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가족 배경
데이비드 글래스고 패러거트는 어린 시절부터 해군 장교인 양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해군에 대한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다.
1.1. 출생과 어린 시절
제임스 글래스고 패러거트는 1801년 테네시주 홀스턴강(현재의 테네시강) 유역의 로우즈 페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조지 패러거트(George Farragut영어, 1755년-1817년)는 스페인 발레아레스 제도 메노르카섬 출신의 상선 선장이었으며, 어머니 엘리자베스 샤인(Elizabeth Shine영어, 1765년-1808년)은 노스캐롤라이나주 출신의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미국인이었다. 그의 출생지는 테네시주 녹스빌 근처의 캠벨즈 스테이션에서 남동쪽으로 수 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아버지는 스페인 해운업에 종사하다 1776년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여 미국 독립 전쟁 중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처음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해군에서, 이후 대륙 해군에서 복무했다. 독립 전쟁 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쪽의 테네시로 이주하여 로우즈 페리에서 뱃사공으로 일했으며, 테네시 민병대의 기병 장교로도 복무했다.
1805년, 아버지는 미국 뉴올리언스 항구의 직책을 수락했고, 먼저 그곳으로 이동했다. 가족은 고용된 뱃사공의 도움을 받아 2735878 m (1700 mile)에 달하는 평저선을 타고 뒤따라갔는데, 당시 4세였던 제임스에게는 첫 항해였다. 가족이 뉴올리언스에 살고 있을 때 어머니는 황열병으로 사망했다. 아버지는 어린 자녀들을 더 잘 돌볼 수 있는 친구나 가족에게 맡길 계획을 세웠다.
1.2. 양육과 초기 해군 경험
데이비드 패러거트의 본명은 제임스였다. 1808년 어머니의 사망 후, 제임스는 미국 해군 장교 데이비드 포터(David Porter영어)와 함께 살기로 합의했으며, 포터의 아버지는 미국 독립 전쟁 당시 패러거트의 아버지와 함께 복무한 인연이 있었다. 1812년, 그는 양아버지의 이름을 기려 "데이비드"로 개명했고, 1810년 말에는 양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패러거트는 해군 집안에서 자랐으며, 그의 양형제 중에는 훗날 미국 남북 전쟁에서 제독이 되는 데이비드 딕슨 포터와 준장(Commodore영어)이 되는 윌리엄 D. 포터가 있었다. 그의 해군 경력은 9세에 사관생도로 해군 명단에 추가되면서 시작되었다.
2. 해군 경력
패러거트의 해군 경력은 9세의 어린 나이에 사관생도로 시작하여 69세로 사망할 때까지 60년 동안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여러 전쟁에 참전했으며, 특히 미국 남북 전쟁에서 결정적인 해전들을 승리로 이끌며 명성을 얻었다.

2.1. 초기의 임무
패러거트의 해군 경력은 1810년 봄, 그가 9세의 나이로 미국 해군 명단에 "소년 선원" 계급으로 추가되면서 시작되었다. 양아버지의 영향으로 1810년 12월 17일, 9세의 나이로 미국 해군 사관생도 자격을 얻었다. 11세에 포상 선박의 선장이 된 패러거트는 1812년 전쟁에 참전하여 양아버지인 포터 대령의 지휘 아래 복무했다. 그는 프리깃함 USS 에식스에 승선하여 1812년 8월 13일 HMS 얼러트호 포획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마르키즈 제도의 누쿠히바 전역 중 포트 매디슨이라는 이름으로 태평양 최초의 미국 해군 기지이자 식민지 건설에 기여했다. 동시에 미국인들은 테 이이족 동맹군의 도움을 받아 섬의 적대적인 부족들과 싸웠다.
패러거트는 1812년 전쟁 중 11세의 나이에 에식스호에 의해 나포된 선박을 안전하게 항구로 가져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1814년 3월 28일 칠레 발파라이소 만에서 영국군과의 발파라이소 전투에서 에식스호에 복무 중 부상당하고 포로로 잡혔다.
