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반
다카스기 신사쿠는 출생부터 학창 시절, 초기 사회 활동을 통해 그의 사상적 기반과 인맥을 형성했다.
1.1. 출생과 성장

다카스기 신사쿠는 텐포 10년 8월 20일인 1839년 9월 27일, 나가토국 하기성 아래 기쿠야요코초(현 야마구치현 하기시 미나미하기마치)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슈번의 중간 계급 사무라이인 다카스기 고추타(高杉小忠太다카스기 고추타일본어)와 오니시 쇼소(大西将曹오니시 쇼소일본어)의 딸인 미치(ミチ미치일본어)의 장남이었다. 그에게는 토모(智토모일본어), 사치(幸사치일본어), 메이(明메이일본어)라는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고, 남자 형제는 신사쿠가 유일했기 때문에 가문의 후계자로서 엄격하게 양육되었다. 10세 무렵 천연두를 앓았으나, 가족의 헌신적인 간호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얼굴에 얽은 자국이 남아 "아즈키 모치"(あずき餅아즈키 모치일본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1.2. 교육과 요시다 쇼인과의 만남

신사쿠는 어린 시절 한학 학원(요시마쓰 학원)을 거쳐, 가에이 5년(1852년)에 번교인 메이린칸에 입학하여 한학과 검술을 배웠다. 특히 야규 신카게류 검술을 익혀 나중에 면허를 모두 취득하기도 했다. 안세이 4년(1857년)에는 요시다 쇼인이 주재하던 사설 학교 쇼카손주쿠에 들어가, 구사카 겐즈이, 요시다 토시마로, 이리에 쿠이치와 함께 쇼카손주쿠의 사천왕으로 불리며 요시다 쇼인의 총애하는 제자가 되었다. 쇼인은 신사쿠의 비범함을 일찍이 간파하고, 검술에만 열중하고 학업에는 소홀한 신사쿠를 독려하기 위해, 일부러 동문이자 소꿉친구였던 뛰어난 구사카만을 칭찬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신사쿠는 분함을 발판 삼아 자신의 비범함을 발휘하며 구사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로를 절차탁마하는 등 매우 우수한 인물이었다. 안세이 5년(1858년)에는 번의 명령으로 에도에 유학하여 쇼헤이코와 오하시 돗난(大橋訥庵오하시 돗난일본어)의 오하시 학원 등에서 배웠다. 안세이 6년(1859년), 스승 쇼인이 안세이 대옥으로 체포되자 덴마초 감옥을 방문하여 옥중의 스승을 돌보기도 했다. 그러나 번의 명령으로 하기로 돌아오던 중 쇼인은 1859년 11월 21일에 처형되었다. 만엔 원년(1860년) 11월, 고향으로 돌아온 후, 방장(防長보초일본어) 제일의 미인으로 불리던 야마구치 마치부교 이노우에 헤에몬(井上平右衛門이노우에 헤에몬일본어)(250석)의 둘째 딸인 이노우에 마사(井上雅이노우에 마사일본어, 1845년-1922년)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1859년 스승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잊고 새로운 아내와 함께 정착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으로 성사되었다.
1.3. 에도 유학 및 초기 활동
분큐 원년(1861년) 3월, 신사쿠는 해군 수련을 위해 번이 소장하고 있던 군함 '헤이신마루(丙辰丸헤이신마루일본어)'에 승선하여 에도로 향했다. 이곳에서 신도무념류 연병관 도장에서 검술을 수련했다. 같은 해 8월에는 도호쿠 지방으로 유학을 떠나, 가토 오우로, 사쿠마 쇼잔, 요코이 쇼난 등 당대의 주요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하며 학문적 배경을 넓혔다.
분큐 2년(1862년) 1월 2일(음력), 신사쿠는 번의 명령으로 나가사키에서 청나라 상하이로 비밀리에 건너가 서양 세력의 정세와 국력을 조사하게 되었다. 나가사키에 도착한 신사쿠는 숭복사에 머물던 미국인 선교사 채닝 윌리엄스와 귀도 풀베키로부터 유럽의 남북 전쟁과 청나라의 내란 등 세계 정세에 대한 최신 정보를 얻었다. 신사쿠는 윌리엄스에게서 대통령제와 같은 정치 제도에 대해서도 배웠으며, 영어 회화를 배우고 미국, 프랑스, 포르투갈 영사를 방문하는 등 상하이 방문을 위한 준비를 했다. 나가사키의 객사에서는 "번의 역할을 다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아버지에게 쓰기도 했다.
같은 해 분큐 2년 4월 29일(1862년 5월 27일), 신사쿠는 고다이 도모아쓰, 나카무타 구라노스케, 나구라 쇼소 등과 함께 막부 사절 수행원으로서 막부의 증기선 '지토세마루(千歳丸지토세마루일본어)'를 타고 나가사키를 출항하여 5월 6일(1862년 6월 3일) 상하이에 입항했다. 약 두 달간의 상하이 체류 기간 동안, 신사쿠는 청나라가 유럽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실태와 태평천국의 난을 직접 목격하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일기인 《유청오록》(遊清五録유청오록일본어)에 상세히 기록했다. 7월 5일(1862년 7월 31일) 상하이에서 출항하여 7월 14일(1862년 8월 9일) 나가사키로 귀국했다.
