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레몽 후탈스(Raymond Goethals레몽 구탈스프랑스어, Raymond Goethals레몽 후탈스네덜란드어; 1921년 10월 7일 ~ 2004년 12월 6일)는 벨기에의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이었다. 그는 1993년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를 이끌고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프랑스 클럽으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유럽 대항전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감독으로 기록되었다.
후탈스는 종종 '과학자'(Raymond-la-science레몽 라 시앙스프랑스어), '마법사'(le sorcier르 소르시에프랑스어), 또는 '마술사'(le magicien르 마지시앵프랑스어)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직설적인 화법과 선수들의 이름을 잘못 발음하는 습관, 그리고 독특한 브뤼셀 억양으로 유명했다. 줄담배를 피우는 습관 때문에 TV 드라마 속 형사 콜롬보에 비유되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가이 후탈스는 1992년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와 1996년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심판을 맡기도 했다. 이 문서는 그의 선수 경력부터 시작하여 벨기에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 주요 클럽에서의 성공과 논란,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삶과 축구계에 미친 영향까지 레몽 후탈스의 전반적인 생애를 다룬다.
2. 선수 경력
레몽 후탈스는 1930년대에 대링 브뤼셀에서 골키퍼로 축구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이 클럽의 유소년 팀을 거쳐 성장했으며, 1947년 라싱 클럽 브뤼셀로 이적하여 1948년까지 활동했다. 이후 그는 르네시엔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선수 시절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은퇴 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3. 지도자 경력
레몽 후탈스의 지도자 경력은 벨기에의 소규모 클럽에서 시작하여 벨기에 국가대표팀을 거쳐 유럽 최고 수준의 클럽을 이끄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의 경력은 성공과 동시에 일부 논란을 포함하고 있다.
3.1. 초기 지도자 경력
선수 생활을 마친 후 레몽 후탈스는 하누투아와 와렘에서 감독직을 맡으며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1959년에는 신트트라위던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1966년 벨기에 퍼스트 디비전에서 팀을 2위로 이끌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1966년부터 1968년까지는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코치로 활동했다.
3.2. 벨기에 국가대표팀 감독
1968년 레몽 후탈스는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의 정식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의 지휘 아래 벨기에는 1970년 FIFA 월드컵 멕시코 본선 진출에 성공했으나, 아쉽게도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벨기에는 1972년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를 개최했으며, 예선에서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를 꺾는 이변을 연출했다. 준결승에서 최종 우승팀인 독일에 패했지만,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를 꺾고 3위를 차지하며 후탈스 감독으로서 국가대표팀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또한 1974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 당시 강력하게 떠오르던 네덜란드를 상대로 두 번의 맞대결에서 모두 무실점을 기록한 것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벨기에는 예선전 동안 단 한 골도 실점하지 않았지만, 네덜란드에 골 득실에서 밀려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1976년, 후탈스는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내려놓았다.
3.3. 클럽 지도자 경력
벨기에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마친 후, 레몽 후탈스는 다양한 클럽에서 감독 생활을 이어갔다.
3.3.1. 벨기에 클럽
1976년, 후탈스는 안데를레흐트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첫 시즌인 1976-77 시즌에 UEFA 컵 위너스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독일의 함부르크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77-78 시즌에는 FK 아우스트리아/WAC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안데를레흐트에서 그는 1976년과 1978년 UEFA 슈퍼컵 우승, 1977년 쥘 파파르트 컵 우승, 1978년 벨기에 스포츠 공로상을 수상했다. 또한 1976년 암스테르담 토너먼트와 1977년 파리 토너먼트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프랑스와 브라질에서의 감독 생활을 마친 후, 후탈스는 벨기에로 돌아와 스탕다르 리에주의 감독을 맡았다. 스탕다르 리에주를 이끌고 1982년과 1983년 벨기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1981년과 1983년 벨기에 슈퍼컵에서도 우승했다. 1982년에는 UEFA 컵 위너스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결승전이 상대 팀인 바르셀로나의 홈 구장인 캄프 누에서 열리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 패배하여 준우승에 그쳤다. 1982년과 1984년에는 UEFA 인터토토컵 그룹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스탕다르 리에주를 떠난 후에는 포르투갈의 비토리아 기마랑이스를 거쳐 벨기에의 라싱 제트 드 브뤼셀을 지도했다. 이후 안데를레흐트 감독으로 두 번째 부임하여 1989년 벨기에 컵 우승을 차지했다.