1823년, 패러거트는 USS 페럿호의 지휘를 맡았는데, 이는 그가 미국 해군 함선을 처음으로 지휘한 경험이었다. 그는 카리브해에서 해적들과 싸우기 위해 무장된 함대인 모스키토 함대에서 복무했다. 그의 옛 함장인 포터 준장이 함대의 지휘관이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는 포터의 동생인 존 포터가 지휘하는 소형 함선 중 하나인 그레이하운드호에 승선할 것을 요청하여 승인받았다. 1823년 2월 14일, 함대는 서인도 제도로 출항하여 다음 6개월 동안 해적들을 바다에서 몰아내고 섬 곳곳의 은신처에서 소탕했다. 그는 서인도 제도에서 해적과 싸우는 작전 동안 익스페리먼트호의 부함장으로 복무했다. 패러거트는 1825년 해군 대위로 진급했다.
2.2. 멕시코-미국 전쟁
1847년, 이미 해군 중령 계급이었던 패러거트는 버지니아주 노퍽의 노퍽 해군 공창에서 재취역한 슬루프함 USS 새러토가호의 지휘를 맡았다. 멕시코-미국 전쟁 참전을 위해 본국 전대에 배속된 새러토가호는 1847년 3월 29일 노퍽을 떠나 멕시코만으로 향했고, 1847년 4월 26일 멕시코 베라크루스 앞바다에 도착하여 전대 사령관인 매슈 C. 페리 준장에게 임무 보고를 했다. 4월 29일, 페리는 패러거트에게 새러토가호를 150 해리(약 278 km) 북쪽으로 항해하여 툭스판을 봉쇄할 것을 명령했고, 새러토가호는 4월 30일부터 7월 12일까지 그곳에서 작전을 수행한 후 베라크루스로 돌아왔다. 약 2주 후, 패러거트는 타바스코로 급파 임무를 위해 왕복 항해를 시작하여 1847년 8월 11일 베라크루스로 복귀했다. 1847년 9월 1일, 패러거트와 새러토가호는 다시 툭스판 해상 봉쇄 임무로 돌아와, 함선 내에 황열병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달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그 후 패러거트는 함선을 베라크루스로 다시 데려왔고, 한 달 후 플로리다주 펜서콜라의 펜서콜라 해군 공창을 향해 출항하여 1월 6일에 도착, 심각한 환자들을 병원에 하선시키고 보급품을 보충했다. 1848년 1월 31일, 패러거트는 함선을 펜서콜라에서 뉴욕시로 향하게 했고, 2월 19일에 도착하여 1848년 2월 26일에 퇴역했다.
2.3. 마레 아일랜드 해군 공창 건설
1853년, 미국 해군장관 제임스 C. 도빈은 샌프란시스코 근처 산 파블로 만에 마레 아일랜드 해군조선소를 건설할 지휘관으로 데이비드 G. 패러거트 중령을 선정했다. 1854년 8월, 패러거트는 버지니아주 노퍽의 병기 보조 검사관 직책에서 워싱턴으로 호출되었다.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은 패러거트의 해군 경력과 그가 맡을 임무에 대해 축하했다. 1854년 9월 16일, 패러거트 중령은 캘리포니아주 발레이오에 마레 아일랜드 해군조선소 건설을 감독하기 위해 도착했고, 이곳은 미국 서해안의 함선 수리 항구가 되었다. 패러거트 대령은 1858년 7월 16일에 마레 아일랜드를 취역했다. 패러거트는 1859년 8월 11일 마레 아일랜드에서 영웅적인 환영을 받으며 돌아왔다.
2.4. 남북 전쟁 참전
패러거트는 미국 남북 전쟁 동안 미시시피강과 멕시코만을 따라 중요한 해군 작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북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2.4.1. 연방에 대한 충성과 초기 지휘

패러거트는 남부 출생이며 남북 전쟁 이전에 남부에 거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아는 모든 이들에게 미국 분리 독립은 반역죄로 간주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전쟁 발발 직전, 패러거트는 버지니아 출신 아내와 함께 뉴욕시 바로 외곽에 있는 작은 마을인 뉴욕주 헤이스팅스온허드슨으로 이사했다.