2. 해외 경험과 사상 변화
다카스기 신사쿠의 청나라 상하이 방문 경험은 그의 세계관과 사상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슈번 내에서 쇄국과 양이 정책의 가장 급진적인 옹호자 중 한 명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862년 청나라 상하이에서 목격한 서양 제국주의의 침탈과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한 혼란은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청나라가 서양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현실을 보며, 그는 일본 또한 국력을 강화하지 않으면 비슷한 운명을 맞이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일본의 서양 열강의 식민지화를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강해야 한다는 주장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당시 일본에서 고조되던 존왕양이 운동, 즉 '오랑캐를 물리치고 천황을 숭배하라'는 사상과 맞물려 조슈번을 비롯한 일본 각지에서 큰 지지를 얻었다. 그는 서구 열강과의 직접적인 대결은 무모하며, 일본은 서양의 군사 전술, 기술 및 과학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존왕양이 운동의 방향을 단순히 서구 배척에서 막부 타도와 국력 강화를 위한 반막부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3. 존왕양이 운동과 군제 개혁
다카스기 신사쿠는 막부 말기 격동의 시기에 존왕양이 운동에 깊이 참여했으며, 그의 급진적인 행동과 혁신적인 군제 개혁은 일본 근대사의 흐름을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3.1. 존왕양이 운동 참여와 급진적 행동
신사쿠가 상하이에서 귀국한 사이, 조슈번에서는 보수파였던 나가이 우타가 실각하고 존왕양이 세력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신사쿠 또한 가쓰라 고고로(기도 다카요시)와 구사카 요시스케(구사카 겐즈이) 등과 함께 존왕양이 운동에 가담하여, 에도와 교토에서 근황(勤皇)·파약·양이의 선전 활동을 펼치며 각 번의 지사들과 교류했다.
1862년, 신사쿠는 "사쓰마 번은 이미 나마무기 사건에서 오랑캐를 죽여 양이의 열매를 거두었는데, 우리 번은 아직도 공무합체를 말하고 있다. 어떻게든 양이의 결과를 이루어야 한다. 번 정부에서 이를 단행할 수 없다면, 우리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외국 공사들이 종종 무슈 가나자와(武州金澤무슈 가나자와일본어)에서 유흥을 즐기러 가는 길에 그들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동지들(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오야마 야하치로, 나가미네 구라노스케, 시도 몬타, 마쓰시마 고조, 테라시마 주자부로, 아리요시 구마지로, 아카네 타케토, 야마오 요조, 시나가와 야지로 등 11명)과 논의했으나, 구사카가 도사번의 다케치 한페이타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다케치가 이를 전 도사 번주인 야마노우치 요도에게 전하면서 조슈 번 세자 모리 사다히로에게까지 알려져 무모하다는 이유로 제지되어 실행에 이르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신사쿠는 앵전 저택 내 근신을 명령받았다.
분큐 2년 12월 12일(1862년 12월 12일), 신사쿠는 막부의 칙령 위반에 항의하기 위해 동지들과 함께 시나가와 고텐야마에 건설 중이던 영국 공사관 방화를 주도했다. 이 사건 이후 다른 동지들이 잇따라 교토로 향하는 가운데, 신사쿠는 에도에 남아 쇼인의 개장 등을 마쳤다. 이후 교토에 있던 세자의 명을 받은 시도 몬타(이노우에 가오루)가 신사쿠를 데리러 와 함께 교토로 향했다. 교토에 불려온 신사쿠는 번이 자신에게 맡기려던 조정과의 교섭역인 학습원 용무 담당직을 사퇴하고, 갑자기 10년간의 휴가를 요청했다. 허락되자 다음 날 머리를 깎고 승려의 모습이 되었다. 이때 신사쿠는 "서쪽으로 가는 사람을 따르며 동쪽으로 가는 내 마음을 신이 아시려나"(西へ行く人をしたひて東行くわが心をば神やしるらむ니시 에 유쿠 히토 오 시타이테 히가시 유쿠 와가 코코로 오 바 카미 야 시루란일본어)라고 읊으며 '도교'(東行도교일본어)라는 호를 사용했다. 이후 하기로 돌아와 요시다 쇼인의 생가가 있던 마쓰모토 마을의 작은 셋집으로 아내와 하녀 한 명을 데리고 이사했다.
3.2. 쇼타이와 기병대 창설

분큐 3년(1863년) 5월 10일, 막부가 조정의 요청으로 정한 양이 기한이 지나자, 조슈번은 간몬 해협에서 외국 선박에 포격을 가했지만, 오히려 미국,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 서양 열강의 보복 공격을 받아 참패했다(시모노세키 전쟁). 다카스기 신사쿠는 시모노세키 방어를 책임지게 되었고, 같은 해 6월, 회선상 시라이시 쇼이치로의 저택에서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지원병으로 구성된 기병대를 결성했다. 기병대는 아미다지(阿弥陀寺아미다지일본어)(현 아카마 신궁 옆)를 본거지로 삼았다.
