
7. 유산 및 평가
레지 파크스는 프로레슬링과 벨트 디자인 분야 모두에서 지대한 공헌을 남기며, 독특하고 지속적인 유산을 형성했다. 그의 업적은 단순히 타이틀 획득이나 벨트 제작을 넘어, 해당 산업의 미학적 기준과 경기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7.1. 레슬러로서의 영향
레슬러로서 레지 파크스는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손가락만으로 푸쉬업을 하거나, 자신의 복부 위에 폭스바겐 자동차를 운전하게 하는 등 놀라운 신체적 능력을 선보이며 관중들을 경탄시켰다. 이러한 그의 독특한 힘 과시와 "조용한 슈퍼맨" 페르소나는 그를 팬들에게 더욱 친근하고 인상적인 레슬러로 각인시키는 데 기여했다.
7.2. 벨트 디자이너로서의 영향력
레지 파크스는 챔피언십 벨트 디자인 분야에서 혁신적인 장인으로 평가받는다. 동료 벨트 제작자인 데이브 밀리컨은 "아무도 레지 파크스 이전에 이런 방식으로 벨트를 만들지 않았다. 레지 이전에 벨트가 있었느냐고? 물론 있었다. 레지 이전에 좋은 벨트가 있었느냐고? 없었다."라고 말하며 그의 선구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그의 벨트는 주류 및 인디 단체를 포함한 수많은 프로모션에서 사용되었다. WWE에서는 헐크 호건, 브렛 하트, 숀 마이클스, 스톤 콜드 스티브 오스틴 등 역대 세계 챔피언들이 그의 손길이 닿은 벨트를 허리에 둘렀다. 이처럼 레지 파크스의 벨트들은 챔피언십의 권위와 미학적 기준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현재까지도 그의 디자인은 업계의 표준으로 남아 있다.
8. 외부 링크
- [https://www.facebook.com/people/Reggie-Parks-The-King-of-Belts/100063884313400 Reggie Parks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 [https://www.onlineworldofwrestling.com/profile/reggie-parks/ Online World of Wrestling 프로필]
- [https://www.wrestlingdata.com/index.php?befehl=bios&wrestler=7239&bild=0&details=0 Wrestlingdata.com 프로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