3.3.2. 해외 클럽
안데를레흐트 감독직을 마친 후 후탈스는 프랑스의 보르도와 브라질의 상파울루에서 감독 생활을 했다. 보르도에서는 1989-90 시즌 프랑스 챔피언십에서 마르세유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다. 상파울루에서는 1981년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이 A 준우승을 기록했다.
1990년, 7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후탈스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클럽의 유러피언컵 우승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첫 시즌인 1990-91 시즌에 마르세유는 유러피언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에 승부차기 끝에 아쉽게 패하며 우승을 놓쳤다. 하지만 후탈스의 지도력은 인정받아 1991년 유럽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1993년, 마르세유는 다시 유러피언컵 결승에 진출했고,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AC 밀란을 바실 볼리의 헤딩골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마르세유에서의 주요 목표를 달성한 후, 후탈스는 클럽을 떠났다. 그는 또한 마르세유에서 1990-91 시즌과 1991-92 시즌 프랑스 디비전 1 우승, 1990-91 시즌 쿠프 드 프랑스 준우승을 이끌었다.
3.4. 주요 논란
레몽 후탈스의 감독 경력에는 몇 가지 논란이 있었다. 가장 큰 논란은 스탕다르 리에주 감독 시절인 1984년에 불거진 승부 조작 스캔들이었다. 1982년 스탕다르 리에주의 리그 우승과 관련하여, 후탈스는 자신의 첫 벨기에 리그 우승을 간절히 원한 나머지 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바터르스헤이와의 경기 전에 상대 팀 선수들에게 뇌물을 주어 승리를 확보하고, 동시에 유럽 대항전 결승을 앞두고 자신의 선수들이 부상으로 결장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 스캔들이 터지면서 후탈스는 감독직에서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1993년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프랑스 챔피언십 우승 역시 후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마르세유와 발랑시엔의 중요한 경기에서 발랑시엔 선수 세 명이 고의로 부진한 경기를 펼치도록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마르세유는 1993년 프랑스 챔피언십 우승 타이틀을 박탈당했고, 유럽 대항전 타이틀 방어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프랑스 2부 리그로 강등되는 징계를 받았다.
4. 개인적인 삶과 특징
레몽 후탈스는 그의 축구 전술만큼이나 독특한 개인적인 면모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과학자'(Raymond-la-science레몽 라 시앙스프랑스어), '마법사'(le sorcier르 소르시에프랑스어), '마술사'(le magicien르 마지시앵프랑스어) 등의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는 그의 전술적 깊이와 예측 불가능한 지도 방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는 느릿한 말투와 독특한 브뤼셀 억양으로 유명했으며, 종종 선수들의 이름을 잘못 발음하는 습관이 있었다. 또한 줄담배를 피우는 열렬한 흡연자였고, 이러한 모습 때문에 TV 드라마의 형사 콜롬보에 비유되기도 했다.
레몽 후탈스의 아들인 가이 후탈스 역시 축구계에서 활동했으며, 1992년과 1996년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심판을 맡은 바 있다. 이러한 가족 관계는 그가 축구계에 미친 영향력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5. 은퇴 및 말년
레몽 후탈스의 감독 경력은 1995-96 시즌 안데를레흐트에서 최종적으로 막을 내렸다. 감독직에서 은퇴한 후에도 그는 축구계와 인연을 이어갔다. 그는 축구 해설가로 활동하며 현역 시절과 다름없는 통찰력 있는 분석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의 해설은 축구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은퇴 후에도 축구에 대한 그의 열정과 지식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6. 사망
레몽 후탈스는 2004년 12월 6일, 장암으로 인해 향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축구계에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7. 통계
레몽 후탈스의 감독 경력 통계는 다음과 같다.