다카스기는 기존의 봉건적 신분 제도를 타파하고 민간인으로 구성된 보조 비정규 민병대인 '쇼타이(諸隊쇼타이일본어)'라는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창안했다. 봉건 제도 하에서는 사무라이 계급만이 무기를 소유할 수 있었으나, 다카스기는 농민, 상인, 목수, 심지어는 스모 선수와 불교 승려까지도 새로운 사회 혼합 준군사 부대에 모집했다. 이 부대에서는 채용이나 승진이 (이론적으로는) 사회적 지위에 의존하지 않았다. 사무라이가 대부분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카스기는 중산층 상인과 농민의 재정적 부를 활용하는 것이 번의 재정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군사력을 증가시킬 수 있음을 명확히 파악했다。조슈번의 지도자들은 번의 사회 구조를 변경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제한적인 농민과 일반인의 활용은 전통 사회를 혼란시키지 않고 새로운 유형의 군대를 형성할 수 있게 했다.
1863년 6월, 다카스기 신사쿠는 직접 지휘하는 특별 쇼타이 부대인 '기병대'를 창설했는데, 이 부대는 300명의 병사로 구성되었고, 그중 약 절반은 사무라이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기병대와 선봉대(撰鋒隊선봉대일본어) 간의 충돌인 교호지 사건으로 두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기병대 총괄 책임자 미야기 히코스케가 할복하고 다카스기는 사건의 책임을 지고 총독직에서 해임되었다. 해임 후 약 두 달 만에 기병대 총독직은 가와카미 야이치와 다키 야타로에게 넘어갔고, 10월에는 아카네 다케토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그 뒤를 이었다. 이후 다카스기는 자객을 피해 숨어 지내던 중 시모노세키 아카마세키의 사카이야 홍등가에서 샤미센 연주를 하는 오우노(おうの오우노일본어)(1843년-1909년)라는 게이샤를 만나 관계를 맺기도 했다. 막부 관리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번주로부터 '도이치'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개명했다.
4. 막부 말기의 혼란과 주요 활동
다카스기 신사쿠는 막부 말기 일본을 뒤흔든 주요 사건들 속에서 혁신적인 군사 개혁과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4.1. 시모노세키 전쟁과 화의 교섭

분큐 3년(1863년) 8월 18일에 교토에서 사쓰마번과 아이즈번이 결탁한 8월 18일의 정변으로 조슈번이 추방되면서, 조슈번의 국정 주도권이 위협받았다. 같은 해 9월,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의 4개국 연합 함대가 시모노세키를 포격하고 포대를 점령하기에 이르자, 조슈번은 다시 다카스기를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다카스기는 탈번죄로 노야마 감옥에 투옥된 상태였으나, 번의 군사력 열세를 인지한 조슈번은 그를 사면하고 서양 세력과의 평화 교섭을 맡겼다. 당시 다카스기의 나이는 겨우 24세였다.
교섭 자리에서 통역을 맡았던 이토 히로부미는 훗날 이 평화 조약에서 연합국이 배상금 지불과 함께 히코시마(彦島히코시마일본어)의 조차를 요구했다고 회고했다. 다카스기는 배상금 문제는 막부에 대신 교섭하도록 합의하고, 히코시마 조차는 식민지화를 의미함을 꿰뚫어보고 이를 완강히 거부하여 철회시키는 데 성공했다. 일설에는 고지키를 암송하며 얼버무려 무마시켰다고도 전해진다. 이 외교적 성공은 서구 열강과의 직접적인 대결이 무모하다는 다카스기의 깨달음을 더욱 확고히 했고, 일본은 서양의 군사 전술, 기술,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카스기는 기병대를 최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부대로 재편성하고 서양의 전략과 전술 훈련을 도입하는 등 군사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그는 존왕양이 운동의 방향을 서구 배척에서 막부 타도와 일본의 국력 강화를 위한 반막부 운동으로 전환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4.2. 고잔지 거병과 조슈 번 내전 승리
막부에 의한 제1차 조슈 정벌이 임박하면서 조슈번 내에서는 막부에 순종하자는 보수파(속론파)가 득세했고, 다카스기는 이들을 '속론파'라 칭하며 자신들을 '정의파'라 불렀다. 10월, 그는 후쿠오카로 피신하여 히라오 산장(平尾山荘히라오 산장일본어)에 은신했으나, 속론파가 정의파 가로들을 처형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시모노세키로 귀환했다.
겐지 원년(1864년) 12월 15일 밤, 다카스기는 이토 슌스케(이토 히로부미)가 이끄는 역사대(力士隊), 이시카와 고고로(石川小五郎이시카와 고고로일본어)(가와세 마사타카)가 이끄는 유격대 등 조슈번 제대를 이끌고 공산사에서 거병했다. 이후 기병대 등 다른 제대들도 합류했으며, 겐지 2년(1865년) 3월에는 속론파의 수괴인 무쿠나시 도타 등을 축출하고 번의 실권을 장악했다.
