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다비드 아우아테는 1977년 10월 17일 이스라엘의 나사렛 일리트 (현재 노프 하갈릴)에서 세파르디 유대인 혈통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카비 하이파 FC의 유소년 팀에서 축구를 시작했으며, 당시 주전 골키퍼인 니르 다비도비치의 후보 선수였다. 1군 출전 기회를 얻기 위해 하포엘 나사렛 일리트 FC로 임대되었으나, 실질적인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이후 하포엘 하이파 FC로 이적하면서 주전 골키퍼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지만, 이곳에서도 처음에는 주전 자리를 잡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1998-99 시즌 초반, 팀의 주전 골키퍼인 아비 페레츠가 부상을 당하면서 아우아테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하포엘 하이파는 그 해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아우아테는 그의 뛰어난 활약으로 찬사를 받았다. 페레츠가 부상에서 회복했을 때쯤, 아우아테는 팀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2. 클럽 경력

다비드 아우아테는 이스라엘 리그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후 스페인 라리가로 진출하여 유럽 무대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2.1. 이스라엘 리그에서의 경력
하포엘 하이파에서의 활약은 1999년 이스라엘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2001-02 시즌에는 심각한 부상을 당한 다비도비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마카비 하이파 FC로 복귀했으며, 그는 논쟁의 여지 없는 주전으로 자리매김하며 팀의 이스라엘 프리미어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2002-03 시즌에는 마카비 하이파의 주전 골키퍼로서 UEFA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했는데, 이는 이스라엘 팀이 챔피언스리그 조별 리그에 진출한 첫 사례였다. 마카비 하이파는 강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며 조 3위를 차지했고, 리그에서는 마카비 텔아비브에 이어 준우승을 기록했다. 그의 견고한 활약은 유럽 축구로의 이적을 이끌었고, 2003년 7월 17일 스페인 클럽 라싱 산탄데르와 계약했다.
2.2. 스페인 라리가에서의 경력
아우아테의 스페인 이적은 그가 프랑스 여권을 취득하여 외국인 선수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수월했다. 2004-05 시즌에는 리카르도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임대 복귀하면서 주전 라인업에 합류했고, 이후 라싱에서의 마지막 두 시즌 동안 76경기 중 74경기에 출전했다. 2006년 8월, 그는 동료 라리가 팀인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와 4년 계약을 체결했다. 이 이적은 세 명의 선수가 포함된 스왑 딜과 함께 150.00 만 EUR의 이적료가 오갔다. 그는 페드로 무니티스, 루벤 카스트로, 모모가 라싱으로, 아우아테와 안토니오 토마스, 세르히오 카날레스의 50% 권리가 데포르티보로 이동하는 복잡한 거래였다. 그는 2006-07 시즌 모든 38경기에 출전하며 새로운 클럽의 신뢰에 보답했고, 스페인 축구 잡지 돈 발론은 그를 2007년 라리가 올해의 축구 선수 목록에서 8위에 올렸다.
2007-08 시즌 겨울 이적 시장에서 구스타보 무누아에게 주전 자리를 내준 후, 두 골키퍼는 훈련 후 주먹다짐에 휘말려 비야레알 CF와의 경기를 포함한 이후 리그 경기에서 모두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아우아테는 전날 무누아가 주전 골키퍼인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2월에는 B팀 골키퍼 파브리의 경험 부족으로 두 선수 모두 스쿼드에 복귀했으며, 아우아테는 주전 자리를 되찾았다.
2008년 12월 말, 그는 미겔 앙헬 로티나 데포르티보 감독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아 무누아와 별도로 훈련하고 있었다. 아우아테는 RCD 마요르카와 2011년 6월까지 약 100.00 만 EUR에 계약을 맺었다. 당시 발레아레스 제도에 위치한 이 클럽은 리그에서 고전하고 있었고, 주전 골키퍼 미겔 앙헬 모야의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2009년 1월 8일 코파 델 레이 UD 알메리아와의 경기에서 3-1 승리를 거두며 데뷔전을 치렀다. 나흘 뒤, 모야가 여전히 부상 중인 가운데, 그는 레알 마드리드와의 리그 경기에서 0-3으로 패하며 리그 데뷔전을 가졌다. 그는 마요르카에서 빠르게 주전 자리를 확보했으며, 2008-09 시즌 14경기에 출전했다. 2009년 6월, 모야가 발렌시아 CF로 이적하면서 아우아테는 자동으로 주전 골키퍼가 되었다. 2013년 2월, 그는 마요르카 골키퍼 최다 출전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으며, 2014년 8월 8일 36세의 나이로 현역 은퇴를 발표했다.
