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래리 드메트릭 존슨(Larry Demetric Johnson영어, 1969년 3월 14일 ~ )은 미국의 은퇴한 농구 선수로, 파워 포워드 포지션에서 활약했다. 그는 NBA의 샬럿 호니츠와 뉴욕 닉스에서 선수 경력을 보냈다. 존슨은 NCAA 챔피언이자 2차례 NBA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NBA 신인상을 수상하는 등 대학과 프로 무대에서 모두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는 고등학교, 주니어 칼리지, 그리고 NCAA 디비전 I 레벨에서 모두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유일한 선수이다. 은퇴 후에는 뉴욕 닉스의 농구 및 사업 운영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래리 존슨은 1969년 3월 14일 텍사스주 타일러에서 태어났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존슨은 텍사스주 댈러스에 위치한 스카이라인 고등학교에서 농구를 했다. 고등학교 4학년 시절에는 만장일치로 올아메리칸에 선정되었고, 미스터 바스켓볼 USA로 지명되었다. 또한 1987년 맥도날드 올아메리칸 팀의 일원이었다.
원래 그는 서던 메소디스트 대학교에서 데이브 블리스 감독 아래에서 뛰기로 구두 약속했으나, SAT 점수의 유효성에 대한 학교 행정부와의 분쟁으로 인해 약속을 철회하고 텍사스에 위치한 오데사 칼리지에 입학했다.
2.2. 대학 경력
2.2.1. 오데사 칼리지
존슨은 1987-88 시즌과 1988-89 시즌을 오데사 칼리지에서 보냈다. 신입생 시절에는 경기당 평균 22.3득점을 기록했으며, 2학년 때는 경기당 평균 29득점 이상을 기록했다. 그는 전미 주니어 칼리지 선수 협회 디비전 1 올해의 선수상을 두 시즌 연속으로 수상한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선수이다. 일부 농구 분석가들은 그가 조기 드래프트에 참여했다면 1989년 NBA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에 지명될 수도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2.2.2. UNLV
이후 존슨은 UNLV로 편입하여 제리 타카니안 감독의 지도를 받았다. 스테이시 오그먼과 그레그 앤서니 등 미래의 NBA 선수들과 함께, 존슨은 1990년 NCAA 남자 농구 토너먼트 결승전에서 듀크 블루 데블스를 상대했다. UNLV는 103대 73으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고, 존슨은 22득점과 11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런닝 레블스(UNLV 농구팀의 별명)는 이 토너먼트에서 NCAA 챔피언십 경기 역사상 가장 큰 점수 차이와 가장 높은 득점을 기록하는 등 여러 NCAA 기록을 세웠다.
UNLV의 선수 영입 규정 위반과 비행 혐의로 인해 시즌 후 논란이 있었지만, 학교와 NCAA는 1990-91 시즌에 타이틀 방어를 허용하고 다음 시즌에는 플레이오프 출전을 금지하는 데 합의했다. 존슨과 런닝 레블스는 이에 27승 무패의 완벽한 정규 시즌 기록으로 응답했으며, 경기당 평균 26.7득점 마진을 기록했다. 이 기록에는 당시 전국 2위였던 아칸소 레이저백스를 112대 105로 꺾은 경기도 포함되었다.
1991년 NCAA 남자 농구 토너먼트에서 UNLV는 서부 지역 토너먼트에서 우승했지만, 파이널 포에서 결국 우승팀이 된 듀크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존슨은 두 차례 퍼스트 팀 올아메리칸에 선정되었고, 1990년과 1991년에 빅 웨스트 컨퍼런스 올해의 선수상과 토너먼트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또한 1991년에는 명망 높은 존 R. 우든 상과 네이스미스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존슨은 단 두 시즌만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UNLV 역대 득점 12위, 리바운드 7위에 랭크되어 있다. 그는 또한 단일 시즌 및 통산 야투 성공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2002년, 존슨과 팀 동료인 오그먼, 앤서니는 1990-91 UNLV 남자 농구팀과 함께 UNLV 체육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현재까지 그들은 UNLV 역사상 유일하게 2년 연속 파이널 포에 진출한 팀이다.
