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닉 압둘 아지즈 빈 닉 맛(Nik Abdul Aziz bin Nik Mat말레이어, 1931년 1월 10일 ~ 2015년 2월 12일)은 말레이시아의 정치인이자 이슬람 종교학자이다. 그는 1990년부터 2013년까지 클란탄주의 주수상(Menteri Besar)을 역임했으며, 1991년부터 2015년 사망 시까지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의 정신적 지도자(Mursyidul Am)를 지냈다. 1967년 말레이시아 의회에 선출된 이래 약 48년간 선출직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닉 아지즈는 PAS 지도부 내 다른 동시대 인물들과 달리 인종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며 비말레이계, 비무슬림 유권자들에게 호소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이는 인민동맹과 같은 좌파 및 다문화 정당들과의 역사적인 연합에 기여했다. 2008년에는 반부패 인민운동(GERAK)으로부터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깨끗한 주수상"으로 선정되었으며, 2009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500인의 무슬림"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그의 사망 이후 PAS 지도부는 유사한 진보적 성향의 인물들을 숙청하고, 말레이 우월주의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더욱 우경화되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2.1. 출생 및 가족 배경
닉 압둘 아지즈는 1931년 1월 10일 영국령 말라야 클란탄주 코타바루의 캄풍 풀라우 멜라카에서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대장장이가 되고자 했던 아버지 토크 쿠라(Tok Kura)에 의해 홀로 양육되었다.
1963년 푸안 스리 투안 사바리아 투안 이샤크와 결혼하여 5남 5녀를 두었으며, 자녀 중에는 닉 오마르와 닉 모하마드 압둘이 있다. 그의 친척으로는 투안 이브라힘 투안 만, 닉 무함마드 자와위 살레, 아흐마드 두수키 압둘 라니 등이 있다.
2.2. 종교 교육 및 학업
닉 아지즈는 캄풍 풀라우 멜라카에 있는 자택에서 아버지 투안 구루 하지 닉 모하마드 알리 라자 반자로부터 초기 교육을 받았다. 1936년에는 클란탄의 느가라 느가리 케다이 랄랏 학교에서 3개월간 수학했다. 그의 이슬람 종교 교육은 클란탄(토크 케날리 쿠방 케리안)과 트렝가누주(토크 구루 하지 압바스, 베수트)의 폰독 학교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의 다룰 울룸 데오반드에서 5년간 수학했으며, 1957년에는 파키스탄 라호르 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이후 이집트의 알아즈하르 대학교에서 아랍어 학사 학위와 이슬람 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재학 중 그는 아랍-이스라엘 분쟁의 한가운데서 생활하며 이를 목격한 민간인 중 한 명이었다.
이집트에서 돌아온 후, 닉 아지즈는 아버지의 폰독을 포함하여 클란탄의 여러 종교 학교(세콜라 메넹아 아가마 타르비야 마르디아, SMA 다룰 안와르, SMA 마하드 무함마디)에서 교사로 일했다. 그는 클란탄과 다른 주에 있는 여러 모스크와 폰독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존경받는 이슬람 학자가 되어 "토크 구루"(학자 또는 교사의 스승)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이슬람 지식을 전파하는 데 활발히 활동했으며, 거의 매일 아침 자신의 집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모스크에서 파즈르(새벽) 기도를 이끌고 짧은 강연을 했다. 그는 아랍어, 우르두어, 영어, 타밀어 등 다양한 언어로 소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전 측근이었던 모하마드 노르 이드리스(전 PAS 중앙 및 클란탄 관계자, 현 UMNO 소속)는 닉 아지즈가 쿠란 구절과 하디스를 적절한 전달자 없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심지어 99가지 알라의 이름인 아스마울 후스나를 해석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그의 아랍어 실력을 의심했다고 주장했다.
3. 정치 경력
닉 압둘 아지즈 닉 맛은 말레이시아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히 클란탄주의 주수상으로서 장기간 재임하며 이슬람 정치의 방향을 제시했다.