그는 연방에 자신의 복무를 제안했고, 처음에는 해군 퇴역 위원회에 배정되었다. 양형제인 데이비드 딕슨 포터로부터 특별 임무 지휘를 제안받았을 때, 목표가 노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망설였다. 그곳에 친구와 친척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목표가 그의 어린 시절 집이었던 뉴올리언스로 변경되었다는 것을 알고 안도했다. 패러거트는 남부 출신이었고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였으므로, 해군은 그의 연방에 대한 충성심을 다소 의심했다. 하지만 포터가 패러거트의 편을 들면서, 패러거트는 뉴올리언스 공격의 주요 임무를 맡게 되었다.
패러거트는 1862년 2월 3일, 서부 만 봉쇄 전대의 지휘를 맡는 비밀 지시를 받고 햄프턴 로즈에서 25문의 포를 장착한 나사식 증기선 USS 하트퍼드호를 기함으로 삼아 17척의 함대로 출항했다. 그는 미시시피강 어귀에 도착했는데, 그곳에는 강변에 서로 마주보고 위치한 남부 연합의 세인트 필립 요새와 잭슨 요새가 있었고, 이 두 요새는 총 100문 이상의 중포와 700명의 병력을 갖추고 있었다. 패러거트의 접근을 알게 된 남부 연합군은 뉴올리언스 바로 외곽에 16척의 포함 함대를 집결시켰다.
2.4.2. 뉴올리언스 점령
1862년 4월 18일, 패러거트는 포터의 지휘 아래 박격포 함선들에게 두 요새에 대한 포격을 개시하도록 명령했고, 상당한 피해를 입혔지만 남부 연합군을 항복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잭슨 요새와 세인트 필립 요새 전투에서 이틀간의 맹렬한 포격 후, 패러거트는 잭슨 요새와 세인트 필립 요새, 그리고 찰메트 포대들을 돌파하여 4월 29일 뉴올리언스 시와 항구를 점령했는데, 이는 전쟁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미국 의회는 1862년 7월 16일 해군 소장 계급을 신설하여 그에게 수여하며 그를 기렸는데, 이 계급은 이전까지 미국 해군에서 사용된 적이 없었다. 이전까지 미국 해군은 유럽 해군의 전통과 구분하기 위해 "기함 장교"라는 용어를 선호하며 제독 계급을 도입하지 않았다. 패러거트는 13명의 다른 장교들(현역 3명, 퇴역 10명)과 함께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해 후반, 패러거트는 미시시피주 빅스버그를 방어하는 포대들을 통과했지만, 그곳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임시 남부 연합 해군 철갑함은 1862년 7월 그의 38척 함대를 후퇴시켰다.
2.4.3. 미시시피강 작전
패러거트는 공격적인 지휘관이었지만, 항상 협조적인 것은 아니었다. 포트 허드슨 공방전에서 원래 계획은 패러거트 함대가 걸프 육군 사령관인 너새니얼 뱅크스 장군이 지휘하는 육상 부대의 양동 공격(1863년 3월 15일 오전 8시 개시 예정)의 도움을 받아 남부 연합 요새의 포대들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패러거트는 일방적으로 일정을 3월 14일 오후 9시로 앞당겨, 연방 지상군이 제자리에 배치되기 전에 포대들을 통과하는 작전을 시작했다. 그 결과 조율되지 않은 공격으로 남부 연합군은 패러거트의 함대에 집중할 수 있었고 그의 전함들에 큰 피해를 입혔다.