3. 프로 경력
3.1. NBA 드래프트 및 신인 시절
존슨은 1991년 NBA 드래프트에서 샬럿 호니츠에 전체 1순위로 지명되었고, 첫 시즌에 NBA 신인상을 수상했다. 그는 또한 올랜도에서 열린 1992년 NBA 올스타 위크엔드의 슬램 덩크 콘테스트에 참가하여 피닉스 선스의 세드릭 세발로스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3.2. 샬럿 호니츠 시절
1993년, 존슨은 1993 NBA 올스타전에 선발 출전하는 영예를 안았는데, 이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첫 호니츠 선수였다. 그는 82경기에서 경기당 평균 22.1득점과 10.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자신의 최고의 시즌을 보냈고, 이 활약으로 올-NBA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다. 알론조 모닝, 머그시 보그스, 델 커리와 함께 존슨은 1990년대 초중반 호니츠의 전성기이자 최고 인기 시절에 활약했다. 이 시기 동안, 존슨은 자신의 이니셜인 LJ영어와 Grandmama영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 별명은 존슨이 NBA에 입단한 후 컨버스와 광고 계약을 맺고 출연한 인기 광고 시리즈에서 할머니 캐릭터를 연기한 것에서 유래했다. 그는 창간호 표지 모델로도 등장했다.
1993년 10월, 존슨은 호니츠와 12년 8400.00 만 USD에 달하는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당시 NBA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계약이었다. 그러나 1993년 12월 27일 디트로이트 피스턴스와의 경기에서 허리를 삐끗한 후 31경기에 결장했다. 이 부상은 래리 존슨의 농구 경력에 큰 타격이었다. 그는 리그에 폭발적인 파워 포워드로 입성하여 경기당 평균 20득점 이상과 10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허리 부상 이후에는 향상된 외곽 슛을 포함한 올라운드 플레이를 개발해야 했다. 1994-95 시즌에는 81개의 3점 슛을 성공시켰는데, 이는 이전 세 시즌을 합친 것보다 거의 60개나 많은 수치였다. 이 활약으로 그는 1995 NBA 올스타전에 다시 선정되었다.
존슨과 모닝 사이의 마찰로 인해 구단은 변화를 모색해야 했고, 그 결과 두 선수 모두 다른 팀으로 이적하게 되었다. 1995-96 시즌을 앞두고 모닝은 글렌 라이스와 맷 가이거를 상대로 마이애미 히트로 트레이드되었다. 그 시즌이 끝난 후, 존슨은 앤서니 메이슨과 브래드 로하우스를 상대로 뉴욕 닉스로 트레이드되었다.
3.3. 뉴욕 닉스 시절
존슨은 닉스 이적 첫 시즌에 경기당 평균 12.8득점을 기록하며 개인 통산 최저치를 기록했다. 비록 그는 이전의 올스타 시절 기량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지만, 1999년 동부 컨퍼런스 챔피언십을 차지한 닉스의 핵심 멤버였다. 닉스가 앨런 휴스턴과 이후 레이트럴 스프리웰을 팀의 주요 득점원으로 삼으면서 존슨은 더 적은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99년 동부 컨퍼런스 결승전 3차전에서 그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안토니오 데이비스에게 파울을 당하는 결정적인 플레이에 연루되었다. 경기 종료 11.9초를 남기고 3점 슛 라인 밖에 서 있던 존슨은 공을 잡고 드리블을 시작했다. 그는 수비수 데이비스에게 몸을 기울인 후 점프했다. 심판은 존슨이 공을 놓기 약 0.5초 전에 파울을 선언했지만, 이는 연속 동작 슈팅 파울로 인정되었다. 존슨은 슛을 성공시키고 이어서 얻은 자유투까지 성공시켜 4점 플레이를 완성했고, 이는 92대 91로 닉스가 승리하는 결정적인 득점이 되었다.