3.1.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 입당 및 초기 활동
닉 아지즈는 1967년 PAS에 입당했다. 같은 해 클란탄 힐리르 연방 의회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 선거구(이후 펭칼란 체파로 개명) 의원직을 1986년까지 유지했다.
1982년, 그는 당 지도부의 변화를 모색하는 젊은 당원들의 움직임에 참여했다. PAS는 1978년 클란탄 주 선거에서 패배했고, PAS 주 위원장이었던 닉 아지즈는 당시 아스리 무다(Asri Muda) 총재의 리더십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 해 PAS 무크타마르(총회)에서 아스리 무다는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3.2. 국회의원 활동
닉 아지즈는 1967년부터 1986년까지 말레이시아 연방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처음에는 클란탄 힐리르 연방 선거구(1967-1974)를 대표했으며, 이후 펭칼란 체파 연방 선거구(1974-1986) 의원을 지냈다.
3.3. 클란탄 주수상
연방 정치에서 물러난 후, 닉 아지즈는 1986년 총선에서 클란탄주 의회의 세무트 아피 주 의원직에 당선되었다. 1990년 총선에서 PAS는 국민전선으로부터 클란탄 주의 통제권을 되찾는 데 성공했고, 닉 아지즈는 클란탄의 주수상(Menteri Besar)이 되었다.
그는 1990년 10월 22일부터 2013년 5월 6일까지 주수상으로 재임하며 클란탄 역사상 최장기 주수상이 되었다. 그의 정부는 1995년, 1999년, 2004년, 2008년 총 네 차례 재선에 성공하며 2013년 은퇴할 때까지 직책을 유지했다. 1990년대 동안 그의 클란탄 행정부는 당시 총리였던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의 연방 정부와 말레이시아 내 이슬람의 역할에 대해 자주 충돌했다.
2008년 반부패 인민운동(GERAK)은 그에게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깨끗한 주수상"이라는 칭호를 수여하며, 거의 18년간의 재임 기간 동안 부패 척결을 위한 그의 노력을 인정했다. 그는 검소하고 경건한 생활 방식으로 유명했다. 그는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정부 전력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사무실에서 불을 끄고 기도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울타리도 없고 경비원도 없는 평범한 시골집에서 생활했다.
그는 사위 아리파흐미(Ariffahmi)를 PMBK(Perbadanan Menteri Besar Kelantan)의 최고경영자로 임명하여 정실 인사 의혹을 받기도 했다. 닉 아지즈는 아리파흐미의 높은 학력과 광범위한 공학 분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정당한 임명이라고 옹호했지만, 아리파흐미는 결국 그 직책에서 사임했다.
3.4. PAS 정신적 지도자
닉 아지즈는 1991년 유소프 라와의 뒤를 이어 PAS의 정신적 지도자(Mursyidul Am)가 되었다. 그는 2015년 2월 12일 사망할 때까지 이 영향력 있는 직책을 유지하며 당의 이념과 방향 설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1971년부터 1995년까지 PAS 울라마(종교학자) 날개(Ulama Wing)의 수장을 역임했으며, 1978년부터 2013년까지 클란탄 PAS 위원장을 지냈다.
3.5. 정치적 동맹 및 입장
닉 아지즈는 PAS 지도부 내 다른 동시대 인물들과 대조적으로 인종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당이 비말레이계 및 비무슬림 유권자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데 기여했으며, 인민동맹과 같은 좌파 및 다문화 정당들과의 역사적인 연합을 가능하게 했다. 그는 인종 배타적인 집권당 UMNO와는 달리 공동체주의적 정치를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2013년 5월, 닉 아지즈는 자신이 살아있는 한 UMNO와 PAS 간의 어떠한 협력에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2019년 9월, PAS와 UMNO가 공식적인 동맹 헌장인 무아파카트 나시오날(Muafakat Nasional)에 서명했을 때, PAS 총재 압둘 하디 아왕은 닉 아지즈가 살아있을 때 이미 협력에 동의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행동당(DAP), MCA, MIC와 같은 비무슬림 정당들이 이슬람 정부를 진정으로 돕고자 한다면 협력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발언으로 "만약 DAP가 PAS를 진심으로 돕고 싶다면, 우리는 받아들일 것이다. DAP뿐만 아니라, 나는 심지어 사탄의 도움도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1999년 1월에 말하며 이슬람을 위한 정치적 동맹에 대한 그의 실용적인 접근 방식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이러한 비무슬림과의 협력 의지를 무함마드 선지자가 메디나에 도착했을 때 유대인들과 조약을 맺은 것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이슬람을 위한 더 큰 평화를 위해 "이슬람 국가"라는 슬로건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히며, 이슬람을 위한 유연성을 어느 정도 보여주었다.