3. 국가대표 경력
아우아테의 국내 리그에서의 강력한 활약은 그를 이스라엘 축구 국가대표팀에 처음으로 발탁되게 했다. 그의 국가대표 데뷔전은 1999년 10월 10일 UEFA 유로 2000 예선에서 스페인을 상대로 0-3으로 패한 원정 경기였다. 그 이후로 그는 국가대표팀의 핵심 구성원이 되었다. 아우아테는 1999년부터 2013년까지 14년 동안 78번의 캡을 기록했다. 2007년 3월 24일, 그는 유로 2008 예선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클린 시트를 기록했고, 상대팀의 여러 슈팅을 막아냈다.
4. 포지션 및 플레이 스타일
다비드 아우아테는 골키퍼 포지션에서 활약했다. 그는 경기 중 견고하고 안정적인 플레이를 선보였으며, 특히 중요한 순간에 여러 차례 결정적인 선방을 보여주며 팀에 기여했다. 그의 키는 188 cm였고, 체중은 85 kg으로 골키퍼로서 이상적인 신체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주 사용 발은 오른발이었다.
5. 수상 경력
다비드 아우아테는 선수 생활 동안 소속팀과 함께 다음과 같은 주요 우승을 경험했다.
| 클럽 | 대회 | 연도 |
|---|---|---|
| 하포엘 하이파 FC | 이스라엘 프리미어리그 | 1998-99 |
| 하포엘 하이파 FC | 토토컵 | 2000-01 |
| 마카비 하이파 FC | 이스라엘 프리미어리그 | 2001-02 |
| 마카비 하이파 FC | 토토컵 | 2001-02 |
6. 사회적 이슈 및 논란
다비드 아우아테는 선수 경력 동안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관련된 논란과 반유대주의적 차별 경험 등 여러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포함하는 사건들에 휘말렸다.
6.1. 욤 키푸르 경기 참여 논란
2006년 9월, 아우아테는 스페인 신문 디아리오 AS와의 인터뷰에서 욤 키푸르의 의미와 금식일의 금지 사항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 휴일에 축구를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만약 2006년 9월 레알 소시에다드와의 경기에서 뛰도록 강요받는다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발언은 이스라엘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심지어 샤스당의 한 의원은 그를 국가대표팀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010년 9월, 아우아테는 유대인 금식일이 끝나기 18분 전에 경기가 시작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CA 오사수나와의 경기에 출전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마요르카 구단은 그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6.2. 반유대주의적 차별 경험
2009년 12월, CA 오사수나와 마요르카의 경기 도중, 아우아테는 나바라 지역 서포터들로부터 반유대주의적인 구호를 들었다. 또한, 그들은 팔레스타인 국기를 흔들며 그를 "살인자"라고 불렀다. 스페인 왕립 축구 연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착수했으며, 이는 아우아테가 이러한 학대를 겪은 두 번째 사례였다 (이전 사건은 2006년 데포르티보 소속일 때 역시 오사수나와의 경기에서 발생했다).
7. 은퇴 후 활동
2014년 8월 8일 현역 은퇴를 발표한 후, 다비드 아우아테는 RCD 마요르카 구단의 주요 주주가 되었다. 그는 비엘 세르다와 로렌소 세라 페레르의 지분을 매입하여 구단의 통제권을 확보했다. 이후 8월 11일에는 구단의 단장으로 임명되어 경영에 참여했다.
8. 평가 및 영향
다비드 아우아테는 이스라엘과 스페인 라리가에서 모두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뛰어난 골키퍼로 평가받는다. 특히 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에 진출한 최초의 이스라엘 팀의 주전 골키퍼로서 역사적인 활약을 펼쳤으며, RCD 마요르카에서는 골키퍼 최다 출전 기록을 세우는 등 꾸준함과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그의 경기력은 이스라엘 축구 국가대표팀의 핵심 선수로서 14년간 78번의 캡을 기록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경력은 단순히 스포츠적 성과를 넘어 사회적, 종교적 이슈에 대한 그의 대응으로도 주목받았다. 욤 키푸르 경기 참여를 둘러싼 논란은 종교적 신념과 직업적 의무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사례로, 그가 개인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내린 결정은 이스라엘 사회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경기 중 겪었던 반유대주의적 차별 경험은 스포츠계에 만연한 인종차별 문제와 팔레스타인 문제와 같은 민감한 정치적 이슈가 어떻게 스포츠 경기장으로 유입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아우아테는 이러한 차별에 직면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으며, 이는 스포츠계와 사회 전반에 걸쳐 관용과 다양성 존중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은퇴 후 구단 경영에 참여한 것은 그의 리더십과 축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도전으로 평가된다.
9. 관련 항목
- 유대인 스포츠인 목록#축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