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라우라 바시는 1711년 이탈리아 볼로냐의 부유한 변호사 주세페 바시와 마리아 로사 체사리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정확한 출생일은 문헌에 따라 10월 20일, 29일, 31일, 11월 29일 등으로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볼로냐 대학교와 학술 자료들은 10월 29일을 가장 유력한 날짜로 보고 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바시는 정규 학교 교육을 받지 않고 개인 교습을 통해 학문을 익혔다. 5세부터 사촌인 로렌초 스테가니 신부에게 라틴어, 프랑스어, 수학을 배웠다. 스테가니 신부는 그녀에게 라틴어를 읽는 것을 넘어 라틴어로 말하고 쓰는 법을 가르쳤으며, 바시는 학자 경력 내내 라틴어로 강연하고 논문을 발표했다. 13세부터 20세까지 7년 동안은 가족 주치의이자 볼로냐 대학교 의학 교수였던 가에타노 타코니에게 철학, 형이상학, 논리학, 자연 철학을 배웠다. 바시는 타코니의 가르침을 받던 중 뉴턴 역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타코니는 그녀가 논란이 적은 데카르트주의에 집중하기를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바시는 뉴턴 과학에 대한 흥미를 키워나갔다.
2. 학문적 성취와 인정
바시의 교육과 지성은 1731년 볼로냐 대주교가 된 프로스페로 로렌치니 람베르티니(이후 교황 베네딕토 14세)의 주목을 받았다. 람베르티니는 바시의 공식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2.1. 박사 학위 취득 및 교수 임명
람베르티니의 주선으로 1732년 4월 17일, 20세의 바시는 푸블리코궁의 살라 델리 안치아니(Sala degli Anziani)에서 볼로냐 대학교 교수들(가브리엘레 만프레디, 야코포 바르톨로메오 베카리, 프란체스코 마리아 차노티 등) 앞에서 49개의 논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변론했다. 이 논제들은 대부분 물리학 관련이었으며, 일부는 형이상학과 논리학에 관한 내용도 포함했다. 1732년 5월 12일, 볼로냐 대학교는 그녀에게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이로써 바시는 과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여성이자, 1678년 엘레나 코르나로 피스코피아 이후 54년 만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세계에서 두 번째 여성이 되었다. 당시 그녀는 대중적으로 "볼로냐의 미네르바"로 불리며 명성을 얻었다. 또한 1732년 3월 20일, 그녀는 볼로냐 과학 연구소의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1732년 6월 27일, 바시는 볼로냐 대학교의 본관인 아르키지나시오 디 볼로냐에서 12개의 추가 논제를 변론하며 교수직 임명을 청원했다. 이 논제들은 화학, 물리학, 수리학, 수학, 역학, 기술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다. 1732년 10월 29일, 볼로냐 의회와 대학교는 바시의 교수직 임명을 승인하고 12월에 그녀를 자연 철학 교수(현대의 명예직과 유사)로 임명했다. 이로써 그녀는 세계 최초의 유급 여성 강사가 되어 학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3. 결혼과 가족
1738년 2월 7일, 바시는 볼로냐 대학교의 의사이자 해부학 강사였던 주세페 베라티와 결혼했다. 그들은 학문적으로도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했으며, 결혼을 통해 바시가 실험 물리학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두 사람 사이의 자녀 수는 명확하지 않으며, 일부 기록에는 8명, 다른 기록에는 12명으로 보고되기도 한다. 세례 기록에는 8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이 중 카테리나(1739년생), 카테리나(1742년생), 플라미니오(1751년생)는 유아기에 사망했다. 그러나 다섯 명의 자녀는 유아기를 넘겨 성인이 되었다. 이들은 산 페트로니오의 참사회원이자 콜레지오 몬탈토의 신학 교수가 된 조반니(1738~1800), 치로(1744~1827), 수녀가 된 카테리나(1745~1768), 참사회원이 된 자코모(1749~1818), 그리고 의사이자 과학 연구소의 실험 물리학 교수가 되어 유일하게 후손을 남긴 파올로(1753~1831)이다.
4. 볼로냐 대학교에서의 경력
바시는 볼로냐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다양한 학문적 활동을 수행했으나, 당시의 사회적 제약으로 인해 그 활동 방식이 변화하고 발전했다.