1999년 NBA 파이널 동안 존슨은 닉스를 "반란적인 노예들"의 집단으로 묘사했다. 그는 "우리는 같은 농장에서 왔다. 빌 월튼에게 그렇게 말해라. 우리는 존슨 주인님의 농장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여기는 흑인들로 가득 찬 NBA다. 멋진 기회들이 있고, 그들은 아름다운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내가 내 동네로 돌아가서 똑같은 것을 본다면 그게 무슨 의미인가? 나는 내 동네에서 유일하게 빠져나온 사람이다. 모두 죽거나, 감옥에 가거나, 마약에 빠지거나, 마약을 팔았다. 그러니 나는 내 성공에 대해 영광스럽고 행복해야 한다. 그렇다, 나는 그렇다. 하지만 수년 동안 우리에게 일어난 일, 그리고 우리가 여전히 최하층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존슨은 또한 마이애미 히트와 닉스 사이의 라이벌 관계 형성에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97년 동부 컨퍼런스 준결승 5차전에서 존슨은 팀 동료 찰리 워드와 마이애미의 P. J. 브라운이 연루된 난투극 중에 닉스 벤치를 떠난 여러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결국 7차전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았고, 닉스는 이 경기에서 패배했다. 이어서 1998년 동부 컨퍼런스 1라운드 4차전에서는 존슨과 전 호니츠 팀 동료 모닝이 싸움을 벌였고, 이 싸움에는 닉스 감독 제프 밴 건디가 모닝의 다리를 붙잡는 장면도 포함되었다. 존슨과 모닝 모두 5차전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았고, 7번 시드 닉스는 이 경기에서 2번 시드 히트를 탈락시켰다.
2001년 10월 10일, 존슨은 수년간 그를 괴롭혔던 만성적인 허리 문제로 인해 농구에서 조기 은퇴를 발표했다. 그의 득점 생산량은 3년 연속 감소하고 있었다.
4. 플레이 스타일
존슨은 파워 포워드로서는 201 cm의 비교적 작은 키와 107 kg의 체중을 가졌지만, 강력한 플레이로 인사이드를 지배했다. 그의 거대한 근육질 몸집에서 나오는 덩크슛은 "하늘을 나는 거대한 바위"라고 불리기도 했다. 무뚝뚝한 외모와 달리 슈팅 범위가 넓고 어시스트 또한 능숙하여 세련된 선수였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찰스 바클리와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993년 12월에 당한 허리 부상(디스크)은 그의 농구 인생에 가장 큰 타격이었다. 이 부상 이후 그는 폭발적인 운동 능력과 점프력, 힘, 골밑 공격을 기반으로 하던 기존의 플레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플레이 스타일을 변화시켜, 주무대였던 골밑에서 점차 미들 라인과 3점 슛 라인으로 슈팅 거리를 넓혔고, 점프 슛을 바탕으로 한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변모했다.
5. 국제 대회 경력
존슨은 미국 국가대표로서 여러 국제 대회에 참가했다. 1987년 FIBA U19 농구 월드컵에서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1989년 유니버시아드에서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특히 1994년에는 FIBA 세계 선수권 대회에 드림팀 II의 일원으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했다.
6. 은퇴 후 경력
2007년 7월, 존슨은 뉴욕 닉스에서 어떤 종류의 "리더십 역할"을 맡는 것에 관심을 표명했다. 같은 해 12월 21일, 그는 UNLV에서 사회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8년에는 서던 네바다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12년 4월 8일, 그는 닉스에 농구 및 사업 운영 대표로 고용되었다. 2014년에는 텍사스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19년에는 대학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7. 개인 생활
존슨은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며, NBA 시즌 동안 라마단 기간에는 금식을 지켰다. 그는 네 명의 여성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2015년, 그는 미납된 양육비가 12.00 만 USD 이상이라고 주장하며 캘리포니아 법원에 파산 신청을 했다.
8. 미디어 출연 및 문화적 영향
1993년, 존슨은 시트콤 패밀리 매터스의 "그랜드마마" 에피소드에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그랜드마마"로 출연하여 스티브 어클의 농구 토너먼트 팀 동료가 되었다. 같은 해 말, 그는 데이비드 레터맨의 레이트 쇼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3년 후인 1996년에는 영화 에디와 스페이스 잼에 본인 역으로 출연했다. 특히 스페이스 잼에서는 머그시 보그스, 숀 브래들리, 찰스 바클리, 패트릭 유잉과 함께 농구 능력을 도둑맞은 NBA 스타 중 한 명으로 조연 역할을 맡았다.
