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와 경력의 시작
노먼 페티는 뉴멕시코주 클로비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피아노 연주에 능했으며, 고등학교 시절부터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1. 출생, 유년기, 그리고 교육
노먼 페티는 1927년 5월 25일 뉴멕시코주클로비스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지역 라디오 방송국의 15분짜리 쇼에 정기적으로 출연하며 음악적 재능을 선보였다. 1945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미국 공군에 징집되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그는 고등학교 시절 연인이었던 바이올렛 앤 브래디와 1948년 6월 20일 결혼했다. 부부는 잠시 텍사스주댈러스에서 거주하며 페티가 녹음 스튜디오에서 파트타임 엔지니어로 일하기도 했으나, 결국 고향인 클로비스로 돌아왔다.
1.2. 노먼 페티 트리오의 결성 및 성공
클로비스로 돌아온 노먼 페티는 아내 바이와 기타리스트 잭 본과 함께 노먼 페티 트리오를 결성했다. 이들의 독립적으로 발매한 데뷔곡인 "Mood Indigo무드 인디고영어"는 지역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를 계기로 트리오는 RCA 레코드와 음반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Mood Indigo무드 인디고영어"는 50만 장 이상 판매되었고, 이들은 1954년 《캐시박스》 잡지로부터 '가장 촉망받는 기악 그룹'으로 선정되었다. 1957년에는 그들의 곡 "Almost Paradise올모스트 파라다이스영어"가 차트 18위에 오르는 히트를 기록했고, 페티는 이 곡으로 첫 BMI 작곡가상을 수상했다. 이 곡은 여러 차례 커버되었는데, 로저 윌리엄스의 버전이 가장 많이 팔렸다.
2. 노먼 페티 스튜디오와 음반 제작 활동
노먼 페티는 자신의 음악 활동을 넘어, 뉴멕시코주 클로비스에 최첨단 녹음 스튜디오를 설립하며 음반 제작자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이곳에서 수많은 서부 텍사스 및 해외 음악가들의 히트곡 제작에 기여했다.
2.1. 스튜디오 설립과 초기 제작
노먼 페티는 자신의 음반 성공에도 불구하고, 1954년 말부터 클로비스에 자신의 녹음 스튜디오 건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새로 지어진 스튜디오는 당시 최첨단 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며, 건설 비용은 약 10.00 만 USD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페티는 평생 클로비스의 센트럴 침례교회 신자였던 독실한 종교인이었으며,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는 모든 아티스트들에게 투어 중 성경을 소지할 것을 권하고 스튜디오 내에서는 음주, 흡연, 욕설을 금지했다. 1957년 중순, "Almost Paradise올모스트 파라다이스영어"의 성공에 힘입어 스튜디오는 완공되었다.

그는 자신의 7번가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음악 그룹을 위한 곡 외에도 여러 웨스트 텍사스 음악가들의 싱글을 제작했으며, 그중 다수는 히트곡이 되었다. 이들 중에는 로이 오비슨, 버디 녹스, 웨일런 제닝스, 찰리 "슈거타임" 필립스, 소니 웨스트, 캐롤린 헤스터, 조니 "피너츠" 윌슨, 빌리 워커, 그리고 테리 놀런드 등이 포함된다. 1960년대에는 지미 길머 앤드 더 파이어볼스의 "Sugar Shack슈거 섀크영어"와 "Bottle of Wine바틀 오브 와인영어", 더 스트링어롱스의 "Wheels휠즈영어"와 같은 상당한 히트곡들이 페티의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페티는 기악 그룹 분야에서 명성 있는 프로듀서였으며, 1960년대 초 그의 클로비스 스튜디오는 기타 기악(서프) 사운드를 위한 최고의 "필수 스튜디오" 중 하나였다. 1960년대에 스튜디오를 방문한 주목할 만한 음악가들로는 더 챔프스(실스 앤 크로프츠와 글렌 캠벨을 포함), J. D. 사우더, 조니 덩컨, 그리고 에디 리브스가 있다.
