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디터 회네스는 서독 울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이스터 정육점 주인이자 1949년 11월 13일에 VfB 울름을 공동 설립한 에르빈 회네스였다.
1.1. 아마추어 및 프로 데뷔
회네스는 6세부터 14세까지 VfB 울름에서 골키퍼로 아마추어 선수 생활을 했다. 그는 형 울리와 함께 1960-61 시즌 D-유스 부문에서 1지구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1967년부터 1973년까지는 TSG 울름 1846에서 뛰었다.
1973년, 20세의 나이에 그는 3부 리그인 베어반트리가 뷔르템베르크의 VfR 알렌으로 이적하며 프로 무대에 발을 들였다. 알렌에서의 첫 시즌에 그는 23골을 기록하며 팀 내 득점 2위에 올라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5개 트랙의 레기오날리가가 2개 트랙의 2. 분데스리가로 대체되는 리그 개편으로 인해 VfR 알렌은 승격하지 못하고 다음 시즌에도 3부 리그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회네스와 그의 팀은 다시 한번 우승을 차지했지만, 승격 플레이오프에서는 실패했다.
1975년, 회네스는 당시 2부 리그에 속해 있던 VfB 슈투트가르트에 입단하며 프로 선수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975년 9월 13일 (7라운드) 1. FSV 마인츠 05와의 홈 경기에서 0-2로 패하며 데뷔전을 치렀다. 첫 골은 10월 15일 (11라운드) SV 뢰힐링 푈클링겐과의 홈 경기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기록했다.
1.2. VfB 슈투투가르트 시절
VfB 슈투트가르트에서 두 시즌 동안 19골을 기록한 디터 회네스는 팀이 분데스리가로 승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77년 8월 6일 (1라운드) 미래의 소속팀인 FC 바이에른 뮌헨과의 경기에서 3-3으로 비기며 분데스리가 데뷔전을 치렀다. 분데스리가 첫 골은 8월 31일 (5라운드) 함부르거 SV와의 홈 경기에서 1-2로 패했지만, 1-1 동점골을 기록하며 터뜨렸다.
1.3. FC 바이에른 뮌헨 시절
1978-79 시즌, 16골을 기록하며 슈투트가르트가 리그 2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한 후, 회네스는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했다. 그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개인적으로나 팀적으로나 큰 성공을 거두며 5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DFB-포칼 우승을 경험했다. 강력한 스트라이커이자 뛰어난 헤딩 능력을 자랑했던 그는 바이에른 소속으로 다섯 시즌 동안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으며, 독일 최상위 리그에서만 총 288경기 출전 127골을 기록했다. 그는 1987년 34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분데스리가 224경기에서 102골을 넣었다. 또한 바이에른 뮌헨 소속으로 유러피언컵 52경기에서 26골을 기록하며 경기당 약 0.5골의 높은 득점률을 보였다.
회네스는 1979-80 UEFA컵에서 바이에른을 준결승으로 이끌었으며, 7골로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1982년에는 유러피언컵 결승에 진출했지만 아스톤 빌라에게 패했다. 이 대회에서도 그는 7골로 득점왕을 차지했다. 뮌헨 시절, 회네스는 특히 헤딩을 이용한 득점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강렬한 경쟁심을 가진 선수로 알려졌다. 이러한 명성은 1982 DFB-포칼 결승전에서 더욱 확고해졌다. 당시 1. FC 뉘른베르크 선수 알로이스 라인하르트와의 충돌로 머리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터번처럼 머리에 붕대를 감고 거의 한 시간 동안 경기를 계속했으며, 결국 89분에 헤딩으로 4-2 승리골을 기록했다.
1984년 2월 25일, 회네스는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와의 홈 경기에서 6-0으로 승리하는 동안 21분 만에 5골을 터뜨리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그의 58번째이자 마지막 유럽 클럽 대항전 경기는 은퇴 시즌인 1986-87년에 FC 포르투와의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패배하면서 치러졌다.
