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과 가족 관계
레오 루돌프 라우발 유니오어는 1906년 10월 2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레오 라우발 시니어이며, 어머니는 아돌프 히틀러의 이복 누이인 앙겔라 히틀러였다. 이로 인해 그는 아돌프 히틀러의 이복 조카가 된다.
라우발 유니오어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화학 교사로 일했으며, 어머니 앙겔라가 베르흐테스가덴에 살 때 간헐적으로 어머니를 방문했다. 그는 사촌인 하인츠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히틀러가 "가장 좋아하는 조카" 중 한 명이었으며, 히틀러는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그의 사촌 윌리엄 패트릭 히틀러는 라우발이 외삼촌인 아돌프 히틀러를 좋아하지 않았고, 자신의 여동생 겔리 라우발의 죽음에 대해 히틀러를 비난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역사학자 베르너 마저에 따르면, 레오 라우발은 1967년에 겔리의 죽음에 대해 히틀러가 "절대적으로 결백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윌리엄 패트릭 히틀러의 주장은 확인된 바가 없다.
q=Salzburg, Linz, Austria|position=right
2. 전전(戰前) 및 군 경력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 레오 루돌프 라우발 유니오어는 오스트리아 린츠에 위치한 제철소의 경영자로 재직했다.
1939년 10월, 그는 독일 공군인 루프트바페에 징집되어 공병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외모가 아돌프 히틀러와 닮았기 때문에, 전쟁 중 때때로 히틀러의 대역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3. 제2차 세계 대전과 소련 포로 생활
1943년 1월, 레오 루돌프 라우발 유니오어는 제2차 세계 대전의 격전지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다. 당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라우발을 독일로 대피시킬 수 있는 비행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를 거부했고, 라우발은 1943년 1월 31일에 소련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q=Volgograd, Russia|position=left
히틀러는 1941년 7월 16일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아들 야코브 드주가슈빌리와 라우발의 포로 교환 가능성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야코브를 라우발이나 파울루스 원수와 교환하는 것을 거부하며 "전쟁은 전쟁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라우발은 이후 모스크바의 감옥에 갇혔고, 1955년 9월 28일에 소련에 의해 석방되어 오스트리아로 귀환했다.
4. 포로 석방 이후의 삶과 죽음
소련에서 석방된 후, 레오 루돌프 라우발 유니오어는 고향인 오스트리아 린츠로 돌아와 교사로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스페인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1977년 8월 18일에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1977년 9월 7일 린츠에 매장되었다.
5. 가족 및 후손
레오 루돌프 라우발 유니오어에게는 1931년에 태어난 아들 페터 라우발이 있다. 페터 라우발은 은퇴한 기술자로, 현재 오스트리아 린츠에 거주하고 있으며, 결혼하지 않고 자녀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오 루돌프 라우발 유니오어는 여동생 엘프리데 라우발의 아들 하이너 호체거(1945년생)와 윌리엄 패트릭 스튜어트휴스턴의 세 아들(알렉산더 아돌프(1949년생), 루이스(1951년생), 브라이언 윌리엄(1965년생))과 함께 아돌프 히틀러의 가장 가까운 생존 친척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라우발과 달리, 윌리엄 패트릭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을 위해 싸웠고 나중에는 성을 스튜어트휴스턴으로 변경했으며, 1938년에는 아돌프 히틀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등 히틀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윌리엄 패트릭의 아들들 또한 자녀가 없으며, 스튜어트휴스턴이라는 성을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