패러거트 함대는 두 척의 함선만이 남부 연합 요새의 중포를 통과할 수 있었던 채 후퇴를 강요받았다. 맹렬한 포격을 견뎌낸 후에도 패러거트는 루이지애나주 포트 허드슨 전투에 더 이상 참여하지 못했으며, 뱅크스 장군은 해군 지원 없이 포위전을 계속해야 했다. 연방군은 요새에 두 번의 주요 공격을 감행했지만, 두 번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고 격퇴되었다. 패러거트 함대는 분열되었지만, 남아있는 두 척의 전함으로 레드강 어귀를 봉쇄할 수 있었다. 그는 포트 허드슨과 빅스버그 사이의 미시시피강 구간을 효율적으로 순찰할 수 없었다. 패러거트의 결정은 연방 해군과 연방 육군에 큰 대가를 치르게 했으며, 포트 허드슨에서 전쟁 중 가장 높은 사상자율을 기록했다.
빅스버그가 1863년 7월 4일 항복하면서 포트 허드슨은 미시시피강에 남은 마지막 남부 연합군 요새가 되었다. 뱅크스 장군은 7월 9일 포트 허드슨의 남부 연합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들였고, 이는 미국 군사 역사상 가장 긴 포위전을 끝냈다. 미시시피강 통제는 전쟁 승리를 위한 연방 전략의 핵심이었으며, 포트 허드슨의 항복으로 남부 연합은 이제 둘로 나뉘게 되었다.
2.4.4. 모빌만 전투
1864년 8월 5일, 패러거트는 모빌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앨라배마주 모빌은 당시 멕시코만에 남은 남부 연합의 마지막 주요 개방 항구였다. 이 만은 계류 어뢰(당시 "어뢰"라 불리던 기뢰)가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패러거트는 그의 함대에 만으로 돌격할 것을 명령했다. 전투가 진행되면서 연기로 인해 패러거트의 기함인 USS 하트퍼드호에서 시야가 가려졌다. 이 사건에 대한 로버트 M. 브라우닝의 상세한 설명에 따르면, 패러거트는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함선의 삭구(rigging)를 타고 올라 주돛대 아래의 풋톡 슈라우드(futtock shrouds)까지 올라갔다. 그의 안전을 염려한 승무원들은 그를 돛대와 삭구에 묶었다.

모니터함 USS 테쿰세호가 기뢰에 부딪혀 침몰하자 다른 함선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패러거트는 확성기로 USS 브루클린호에 "무슨 문제인가?"라고 소리쳤다. "어뢰입니다!"라는 외침이 돌아왔다. 패러거트는 "빌어먹을 어뢰! 퍼시벌 드레이튼 함장, 전진! 제임스 에드워드 주엣, 전속력으로!"라고 외쳤다. 함대의 대부분은 만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패러거트는 모건 요새와 게인스 요새의 강력한 포대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프랭클린 뷰캐넌 제독의 전대를 격파했다. 1864년 12월 21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패러거트를 부제독으로 진급시켰고, 이로써 그는 미국 해군 최고위 장교가 되었다.
2.4.5. 전쟁 후 진급과 유럽 전대 지휘
남북 전쟁 후, 패러거트는 1866년 3월 18일 미국 충성군사명예회 뉴욕 사령부의 1급 동료로 선출되었고, 인식표 번호 231번을 부여받았다. 그는 1866년 5월부터 사망할 때까지 뉴욕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패러거트는 1866년 7월 25일 정식 제독으로 진급했으며, 이 계급을 가진 최초의 미국 해군 장교가 되었다. 그의 마지막 현역 복무는 1867년부터 1868년까지 나사식 프리깃함 USS 프랭클린호을 기함으로 삼아 유럽 전대를 지휘한 것이었다. 패러거트는 평생 현역으로 남았는데, 이는 남북 전쟁 이후 단 일곱 명의 다른 미국 해군 장교에게만 주어진 영예였다.
3. 개인 생활
패러거트는 결혼과 가족생활, 그리고 프리메이슨 활동을 통해 개인적인 소속감을 가지고 있었다.