1.4. 개인 수상 및 주요 성과 (선수)
- DFB-포칼 득점왕: 1978-79 시즌
- UEFA컵 득점왕: 1979-80 시즌
- 유러피언컵 득점왕: 1981-82 시즌
2. 국가대표 경력

1979년 3월 28일, 회네스는 아헨에서 열린 노르웨이와의 B대표팀 경기에서 3-0 승리에 기여하며 첫 국가대표 경기를 치렀고, 이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했다. 1979년 12월 19일 제노바에서 열린 이탈리아 B선발팀과의 두 번째 B대표팀 경기에서도 득점하며 2-1 승리를 이끌었다.
회네스는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6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했다. 그의 국가대표 데뷔전은 1979년 5월 22일 아일랜드와의 경기로, 이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했다. 한 달 뒤 아이슬란드와의 경기에서도 득점했다 (두 경기 모두 원정 친선경기였으며, 3-1 승리로 끝났다).
이후 회네스는 7년 동안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지 않았다. 그러나 1985-86 시즌 바이에른 뮌헨에서 15골을 기록하고 더블을 달성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치자, 멕시코에서 열린 1986년 FIFA 월드컵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다. 그는 이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서독 대표팀의 일원으로 두 경기에 출전했다. 특히 아르헨티나와의 1986 FIFA 월드컵 결승전에서는 펠릭스 마가트와 교체되어 후반전에 투입되었는데, 당시 33세 173일의 나이로 이 경기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선수였다. 프란츠 베켄바워 감독의 부름을 받아 1986년 4월 9일 바젤에서 열린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골든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5월 11일 보훔에서 열린 유고슬라비아와의 1-1 무승부 경기에서는 처음으로 국가대표 경기에서 득점하지 못했다.
3. 은퇴 후 경력

선수 생활 은퇴 후, 디터 회네스는 축구계에 계속 몸담으며 다양한 경영직을 수행했다.
3.1. 스포츠 마케팅 및 초기 활동
선수 은퇴 직후, 회네스는 당시 바이에른 뮌헨의 주요 스폰서였던 컴퓨터 제조업체 코모도어 인터내셔널의 홍보 담당자로 일했다. 그해 10월, 그는 독일 가정용 컴퓨터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코모도어의 스포츠 마케팅 책임자로 새로운 역할을 맡았다. 그는 1989년 바이에른 뮌헨과의 스폰서십 계약 만료를 담당했으며, 회사의 전략적 변화에 따라 승마, 골프, 테니스, 알파인 스키와 같은 다른 스포츠 및 이벤트 마케팅에 집중했다.
3.2. VfB 슈투트가르트 단장
1990년부터 1995년까지 회네스는 그의 첫 프로팀인 VfB 슈투트가르트의 상업/제너럴 매니저로 일했다. 이는 다임러 이사회 대변인 마티아스 클라이너트를 VfB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포함하는 전문화 전략의 일환이었다.
슈투트가르트는 1991-92 시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다음 시즌에는 추가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크리스토프 다움 감독이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2차전에서 요비차 시마니치가 교체 투입된 후 정당한 이유 없이 4명의 외국인 선수를 사용한 '실수'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캄프 누에서 열린 1992-93 UEFA 챔피언스리그 1라운드 결정전에서 1-2로 패하며 대회 조별 리그 진출에 실패했다. 이후 몇 년간 클럽은 이전의 성공을 이어가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었다. 1995년 봄, 회네스는 단장으로서 비판에 직면했다. 그의 '이벤트', '마케팅', '머천다이징'과 같은 영어식 용어 사용은 슈바벤 문화의 전통적이고 소박한 가치와 잘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고, 아침에 늦게 출근한다는 비난도 받았다. 결국 회네스는 1976년부터 1990년까지 재직하며 클럽 운영을 다시 맡게 된 전임 단장 울리히 셰퍼로 교체되었다.
3.3. 헤르타 BSC 부회장 및 단장
1995년 11월, 1. FC 뉘른베르크의 회장 미하엘 A. 로스는 회네스를 영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지만, 회네스가 텔레비전 회사의 제너럴 매니저 제안을 수락하면서 영입에 실패했다. 1997년 4월, 회네스는 텔레비전 회사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3월부터 해고된 카를-하인츠 륄의 임시 대행으로 일한 후 또 다른 분데스리가 클럽인 헤르타 BSC의 부회장이 되었다. 그해 여름 클럽이 분데스리가로 승격한 후, 팀은 최상위 리그에 안착했으며, 회네스의 리더십 아래 12시즌 동안 7번이나 국제 컵 대회에 진출했다. 이 기간 동안 팀은 8번이나 리그 6위 안에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상업/제너럴 매니저로 전환했으며, 2009년 6월 7일 자신의 경영 방식에 대한 이견으로 계약 만료 1년 전에 요청에 따라 팀을 떠났다.