그의 별명은 이니셜인 LJ영어 외에도 컨버스 농구화 광고에서 노파를 연기한 것 때문에 Grandmama영어("할머니")로 불렸다. 한국에서는 그의 강력한 골밑 플레이와 거대한 몸집 때문에 "하늘을 나는 거대한 바위"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9. 경력 통계
GP | 출전 경기 수 | GS | 선발 출전 경기 수 | MPG | 경기당 평균 출전 시간 |
---|---|---|---|---|---|
FG% | 필드골 성공률 | 3P% | 3점 슛 성공률 | FT% | 자유투 성공률 |
RPG | 경기당 평균 리바운드 수 | APG | 경기당 평균 어시스트 수 | SPG | 경기당 평균 스틸 수 |
BPG | 경기당 평균 블록 수 | PPG | 경기당 평균 득점 | 굵은 글씨 | 커리어 하이 |
9.1. NBA
9.1.1. 정규 시즌
연도 | 팀 | GP | GS | MPG | FG% | 3P% | FT% | RPG | APG | SPG | BPG | PPG |
---|---|---|---|---|---|---|---|---|---|---|---|---|
1991-92 | 샬럿 호니츠 | 82 | 77 | 37.2 | .490 | .227 | .829 | 11.0 | 3.6 | 1.0 | .6 | 19.2 |
1992-93 | 샬럿 호니츠 | 82 | 82 | 40.5 | .526 | .254 | .767 | 10.5 | 4.3 | .6 | .3 | 22.1 |
1993-94 | 샬럿 호니츠 | 51 | 51 | 34.5 | .515 | .238 | .695 | 8.8 | 3.6 | .6 | .3 | 16.4 |
1994-95 | 샬럿 호니츠 | 81 | 81 | 39.9 | .480 | .386 | .774 | 7.2 | 4.6 | 1.0 | .3 | 18.8 |
1995-96 | 샬럿 호니츠 | 81 | 81 | 40.4 | .476 | .366 | .757 | 8.4 | 4.4 | .7 | .5 | 20.5 |
1996-97 | 뉴욕 닉스 | 76 | 76 | 34.4 | .512 | .324 | .693 | 5.2 | 2.3 | .8 | .5 | 12.8 |
1997-98 | 뉴욕 닉스 | 70 | 70 | 34.5 | .485 | .238 | .756 | 5.7 | 2.1 | .6 | .2 | 15.5 |
1998-99 | 뉴욕 닉스 | 49 | 48 | 33.4 | .459 | .359 | .817 | 5.8 | 2.4 | .7 | .2 | 12.0 |
1999-00 | 뉴욕 닉스 | 70 | 68 | 32.6 | .433 | .333 | .766 | 5.4 | 2.5 | .6 | .1 | 10.7 |
2000-01 | 뉴욕 닉스 | 65 | 65 | 32.4 | .411 | .313 | .797 | 5.6 | 2.0 | .6 | .4 | 9.9 |
통산 | 707 | 699 | 36.3 | .484 | .332 | .766 | 7.5 | 3.3 | .7 | .4 | 16.2 | |
올스타 | 2 | 1 | 18.0 | .444 | 1.000 | 1.000 | 4.0 | 1.0 | .0 | .0 | 5.5 |
9.1.2. 플레이오프
연도 | 팀 | GP | GS | MPG | FG% | 3P% | FT% | RPG | APG | SPG | BPG | PPG |
---|---|---|---|---|---|---|---|---|---|---|---|---|
1993 | 샬럿 호니츠 | 9 | 9 | 38.7 | .557 | .250 | .788 | 6.9 | 3.3 | .6 | .2 | 19.8 |
1995 | 샬럿 호니츠 | 4 | 4 | 43.0 | .477 | .111 | .800 | 5.8 | 2.8 | 1.0 | .5 | 20.8 |
1997 | 뉴욕 닉스 | 9 | 9 | 32.8 | .558 | .353 | .842 | 4.0 | 2.6 | .8 | .1 | 13.8 |
1998 | 뉴욕 닉스 | 8 | 8 | 38.8 | .486 | .200 | .740 | 6.6 | 1.6 | 1.3 | .4 | 17.9 |
1999 | 뉴욕 닉스 | 20 | 20 | 34.2 | .426 | .293 | .674 | 4.9 | 1.6 | 1.1 | .1 | 11.5 |
2000 | 뉴욕 닉스 | 16 | 16 | 36.8 | .461 | .394 | .794 | 5.0 | 1.6 | .5 | .1 | 11.3 |