4. 사상 및 철학
닉 압둘 아지즈 닉 맛의 사상과 철학은 이슬람 통치와 샤리아법 적용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과, 동시에 사회 및 인종 문제에 대한 그의 독특한 시각이 공존했다.
4.1. 이슬람 통치와 샤리아법
닉 아지즈는 이슬람 국가 건설과 모든 말레이계 무슬림에게 샤리아법을 적용하는 것을 강력히 옹호했으며, 이는 일부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UMNO를 포함한 어떤 정당이라도 국가 통치에서 이슬람 이념을 거부한다면 "카피르"(불신자 또는 배교자)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UMNO가 이슬람을 거부한다면 어떤 종교를 따르는지 반복적으로 질문하며 이슬람을 쿠란과 동일시했다. 그는 이슬람을 거부하는 것은 유통기한이 지난 약을 버리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말레이인들 사이의 배교가 기독교 사제 때문이 아니라, 이슬람을 경시하는 말레이인들, 특히 UMNO의 이슬람 거부 때문이라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터번과 수염을 기른 "토크 구루"조차도 이슬람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면 배교자가 된다고 말했다.
통치와 관련하여, 그는 클란탄 주가 주류 판매 허가나 개 면허와 같은 비이슬람적 세금 수입을 도로 건설 및 기타 인프라 프로젝트 자금으로 사용하는 것을 옹호했다. 그는 비무슬림이 술을 마시는 것이 허용되므로 중앙 정부는 예산을 위해 어디서 세금을 걷는지 질문했다.
그는 특정 종교 행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2008년 3월에는 마울리두르 라술(예언자 탄생일)을 기념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히즈라 이후 300~400년이 지나서야 시작된 이 전통이 기독교인들을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4.2. 사회 및 인종 문제에 대한 입장
닉 아지즈는 그의 강경한 이슬람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인종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했다. 이는 PAS가 말레이시아의 비무슬림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는 데 기여했다. 그는 인종 배타적인 집권당 UMNO와는 달리 공동체주의적 정치를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이러한 포괄적인 시각 덕분에 PAS는 인민동맹과 같은 다문화적이고 좌파적인 정당들과 역사적인 연합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종 문제에 대한 그의 진보적인 입장은 여성 및 사회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종종 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5. 논란 및 비판
닉 압둘 아지즈 닉 맛은 그의 정치적, 종교적 경력 전반에 걸쳐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5.1. 여성 및 성별 문제에 대한 발언
닉 아지즈는 여성 및 성별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되는 발언으로 자주 비판을 받았다.
1999년, 그는 미인들은 공직에 진출해서는 안 된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성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보통 부유한 남편을 맞이한다"며, 이는 "덜 매력적인 여성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말레이시아 여성 단체들은 그를 "여성 차별주의자"라고 맹렬히 비난하며,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보는 견해를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했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그의 행정부 아래에서 클란탄 주에서는 대중 공연 및 연예 오락이 금지되었다. 그는 "여성들은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자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다"며 "이슬람은 마음을 타락시키는 연예 오락을 금지한다"고 정당화했다. 2005년 9월 30일부터 남성에게는 대중 공연이 허용되었지만, 여성에 대한 제한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2003년에는 "여성이 립스틱을 바르는 것은 강간을 초래할 수 있다"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다. 2012년에는 "유행에 맞게 섹시하게 옷을 입은 여성들은 강간당해도 싸다"고 말하는 영상이 유포되기도 했다. 그는 또한 클란탄에서 15년 동안 스누커 게임을 금지했다.