1865년 3월, 다카스기 신사쿠와 이토 슌스케(이토 히로부미)는 조슈 번주의 명을 받아 시모노세키 개항 협상을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려 했고, 시모노세키에 기항한 영국 상선 유니온호에 편승하여 나가사키로 향했다. 그들은 1865년 4월 16일 영국 나가사키 영사 대리인 아벨 가워를 방문하여 6일간 그의 저택에 머물며 협상했다. 다카스기는 당초 즉시 영국으로 건너가 이 문제를 해결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어서 다카스기와 이토는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와 그의 저택에서 접촉하여 영국으로의 도항을 부탁했으나, 도항 준비가 갖춰질 때까지 나가사키 영국 영사관 관리였던 존 F. 라우더가 두 사람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자신의 집에서 돌보았다. 다카스기, 이토, 라우더는 이미 전년도 시모노세키 전쟁의 강화 회담에서도 면식이 있었다. 라우더는 "조슈가 어려운 시기에 외국에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두 사람의 도항을 만류했고, 글로버도 이에 동의하여 도항은 단념되었다. 라우더는 이때 "시세는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으며, 이제는 쇄국이 아닌 개국의 시대이다. 바칸(시모노세키)을 개항하여 부국강병을 꾀하고, 조슈번의 독립을 한 발 내딛을 때이다. 바칸의 개항은 조슈를 위해 막대한 이익이 될 것"이라며 시모노세키의 개항을 권했다. 영국에서는 새로운 공사로 해리 파크스가 부임할 예정이었고, 그는 각국으로부터 신망이 두터운 유능한 인물이라며 두 사람에게 소개할 것도 말하며, 시모노세키 개항에 대해 파크스에게 이야기해달라고 전했다. 이리하여 다카스기와 이토는 그 의견에 찬동하여 파크스에게 보낼 서신을 글로버에게 맡기는 동시에, 라우더가 준비한 무역 관련 서류를 들고 시모노세키로 돌아갔다.
4월에는 시모노세키 개항을 추진한 일로 인해 양이파와 속론파 양측으로부터 목숨을 위협받아, 애첩 오우노와 함께 시코쿠로 피신하여 히류 옌세키에게 의지했다. 6월에는 가쓰라 고고로의 주선으로 귀향했다. 겐지 2년(1865년) 1월 11일부로 신사쿠는 다카스기 가문의 가독을 박탈당하고 '하구쿠미'(育하구쿠미일본어, 양육) 신분으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9일, 막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번의 명령으로 '다니 센조'(谷潜蔵다니 센조일본어)로 개명했다. 게이오 3년(1867년) 3월 29일에는 새로운 봉록 100석이 주어지며 다니 가문을 창설하고 초대 당주가 되었다. 다카스기 본가의 가독은 막내 여동생 히카리(光히카리일본어)의 남편인 다카스기 슌키(高杉春棋다카스기 슌키일본어)가 이었다.
4.3. 제2차 조슈 정벌의 지휘와 승리
재차 조슈 정벌에 대비하여 신사쿠는 방어 태세 강화를 추진했다. 1866년(게이오 2년), 신사쿠는 사쓰마-조슈 동맹에 참여할 목적으로 세 번째로 나가사키를 방문하여 도자마치(銅座町도자마치일본어)의 사쓰마 번 저택으로 향했다. 게이오 2년(1866년) 1월 21일(일설에는 1월 22일), 그가 가쓰라 고고로(기도 다카요시)·이노우에 몬타·이토 슌스케 등과 함께 추진했던 사쓰마-조슈 동맹이 도사번의 사카모토 료마·나카오카 신타로·히지카타 히사모토의 중개로 교토 사쓰마 번 저택에서 체결되었다.
5월, 이토 슌스케와 함께 사쓰마행을 명받고, 그 도중 나가사키에서 증기선 '헤이신마루(丙寅丸헤이신마루일본어)'(오텐토사마루(オテントサマ丸오텐토사마루일본어))를 구입했다.
게이오 2년 6월의 제2차 조슈 정벌(사경 전쟁)에서는 해군 총독으로서 '헤이신마루'에 승선하여 전투를 지휘했다. 오시마구치 전투에서는 '헤이신마루'가 막부 측의 '아사히마루'와 '야쿠모마루'를 기습했으나, 큰 전과 없이 마무리되었다. 고쿠라시 방면에서는 함포 사격의 지원 아래 기병대와 보국대(報国隊호코쿠타이일본어)를 모지(門司모지일본어)와 다노우라(田ノ浦다노우라일본어)에 상륙시켜 막부군을 패주시켰다. 그 후 고쿠라 성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히고번 호소카와 가문의 군대에 격퇴되어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7월 20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사망하자, 7월 30일에는 히고 번, 구루메 번, 야나가와 번, 가라쓰 번, 나카쓰 번이 철수했고, 막부군 총독 오가사와라 나가미치 또한 해로로 고쿠라에서 이탈했다. 남겨진 고쿠라 번이 8월 1일 고쿠라 성에 불을 지르고 도주했기 때문에, 막부군의 패배가 결정되었다. 이로써 막부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이듬해 게이오 3년(1867년) 11월의 대정봉환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다카스기 신사쿠의 노력은 조슈를 작은 규모의 '무장 국가'로 만들었으며, 이는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에 비해 불균형적인 군사력을 부여했다. 도쿠가와 군대에 대한 조슈의 승리는 막부의 군사적 권위를 실추시켰고, 전통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던 번들이 조슈와 동맹을 맺어 이후의 전투에서 도쿠가와 막부의 종말과 1868년 메이지 유신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5. 사상과 인물됨
다카스기 신사쿠는 혁신적인 사상과 독특한 인물됨으로 막말 시대를 풍미했다.