4.1. 초기 교수 활동과 제약
교수로 임명된 후 그녀의 첫 강의 제목은 라틴어로 "물은 다른 모든 물체의 자연적 요소이며 우주의 일부이다"(De aqua corpore naturali elemento aliorum corporum parte universi물은 다른 모든 물체의 자연적 요소이며 우주의 일부이다라틴어)였다. 그러나 당시 대학은 여성이 사적인 삶을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바시는 남성 교수들보다 공개 강연에 더 많은 제약을 받았다. 1746년부터 1777년까지 그녀는 중력 문제부터 전기에 이르기까지 매년 단 한 번의 공식적인 논문 발표만을 허용받았다. 그녀는 대학에 최소 31개의 논문을 제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39년, 바시는 정식 교수직을 위한 청원을 제출했고, 이는 람베르티니와 교황청 주재 볼로냐 대사관 서기 플라미노 스카르셀리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청원은 다시 거부되었고, 대신 1740년(또는 1759년)에 자택에서 개인 수업을 시작하고 실험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이로써 그녀는 대학의 제약에서 벗어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탐구할 수 있었다.
바시는 상징적이고 정치적인 인물로서 의회로부터 다양한 행사에 참석할 것을 요청받았다. 티켓이 공개되어 누구나 참석할 수 있었던 카니발 해부학 강연은 대학 공공생활의 중심적인 행사였으며, 많은 외국인과 지역 중요 인사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녀는 1734년부터 이 행사에 매년 참석하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사가 되면서 대학의 급여도 인상되었다. 바시는 연간 1200 ITL를 받았으며, 이는 당시 대학 내에서 도메니코 갈레아치와 함께 가장 높은 급여였다. 그녀는 이렇게 늘어난 급여를 새로운 실험 장비 구입에 사용했다.
4.2. 실험 물리학 강의 및 연구
주세페 베라티와의 결혼 후, 바시는 자택에서 정기적으로 강의를 할 수 있었다. 1760년대 동안 바시와 그녀의 남편은 전기에 대한 실험 연구를 함께 진행했다. 이들의 연구는 장앙투안 놀레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볼로냐로 와서 전기를 연구하도록 이끌었다.
바시는 주로 뉴턴 물리학에 관심을 가졌고 28년 동안 이 주제에 대한 강의를 진행했다. 그녀는 이탈리아에 뉴턴의 물리학 및 자연 철학 사상을 도입하는 데 핵심적인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또한 물리학의 모든 측면에서 자체적인 실험을 수행했다. 대학 커리큘럼에 포함되지 않았던 뉴턴 물리학과 벤저민 프랭클린의 전기 이론을 가르치기 위해 바시는 개인 수업을 진행했다. 그녀는 생애 동안 28편의 논문을 저술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물리학과 수리학에 관한 것이었지만, 책을 출판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논문 중 인쇄된 것은 4편에 불과하다.
바시는 실험을 위한 재정적 제약에 직면하기도 했다. 1755년 7월 16일 플라미노 스카르셀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저의 물리 실험에 관해서는,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비용 때문에 제가 이를 발전시키고 완성하려면 어떤 형태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거의 절망적입니다"라고 언급했다.
4.3. 실험 물리학 석좌 교수
1772년, 실험 물리학 교수였던 파올로 발비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발비의 오랜 조교는 바시의 남편 베라티였지만, 바시는 자신이 그 공석을 채울 수 있다고 믿었다. 마침내 1776년, 65세의 나이에 그녀는 볼로냐 과학 연구소의 실험 물리학 석좌 교수로 임명되었고, 남편 베라티는 그녀의 조교가 되었다. 여성으로서 과학계에 평생에 걸쳐 큰 족적을 남기고 학계에서 여성의 지위를 높인 바시는 이 직위를 맡은 지 2년 후 사망했다.
5. 과학적 연구 및 기여
라우라 바시는 이탈리아 과학계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특히 뉴턴 물리학의 보급과 다양한 실험 연구, 그리고 당대 주요 학자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학문 발전에 이바지했다.
5.1. 뉴턴 물리학의 보급
바시는 이탈리아에 아이작 뉴턴의 과학 이론과 자연 철학을 소개하고 대중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28년 동안 뉴턴 물리학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며 이탈리아 학계에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5.2. 주요 연구 분야
바시의 주요 연구 분야는 유체 역학, 전기학, 고전 역학 등이었다. 그녀는 대학 커리큘럼에 포함되지 않았던 뉴턴 물리학과 벤저민 프랭클린의 전기 이론을 가르치기 위해 자택에서 사설 강의실을 열고 개인 강의를 진행했다. 특히 1760년대 동안 남편 주세페 베라티와 함께 전기에 대한 실험 연구를 활발히 수행했다. 이들의 전기 실험은 장앙투안 놀레와 같은 저명한 학자들이 볼로냐로 와서 전기를 연구하도록 이끌었으며, 전기 관련 연구 발전에 기여했다. 그녀는 전기의 치료 효과에도 주목하여 남편의 연구에 기여했으며, 남편 주세페의 전기 요법에 대한 논문은 유럽 전역에 알려져 프랑스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바시는 벤저민 프랭클린과 거의 동시대인 1740년대에 전기 실험을 수행했으며, 프랑스의 물리학자 장앙투안 놀레와 프랭클린 등과 서신을 교환했다.