USS 페럿호의 대리 중위로 임명되어 첫 항해를 마친 후, 패러거트는 1824년 9월 2일 수잔 캐롤라인 마찬트와 결혼했다. 수년간 건강이 좋지 않았던 수잔 패러거트는 1840년 12월 27일 사망했다. 패러거트는 아내의 병환 중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아내 사망 후, 패러거트는 1843년 12월 26일 버지니아 도르카스 로얄과 재혼했으며, 이들 사이에서 1844년 10월 12일에 아들 로얄 패러거트가 태어났다. 로얄 패러거트는 1868년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하고 1872년 전역하기 전까지 미국 육군 소위로 복무했다. 그는 남은 경력의 대부분을 뉴저지 중앙 철도 회사의 임원으로 보냈다. 그는 1812년 전쟁 군사 사회의 세습 회원이었고 미국 충성군사명예회의 동료였다. 로얄은 1916년 10월 1일 사망했으며, 이는 그와 그의 어머니가 우드론 묘지에 그의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가족 기념비 한쪽에 기록되어 있다.
패러거트에게는 윌리엄 A. C. 패러거트라는 형제가 있었다. 윌리엄 역시 해군에 있었지만, 훨씬 덜 두드러진 경력을 보냈다. 그는 데이비드가 경력을 시작하기 1년 전인 1809년 1월 16일에 사관생도 자격을 얻었고, 1814년 12월 9일에 중위로 진급했다. 그는 1855년 12월 15일에 예비역으로 전환될 때까지 그 계급에 머물렀다. 그는 1859년 12월 20일 사망했다.
패러거트는 프리메이슨이자 스코티시 라이트 프리메이슨이었다.
4. 사망

패러거트는 1870년 늦여름 휴가 중 69세의 나이로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거의 60년 동안 해군에서 복무했다. 그는 뉴욕시 브롱크스에 있는 우드론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지는 우드론 묘지 자체와 마찬가지로 미국 국립사적지에 등재되어 있다.
5. 유산과 영예
패러거트의 삶과 경력은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기억되고 기려지고 있으며, 그의 이름은 미국 전역의 수많은 장소, 기관, 함선에 남아있다.

5.1. 기념물 및 지명
패러거트 제독의 출생지에서 불과 수 마일 떨어진 곳에 있던 테네시주 캠벨즈 스테이션 지역은 그의 이름을 따서 테네시주 패러거트로 개명되었다. 워싱턴 D.C.의 패러거트 스퀘어도 그의 이름을 기려 명명되었다. 패러거트 스퀘어 중앙에는 데이비드 G. 패러거트 제독 (림 동상)이라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두 개의 워싱턴 메트로 역인 패러거트 서역과 패러거트 북역 또한 그의 이름을 공유한다. 매사추세츠주 사우스 보스턴 해양 공원 내 캐슬 아일랜드 인근에는 패러거트 제독의 동상이 있다. 뉴욕시 맨해튼 매디슨 스퀘어 파크에도 그의 야외 조각상이 있으며, 브루클린 자치구의 브루클린 패러거트 지역(패러거트 로드 포함)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뉴욕 브롱크스에도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2023년 5월 미국 해군사관학교 교장 관저는 이전 이름인 '뷰캐넌 하우스'를 '패러거트 하우스'로 변경했는데, 이는 남북 전쟁 중 모빌만 전투에서 패러거트에게 패배한 남부 연합 제독 프랭클린 뷰캐넌의 이름을 기린 것이었다. 아이다호주 북부 펜드 오레일 호에 위치했던 패러거트 해군 훈련소는 제2차 세계 대전 해군 훈련 센터로, 29만 3천 명 이상의 해군이 그곳에서 기초 훈련을 받았다. 1966년 아이다호 주는 이 땅을 패러거트 주립공원으로 전환했다.
5.2. 명예 기관 및 함선
미 해군 구축함 중 두 개의 함선 등급이 패러거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34년의 패러거트급과 1958년의 패러거트급이다. 그 외에 패러거트의 이름을 딴 미 해군 함선으로는 1898년의 TB-11, 1920년의 DD-300, 2006년의 DDG-99가 있다.