3.4. VfL 볼프스부르크 단장
2009년 12월 21일, 회네스는 VfL 볼프스부르크의 새로운 제너럴 매니저로 발표되었고, 2010년 1월 15일에 공식적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펠릭스 마가트가 클럽으로 복귀한 후, 그의 계약은 2011년 3월 17일에 해지되었다.
4. 개인사
4.1. 가족 관계
디터 회네스의 형인 울리 회네스 또한 분데스리가에서 성공적인 공격수였으며,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활약한 경력이 있다. 디터가 바이에른 뮌헨에 도착할 무렵 울리는 팀을 떠났으며, 울리는 이후 바이에른 뮌헨의 제너럴 매니저와 회장으로서 오랜 경력을 쌓았다.
디터의 아들인 세바스티안 회네스는 전 축구 선수이자 현직 축구 감독이다. 그는 VfB 슈투트가르트, TSG 1899 호펜하임, 헤르타 BSC의 2군 팀 등에서 U19 팀 선수로 뛰었다. 베를린에서는 U-23 팀의 주장을 맡기도 했다. 2019년 6월부터는 여러 유소년 코치직을 거쳐 새로 승격한 3부 리그 팀 FC 바이에른 뮌헨 II의 감독을 맡아 곧바로 3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2020년 7월부터 2021-22 시즌 종료까지 TSG 1899 호펜하임의 감독을 역임했다.
4.2. 교육 및 기타 활동
회네스는 울름의 슈바르트 김나지움에 다녔으며, 1972년에 아비투어를 취득했다. 튀빙겐에서는 영어, 지리, 스포츠 과목의 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고향인 울름의 도시 후원자로서 2010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회 프로젝트인 '우리는 아프리카를 돕는다'를 지원했다. 또한 '존중! 인종차별은 설 자리가 없다'는 캠페인의 앰버서더로 활동하고 있다. 분데스리가 경영자 경력 이후, 회네스는 뮌헨으로 돌아와 2012년에 컨설팅 회사를 설립했다. 회네스 형제는 여가 시간에 골프를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경영진으로서의 주요 업적 및 수상
디터 회네스는 선수 은퇴 후 축구 클럽 경영진으로서 다음과 같은 주요 업적을 달성했다.
| 클럽 | 업적 | 연도 |
|---|---|---|
| VfB 슈투트가르트 | 분데스리가 우승 | 1991-92 |
| VfB 슈투트가르트 | DFL-슈퍼컵 우승 | 1992 |
| 헤르타 BSC | DFL-리가포칼 우승 | 2001, 2002 |
6. 평가 및 영향력
디터 회네스는 선수와 경영인으로서 독일 축구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선수 시절에는 강력한 스트라이커이자 뛰어난 헤딩 능력을 겸비한 선수로 평가받았다. 특히 FC 바이에른 뮌헨에서 수많은 득점을 기록하며 팀의 여러 우승에 기여했고, 1982 DFB-포칼 결승전에서 보여준 투혼은 그의 강렬한 경쟁심을 잘 보여주는 일화로 회자된다.
은퇴 후 경영인으로 변신한 그는 VfB 슈투트가르트, 헤르타 BSC, VfL 볼프스부르크 등 여러 클럽에서 단장 및 부회장을 역임하며 클럽의 전문화와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VfB 슈투트가르트의 분데스리가 우승과 헤르타 BSC를 국제 대회 단골 진출팀으로 만든 것은 그의 경영 능력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업적이다. 비록 일부 클럽에서는 이견으로 인해 계약이 조기 종료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클럽의 재정 안정화와 스포츠적 성공을 동시에 추구하며 현대 축구 경영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존중! 인종차별은 설 자리가 없다'와 같은 사회 공헌 활동에 참여하며 축구장 밖에서도 긍정적인 영향력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