5.2. 종교 및 정치적 발언
2012년, 말레이시아의 한 기독교 신문이 "알라"라는 아랍어 단어를 "하나님"의 의미로 사용하면서 논란이 발생했다. 닉 아지즈는 처음에는 "알라"라는 단어의 기원이 이슬람 이전 시대에 있었으므로 비무슬림도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무슬림 공동체 내에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고, PAS 당을 거의 두 진영으로 분열시킬 뻔했다. 결국 닉 아지즈는 당의 단결을 위해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고, 비무슬림이 "알라"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알라"가 "하나님"임을 명확히 해야 하며, 다른 종교 신자들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매우 논란이 많은 정치적, 종교적 발언들을 했다. 2012년 PAS 무크타마르(총회)에서 그는 집권당인 UMNO가 당의 정책에서 이슬람을 거부하고 경멸했기 때문에 "무르타드"(배교자)라고 비난했다. 그는 UMNO가 이슬람을 근본 원칙에서 포기한다면 어떤 종교를 따르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그는 이슬람을 거부하는 것을 유통기한이 지난 약을 버리는 것에 비유했다.
2009년 6월, 그는 UMNO의 투쟁을 "아야 핀"과 같은 "이단적 가르침"과 공산주의에 비유했다. 그는 또한 "신도 욕설을 한다"거나 "신은 난폭하다"는 등 신의 본질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발언을 했다. 그는 "UMNO를 선택하는 것과 PAS를 선택하는 것은 지나(간통)와 결혼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과 같다"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발언을 했다.
2013년 2월, 그는 1말레이시아 국민 지원금(BR1M) 수령자들을 "동물"에 비유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사람들에게 돈을 제공하는 것은 닭을 부르기 위해 코코넛 껍질과 쌀을 뿌리거나, 소를 부르기 위해 건초를 주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슬람 가르침을 주고자 한다면, 닭이나 소가 강연을 들으러 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10 MYR이나 50 MYR을 주는 것은 이슬람 방식이 아니다. 이슬람은 사람들에게 지식을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5.3. 개인적 논란
그의 아들 닉 아들리(Nik Adli)는 2001년 말레이시아 내부보안법(ISA)에 따라 구금되었다. 그는 지하드 계획, 무기 소지,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인 쿨풀란 무자히딘 말레이시아(KMM) 회원 활동을 포함한 테러 활동 혐의를 받았다. 닉 아들리는 재판 없이 5년간 구금된 후 석방되었다.
그는 사위 아리파흐미를 PMBK(Perbadanan Menteri Besar Kelantan)의 최고경영자로 임명하여 정실 인사 의혹에 직면했다. 닉 아지즈는 아리파흐미의 자격을 바탕으로 임명을 옹호했지만, 아리파흐미는 결국 그 직책에서 사임했다.
6. 개인 생활 및 건강
6.1. 가족 및 생활 방식
닉 압둘 아지즈 빈 닉 맛은 1963년 푸안 스리 투안 사바리아 투안 이샤크와 결혼했다. 그들은 5남 5녀를 포함하여 총 10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 중에는 닉 오마르와 닉 모하마드 압둘이 있다.
그는 매우 경건하고 금욕적인 주수상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거의 항상 주바(긴 가운)와 터번을 착용했으며,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정부 전력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사무실에서 불을 끄고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거주지는 일반 시민들의 집과 같은 소박한 시골집이었고, 울타리나 고용된 경비원도 없었다.
주수상이 되기 전, 그는 클란탄의 여러 종교 학교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종교 교사였다. 이로 인해 그는 말레이시아인들 사이에서 "투안 구루" 또는 "토크 구루"(스승님)라는 애칭을 얻었다. 말년에도 그는 이슬람 지식을 전파하는 데 적극적이었으며, 종종 집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모스크에서 파즈르(새벽) 기도를 이끌고 짧은 강연을 했다.