패러거트의 이름을 딴 애드미럴 패러거트 아카데미는 1933년 플로리다주 세인트피터즈버그에 설립된 남학생 전용 사관 기숙 고등학교였다. 현재 이 아카데미는 유치원부터 12학년까지 학생들을 교육하는 대학 예비 사립학교이며, 8학년부터 시작하는 상위 학년은 기숙 프로그램과 주니어 예비역 장교 훈련단의 해군 군사 구조로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패러거트 아카데미는 항공, 스쿠버 다이빙, 해양 과학, 공학, 항해 등 다양한 특화된 학업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1894년 설립된 시카고 일리노이주의 패러거트 직업학교와 1904년 설립된 테네시주 패러거트의 패러거트 고등학교도 패러거트의 이름을 기려 명명된 고등학교이다. 아이오와주 패러거트는 아이오와 남서부의 작은 농업 마을이다. 그의 유명한 슬로건이 마을 입구의 빌보드에 방문객을 맞이한다. 지역 학교인 패러거트 커뮤니티 고등학교는 2016년 폐교될 때까지 '어드미럴(제독)'과 '세일러(선원)' 팀을 운영했다. 이 학교는 또한 패러거트의 이름을 딴 함선들의 기념품을 소장하고 있다.
5.3. 문화적 인정
미국 역사상 우표에 기념된 해군 장교는 소수에 불과하지만, 데이비드 패러거트는 여러 번 우표에 등장하는 영예를 누렸다. 패러거트를 기리는 첫 우표(왼쪽)는 1903년 발행된 1달러짜리 검정색 우표였다. 1937년 해군 우표는 5종 시리즈 중 하나로, 3센트짜리 보라색 우표에 데이비드 패러거트 제독(왼쪽)과 데이비드 딕슨 포터(오른쪽)가 그려져 있으며, 중앙에는 항해 중인 전함이 나타나 있다. 패러거트를 기리는 가장 최근의 우표는 1995년 6월 29일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스버그에서 발행되었다.




1890년과 1891년 시리즈의 100 USD 재무 노트(코인 노트라고도 불림) 앞면에는 패러거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1890년 시리즈 노트는 수집가들 사이에서 "수박 노트"라고 불리는데, 뒷면의 큰 숫자 0이 수박 무늬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미국 해군사관학교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는 모빌만에서 하트퍼드호의 삭구에 있는 패러거트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2021년 7월 22일, 테네시주 의사당 위원회와 역사 위원회는 패러거트 제독의 흉상을 테네시주립박물관으로 옮기기로 의결했으며, 2021년 7월 23일부터 공식적으로 이전이 시작되었다. 패러거트의 모습은 메인주 포틀랜드의 병사 및 선원 기념비 남쪽 측면에 새겨져 있다.
5.4. 대중문화 속의 등장
- 쥘 베른의 1870년 소설 해저 2만리에는 데이비드 패러거트를 명백히 기반으로 한 "패러거트 준장"이 등장한다.
- 1943년 영화 더 모어 더 메리어에서 찰스 코번은 동상에 새겨진 유명한 인용구를 보고 그 문구를 좌우명으로 삼아 이야기가 전개된다.
- 패러거트는 1952년 장편 영화 양키 버캐니어에서 배우 스코트 브레이디가 연기했다.
- 로널드 레이건은 그의 마지막 연기 역할 중 하나로, 1965년 텔레비전 신디케이션 서부극 데스 밸리 데이즈의 "샌프란시스코만 전투" 에피소드에서 패러거트를 연기했다. 이 에피소드는 1856년 샌프란시스코 비질런스 위원회에 초점을 맞춘다. 준 데이턴은 이 에피소드에서 패러거트의 두 번째 부인인 버지니아 역으로 출연했다.
