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람베르토 2세의 생애는 9세기 말 혼란스러웠던 이탈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적 격변 속에 있었다. 그는 강력한 가문의 후예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의 왕위와 황제위를 계승하며 복잡한 권력 투쟁의 중심에 섰다.
1.1. 출생 및 가계
람베르토는 880년경 스폴레토의 구이도 3세와 베네벤토 공작 아델히스의 딸인 아겔트루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카롤링거 왕조와 깊은 연관이 있다. 람베르토의 증조모인 롬바르디아의 아델라이드는 샤를마뉴의 아들 피피노 카를로만의 딸이었다. 또한, 그의 작은할아버지인 낭트의 람베르토 3세의 부인 로틸데는 중프랑크 왕국의 황제 로타르 1세의 딸이었다. 이처럼 람베르토는 샤를마뉴의 아들 피피노 카를로만의 증외고손에 해당하여, 비록 먼 혈족이었으나 카롤링거 왕조의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1.2. 초기 통치 및 섭정
람베르토는 891년 5월 파비아에서 이탈리아의 왕으로 즉위했으며, 892년 4월 30일 라벤나에서 아버지 구이도 3세와 함께 교황 포르모소에 의해 마지못해 공동 황제로 대관되었다. 그와 그의 아버지는 교황과 협정을 맺어 피핀의 기증과 이후 카롤링거 왕조가 교황청에 기증한 영토를 재확인했다. 889년 5월, 람베르토는 제국 및 이탈리아 왕국의 섭정으로 임명되어 아버지의 통치에 참여했다. 아버지가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교황에게 람베르토의 축성과 제관 수여를 지속적으로 요청했으나, 교황 포르모소는 이를 거부했다. 894년 늦가을 아버지 구이도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람베르토는 단독 왕이자 황제가 되었고, 아버지로부터 스폴레토 공국을 계승했다. 그러나 당시 아직 젊었던 그는 강력한 반(反)독일주의자였던 어머니 아겔트루드의 섭정 하에 놓였다.
2. 주요 활동 및 통치
람베르토의 통치 기간은 이탈리아 내외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특징지어진다.
2.1. 이탈리아 왕위 및 황제 즉위
람베르토는 891년 5월 파비아에서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했으며, 892년 4월 30일 라벤나에서 아버지 구이도 3세와 함께 교황 포르모소에 의해 공동 황제로 대관되었다. 당시 교황 포르모소는 스폴레토 가문의 세력 확대를 경계하며 황제 대관을 꺼려 했으나, 구이도 3세의 군사적 압력에 굴복하여 람베르토를 공동 황제로 인정했다. 람베르토와 구이도 3세는 교황에게 피핀의 기증과 같은 형태로 영토를 헌납하겠다고 약속하며 황제위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러나 교황 포르모소는 람베르토의 황제위를 인정하면서도, 비밀리에 동프랑크 왕국의 케른텐의 아르눌프에게 사절을 보내 이탈리아를 해방하고 로마를 구해달라고 요청하며 황제위를 제안했다.
2.2. 교황과의 관계 및 갈등
람베르토의 재위 기간 동안 교황청과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갈등으로 가득했다.
- 교황 포르모소**: 893년 교황 포르모소는 동프랑크의 레겐스부르크로 사절을 보내 아르눌프에게 이탈리아 원정을 요청했다. 894년 아르눌프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람베르토와 어머니 아겔트루드는 로마로 가서 교황의 황제위 승인을 얻으려 했으나, 포르모소는 아르눌프를 황제로 대관하려 했고, 람베르토 일행을 산탄젤로 성에 감금했다. 896년 2월 21일, 아르눌프가 로마를 점령하고 포르모소를 해방시키자, 포르모소는 아르눌프를 왕이자 황제로 대관하며 람베르토의 황제위를 폐위한다고 선언했다.
- 교황 스테파노 6세**: 896년 4월 교황 포르모소가 사망하자, 람베르토와 아겔트루드의 영향력으로 교황 스테파노 6세가 선출되었다. 람베르토와 아겔트루드는 스테파노 6세를 설득하여 죽은 포르모소의 시신을 재판하는 악명 높은 시체 재판을 벌이도록 했다.
