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다니구치 요시로는 일본의 전통 건축과 서구 모더니즘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 건축가로, 격동의 시대를 겪으며 자신만의 건축 철학을 확립했다.
1.1. 어린 시절 및 교육
다니구치 요시로는 1904년 가나자와시 가타마치의 구타니야키 가마터 '다니구치 긴요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다니구치 요시지로(谷口吉次郎)는 두 차례 유럽을 방문하여 구타니야키를 여러 박람회에 출품하고 수상하는 등 일본 도자기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스이엔'이라는 아호를 가지고 그림, 노, 시, 바둑 등을 즐겼으며 화가와 공예가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요시로는 이시카와현 사범학교 부속 초등학교, 이시카와현립 제2중학교, 제4고등학교 (구제)를 거쳐 1925년 도쿄 제국대학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그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 도쿄의 오래된 건축물들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제국 호텔과 같은 서구의 새로운 부흥 양식에 자리를 내주거나, 1923년 관동대지진과 같은 끔찍한 지진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재해에 견딜 수 있는 새로운 건축 방식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1.2. 초기 경력 및 독일 경험
1928년 도쿄 제국대학 공학부 건축학과를 졸업한 다니구치 요시로는 1929년 은사 사노 도시카타의 권유로 도쿄 공업대학 강사로 부임했다. 1930년에는 조교수가 되었고, 1943년에는 교수로 승진했다. 그는 1929년부터 1965년까지 도쿄 공업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건축 분야에 기여했다.
그의 초기 주요 작품으로는 1932년 설계한 '도쿄 공업대학 수력 실험실'과 1935년 건설한 자신의 자택이 있다. 1938년부터 1939년까지는 주독 일본 대사관 신축의 일환으로 일본 정원 조성을 위해 베를린에 출장을 다녀왔다. 독일에서 그는 알베르트 슈페어의 지도를 받으며 일본 대사관 정원 설계를 담당했다. 이 시기에 그는 카를 프리드리히 신켈의 엄격한 고전주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신켈의 엄숙하고 우아한 형식주의는 슈페어의 작품과 함께 박물관, 홀, 기념비 등 거대한 기념비적 프로젝트에 봉사하는 웅장하고 미니멀리즘적인 특성을 공유했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다니구치는 전쟁 중 유럽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마지막 배인 야스쿠니마루를 타고 도쿄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피했던 전쟁에 일본이 휘말리고, 이전의 모든 지진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파괴되는 것을 다시 한번 목격하게 되었다.
2. 주요 활동 및 성과
다니구치 요시로는 일본 근대 건축의 전환기에 수많은 중요한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2.1. 주요 건축 작품
다니구치 요시로는 50개 이상의 건물과 10개의 기념비를 설계했으며, 그의 작품은 공공 건물, 문화 시설, 기념물, 주택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그는 특히 중요한 문화적 기능을 수행하며 일본의 문화적 지혜를 전달하고 새로운 이상과 미래의 약속을 심어주는 공공 영역의 프로젝트에 중점을 두었다.


그의 주요 건축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명칭 | 완공 연도 | 소재지 | 비고 |
---|---|---|---|
도쿄 공업대학 수력 실험실 | 1932년 | 도쿄도 메구로구 |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 |
자택 | 1935년 | 도쿄도 시나가와구 | |
게이오기주쿠대학 유치사 본관 | 1935년 | 도쿄도 시부야구 | |
게이오기주쿠대학 히요시 기숙사 | 1938년 |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고호쿠구 | |
후지무라 기념당 | 1947년 | 기후현 나카쓰가와시 | DOCOMOMO JAPAN 선정 작품 |
게이오기주쿠대학 제3교사(4호관) 및 대학 학생회관 | 1949년 | 도쿄도 미나토구 |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 일본 건축학회 작품상 수상 |
