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Δημήτριος Α` ὁ ΣωτήρDēmḗtrios ho Sōtḗr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 "구원자 데메트리오스"; 기원전 185년경 ~ 기원전 150년 6월)는 기원전 162년 11월부터 기원전 150년 6월까지 헬레니즘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으로 재위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 로마에서 인질로 성장했으나, 그리스계 시리아로 돌아와 어린 사촌 안티오코스 5세 에우파토르와 리시아스 섭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제국의 격동기에 통치권을 장악했으며, 티마르코스와 알렉산더 발라스 같은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반란군과 싸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바빌로니아인들로부터 '구원자'를 의미하는 '소테르' 칭호를 얻었으며, 유다 마카베오를 물리치는 등 마카베오 반란 진압에도 성공했다.
2. 생애
2.1. 초기 생활과 로마 인질 시기

데메트리오스 1세는 기원전 185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와 어머니 라오디케 4세의 통치 시기, 어린 나이에 로마로 인질로 보내졌다. 셀레우코스 가문의 주요 인물들을 로마에 인질로 보내는 것은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을 종결시킨 아파메이아 조약의 조건 중 하나였다. 이 조약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해군력을 제한하고, 전쟁 코끼리를 보유할 수 없도록 하는 등 셀레우코스 제국을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175년, 그의 아버지 셀레우코스 4세는 재무장관 헬리오도로스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서 삼촌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는 헬리오도로스를 제거하고 스스로 왕위를 차지했다. 당시 왕위는 데메트리오스에게 돌아가야 했으나, 그는 너무 어렸고 여전히 로마에 인질로 억류되어 있었다.
안티오코스 4세는 기원전 164년 10월에서 11월경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 원정 중에 사망했다. 그의 아홉 살 난 아들 안티오코스 5세 에우파토르가 왕이 되었지만, 실권은 안티오코스 4세가 안티오키아에 남겨둔 섭정 리시아스에게 있었다. 당시 데메트리오스는 스물두 살이었다. 그는 로마 원로원에 시리아 왕위를 자신에게 돌려줄 것을 요청했으나, 로마는 약한 시리아를 선호하여 성인 남성보다 어린 소년이 통치하는 것을 더 원했기에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2년 후, 안티오코스 5세의 권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로마는 사절단을 보내 아파메이아 조약의 조건을 명분으로 안티오코스 5세의 함선을 침몰시키고 전쟁 코끼리를 무력화시켰다. 데메트리오스는 다시 원로원에 자신의 감금이 안티오코스 5세가 로마의 명령을 따르도록 하는 데 거의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청원했으나, 로마는 여전히 약한 어린아이를 자신보다 선호했기에 그의 호소는 또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2.2. 왕위 계승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비오스의 도움을 받아 데메트리오스는 감금 상태에서 탈출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의 수도인 안티오키아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지역 귀족들의 지지를 성공적으로 얻었고, 기원전 162년 11월경 시리아 왕위에 다시 오르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그는 즉시 안티오코스 5세와 리시아스를 처형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 생애의 이 시기는 폴리비오스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조언했던 인물이었기에, 그의 저서 『역사』가 온전히 전해져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3. 통치와 주요 업적
3.1. 권력 공고화와 반란 진압

로마는 데메트리오스 1세의 새로운 통치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들은 셀레우코스 제국을 분할하여 약화시키려는 모든 시도에 간접적인 지원과 격려를 보냈다. 특히 이는 사트라프 티마르코스, 유대인 마카베오인, 코마게네의 프톨레마이오스, 아르메니아의 아르탁시아스 1세를 포함했다.
데메트리오스는 반란을 일으킨 메디아의 사트라프 티마르코스를 물리치고 바빌로니아인들을 그의 폭정에서 해방시켰다. 티마르코스는 신흥 파르티아에 맞서 메디아를 방어하며 명성을 얻었지만, 데메트리오스 1세의 즉위를 독립 왕국을 선언하고 자신의 영역을 바빌로니아까지 확장할 명분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새로운 셀레우코스 왕에게 맞설 만큼 강하지 못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기원전 160년 티마르코스를 물리치고 살해했으며, 카파도키아의 왕 아리아라테스 5세를 폐위시켰다. 이로써 셀레우코스 제국은 일시적으로 다시 통일되었다.