- 교황 요한네스 9세**: 898년 1월, 교황 요한네스 9세가 즉위하며 포르모소를 복권시켰다. 람베르토는 같은 해 2월 라벤나에서 의회를 소집하여 70명의 주교들과 만나 891년의 자신의 즉위가 정당하며, 아르눌프의 대관식은 무효이고 람베르토 자신의 황제위가 유효함을 재확인했다. 또한 요한네스 9세의 선출을 합법화하고 포르모소의 복권을 승인했다. 람베르토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로타르 1세의 824년 로마 헌장(Constitutio Romana라틴어)을 재확인하여 교황 선출 시 황제의 입회가 필요함을 명시한 것이었다.
2.3. 대외 정책 및 군사 충돌
람베르토는 재위 기간 내내 케른텐의 아르눌프와 프리울리의 베렝가리오 1세로부터 이탈리아를 지키기 위한 시도에 몰두했다.

- 아르눌프와의 대결**: 893년 교황 포르모소의 요청으로 아르눌프는 아들 츠벤티볼트와 바이에른 군대를 보내 베렝가리오 1세와 합류하여 구이도 3세를 공격했다. 그들은 구이도를 격파했으나, 뇌물과 열병 발생으로 가을에 철수했다. 894년 초 아르눌프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포강 이북의 모든 영토를 정복했다. 구이도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아르눌프는 진격을 멈췄다. 895년 9월, 교황의 사절이 다시 아르눌프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10월 아르눌프는 두 번째 이탈리아 원정을 단행했다. 그는 파비아를 점령했으나 천천히 진군했다. 람베르토는 전투를 피했고, 아르눌프는 토스카나 귀족들의 지지를 얻었다. 토스카나의 아달베르토 2세마저 아르눌프에게 합류했다. 아겔트루드가 지키던 로마는 아르눌프에게 문을 잠갔으나, 아르눌프는 896년 2월 21일 무력으로 도시를 점령하고 교황을 해방시켰다. 아르눌프는 그곳에서 교황 포르모소에게 왕이자 황제로 대관되었고, 람베르토는 폐위되었다. 아르눌프는 람베르토가 피신한 스폴레토로 진군했으나, 뇌졸중으로 쓰러져 원정을 중단하고 철수해야 했다.
- 베렝가리오 1세와의 관계**: 아르눌프가 독일로 돌아간 후부터 람베르토 사망 전까지 이탈리아는 람베르토와 그의 지지자들(주로 북동부와 중부)의 완전한 통제 하에 있었다. 그는 파비아를 탈환하고 아르눌프에 가담했던 밀라노의 마기눌프 1세를 참수했다. 10월과 11월, 그는 파비아 외곽에서 베렝가리오를 만나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으로 그들은 왕국을 분할하여 베렝가리오는 아다강과 포강 사이의 영토를, 람베르토는 나머지 영토를 차지하기로 했다. 그들은 베르가모를 공유했다. 이는 889년의 현상 유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람베르토는 또한 베렝가리오의 딸 기셀라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 분할 통치로 인해 후대 연대기 작가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는 이탈리아인들이 항상 두 군주 아래에서 고통받았다고 기록했다.
- 기타 대외 활동**: 895년 람베르토는 수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같은 해 그의 사촌 스폴레토의 구이도 4세는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베네벤토 공국을 정복했다. 897년 베네벤토의 라델히스 2세의 복위 이후 베네벤토에서 그의 통치가 인정되었다.
2.4. 법률 및 행정 개혁
람베르토는 교황청과 협력하여 아버지 구이도 3세의 정책인 "새로운 프랑크 왕국"(renovatio regni Francorum라틴어)을 계승했다. 그는 아버지처럼 프랑크식 카피툴라리아를 발행할 수 있었는데, 사실상 그가 이를 발행한 마지막 통치자였다. 898년, 그는 아리만니(arimanni라틴어)가 봉건 영주에게 제공해야 하는 봉사를 착취하여 봉신들을 위한 베네피케움(benefice라틴어)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또한, 그의 궁정에서는 우티넨 로마법(Lex Romana Utinensis라틴어)이 편찬되었다.