게이오기주쿠대학 제2연구실(신만래사) | 1951년 | 도쿄도 미나토구 | |
이시카와현 섬유회관 | 1952년 |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 현 서쪽 거리 교육 연수관 |
지치부 시멘트 제2공장 | 1956년 | 사이타마현 지치부시 | 현 지치부 태평양 시멘트 지치부 공장, 일본 건축학회 작품상 수상 |
도쿄 공업대학 창립 70주년 기념 강당 | 1958년 | 도쿄도 메구로구 | DOCOMOMO JAPAN 선정 작품, 등록 유형 문화재(건조물) |
후지무라 기념관 | 1958년 | 나가노현 고모로시 | |
하라 다카시 기념관 | 1958년 | 이와테현 모리오카시 | |
이시카와현 미술관 | 1959년 |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 현 이시카와현립 전통 산업 공예관 |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 1959년 | 도쿄도 지요다구 | |
도구 어소 | 1960년 | 도쿄도 미나토구 | |
아오모리현청 | 1961년 | 아오모리현 아오모리시 | |
분쿄구립 오가이 기념 혼고 도서관 | 1962년 | 도쿄도 분쿄구 | |
호텔 오쿠라 도쿄 본관 메인 로비 | 1962년 | 도쿄도 미나토구 |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 |
나고야대학 후루카와 도서관 | 1964년 | 아이치현 나고야시 지쿠사구 | 현 나고야대학 후루카와 기념관 |
조센지 | 1965년 | 도쿄도 시부야구 | |
료칸 기념관 | 1965년 | 니가타현 이즈모자키정 | |
제국극장 (로비 및 객석) | 1966년 | 도쿄도 지요다구 | |
야마타네 미술관 | 1966년 | 도쿄도 주오구 |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 |
이데미쓰 미술관 | 1966년 | 도쿄도 지요다구 | |
사이토 모키치 기념관 | 1967년 | 야마가타현 가미노야마시 | |
메이테쓰 버스 터미널 빌딩 | 1967년 | 아이치현 나고야시 나카무라구 | |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 | 1968년 | 도쿄도 다이토구 | |
샌프란시스코 평화탑 | 1968년 |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주, 미국 | |
도호 트윈 타워 빌딩 | 1969년 | 도쿄도 지요다구 |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 |
도쿄국립근대미술관 | 1969년 | 도쿄도 지요다구 | |
하치오지 조센지 영원 | 1971년 | 도쿄도 하치오지시 | |
영빈관 아카사카 이궁 일본풍 별관 | 1974년 | 도쿄도 미나토구 | |
일본학사원 회관 | 1974년 | 도쿄도 다이토구 | |
국립 아스카 자료관 | 1974년 | 나라현 아스카촌 | |
요시카와 에이지 기념관 | 1976년 | 도쿄도 오메시 | |
구리모토 도서관 | 1978년 | 나가노현 스와군 후지미정 | |
아이치현 도자기 미술관 | 1978년 | 아이치현 세토시 | |
가나자와시립 다마가와 도서관 | 1979년 |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 아들 다니구치 요시오와 공동 설계 |
오키나와 전몰자 위령비 | 1979년 | 오키나와현 이토만시 | |
레이메이칸 미술관 | 1983년 |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 사후 완공 |


그는 또한 교육 기관 및 종교 시설과 관련된 건축물도 다수 설계하였다.


이 외에도 그의 건축적 유산은 다양한 공공 및 문화 시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2.2. 저술 및 출판물
다니구치 요시로는 건축가로서의 실천 외에도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의 건축 철학과 사상을 공유했다. 그의 주요 저서와 출판물은 다음과 같다.
- 《수학원 이궁》(The Shugakuin Imperial Villa), 1956년
- 《눈빛 일기》(雪あかり日記), 중앙공론미술출판, 1974년
- 《시냇물 일기》(せせらぎ日記), 중앙공론미술출판, 1983년
- 《눈빛 일기 시냇물 일기》(雪あかり日記 せせらぎ日記), 주코분코, 2015년
- 《다니구치 요시로 저작집》(谷口吉郎著作集) 전5권, 단코샤, 1981년
- 건축 기행
- 건축 평론
- 건축 수필
- 작품편 1
- 작품편 2
- 《다니구치 요시로 작품집》(谷口吉郎作品集), 신건축사 편, 단코샤, 1981년
- 신편 《다니구치 요시로 건축 작품집》(谷口吉郎建築作品集), 단코샤, 2019년
- 《다니구치 요시로의 세계: 모더니즘 상대화가 연 지평》(谷口吉郎の世界 モダニズム相対化가 ひらいた地平), 쇼코쿠샤, 1998년
- 《생활·시정 건축가 다니구치 요시로》(生活・詩情建築家 谷口吉郎), 모분샤, 2022년
2.3. 수상 및 영예
다니구치 요시로는 그의 건축적 기여와 학문적 성취를 인정받아 여러 중요한 상과 영예를 얻었다.