- 소위 사세구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재미있는 일이라곤 없는 세상을 재미있게"(おもしろきこともなき世を面白く오모시로키 코토모 나키 요 오 오모시로쿠일본어)와 "재미있는 일이라곤 없는 세상에 재미있게"(おもしろきこともなき世に面白く오모시로키 코토모 나키 요 니 오모시로쿠일본어)가 그것이다. 신사쿠의 자필 사세구가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것은 불명이다. 다만 도교안의 비석에는 '니(に니일본어)'가 새겨져 있고, 호후 텐만구의 가비에는 '오(を오일본어)'가 새겨져 있다. 이치사카 타로는 "'오'는 후대에 개작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신사쿠가 임종 시에 이 구절을 읊었고, 그를 간호하던 노무라 보토니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로다"(すみなすものは心なりけり스미나스 모노 와 코코로 나리케리일본어)라는 뒷 구절을 붙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노래는 그의 사망 전년인 1866년에 이미 지어진 것으로, 정확히는 사세구가 아니라는 설이 유력하다.
- 도도이쓰 중 "삼천세계의 까마귀를 죽이고, 임과 함께 잠들고 싶어라"(三千世界の鴉を殺し、主と添寝がしてみたい산젠세카이노 카라스오 코로시, 키미토 소이네가 시테미타이일본어)는 일반적으로 신사쿠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일각에서는 기도 다카요시의 작품이라는 설도 있음). 이 도도이쓰는 오늘날에도 하기의 민요인 '남자라면'(男なら오토코나라일본어)이나 '요이쇼코쇼(ヨイショコショ節요이쇼코쇼 부시일본어)'의 가사로 불린다.
- 신사쿠는 공금과 사금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번의 돈으로 군함을 두 번이나 구매하려 한 적이 있다.
- 일본에 주둔했던 영국인 병사가 한 번 칼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신사쿠는 이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병사가 무사의 혼이라 할 수 있는 칼을 단순한 구경거리처럼 여러 번 다시 보여달라고 하자, 신사쿠는 이를 불쾌하게 여겨 그 후로는 절대 칼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 신사쿠가 상하이에서 구입한 S&W 모델 2 아미 33구경 6연발 권총을 사카모토 료마에게 선물했다는 일화가 있다. 료마가 편지에 "그 다카스기가 보낸 비스톨로 쳐부쉈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신사쿠가 료마에게 권총을 보낸 것은 확실하지만, 이 권총이 실제로 상하이에서 구입된 것인지에 대한 확증은 없다. 이치사카 타로는 신사쿠가 상하이에서 권총을 구입한 시점부터 료마에게 보낼 때까지 약 2년 반 동안 조슈번에서 무기 밀수가 이루어졌고, 신사쿠 또한 밀수된 권총 한 정을 개인적으로 구매한 점을 들어, 료마에게 보내진 권총이 '상하이 선물'이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훗날 이토 히로부미는 히코시마 앞바다를 배로 지나갈 때 "그때 다카스기가 조차 문제를 얼버무리지 않았다면, 히코시마는 홍콩이 되고 시모노세키는 주룽이 되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 그의 말 중에는 "죽어야 할 때 죽고, 살아야 할 때 사는 것이 영웅호걸이 할 일이다. 2, 3년간은 경거망동하지 말고 오로지 학문에 힘쓰는 것이 좋다. 그 속에서 영웅이 죽어야 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 또한 "대저 영웅이란 별일 없을 때는 비렁뱅이처럼 숨어 지내야 한다. 변고가 있을 때에 비로소 용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 "사내란 곤란하다고 결코 말해서는 안 된다. 이는 아버지가 평소에 시끄럽게 말씀하시던 것이지만, 곤란하다고 말할 때는 죽을 때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아무것도 곤란하지 않다는 기개로 임하면, 저절로 길이 열리는 법이다. 어떤 난국에도 반드시 도피할 길은 있다. 막다른 길에 이르면 돌아갈 길이 있다는 말이다. 단연코 곤란하지 않다는 기개로 임하면 반드시 길이 생기는 법이다. 그러므로 '곤란하다'는 한마디만은 결코 입 밖에 내지 말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6. 개인 생활
다카스기 신사쿠의 개인적인 삶은 그의 공적인 역할만큼이나 다채로웠다. 그의 결혼 생활과 알려진 연인, 그리고 가족 관계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만엔 원년(1860년) 11월, 그는 이노우에 마사(井上雅이노우에 마사일본어)와 결혼했다. 마사는 야마구치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후 분큐 3년(1863년)에는 시모노세키의 유곽에서 샤미센 연주자였던 게이샤 오우노(おうの오우노일본어)를 만나 관계를 맺었다.