통산 | 66 | 66 | 36.3 | .483 | .303 | .767 | 5.3 | 2.0 | .8 | .2 | 14.2 |
9.2. 대학
* | NCAA 디비전 I 선두 |
연도 | 팀 | GP | GS | MPG | FG% | 3P% | FT% | RPG | APG | SPG | BPG | PPG |
---|---|---|---|---|---|---|---|---|---|---|---|---|
1989-90 | UNLV | 40* | 40 | 31.5 | .624 | .342 | .767 | 11.4 | 2.1 | 1.6 | 1.4 | 20.6 |
1990-91 | UNLV | 35 | 35 | 31.8 | .662 | .354 | .818 | 10.9 | 3.0 | 2.1 | 1.0 | 22.7 |
통산 | 75 | 75 | 31.6 | .643 | .349 | .789 | 11.2 | 2.5 | 1.9 | 1.2 | 21.6 |
10. 수상 및 영예
- NBA 신인상 (1992)
-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92)
- NBA 올스타 2회 (1993, 1995)
- 올-NBA 세컨드 팀 (1993)
- NCAA 챔피언 (1990)
- 네이스미스 올해의 선수상 (1991)
- 존 R. 우든 상 (1991)
- 올아메리칸 컨센서스 퍼스트 팀 2회 (1990, 1991)
- 빅 웨스트 컨퍼런스 올해의 선수 2회 (1990, 1991)
- 올-빅 웨스트 퍼스트 팀 2회 (1990, 1991)
- UNLV 영구 결번 No. 4
- 전미 주니어 칼리지 선수 협회 디비전 I 올해의 선수 2회 (1988, 1989)
- USA 농구 올해의 남자 선수 (1989)
- 패러드 매거진 올아메리칸 퍼스트 팀 (1987)
- 맥도날드 올아메리칸 (1987)
- 텍사스주 미스터 바스켓볼 (1987)
- UNLV 체육 명예의 전당 헌액 (2002)
- 서던 네바다 스포츠 명예의 전당 헌액 (2008)
- 텍사스 스포츠 명예의 전당 헌액 (2014)
- 대학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19)
11. 유산 및 평가
11.1. 긍정적 평가 및 영향
래리 존슨은 NBA에 입성하자마자 NBA 신인상을 수상하며 강력한 인상을 남겼고, 샬럿 호니츠의 프랜차이즈 역사상 첫 올스타 선발 출전 선수가 되는 등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는 알론조 모닝, 머그시 보그스 등과 함께 1990년대 초중반 호니츠를 가장 인기 있는 팀 중 하나로 만들었다. 그의 폭발적인 플레이 스타일과 강인한 이미지는 많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컨버스 광고에서 "그랜드마마" 캐릭터를 연기하며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비록 허리 부상으로 인해 플레이 스타일을 바꾸어야 했지만, 그는 뉴욕 닉스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1999년 동부 컨퍼런스 챔피언십을 이끄는 데 기여했다.
11.2. 논란 및 비판
존슨의 경력 중 가장 큰 논란은 1999년 NBA 파이널에서 닉스를 "반란적인 노예들"에 비유한 발언이었다. 이 발언은 빌 월튼으로부터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인종 문제에 대한 그의 솔직하고 때로는 거친 시각을 드러냈다. 그는 NBA의 흑인 선수들이 이룬 발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향에서는 여전히 빈곤과 범죄가 만연한 현실을 지적하며,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발언은 그의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또한, 그의 개인 생활에서는 네 명의 여성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2015년에는 12.00 만 USD 이상의 미납 양육비로 인해 파산을 신청하며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는 모습이 공개되어 비판을 받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