3.2. 마카베오 반란 진압
유대 지역에서는 마카베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조치들이 데메트리오스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시행되었으며, 이는 마카베오서에 기록되어 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통치 초기에 새로운 대제사장 알키모스를 유대에 파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알키모스는 적어도 일부 유대인들을 다시 정부에 순종하도록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또한 데메트리오스 1세는 장군 바키데스가 이끄는 원정대를 파견하여 유대 도시들에 대한 마카베오인들의 영향력을 분쇄했다. 바키데스와 그의 군대는 기원전 160년 엘라사 전투에서 반란 지도자 유다 마카베오를 물리치고 살해하여, 수년 동안 그 지방에 대한 셀레우코스 제국의 통제권을 회복했다.
3.3. '소테르' 칭호 획득
데메트리오스 1세는 반란을 일으킨 메디아의 사트라프 티마르코스를 물리친 공로로 바빌로니아인들로부터 '소테르'(Σωτήρ구원자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라는 칭호를 얻었다. 티마르코스는 자신의 영역을 바빌로니아까지 확장하며 폭정을 일삼았는데, 데메트리오스 1세가 그를 제압함으로써 바빌로니아인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이 칭호는 그의 통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반영하며, 특히 바빌로니아 지역에서 그의 업적이 크게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3.4. 가족 관계
데메트리오스 1세는 자신의 누이인 라오디케 5세와 결혼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라오디케 5세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아들, 즉 데메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 그리고 안티고노스를 두었다. 이 세 아들 중 데메트리오스 2세와 안티오코스 7세는 훗날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이 되어 데메트리오스 1세의 뒤를 이었다.
4. 몰락과 죽음
데메트리오스 1세의 몰락은 패배한 반란군 티마르코스의 살아남은 형제인 헤라클레이데스에게 기인했을 수 있다. 헤라클레이데스는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서자라고 주장하는 알렉산더 발라스라는 소년을 옹립했다. 헤라클레이데스는 로마 원로원이 데메트리오스 1세에 맞서 이 젊은 사칭자를 지지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로마는 셀레우코스 제국이 분열되어 약화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알렉산더 발라스의 주장을 지지했다.
발라스의 용병 군대는 기원전 153년에서 152년(셀레우코스 연대 160년)에 프톨레마이오스에 상륙하여 점령했고, 스스로를 셀레우코스 왕으로 선포하며 통치를 시작했다. 이로써 셀레우코스 제국은 두 왕이 내전 상태에 빠졌다.
유대인들은 데메트리오스 1세의 제국에서 작은 부분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이례적으로 잘 보존되었다. 유다 마카베오의 형제이자 마카베오인들의 새로운 지도자인 요나단 아푸스는 데메트리오스 1세와 협상하여 발라스에 대항하기 위해 유대에서 일부 셀레우코스 군대를 철수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더 발라스가 유대인들에게 훨씬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자 요나단은 데메트리오스와의 일시적인 휴전을 즉시 파기했다.
발라스는 요나단과 동맹을 맺고 그를 유대의 대제사장 겸 스트라테고스로 임명했으며, 요나단은 발라스의 대의를 지지하기 위해 유대 군대를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제사장 가문 출신이지만 사독의 고위 제사장 계통이 아니었던 요나단은 기원전 152년 티쉬리 월에 그 칭호를 받았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요나단에게 더 많은 특권을 제공하는 편지(마카베오상 10:25-45)를 보냈다. 그러나 요나단은 발라스에 대한 신뢰, 데메트리오스에 대한 불신, 또는 발라스가 내전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믿음 등 여러 이유로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알렉산더 발라스는 기원전 150년 데메트리오스 1세를 물리치고 살해했으며, 시리아의 유일한 왕이 되었다.
5. 유산
데메트리오스 1세는 격동의 시기에 왕위에 올라 제국의 일시적인 통일을 이루고 여러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소테르'(구원자) 칭호를 얻은 것은 그가 당시 바빌로니아인들에게 중요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로마의 개입과 내부 반란으로 인해 그의 통치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고, 결국 알렉산더 발라스에게 패하며 생을 마감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가 로마에 인질로 있었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는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스가 1919년에 발표한 시 "데메트리오스 소테르"에 담겨 있다. 이 시는 그의 삶의 특정 단면을 문학적으로 조명하며 역사적 인물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