2.5. 시신 재판 (교황 포르모소 재판)
시체 재판은 람베르토의 통치 기간 중 가장 논란이 많았던 사건이자, 그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비판의 주요 근거가 되는 사건이다.
897년 초, 람베르토는 어머니 아겔트루드, 사촌 구이도 4세와 함께 로마로 가서 자신의 황제위를 재확인받으려 했다. 이때 복수심에 불타던 람베르토와 아겔트루드는 자신들의 영향력으로 선출된 교황 스테파노 6세를 설득하여 죽은 교황 포르모소의 시신을 여러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하도록 했다. 이 재판은 "시체 재판"(Cadaver Synod라틴어)으로 알려져 있다. 포르모소의 시신은 무덤에서 파헤쳐져 교황의 의복이 벗겨지고 훼손된 채 재판정에 세워졌다. 심판관들이 죄를 물으면 포르모소 시신 뒤에 있는 인물이 시신의 손가락을 움직여 죄를 자복하는 식의 재판이 진행되었다. 이 재판에서 교황 스테파노 6세는 포르모소의 교황 선출이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고, 그가 시행한 모든 교회 훈령과 성직자 임명을 무효화했다. 이후 스테파노 6세는 포르모소의 시신을 로마 시내 거리로 끌고 다니며 조리돌림한 뒤 테베레강에 던져 빠뜨리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898년 1월, 교황 요한네스 9세가 즉위하면서 판결은 뒤집혔다. 요한네스 9세는 로마와 라벤나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포르모소를 복권시키고, 스테파노 6세의 재판과 그 교령들을 불법으로 규정하며 파기했다. 또한 스테파노 6세와 그 일파에게 폐위당했던 성직자들을 복권시켰다.
3. 사상 및 통치 철학
람베르토는 아버지 구이도 3세의 "새로운 프랑크 왕국"(Renovatio regni Francorum라틴어)이라는 정책을 계승하며, 프랑크 왕국의 갱신을 추구했다. 그의 통치 철학은 카롤링거 왕조의 전통을 존중하고 이를 이탈리아에 적용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는 로타르 1세의 824년 로마 헌장(Constitutio Romana라틴어)을 재확인하여 교황 선출 시 황제의 사절이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함을 명시하는 등, 교황청에 대한 황제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이는 혼란스러운 이탈리아 상황 속에서 황제의 권위를 확립하고 질서를 회복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우티넨 로마법(Lex Romana Utinensis라틴어)을 제정하는 등 법률 및 행정 개혁을 통해 통치 기반을 다지려 했다.
4. 개인 생활 및 가족
람베르토는 생캉탱과 페로네 백작 피핀 2세의 딸인 아델라이드와 결혼했다. 그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 증조부: 낭트의 람베르토 1세(~836), 낭트 백작
- 증조모: 롬바르디아의 아델라이드, 피피노 카를로만의 딸, 샤를마뉴의 손녀
- 할아버지: 스폴레토의 구이도 1세(~860), 스폴레토 공작
- 할머니: 베네벤토의 이타, 베네벤토의 싸이코 딸
- 백부: 스폴레토의 람베르토 1세
- 사촌: 스폴레토의 구이도 2세
- 백부: 스폴레토의 람베르토 1세
- 아버지: 스폴레토의 구이도 3세, 스폴레토 공작, 이탈리아의 왕, 황제
- 어머니: 아겔트루드(~923년 8월 27일), 베네벤토 공작 아델히스의 딸
- 형제: 스폴레토의 구이도 4세, 스폴레토 공작
- 부인: 아델라이드, 생캉탱과 페로네 백작 피핀 2세의 딸
- 외할아버지: 아델히스(~878년 5월), 베네벤토 공작
- 외할머니: 아겔트루드
- 외증조부: 라델히스(~851), 베네벤토 공작
- 외삼촌: 라델히스 2세(~907)
- 장인: 피핀 2세(815/817~850/855), 피피노 카를로만의 서손자
5. 죽음
898년 10월 15일, 람베르토는 밀라노 남부 마렝고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중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마기눌프의 아들 위그에 의한 암살설이며, 다른 하나는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는 것이다. 주요 사료인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는 암살설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암살자로 위그를 지목하기도 했다. 그의 시신은 피아첸차에 매장되었다.