5.3. 학술 교류 및 서신
1732년 푸블리코궁에서 열린 바시의 학위 변론, 수여식, 그리고 첫 강의는 볼로냐의 가장 중요한 정부 건물 중 한 곳에서 진행되었으며, 단순한 학술 행사를 넘어 사회적으로 큰 의미를 가졌다. 이 행사에는 대학 교수진과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황 특사, 대주교, 곤팔로니에레, 원로원 의원, 판사 등 도시의 주요 정치 및 종교 인사들이 참석했다. 또한 "볼로냐의 모든 귀부인과 모든 귀족"이 참관하여 그녀의 학문적 성취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보여주었다.
바시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 중 한 명은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된 프로스페로 람베르티니 추기경이었다. 그는 그녀의 과학 연구를 지속적으로 격려했으며, 볼로냐 대학교를 꾸준히 지원하고 다른 연구소 회원들이 바시를 교수들로부터 분리하려 할 때마다 개입하여 그녀를 보호했다.
1745년, 교황이 된 베네딕토 14세는 25명의 학자로 구성된 엘리트 그룹인 베네데티니("베네딕트파", 자신의 이름을 따서 명명)를 설립했다. 바시는 이 그룹에 임명되기 위해 강력히 노력했으나, 다른 학자들로부터 엇갈린 반응을 받았다. 결국 베네딕토 교황은 그녀를 유일한 여성 회원으로 임명했지만, 남성 회원들과 달리 투표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현존하는 바시의 과학 저작물은 많지 않지만, 그녀의 과학적 영향력은 볼테르, 체사레 베카리아, 프란체스코 알가로티, 루저 보스코비치, 샤를 보네, 장앙투안 놀레, 파올로 프리시, 라차로 스팔란차니, 알레산드로 볼타 등 수많은 학자들과의 서신 교류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볼테르는 한때 그녀에게 "런던에는 바시가 없고, 영국이 뉴턴을 배출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볼로냐의 학회가 그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하련다"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1737년 『숙녀를 위한 뉴턴주의』(Neutonianismo per le dame숙녀를 위한 뉴턴주의이탈리아어)를 출판한 프란체스코 알가로티는 바시의 학위 수여식을 기념하는 여러 편의 시를 쓰기도 했다.
6. 출판물
바시는 행정 업무, 가족 문제, 그리고 잦은 출산으로 인한 질병 때문에 출판물이 많지 않으며, 이는 그녀가 볼로냐 대학교에 기여한 바의 극히 일부만을 반영한다. 그녀의 과학 저작물은 1852년 도메니코 피아니가 출판한 『고대 아카데미의 저작 목록, 개별 저자별로 수록』(Catalogo dei Lavori dell'Antica Accademia, raccolti sotto i singoli autori고대 아카데미의 저작 목록, 개별 저자별로 수록이탈리아어)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녀의 출판된 주요 저작물은 다음과 같다.
- De aqua corpore naturali elemento aliorum corporum parte universi (1732년, 대학 임용을 위한 논문 모음, "물은 다른 모든 물체의 자연적 요소이며 우주의 일부이다"에 관하여)
- De Bononiensi Scientiarum et Artium Instituto atque Academia Commentarii (볼로냐 과학 예술 연구소 및 아카데미 논평)에 실린 네 편의 논문:
- De aeris compressione (1745년, "공기 압축에 관하여")
- De problemate quodam hydrometrico (1757년, "수량 측정의 특정 문제에 관하여")
- De problemate quodam mechanico (1757년, "역학의 특정 문제에 관하여")
- De immixto fluidis aere (1792년 사후 출판, "유체에 혼합된 기체에 관하여")
그 외 주요 논문은 다음과 같다.