- 패러거트는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에피소드 "크라켄의 밤"에서 언급되지만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클라이맥스에서 이야기의 악당들은 기뢰로 패러거트의 배를 파괴하려 하지만, 시리즈의 영웅들에 의해 저지된다.
- 2010년 올리비아 헤드릭은 스포큰 워드 데뷔작에서 "How I love thee Mister Farragut"이라는 곡을 발표했다.
- 비디오 게임 엘더스크롤 4: 오블리비언에는 포트 패러거트라는 장소가 있다.
- 스타 트렉에는 배경 또는 보조 인물 함선으로 USS 패러거트라는 이름을 가진 다수의 우주선이 등장했다. 여기에는 스타 트렉: 스트레인지 뉴 월드 시리즈에서 제임스 T. 커크의 초기 임무 중 하나로 언급된 스타십과 전체 스타십 등급이 포함된다. 패러거트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스타십으로는 스타 트렉: 제너레이션스 마지막에 USS 엔터프라이즈-D의 승무원을 구출한 성운급 우주선이 있다. 이 함선은 나중에 스타 트렉: 딥 스페이스 나인 에피소드 "노어 더 배틀 투 더 스트롱"에서 파괴된 것으로 언급되었다. 익셀시어급의 USS 패러거트라는 또 다른 스타십은 딥 스페이스 나인 에피소드 크리살리스에서 언급되었다. USS 패러거트라는 스타십은 2009년 영화 스타 트렉 (2009년 영화)에서도 당시 사관생도 니요타 우후라의 초기 임무로 언급되었다.
- 존 킵팩스의 벤처러 트웰브 공상과학 시리즈에서는 먼 미래에 지구 우주 해군을 지휘하는 패러거트 제독이 등장한다.
"빌어먹을 어뢰!"는 다음을 포함한다.
- M*A*S*H 시즌 4 에피소드 13 "이달의 병사"에서 호크아이가 "어떤 유명한 남북 전쟁 영웅이 '빌어먹을 어뢰! 전속력으로 전진하라!'라고 말했지?"라고 묻자, 클링거는 "투가라프"라고 대답하는데, 이는 패러거트를 거꾸로 말한 것이다.
- 톰 페티 앤 더 하트브레이커스의 앨범 Damn the Torpedoes는 데이비드 패러거트의 유명한 인용구에서 이름을 따왔다.
- MDFMK의 앨범 MDFMK에는 "Damn the Torpedoes"라는 곡이 수록되어 있다.
- 코미디 영화 갤럭시 퀘스트에서 팀 앨런의 캐릭터는 "절대 포기하지 마! 절대 항복하지 마! 빌어먹을 공명포! 전속력으로 전진!"이라고 말한다.
6. 역사적 평가
데이비드 글래스고 패러거트는 미국 남북 전쟁에서 연방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해군 사령관으로, 그의 군사적 업적은 미국 역사에서 높이 평가된다. 그는 남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연방에 대한 확고한 충성심을 보여주며, 국가 통합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의 단호하고 용감한 지휘는 뉴올리언스 점령과 모빌만 전투와 같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승리로 이어져 남부 연합의 분열과 멕시코만 봉쇄를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미국 해군 역사상 최초로 해군 소장, 부제독, 제독 계급을 차례로 역임하는 영예를 안았다.
패러거트의 "빌어먹을 어뢰!"라는 대사는 단순한 군사적 구호를 넘어, 불굴의 용기와 결단력을 상징하는 미국 문화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그의 리더십은 전시에 연방의 도덕적 사기를 높이는 데 기여했으며, 특히 위험을 무릅쓰고 임무를 완수하는 그의 태도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그의 평가는 주로 군사적 천재성과 충성심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그의 남부 연신에도 불구하고 연방에 헌신한 그의 선택이 국가 통합의 관점에서 재평가되며, 민주주의 수호와 인권 진보에 기여한 긍정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 그의 유산은 미국이 분열의 위기를 극복하고 하나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서, 국가적 영웅으로 계속해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