다카스기 신사쿠는 겐지 2년(1865년) 1월 11일부로 다카스기 가문의 가독을 박탈당하고 '하구쿠미'(育하구쿠미일본어) 신분으로 취급되었다. 같은 해 9월 29일에는 막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번의 명령으로 다니 센조(谷潜蔵다니 센조일본어)로 개명했다. 게이오 3년(1867년) 3월 29일에는 새로운 봉록 100석을 받고 다니 가문을 창설하여 초대 당주가 되었다. 다카스기 본가의 가독은 막내 여동생인 히카리(光히카리일본어)의 남편인 다카스기 슌키(高杉春棋다카스기 슌키일본어)가 이었다.
그의 아버지 다카스기 고추타(高杉小忠太다카스기 고추타일본어)는 조슈 번의 중간 계급 사무라이였고, 어머니 미치(ミチ미치일본어)는 오니시 쇼소(大西将曹오니시 쇼소일본어)의 딸로 1897년 78세로 사망했다. 숙부인 다노우에 우헤이타(田上宇平太다노우에 우헤이타일본어)는 요시다 쇼인을 사쿠마 쇼잔에게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의 여동생으로는 무토 마사아키(武藤正明무토 마사아키일본어)의 아내가 된 타케(武타케일본어), 사카 엔스케(坂円介사카 엔스케일본어)의 아내가 된 하에(栄하에일본어), 오니시 기이치로(大西機一郎오니시 기이치로일본어)의 아내가 되었다가 후에 다카스기 슌키의 아내가 된 히카리(光히카리일본어)가 있었다.
다카스기의 말년, 그의 병세가 악화되자 그의 아내 마사와 3세 아들 도이치(高杉東一도이치일본어, 1864년-1913년)가 하기에서 그를 방문했다. 오우노는 아내의 존재를 의식하여 떠나 노무라 보토니(野村望東尼노무라 보토니일본어)의 추천으로 불교 승려가 되어 다니 바이쇼(谷梅処다니 바이쇼일본어)라는 법명을 받았으나, 마사가 다시 그를 돌보도록 불러들였다.
7. 사망

다카스기 신사쿠는 1866년 10월부터 폐결핵이 악화되어 시모노세키시 사쿠라야마초의 하야시 산쿠로(林三九郎하야시 산쿠로일본어)의 저택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연인 오우노와 불교 비구니이자 시인인 노무라 보토니가 그를 간호했다.
1867년 2월경, 그의 아내 마사와 세 살배기 아들 도이치(高杉東一도이치일본어, 별명 우메노신)가 하기에서 그를 방문했다. 아내의 존재 때문에 오우노는 떠나 다니 바이쇼(谷梅処다니 바이쇼일본어)라는 이름으로 불교 비구니가 되었으나, 후에 마사의 부름을 받아 다시 그를 돌보게 되었다. 그러나 1867년 3월, 다카스기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자, 마사와 도이치는 하기로 돌아갔고, 바이쇼와 노무라는 그가 1867년 5월 17일에 사망할 때까지 곁을 지켰다. 향년 29세(만 27세 8개월)였다. 일본 음력으로는 게이오 3년 4월 13일 밤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묘비명 등에서 4월 14일로 되어 있는 것은 장남인 도이치에게 다니 가문의 상속을 시키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임종 시에는 부모님과 아내, 아들이 모두 참석했으며, 노무라 보토니, 야마가타 교스케, 다나카 겐스케 등이 지켜보았다고 알려져 있다(단, 다나카 본인은 일기에 당일 교토에 있었다고 기록).
그의 유언에 따라 다카스기는 요시다의 기요미즈산 기병대 진영 근처에 묻혔다. 그로부터 불과 1년 후, 그의 별명 '도교'(東行도교일본어, 동쪽으로 가다)에 명확히 드러났던 도쿠가와 막부 타도의 꿈은 메이지 유신으로 실현되었다. 1869년 유럽으로 떠나기 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기요미즈산에 있는 자신의 초가집 무린안(無鄰菴무린안일본어)을 다카스기의 옛 연인이자 비구니인 바이쇼에게 주어 그곳에 머물며 다카스기의 묘를 돌보게 했다. 기도 다카요시(옛 가쓰라 고고로)와 그의 아내 마쓰코(松子마쓰코일본어)는 1871년 어린 아들 도이치를 돌보았다. 1884년, 야마가타 아리토모, 야마다 아키요시,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 다카스기의 친구들과 동지들은 자금을 모아 그의 별명을 딴 암자 도교안(東行庵도교안일본어)을 그의 묘소 가까이 건립했으며, 다니 바이쇼는 1909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그의 묘를 돌보았다. 그의 묘는 1934년 일본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8. 유산과 평가
다카스기 신사쿠는 일본 역사에 지대한 유산을 남겼으며, 후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평가되고 있다.