2.2. 버디 홀리와의 작업
노먼 페티는 1956년부터 1958년까지 버디 홀리의 스튜디오 녹음 대부분을 클로비스 스튜디오에서 프로듀싱했으며, 나머지 녹음은 뉴욕의 벨 사운드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페티에 따르면, 그는 홀리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즉시 호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 인터뷰에서는 "그를 처음 봤을 때, 성공에 대한 의지가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티셔츠와 리바이스를 입고 있었고, 겉모습은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노래를 들어보니 인상적이었다. 사실 주변 사업가들은 왜 홀리 같은 촌뜨기에게 관심이 있는지 물었고, 나는 버디가 다듬어지지 않은 다이아몬드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고 좀 더 실용적인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1957년 7월 "That'll Be The Day댓 윌 비 더 데이영어"가 히트하기 시작한 후, 홀리는 페티에게 밴드의 "개인 매니저"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페티는 "버디나 크리케츠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원할 때 언제든지 떠날 수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드물지 않은 관행"으로, 페티는 홀리의 경력과 재정을 통제하는 것 외에도 자신의 이름을 작곡 크레딧에 추가했다. 다른 출처에서는 이것이 "1950년대에는 특이했지만, 오늘날에는 일부 장르에서 매우 흔하고 심지어 표준 관행"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페티는 혁신적인 프로듀서로, 당시 표준이었던 시간당 요율 대신 녹음당 고정 요금을 청구했으며, 저작권료에서 고정 지급을 받지 않았다. 그의 위험 부담과 곡 제작에 대한 기여를 보상하기 위해, 페티는 종종 자신이 프로듀싱한 곡의 공동 작곡가로 등재되었고, 곡들은 그의 음악 출판사인 노어-바-잭 뮤직을 통해 출판되었다. 홀리와 크리케츠가 페티의 스튜디오에서 녹음하기 전까지 히트곡을 내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페티가 프로듀서로서 위험을 감수하고 노력에 대한 더 큰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버디 홀리의 형 래리 홀리 역시 "노먼이 버디를 성공시키는 데 책임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페티는 또한 "홀리에게 로열티 지급을 보류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홀리는 결국 밴드의 "녹음 로열티가 그들 이름이 아닌 페티의 이름으로 입금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상점에서 레코드는 개당 69센트에서 89센트에 팔렸고, 로열티는 종종 한 면당 1센트에 불과했다." 페티는 "상당한 금액이 지급될 예정임을 부인할 수 없었지만, 특히 음반사들이 아티스트 로열티 지급을 매우 느리게 처리한다는 점을 계속 강조했다." 1958년, 홀리가 "Rave On!레이브 온!영어"과 "It's So Easy! (The Crickets song)잇츠 쏘 이지!영어"와 같은 곡들에서 실망스러운 판매를 겪은 후, 페티의 통제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다. 돈에 쪼들리던 홀리와 그의 새 아내 마리아 엘레나 산티아고는 페티의 스튜디오를 방문하여 파트너십을 끝내고 미지급 로열티를 요구했다. 산티아고는 결혼하기 전에 홀리가 "재정 문제를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노먼 페티에게서 계속 구걸하며 앉아 있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녀는 "페티가 젊은 제자에게 '버디, 너에게 말하는데, 지금 돈을 줄 바엔 차라리 네가 죽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산티아고에 따르면, 페티는 "우리를 갈라놓으려 했다. 그는 내가 피어-서던에 온 다른 남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한 창녀 같은 여자라고 말하며 버디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했다. 버디는 물론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너무 화가 나서 당장 노먼을 떠나고 싶어 했다." 페티의 회상에 따르면, 회의에서 "엘레나가 모든 말을 했다. 그녀는 '버디와 저는 버디가 더 잘할 수 있다고 결정했습니다. 당신은 버디의 매니저로 적합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게 뭔가요? 내가 뭘 잘못했나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 충분히 하지 않은 것입니다. 당신은 그를 위해 충분히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페티는 결별을 좀 더 우호적으로 회상하며, "내가 버디에게 결별의 원인이 된 일이 있는지 물었을 때, 그 질문은 그때 그의 아내가 대답한 것 같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버디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세상은 버디 홀리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했다. 나는 아티스트로서 그를 홍보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기본적인 이유였다. 음악적으로는 버디와 나 사이에 불화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홀리의 사망 후, 홀리 가족의 요청으로 페티는 미완성 홀리 녹음과 데모에 오버더빙을 담당했으며, 이는 해외 차트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1999년, 홀리의 미망인 마리아 엘레나는 홀리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MCA Inc.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페티가 "홀리 상속인들을 속이기 위해 MCA와 공모했다"고 주장했다. 광범위한 감사 결과, "MCA는 페티 재단과 홀리 상속인들에게 총 25.13 만 USD의 추가 로열티를 지급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2.3. 기타 주목할 만한 제작 활동
페티는 웨스 다쿠스 앤드 더 레벨스, 배리 앨런, 게인즈버러 갤러리, 더 해피 필링을 포함한 수많은 캐나다 음악가들의 음반을 제작했으며, 이들 모두는 캐나다에서 차트 성공을 거두었다. 노먼은 또한 브라이언 풀 앤 더 트레멜로스와 버디 브리튼과 같은 아티스트들을 위해 영국에서, 로만 리드, 메리노 코스타, 더 페블스 등을 위해 벨기에에서 세션을 프로듀싱하기도 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내내, 페티가 다양한 음악 스타일로 프로듀싱한 녹음들은 미국과 캐나다의 거의 모든 주요 음반사에 의해 발매되었으며, 수많은 지역적 성공을 거두었다.