- 1942년: '건조물에 작용하는 풍압의 연구'로 일본 건축학회 학술상 수상
- 1949년: 후지무라 기념당, 게이오기주쿠대학 4호관 및 학생회관 설계로 일본 건축학회 작품상 수상
- 1956년: 지치부 시멘트 제2공장 설계로 일본 건축학회 작품상 수상
- 1957년: 저서 《수학원 이궁》으로 마이니치 출판 문화상 수상
- 1961년: 도구 어소 설계 및 기타 업적으로 일본 예술원상 수상
- 1973년: 문화공로자로 현창 및 문화훈장 수훈
- 1978년: 가나자와시 명예 시민 제1호로 선정
- 1979년: 사망 후 종삼위 및 훈일등 서보장 추증
3. 건축 철학 및 영향
다니구치 요시로의 건축 철학은 전통적인 일본 건축과 서구 모더니즘 사이의 복잡한 대화를 통해 형성되었다. 그는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재해에 견딜 수 있는 새로운 건축 방식의 필요성을 절감했으며, 유럽의 공학 및 건설 기술이 제공하는 자유와 발전에 주목했다.
특히 독일에서 카를 프리드리히 신켈의 엄격한 고전주의와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념비적 프로젝트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1947년 이후 그는 현대 유럽 건축의 '양식'이 일본, 특히 그가 맡게 된 중요한 문화 건축물에는 완전히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에게 영감을 준 다양한 요소들을 통합하려 노력했다. 여기에는 오래된 일본 건축의 전통적인 형태와 공예 기반의 미학, 신켈에게 영감을 주었던 고대 그리스의 '보편적' 고전주의, 고전주의를 현대적 표현으로 변모시킨 독일적 환원주의(르 코르뷔지에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급진적인 신작들로 구현된 국제 양식 (건축)의 이상주의적 순수 미학, 바우하우스 건축을 통한 도시의 민주적 변화에 대한 유토피아적 약속) 등이 포함된다. 이 모든 요소들은 새로운 재료인 강철과 콘크리트로 어떻게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특히 일본을 괴롭혔던 대지진에 저항할 수 있는 건물을 지을 것인가라는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수렴되었다.
현대적인 양식에 매료된 일본에서 다니구치는 오히려 우상파괴주의자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마에카와 쿠니오나 단게 겐조와 같은 다른 모더니스트들의 작품과 의식적으로 대조를 이루었으며, 일본 현대 건축 어휘의 가능한 범위를 지속적으로 확장했다. 다니구치의 모더니즘에 대한 생각은 메이지 시대의 일본 전통 문화 접근 방식을 반영했는데, 이는 심지어 그리스 고전주의까지도 현대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는 코르뷔지에와 현대 건축의 영향을 받았지만, 고전주의, 특히 르네상스 건축에도 공감했다. 이러한 이유로 다니구치는 전통과 현대의 스펙트럼을 넘나들며 특정 한 지점에 그를 명확하게 위치시키기 어렵게 만들었고, 일부에서는 그를 "새로운 현대 건축가 학파와 일본 토착 전통에 더 직접적으로 기반을 둔 보수적인 학파 사이의 연결 고리"로 보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주로 공공 영역의 프로젝트, 특히 문화 기관의 형태를 띠었다. 이 기관들은 중요한 실용적 기능을 수행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비극적인 역사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이상과 미래의 약속을 심어주는 일본의 문화적 지혜를 전달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는 교육 분야에서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가장 적합한 장소를 찾았고, 여러 대학에서 새로 재건되고 성장하는 캠퍼스를 위한 다수의 건물을 지었으며, 새로운 도쿄의 중요한 부분이 될 많은 박물관, 극장, 문화 센터 및 기념물을 만들었다.
4. 개인 생활
다니구치 요시로의 가족은 예술과 건축 분야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구타니야키 가마터 '긴요도'의 주인이자 예술 후원자였던 다니구치 요시지로였다.
그의 아내 기누코(絹子, 1911년생)는 건축가 마쓰이 기요타리(松井清足, 1877-1948)의 둘째 딸이었다. 마쓰이 기요타리는 나고야시 출신으로 1903년 도쿄 제국대학 공과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다쓰노 킹고의 밑에서 도쿄역 설계 주임을 맡았으나, 공법을 둘러싸고 다쓰노와 대립하여 중도에 일본 제국 해군 기사로 전직했다. 만년에는 오바야시구미 도쿄 지점장과 일본 건축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기누코의 어머니 히사는 광산 기술자 요시하라 마사미치의 딸이었다. 기누코의 오빠 마쓰이 구미오(松井汲夫)는 그래픽 디자이너였다.
다니구치 요시로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다.
- 장녀 마미코(真美子, 1933년생)는 센 소시쓰 (14대)의 둘째 아들인 나야 요시하루(단코샤 사장)의 아내이다. 그녀는 여자미술대학을 졸업했다. 마미코의 딸 리미의 남편은 나가타니엔 창업자 나가타니 요시오의 장남이자 동사 전 사장, 나가타니엔 홀딩스 전 회장인 나가타니 에이이치로(1954년생)이다.