8.1. 역사적 의의와 영향
다카스기 신사쿠는 초기 메이지 유신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수완으로 모두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2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그 후 메이지 시대의 유명한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지는 못했다. 반면, 그의 부하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기도 다카요시 등은 신정부의 총리대신 등 고위직에 진출하여 일본 근대화를 이끌었다.
그의 고향인 야마구치현 하기 시에서는 여전히 신비롭고 에너지 넘치는 영웅으로 기억되며, 군사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 및 사회 문제에서도 근대화, 서구화 및 개혁의 길을 여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그가 창설한 기병대는 기존의 봉건적 신분 제도를 타파하고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로 구성된 군대였으며, 이는 이후 일본 제국 육군의 창설과 징병제의 도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 일본의 군사 현대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가 주도한 '무장 국민'의 개념은 조슈 번이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는 데 기여했으며, 도쿠가와 세력에 대한 승리는 막부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메이지 유신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8.2. 동시대 인물들의 평가 및 일화
다카스기 신사쿠는 동시대 인물들로부터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 요시다 쇼인은 그를 "식견이 있는 선비이다. 그러나 학문에 힘쓰지 않으며, 또한 매우 자기 뜻대로 자만하는 버릇이 있다. 내가 일찍이 구사카 겐즈이를 내세워 신사쿠를 억눌렀는데, 신사쿠의 마음이 크게 불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사쿠의 학업이 갑자기 늘고, 논의가 더욱 높아져 동지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내가 일을 논의할 때마다 주로 신사쿠를 불러 이를 결정했다. 그의 말은 종종 얕볼 수 없는 것이었다"고 평했다. 또한 "그의 뛰어난 식견은 내가 미치지 못할 바이다"라거나, 사쿠마 쇼잔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다카스기 생은 나보다 10년 어리며, 학문은 미흡하고 경력은 얕다. 그러나 강건한 본질과 맑은 식견은 평범한 이들을 뛰어넘는다"고 극찬했다.
- 기도 다카요시는 그를 "준수한 소년이다. 다만 아쉽게도 약간 완고한 성품이 있다. 훗날 아마도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귀하(쇼인)가 일찍이 그 점에 주의하여 가르쳤더라면 반드시 그의 미래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 구사카 겐즈이는 "사려가 주도면밀하며, 그 재능은 당대 비할 데가 없다"고 말했고, "신사쿠는 결국 내가 미치지 못할 바이다"라고 인정했다。
- 이리에 쿠이치는 "구사카는 (유지조의) 대장으로서 진중에서 기거하며 병사들과 함께 먹고 마셨고, 근엄하고 검소했다. 다카스기는 이와 반대로 대부분 병영 밖에서 머물렀고, 때로는 게이샤를 데리고 진중에 들어온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 대한 병사들의 인망은 전혀 같았다"고 회고하며 그들의 다른 성격을 묘사했다.
- 이토 히로부미는 "움직이면 뇌전과 같고, 말하면 풍우와 같아, 모든 눈이 놀라 감히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이 사람이 바로 우리의 도교 다카스기 군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극찬했다. 또한 "사이고 난슈와 같은 유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용맹한 사람으로, 창업적인 재간이 매우 풍부한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당시에 이미 무리를 뛰어넘었던 다카스기라면, 오늘날에도 (이토나 이노우에) 그들과 비교할 바가 아닐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의 비범함을 강조했다.
- 야마다 아키요시는 "그 위풍과 영기 늠름하여,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군은 평생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때로는 연해(硯海겐카이일본어)에서 달을 마시고, 때로는 사쿠라야마(桜山사쿠라야마일본어)의 꽃을 읊으며 유유자적하며 스스로 만족하고, 사람들과 고락을 함께 했다. 군이 유신 성명의 아침에 서서 기린의 다리를 펼칠 수 있었다면, 그 이룬 바는 과연 어떠했을까. 애석하다, 천명에 수가 있어 후세에 그를 읽는 자들로 하여금 공연히 그 호탕하고 초월적인 기상을 흠모하게 할 뿐이다"라고 평가했다.
- 나카오카 신타로는 "담략이 있고, 병사에 임하여 흔들림이 없으며, 기회를 보고 움직여 기이한 방법으로 남을 이기는 자는 다카스기 도교(신사쿠)이니, 이 또한 락서(洛西락서일본어)의 기재이다"라고 했다.
- 가쓰 가이슈는 "나이는 젊었지만, 시대가 시대였기에 충분히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아주 기개 넘치는 사내였다"고 평했다.
