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두아르테 바르보사(Duarte Barbosa, 1480년경 ~ 1521년 5월 1일)는 포르투갈령 인도에서 활동한 포르투갈의 작가이자 관료였다. 그는 1500년부터 1516년 사이에 코치의 무역관에서 서기로 일했으며, 현지 언어인 말라얄람어의 통역사 역할을 수행했다. 1516년경에 집필한 그의 저서 『두아르테 바르보사의 책』(Livro de Duarte Barbosa리브루 드 두아르테 바르보사포르투갈어)은 포르투갈 여행 문학의 초기 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두아르테 바르보사라는 이름의 인물이 두 명이었을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이론은 1529년 칸누르섬에 동명의 서기가 있었다는 주앙 드 바루스의 기록에 근거하지만, 대부분의 문헌은 『두아르테 바르보사의 책』의 저자와 마젤란 원정대 참여자가 동일 인물임을 확인한다. 1519년, 바르보사는 그의 매형인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이끄는 세계 일주 항해에 참여했다. 그는 1521년 세부섬의 막탄 전투가 있은 지 며칠 후, 필리핀의 라자 후마본이 주최한 연회에서 살해당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두아르테 바르보사의 아버지는 디에고 바르보사였다. 디에고는 브라간사 공작 알바로의 하인이었으며, 1501년 알바로, 바르톨로메우 마르키오니, 그리고 주앙 다 노바가 선장으로 있던 제3차 포르투갈 인도 함대와 함께 인도로 향하는 합작 사업에 참여했다.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동안, 두아르테는 코치에 있는 그의 삼촌인 곤살루 질 바르보사와 함께 지냈다. 곤살루는 무역관의 대리인으로 일했으며, 이전에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의 1500년 함대와 함께 여행한 경험이 있었다.
q=Kochi, India|position=right
2.1. 어린 시절과 교육
1502년, 삼촌 곤살루는 칸누르로 전근을 가게 되었고, 두아르테 바르보사도 그를 따라 칸누르로 갔다. 그곳에서 바르보사는 현지 언어인 말라얄람어를 배웠다.
q=Kannur, India|position=left
3. 인도에서의 경력
두아르테 바르보사는 인도에서 포르투갈 관료로서 여러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503년, 바르보사는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가 칸누르의 라자와 접촉할 때 통역사로 활동했다. 1513년에는 칸누르의 서기로서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 수석 서기 직위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514년,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는 바르보사의 통역 능력을 활용하여 코치 국왕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시도했다. 1515년에는 알부케르크의 지시로 코지코드로 파견되어 새로운 총독이 이끌 홍해 원정에 사용될 두 척의 선박 건조를 감독했다.
q=Kozhikode, India|position=right
4. 저술 활동: 두아르테 바르보사의 책
두아르테 바르보사는 인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중요한 저술 활동을 남겼다.
1515년,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의 지시로 코지코드에서 선박 건조를 감독한 후, 바르보사는 포르투갈로 돌아와 자신의 원고인 『두아르테 바르보사의 책』(Livro de Duarte Barbosa리브루 드 두아르테 바르보사포르투갈어)을 완성했다. 이탈리아 작가 조반니 바티스타 라무시오의 서문에 따르면, 바르보사는 1516년에 외국의 문화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담은 이 원고를 완성했다. 이 책은 한동안 라무시오의 증언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었으나, 19세기 초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원본 원고가 발견되어 출판되었다. 『두아르테 바르보사의 책』은 포르투갈 여행 문학의 가장 초기 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q=Lisbon, Portugal|position=left
5. 마젤란과 함께한 세계 일주 항해
두아르테 바르보사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 일주 항해에 참여했다.
5.1. 항해 참여 및 역할
인도에서의 자신의 직위에 불만을 품었던 두아르테 바르보사는 스페인 남부의 세비야에서 여러 포르투갈인들과 합류했다. 그의 아버지 디에고 바르보사는 브라간사 공작 알바로를 따라 세비야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알바로는 시장이 되었으며 디에고는 세비야 성의 성주가 되었다. 1516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세비야로 이주하여 디에고와 친분을 쌓았는데, 두 사람 모두 인도를 여행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곧 마젤란은 두아르테의 누이인 베아트리스와 결혼하여 두아르테 바르보사의 매형이 되었고, 이로써 바르보사 가문과 마젤란 가문의 유대가 강화되었다.
q=Seville, Spain|position=right
1519년 8월 10일, 두아르테 바르보사는 친구 주앙 세랑과 함께 세비야를 떠나 마젤란의 세계 일주 항해에 나섰다. 항해 중 그의 호기심은 그를 여러 차례 탐험대에서 벗어나 현지인들과 어울리게 만들었고, 이는 마젤란의 불만을 샀으며 심지어 마젤란이 그를 체포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그러나 1520년 4월 2일, 푸에르토 산 훌리안에서 발생한 폭동을 진압하는 데 두아르테 바르보사의 도움이 결정적이었고, 이후 바르보사는 빅토리아호의 선장이 되었다.
q=Puerto San Julian, Argentina|position=left
5.2. 마젤란 사후와 죽음
안토니오 피가페타의 기록에 따르면, 1521년 4월 27일 필리핀 막탄 전투에서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사망한 후, 바르보사는 전투의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명이었으며 주앙 세랑과 함께 탐험대의 공동 지휘관이 되었다. 바르보사는 마젤란의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엔리케를 육지에 내려주려 했으나 포기했다. 출항 전 마젤란의 유언에 따라 엔리케에게 주어졌던 해방에도 불구하고, 두아르테 바르보사 또는 주앙 세랑은 그를 마젤란의 미망인에게 노예로 팔겠다고 위협했다. 세부섬 학살 사건의 책임 소재에 대해서는 안토니오 피가페타와 막시밀리아누스 트란실바누스의 기록이 엇갈린다. 트란실바누스는 마젤란의 전 노예였던 엔리케를 주앙 세랑이 학대하여 엔리케가 학살을 모의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피가페타는 두아르테 바르보사를 비난한다. 이후 엔리케의 이러한 두려움은 그가 라자 후마본과 공모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진다.
1521년 5월 1일, 바르보사를 비롯한 모든 탐험대원들은 스페인 국왕을 위한 선물을 받기 위해 필리핀 세부 근처 해안에서 라자 후마본이 주최한 연회에 초대되었다. 그곳에서 바르보사와 많은 다른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주앙 세랑은 원주민들에게 붙잡혀 무기와 교환되려 했으나, 버려진 채 조종사 주앙 카르발류에 의해 구출되었다. 엔리케는 이후 사라졌다.
q=Cebu, Philippines|position=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