- Sopra la compressione dell'aria (1746년, "공기의 이해에 대해")
- Sopra le bollicelle che si osservano nei fluidi (1747년, 1748년, "유체를 관찰하기 위한 통에 대해")
- Sopra l'uscita dell'acqua dai fori di un vaso (1753년, 1754년, "병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대해")
- Sopra alcune esperienze d'elettricità (1761년, "전하를 띤 물체의 실험에 대해")
- Prodromo di una serie di esperienze da fare per perfezionare l'arte della tentura (1769년, "작용하는 힘에 해당하는 연결된 물체의 처리에 대한 서론")
- Sopra l'elettricità vindice (1771년, "전기 증명에 대해")
- Sopra il fuoco e la facilità dei vari fluidi di riceverlo (1775년, "화로와 그 위에 놓인 다양한 유체의 성질에 대해")
- Su la relazione della fiamma all'aria fissa (1776년, "바람에 흩날리는 깃발에 관하여")
- Sopra la proprietà che hanno molti corpi, che ritenendo più degli altri il calore, ritengono più degli others ancora l'elettricità (1777년, "연례 해부 보고 및 열에 대한 금박의 반응, 전기를 띤 닻의 반응에 대해")
7. 평가와 영향
라우라 바시는 동시대 및 후대의 학계와 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그녀의 학문적 유산과 사회적 영향력은 여성 과학자의 지위 향상과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7.1. 긍정적 평가
바시가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후, 화가 도메니코 마리아 프라타와 조각가 안토니오 라차리는 청동으로 기념 메달을 제작했다. 메달의 앞면에는 바시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라틴어로 "당신만이 미네르바를 볼 수 있으니"(Soli cui fas vidisse Minervam당신만이 미네르바를 볼 수 있으니라틴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그녀의 뛰어난 지성과 학문적 성취를 높이 평가하는 의미였다. 그녀가 사망한 후에는 볼로냐 자연 연구소에 그녀를 기리는 대리석상이 제작되어 해양학실 위에 세워졌다.
바시는 수많은 문학 학회에 선출된 회원이었으며, 유럽의 가장 저명한 문인들과 광범위한 서신 교류를 이어갔다. 그녀는 볼로냐 과학 연구소 과학 아카데미(1732년), 모데나 디소난티 아카데미(1732년), 피렌체 아파스티티 대학(1732년), 로마 아르카디 아카데미(1737년), 모데나 피날레 플루투안티 아카데미(1745년), 레지오 에밀리아 이포콘드리아치 아카데미(1750년), 볼로냐 아르덴티 아카데미(1752년), 로베레토 아지아티 아카데미(1754년), 부세토 에모니아 아카데미(1754년), 페르모 에란티 아카데미(1755년), 코르토나 보테니카 아만티 아카데미(1758년), 폴리뇨 풀기니아 아카데미(1760년, 1761년), 코레지오 테오프네우스티 아카데미(1763년), 레카나티 플라치디 아카데미(1774년)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고전 문학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이탈리아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7.2. 비판 및 논란
바시는 여성으로서 학계에서 활동하는 데 여러 제약에 직면했다. 그녀는 남성 전용 수업을 가르칠 수 없었고, 공개 강연 기회도 제한적이었다. 1745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설립한 베네데티니 그룹에 유일한 여성 회원으로 임명되었지만, 남성 회원들과 달리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제약들은 당시 사회의 여성에 대한 편견과 학계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8. 사망
라우라 바시는 1778년 2월 20일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의 건강은 잦은 임신과 출산 합병증으로 인해 악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망 원인은 "가슴 통증"(attacco di petto, 아마도 심장 마비)으로 기록되었다. 그녀의 장례식은 볼로냐의 코르푸스 도미니 성당에서 거행되었으며, 은빛 월계관이 그녀의 머리에 놓였고 베네데티나 회원들의 추모를 받았다. 그녀는 비아 탈리아피에트레(Via Tagliapietre)에 있는 성당에 동료 과학자 루이지 갈바니의 무덤 앞에 안장되었다.
9. 유산과 기념
라우라 바시의 업적과 선구적인 정신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고 있으며, 후대 과학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9.1. 기념 명칭
금성에 있는 직경 31 km 크기의 분화구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또한 볼로냐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와 '라우라 바시 베라티 거리'(Via Laura Bassi Veratti라우라 바시 베라티 거리이탈리아어)가 있다.
9.2. 과학계에 미친 영향
2018년부터 에디팅 프레스(Editing Press)는 주니어 학자, 석사 및 박사 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 3회 라우라 바시 장학금(Laura Bassi Scholarship)을 제공하고 있다.
2019년 5월 9일, 영국 남극 연구소의 쇄빙 연구선 RRS 어니스트 섀클턴이 이탈리아 국립 해양학 및 실험 지구물리학 연구소(Istituto Nazionale di Oceanografia e di Geofisica Sperimentale)에 인수되어 라우라 바시로 개명되었다. 2024년에는 이 배가 국립 남극 연구 프로그램(Programma Nazionale di Ricerche in Antartide)의 국제 협력의 일환으로 12명의 뉴질랜드 연구원들을 처음으로 태우고 활동했다.
2021년 4월 17일, 구글은 라우라 바시와 그녀의 수많은 업적을 기념하는 구글 두들을 선보였다.
10. 관련 항목
- 엘레나 코르나로 피스코피아
- 아이작 뉴턴
- 루이지 갈바니
- 마리아 아녜시
- 마리 스코도프스카 퀴리
- 소피아 엘리사베트 브렌너
- 과학 분야 여성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