- 다나카 미쓰아키는 그를 "병사를 다루는 데 귀신과 같았던 다카스기, 일에 임하여 신출귀몰했던 영걸 다카스기, 세상에 다시 없을 쾌남아 다카스기"라고 찬사했다. 또한 "기책이 종횡무진하고 신출귀몰했으며, 그의 한 번의 거동과 한 번의 행동이 모두 천하의 우두머리가 되어 번 전체의 기개를 고무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 근왕 운동가들의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고 평가했다. 그는 "나는 유신 삼걸을 모두 알고 있다. 또한 사카모토, 다케치, 나카오카 외에 많은 명사와 선배들과 접촉했다. 그러나 우뚝 솟아 독보적이었던 이는 다카스기이다"라고 다카스기를 최고로 꼽았다.
- 하야카와 이사무는 "준수하고 기발하며, 병사를 가볍게 다루는 것이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九郎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일본어)의 풍모가 있었다. 탁월한 식견과 통찰력으로 기회를 포착하고 결정하는 데 예측할 수 없는 힘이 있었으니, 그 재략이 어찌 병사에만 그쳤겠는가"라고 칭찬했다.
- 미우라 고로는 "다카스기 신사쿠라는 사람은 정말 위인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위대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이 다카스기 한 사람뿐이다. 실로 눈썰미가 빠르고 기민한 사람으로, 임기응변에 능하고 기지가 샘솟듯 했다. (중략) 그 귀신 같은 계략과 신묘한 계산은 도저히 보통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니다. 오니 사이고가 위대하다고 하지만, 다카스기는 차원이 다르다. 오니 사이고는 하는 행동이 없고 그저 멍하니 있을 뿐이지만, 다카스기는 기략이 종횡무진하여, 행하는 바마다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라고 극찬했다.
- 오쿠무라 이오코는 " (조슈에 잠입했을 때) 남장한 나를 여자임을 간파한 사람은 오직 다카스기 신사쿠 한 사람뿐이었다. 다카스기는 과연 대단한 점이 있었다"고 말했다.
9. 기념물과 추모 시설
다카스기 신사쿠를 기리기 위한 주요 기념물과 추모 시설은 다음과 같다.
- 도교안**: 그의 묘소는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요시다초에 위치한 도교안(東行庵도교안일본어)에 있다. 2016년 4월에는 신사쿠의 생전 유언을 새긴 '묘지비'가 건립되었다. 도교안은 그의 별명 '도교'에서 이름을 따왔다.
- 야스쿠니 신사**: 기도 다카요시, 오무라 마스지로 등에 의해 도쿄 쇼콘샤(東京招魂社도쿄 쇼콘샤일본어)(현 야스쿠니 신사)에 요시다 쇼인, 구사카 겐즈이, 사카모토 료마, 나카오카 신타로 등과 함께 합사되었다.
- 하기시 동상**: 그의 고향인 하기 시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10. 대중문화 속 다카스기 신사쿠
다카스기 신사쿠는 현대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되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 만화 및 애니메이션 《바람의 검심》과 그의 OVA 각색판 《바람의 검심 추억편》에서 병세가 위독한 상태로 등장하며, 젊은 히무라 켄신을 기병대로 영입한 후 가쓰라 고고로가 그를 '히토키리 발도재'로 만들도록 허락하는 인물로 나온다. 거칠고 무자비한 전사로 묘사되지만, 켄신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것을 만류하려 하는 등 내면의 갈등도 보여준다.
- 만화 시리즈 《은혼》의 주요 악당 중 한 명인 다카스기 신스케의 영감이 되었다.
- PSP 게임 《바쿠마츠 록》과 그의 애니메이션 각색판에서는 매우 허구화된 버전으로 등장한다. 막말을 배경으로 한 이 게임은 음악을 테마로 하며, 다카스기는 사카모토 료마가 이끄는 록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묘사된다.
- 대부분의 NHK 대하드라마에서 메이지 유신을 다룰 때 다카스기 신사쿠가 등장한다. 최근 사례로는 《료마전》(배우: 이세야 유스케)과 《꽃 타오르다》(배우: 고라 겐고)가 있다.
- 1957년 영화 《막말 태양전》에서는 이시하라 유지로가 다카스기 신사쿠 역을 맡았다.
- 만화 《나츠유키 랑데부》에서는 "재미없는 세상을 즐겁게 살다"라는 경구를 남긴 인물로 언급된다.
- 애니메이션 《바쿠마츠》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나카무라 유이치가 일본어 성우를 맡았다.
- 모바일 게임 《Fate/Grand Order》에서는 아처 클래스 서번트로 등장한다.
- 쓰쓰미 다카시의 만화 《시두》의 주인공이다.
- 실시간 전략 게임 《토탈 워: 쇼군 2 - 사무라이의 몰락》에서는 조슈 가문의 시작 장군으로 등장하며, 기병대가 가문의 고유 엘리트 유닛으로 등장한다.
- 2024년 액션 RPG 《라이즈 오브 더 로닌》에서는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11. 관위
다카스기 신사쿠에게 사후 추증되거나 부여된 명예로운 직위는 다음과 같다.
- 정4위: 1891년(메이지 24년) 4월 8일에 정4위(正四位쇼시이일본어)가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