6.2. 건강 문제
닉 아지즈는 심장 문제, 고혈압, 위염 등 여러 건강 문제를 앓았다. 2004년 말에는 심장마비로 병원에 입원했다. 2007년에는 피로로 인해 말레이시아 과학 대학교 병원(HUSM)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그는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고 있음을 인정했지만, 신체적인 질병이 그의 날카로운 정신이나 공동체를 위한 봉사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육체적으로는 심장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내 정신은 여전히 날카롭게 생각하고 평가하며 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말년 2년 동안 그는 전립선암으로 인해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7. 사망 및 유산
7.1. 사망
2013년 말레이시아 총선에서 PAS는 다시 한번 클란탄 주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다수 의석을 확보했다. 이 선거 이후 닉 아지즈는 1990년부터 재임했던 클란탄 주수상직에서 은퇴를 발표했다. 그의 후임은 전 부주수상이었던 아흐마드 야콥이었다.
닉 압둘 아지즈 빈 닉 맛은 2015년 2월 12일 밤 9시 40분 말레이시아 표준시(UTC+08:00)에 84세의 나이로 코타바루 캄풍 풀라우 멜라카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 다음 날, 10,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의 지역 모스크인 마스지드 토크 구루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의 사망은 2015년 체파카 선거구의 클란탄주 의회 보궐선거를 촉발했다.
7.2. 평가 및 영향력
닉 압둘 아지즈 닉 맛은 말레이시아의 저명한 정치인이자 이슬람 학자로서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2008년 반부패 인민운동(GERAK)은 그가 클란탄 주수상으로서 거의 18년간 재임하는 동안 부패 척결에 대한 흔들림 없는 헌신을 인정하여 그를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깨끗한 주수상"으로 선정했다. 2009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500인의 무슬림"에 이름을 올리며 영향력 있는 이슬람 인물로서의 국제적 인정을 받았다.
48년간에 걸친 그의 정치 경력은 민족 간 관계에 대한 그의 독특한 접근 방식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말레이시아에 만연했던 공동체주의적 정치와 대조적으로 인종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했다. 이러한 진보적인 시각 덕분에 그는 비말레이계 및 비무슬림 유권자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인민동맹과 같은 다문화적이고 좌파적인 정당들과의 역사적인 연합을 이끌어냈다. 그는 UMNO와 같은 정당들이 추구하는 민족 중심주의적 정치를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그러나 2015년 그의 사망은 PAS에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사망 이후 당 지도부는 상당한 변화를 겪었으며, 이는 유사한 진보적 성향의 인물들을 숙청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들 진보주의자들은 이후 분열하여 국가신뢰당을 결성했다. 동시에 PAS 자체는 닉 아지즈의 보다 포괄적인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 말레이 우월주의에 더 가까운 입장으로 우경화되었다.
8. 저술 활동
닉 압둘 아지즈 닉 맛은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쳤으며, 그의 주요 저서 및 출판물은 다음과 같다.
- Kenapa saya tidak masuk Kristian?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는가?) (Pustaka Aman Press, 1967)
- Air Mata di Mahsyar (심판의 날의 눈물) (Dewan Muslimat Sdn Bhd, 1994)
- Insan, Ingatlah! Sebuah panduan menuju hati yang tenang (인간아, 기억하라! 평온한 마음으로 가는 길) (Nufair Street Sdn Bhd, 2006)
그는 또한 MP3 형식으로 제공되는 여러 강연 시리즈를 남겼다.