- 장남 다니구치 요시오(1937년생)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건축가가 되었다.
- 차녀 마키코(真紀子, 1943년생)는 스기야마 야스시의 둘째 아들인 스스무(유니멕스 사장)의 아내이다. 그녀는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철학과 미학미술사 전공을 졸업하고 도쿄예술대학 대학원 미술학부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의 남동생 요시지(吉二)는 도쿄 제국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으나 병으로 일찍 사망했다. 여동생의 남편인 고이 다카오(五井孝夫)도 건축가였다. 그는 요시로와 마에카와 쿠니오와 함께 제국대학 건축학과에서 공부했으며, 오쿠라성에 입성했고,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 출정 후 가나자와에서 건축 구조 사무소를 설립했다.
5. 평가
다니구치 요시로는 일본 근대 건축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며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5.1. 긍정적 평가
다니구치 요시로는 일본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좋은 의미에서 대중적인 건축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50개 이상의 건물과 10개의 기념비를 설계했으며, 일본 현대 건축의 '국가 원로'로서 많은 전문 활동에 참여했다. 그의 저술 활동 또한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자체로 절묘하고 주변 환경에 잘 어울리는" 무덤, 기념물, 기념비의 디자이너로 명성을 얻었다. 특히 1978년 가나자와시의 첫 번째 명예 시민으로 선정된 것은 그의 고향에서의 높은 위상을 보여준다.
그는 전통적인 일본 건축과 서구 모더니즘 사이의 다리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특히 공공 건물과 문화 시설의 설계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의 작품들은 실용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일본의 문화적 지혜를 전달하고 새로운 이상을 심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재건 과정에서 일본 전통 건축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52년부터 역사적 보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일본 문화재 전문가 협의회와 일본 문화청에 합류했다. 이는 그의 건축적 비전이 단순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을 넘어 과거의 가치를 보존하고 계승하는 데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5.2. 비판 및 논란
다니구치 요시로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나 논란은 자료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건축 양식과 위치에 대한 학술적 논의는 존재한다. 그는 전통과 현대의 스펙트럼을 넘나들며 어느 한 지점에 그를 명확하게 위치시키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로 인해 일부 학자들은 그를 "새로운 현대 건축가 학파와 일본 토착 전통에 더 직접적으로 기반을 둔 보수적인 학파 사이의 연결 고리"로 보기도 한다. 이는 그의 독특한 건축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 그의 업적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마에카와 쿠니오나 단게 겐조와 같은 모더니스트들과 의식적으로 대조되는 작업을 통해 일본 현대 건축 어휘의 가능한 범위를 지속적으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인 다양성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6. 영향
다니구치 요시로는 일본 건축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건축 보존 분야와 후학 양성, 그리고 그의 아들을 통해 그 유산을 이어갔다.
그는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재해에 강한 건축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유럽의 공학 기술을 일본 건축에 접목하려 노력했다. 또한 메이지 시대 건축의 대표작인 로쿠메이칸이 해체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했던 경험은 훗날 박물관 메이지촌의 구상으로 이어졌다. 그는 당시 나고야 철도 부사장인 쓰치카와 모토오와 의견이 맞아 메이지촌 개관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쓰치카와와 다니구치는 가나자와의 제4고등학교 (구제) 동급생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1965년 그는 나고야 북쪽에 위치한 광대한 부지에 메이지촌을 설립하여, 그에게 영감을 준 메이지 시대의 위대한 건축물과 서양 건축에 대한 일본의 해석을 대표하는 근대 작품들을 재건하고 보존하는 데 전념했다. 여기에는 1968년에 해체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제국 호텔도 포함되어, 다니구치의 지휘 아래 조각조각 재건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일본의 근대 건축 유산을 보존하는 데 있어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다니구치는 도쿄 공업대학에서 1929년부터 1965년까지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건축가를 양성했다. 그의 가르침은 일본 건축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제자들은 일본 건축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아들 다니구치 요시오 또한 저명한 건축가로 성장했다. 다니구치 요시오는 도쿄에서 수많은 중요한 건물을 설계했지만, 2004년 뉴욕 근대미술관 재설계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는 다니구치 요시로의 건축적 유산이 아들을 통해 세계적인 수준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7. 기념 및 추모
다니구치 요시로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한 여러 기념물과 기관이 설립되었다.

가나자와시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가나자와 후루사토 위인관에서 가나자와 출신의 위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가나자와시는 다니구치 요시로의 생가 터에 다니구치 요시로·요시오 기념 가나자와 건축관을 조성하여 그의 건축 세계를 대중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의 묘소는 가나자와시 노다야마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