팀 | 시작 | 종료 | 기록 | ||||
---|---|---|---|---|---|---|---|
경기 수 | 승리 | 무승부 | 패배 | 승률 (%) | |||
신트트라위던 | 1959년 6월 9일 | 1966년 5월 28일 | 219 | 82 | 59 | 78 | 37.4 |
벨기에 | 1968년 6월 8일 | 1976년 4월 25일 | 44 | 25 | 8 | 11 | 56.8 |
안데를레흐트 | 1976년 7월 19일 | 1979년 7월 12일 | 143 | 93 | 18 | 32 | 65.0 |
보르도 | 1979년 10월 22일 | 1980년 6월 15일 | 25 | 13 | 4 | 8 | 52.0 |
상파울루 | 1980년 7월 29일 | 1981년 7월 20일 | 52 | 31 | 12 | 9 | 59.6 |
스탕다르 리에주 | 1981년 7월 1일 | 1984년 6월 11일 | 142 | 89 | 25 | 28 | 62.7 |
비토리아 기마랑이스 | 1984년 8월 4일 | 1985년 6월 8일 | 32 | 10 | 7 | 15 | 31.3 |
라싱 제트 브뤼셀 | 1985년 6월 8일 | 1987년 6월 5일 | 67 | 24 | 21 | 22 | 35.8 |
안데를레흐트 | 1987년 7월 23일 | 1989년 6월 12일 | 97 | 60 | 21 | 16 | 61.9 |
보르도 | 1989년 7월 4일 | 1990년 8월 11일 | 46 | 25 | 10 | 11 | 54.3 |
마르세유 | 1991년 1월 3일 ~ 1991년 6월 7일 | 112 | 65 | 34 | 13 | 58.0 | |
합계 | 979 | 517 | 219 | 243 | 52.8 |
8. 수상 및 업적
레몽 후탈스는 감독 경력 동안 수많은 클럽 및 개인 타이틀을 획득하며 벨기에와 유럽 축구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 안데를레흐트
- UEFA 컵 위너스컵: 1977-78 우승; 1976-77 준우승
- UEFA 슈퍼컵: 1976, 1978 우승
- 벨기에 컵: 1987-88, 1988-89 우승; 1976-77 준우승
- 암스테르담 토너먼트: 1976 우승
- 파리 토너먼트: 1977 우승
- 쥘 파파르트 컵: 1977 우승
- 벨기에 국가 스포츠 공로상: 1978 수상
- 브뤼헤 마틴스: 1988 우승
- 상파울루
-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이 A: 1981 준우승
- 스탕다르 리에주
- 벨기에 퍼스트 디비전: 1981-82, 1982-83 우승
- 벨기에 슈퍼컵: 1981, 1983 우승
- UEFA 컵 위너스컵: 1981-82 준우승
- UEFA 인터토토컵 그룹 우승: 1982, 1984
- 보르도
- 프랑스 디비전 1: 1989-90 준우승
- 마르세유
- 프랑스 디비전 1: 1990-91, 1991-92 우승
- UEFA 챔피언스리그: 1992-93 우승; 1990-91 준우승
- 쿠프 드 프랑스: 1990-91 준우승
- 벨기에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1972 3위
- 개인 수상
- 판키나 도로: 1990-91 수상
- 판키나 다르젠토: 1991-92 수상
- 옹즈도르 올해의 감독: 1991, 1993 수상
- 트로피 레몽 후탈스: 2011년부터 그의 이름을 딴 상 제정
- 골든슈 평생 공로상: 2014 수상
- 프랑스 풋볼 선정 역대 최고의 감독 47위: 2019 선정
9. 평가 및 영향력
레몽 후탈스는 벨기에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독특한 성격과 전술적 통찰력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한 최고령 감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프랑스 클럽으로는 유일하게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감독이다.
2005년, 그가 사망한 이듬해에는 BBC의 '위대한 영국인 100인'을 본뜬 플랑드르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위대한 벨기에인'에서 38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는 그가 벨기에 사회 전반에 걸쳐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졌는지를 보여준다. 2005년 말에는 F.C. 브뤼셀의 홈 구장인 에드몽 마흐탕스 스타디움의 2번 스탠드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감독 은퇴 후 축구 해설가로 활동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날카로운 분석과 통찰력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지도 방식과 뛰어난 전술적 능력은 후대 감독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으며, 벨기에 축구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