리우트프란트는 람베르토를 "우아한 젊은이"(elegans iuvenis라틴어)이자 "엄격한 사람"(vir severus라틴어)으로 기억했다. 그의 묘비명(라틴어 애도가)은 다음과 같다.
- Sanguine præcipuō Francōrum germinis ortus라틴어
- Lambertus fuit hīc Caesar in Urbe potēns라틴어
- Alter erat Cōnstantīnus, Theodōsius alter라틴어
- Et prīnceps pācis clārus amōre nimis라틴어
- 프랑크족의 뛰어난 혈통으로 태어났으니
- 람베르토는 이곳 도시(로마)에서 강력한 황제였다.
- 그는 또 다른 콘스탄티누스 1세였고, 또 다른 테오도시우스 1세였으며,
- 평화를 사랑하여 너무나도 명성이 드높은 군주였다.
람베르토에게는 남자 후계자가 없었으며, 그의 죽음 이후 스폴레토 공작위는 그의 동생 스폴레토의 구이도 4세가 계승했다. 그러나 구이도 4세는 알베리크 1세에게 살해당하며 스폴레토 공작직과 이탈리아 남부 지역의 패권은 알베리크 가문과 마로치아 가문이 차지하게 된다. 람베르토의 죽음은 이탈리아 왕국(regnum Italicum라틴어)과 로마 제국(imperium Romanum라틴어)을 혼란에 빠뜨렸고, 여러 계승 후보자들 간의 경쟁이 격화되었다. 람베르토가 죽은 지 며칠 만에 프리울리의 베렝가리오 1세가 파비아를 차지했다.
6. 평가 및 유산
람베르토 2세의 통치와 행동은 후대 역사가들에게 다양한 평가를 남겼으며, 특히 시체 재판은 그의 유산에 대한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6.1. 긍정적 평가
람베르토는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에 의해 "우아한 젊은이"이자 "엄격한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정책인 "새로운 프랑크 왕국"을 계승하며 혼란스러운 이탈리아에 카롤링거 왕조의 법률 및 행정 전통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가 발행한 카피툴라리아는 이러한 노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이며, 그는 이러한 전통을 이어나간 마지막 통치자였다. 또한 로타르 1세의 로마 헌장을 재확인하여 교황 선출에 황제의 입회를 의무화하는 등,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고 질서를 회복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6.2. 비판 및 논란
람베르토의 통치에 대한 가장 큰 비판과 논란은 단연 시체 재판과 관련되어 있다. 죽은 교황의 시신을 파헤쳐 재판하고 훼손한 이 사건은 중세 교회사에서 가장 잔인하고 부도덕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며, 람베르토와 그의 어머니 아겔트루드의 복수심과 정치적 야심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결과로 평가된다. 이러한 행위는 그의 통치에 대한 도덕적 정당성을 크게 훼손시켰다. 또한 그의 재위 기간 내내 케른텐의 아르눌프와 프리울리의 베렝가리오 1세 등 경쟁자들과의 끊임없는 권력 투쟁으로 이탈리아가 혼란에 빠졌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의 죽음 이후 이탈리아가 심각한 혼란기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은 그가 안정적인 통치 기반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6.3. 후대에 미친 영향
람베르토의 죽음은 이탈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에게 남자 후계자가 없었고, 그의 죽음 이후 이탈리아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는 여러 경쟁자들 사이에서 심각한 혼란과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 람베르토의 죽음 직후 베렝가리오 1세가 파비아를 점령하는 등 이탈리아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혼란기를 겪게 되었다. 이는 이후 수십 년간 이탈리아의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시체 재판은 교황청의 권위와 도덕성에 대한 심각한 논란을 야기했으며, 이후 교황청 내부의 개혁 논의에 영향을 미쳤다.
7. 관련 항목
- 케른텐의 아르눌프
- 신성 로마 제국
- 스폴레토의 구이도 3세
- 스폴레토의 구이도 1세
- 피피노 카를로만
- 스폴레토 공작가
- 이탈리아
- 교황 포르모소 시신 재판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