9. 선거 결과
닉 압둘 아지즈 닉 맛의 국회의원 및 주 의회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
연도 | 선거구 | 후보자 | 득표수 | 득표율 | 상대 후보 | 득표수 | 득표율 | 투표수 | 득표차 | 투표율 | ||
---|---|---|---|---|---|---|---|---|---|---|---|---|
1967 | P016 클란탄 힐리르 | 닉 압둘 아지즈 닉 맛 (PAS) | 11,855 | 57.97% | 텡쿠 노르 아시아 텡쿠 아흐마드 (UMNO) | 8,596 | 42.03% | 20,737 | 3,259 | 74.84% | ||
1969 | 닉 압둘 아지즈 닉 맛 (PAS) | 13,635 | 60.73% | 모하메드 살레 이브라힘 (UMNO) | 8,817 | 39.27% | 23,183 | 4,818 | 74.64% | |||
1974 | P017 펭칼란 체파 | 닉 압둘 아지즈 닉 맛 (PAS) | 13,243 | 73.88% | 우마르 이브라힘 (무소속) | 4,682 | 26.12% | 19,278 | 8,561 | 62.10% | ||
1978 | 닉 압둘 아지즈 닉 맛 (PAS) | 11,897 | 54.53% | 무함마드 노르 알리 (UMNO) | 9,919 | 45.47% | N/A | 1,978 | N/A | |||
1982 | 닉 압둘 아지즈 닉 맛 (PAS) | 16,759 | 59.48% | 하산 하루운 (UMNO) | 11,417 | 40.52% | 28,907 | 5,342 | 78.73% | |||
1986 | P023 바콕 | 닉 압둘 아지즈 닉 맛 (PAS) | 16,347 | 49.59% | 모흐드. 자인 압둘라 (HAMIM) | 16,617 | 50.41% | 33,627 | 270 | 80.08% |
참고: PAS는 동맹당(1972-1973) 및 이후 국민전선(1973-1978) 연립 정부에 참여했다.
연도 | 선거구 | 후보자 | 득표수 | 득표율 | 상대 후보 | 득표수 | 득표율 | 투표수 | 득표차 | 투표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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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 N04 세무트 아피 | 닉 압둘 아지즈 닉 맛 (PAS) | 6,233 | 60.36% | 하프사 오스만 (UMNO) | 4,094 | 39.64% | 10,754 | 2,139 | 74.97% | ||
1990 | 닉 압둘 아지즈 닉 맛 (PAS) | 9,504 | 79.10% | 완 맛 (UMNO) | 2,511 | 20.90% | 12,341 | 6,993 | 76.22% | |||
1995 | N05 체파카 | 닉 압둘 아지즈 닉 맛 (PAS) | 7,851 | 72.80% | 유수프 이사 (UMNO) | 2,934 | 27.20% | 11,413 | 4,917 | 74.80% | ||
1999 | 닉 압둘 아지즈 닉 맛 (PAS) | 8,649 | 74.48% | 로플리 이샤크 (UMNO) | 2,302 | 19.82% | 11,801 | 6,347 | 78.26% | |||
2004 | 닉 압둘 아지즈 닉 맛 (PAS) | 7,889 | 65.10% | 루하니 마맛 (UMNO) | 4,195 | 34.62% | 12,407 | 3,694 | 81.47% | |||
2008 | 닉 압둘 아지즈 닉 맛 (PAS) | 9,514 | 64.13% | 닉 모흐드 자인 오마르 (UMNO) | 5,265 | 35.49% | 15,077 | 4,249 | 84.62% | |||
2013 | 닉 압둘 아지즈 닉 맛 (PAS) | 12,310 | 67.92% | 완 라즈만 완 압둘 라자크 (UMNO) | 5,810 | 32.06% | 18,360 | 6,500 | 85.94% |
10. 훈장 및 영예
닉 압둘 아지즈 닉 맛은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말레이시아 연방 및 클란탄 주로부터 여러 훈장과 명예 칭호를 수여받았다.
Officer of the Order of the Defender of the Realm (KMN) 훈장 Commander of the Order of Loyalty to the Crown of Malaysia (PSM) 훈장 Knight Grand Commander of the Order of the Life of the Crown of Kelantan (SJMK) 훈장
말레이시아 연방 훈장
- 말레이시아 :
- 국가 수호 훈장 장교 (KMN) (1974)
- 말레이시아 왕관 충성 훈장 사령관 (PSM) - 탄 스리 (2023년 - 사후 추서)
클란탄 주 훈장
- 클란탄 :
- 치안판사 (JP) (1968)
- 클란탄 왕관 생명 훈장 기사 대사령관 (SJMK) - 다토 (1995)
- 다토 벤타라 세티아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