3. 기타 사업 활동
노먼 페티는 음악 제작 활동 외에도 다양한 사업 영역으로 활동을 확장했다. 그는 극장 및 라디오 방송국을 소유하며 미디어 분야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3.1. 극장 및 라디오 방송국 소유
페티는 1960년 클로비스 메인 스트리트에 있는 메사 극장을 매입했다. 1963년에는 녹음 스튜디오 옆에 FM 라디오 방송국 KTQM을 개국했으며, 처음에는 이지 리스닝을 방송하다가 나중에는 컨트리 앤 웨스턴 음악으로 전환했고, 1968년부터는 톱 40 록 음악을 틀어주었다. 컨트리 장르가 현지에서 인기를 얻자, 그는 새로운 방송국 면허를 신청하여 1971년에 KWKA 680 AM 라디오 방송국을 개국하고 컨트리 앤 웨스턴 음악을 방송했다. 페티는 이 두 방송국을 1979년까지 직접 운영했다. 이 방송국들은 2010년 커리 카운티 브로드캐스팅에서 지아 브로드캐스팅으로 매각되었다.
4. 말년과 사망
노먼 페티는 말년에 백혈병을 앓았으며, 1984년 텍사스주 러벅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아내 바이 역시 1992년에 사망했다.
4.1. 마지막 시기와 사망
노먼 페티는 1984년 8월 15일 텍사스주러벅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내 바이 페티는 1992년 3월에 사망했다.
5. 유산과 평가
노먼 페티의 유산은 그의 혁신적인 음악 제작 방식과 사업적 성공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작곡 저작권 및 로열티 관행에 대한 논란은 그의 생애 내내 지속되었으며, 사후에도 다양한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5.1. 작곡 저작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
노먼 페티의 작곡 저작권, 특히 버디 홀리와 관련된 논란은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그가 홀리가 만든 일부 곡들에 (실제 공동 작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공동 작곡가로 등록했다는 주장이 있었으며, 다른 아티스트들의 곡에 대해서도 유사한 관행이 있었다는 논란이 있었다. 당시 음악 산업에서는 매니저, 레이블 소유자, 음악 프로듀서 등이, 특히 흑인 아티스트들과 작업할 때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이 만연했으며, 어빙 밀스나 모리스 레비 같은 인물들은 이러한 악랄한 관행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2014년에 출간된 프랭크 블래나스의 책 《클로비스의 왕》은 페티의 명성이 "버디 홀리 이야기의 단연 1위 악당"으로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블래나스는 페티가 모두가 이익을 공유할 수 있도록 로열티 비율을 높이려 했으며, 이는 히트곡을 만들고 이론적으로는 관련된 모든 이에게 성공적이어야 하는 '함께 이기거나 함께 지는' 사고방식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페티는 음반 불법 복제, 공짜 홍보 남용, 유료 홍보 및 비자금과 같은 산업 문제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블래나스는 "페티가 돈을 훔쳤다는 생각은 다양한 작가, 예술가, 그리고 대중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사실 1950년대 음반 사업에는 마피아, 사기꾼, 돈세탁업자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소매업자와 클로비스 사이에 핵심적인 중간 상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는다. 작은 독립 음악 사업가였던 노먼은 종종 조직 폭력배와 연루된 전문 사기꾼들과 거래하며, 착취당한 아티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자비에 놓여 있었다."고 강조한다.
5.2. 추모 및 영예
페티는 1984년 사망 후, 그해 클로비스 '올해의 시민'으로 추서되었다. 그의 아내 바이 페티는 1987년부터 1997년까지 클로비스에서 "노먼 앤 바이 페티 음악 축제"의 시작을 도왔다. 이 축제에는 클로비스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던 많은 아티스트들과 인기 있는 히트 메이커들이 출연했다. 로버트 린빌은 1998년부터 2001년 사망할 때까지 이 축제를 다시 개최했으며, 이후 이 행사는 "클로비스 음악 축제"라는 이름으로 매년 9월에 개최되고 있다.
2011년 4월, 클로비스 시립학교 재단 및 동문회는 노먼(1945년 졸업생)과 바이(1946년 졸업생) 부부에게 "뛰어난 졸업생 공로상"을 수여했다. 이 상은 클로비스 고등학교 졸업생 중 각자의 사업 분야에서 이룬 업적을 기리기 위해 수여되며, 수상자들은 현재 클로비스 고등학생들의 모범이 될 만한 강한 성격과 시민 의식을 갖춘 인물로 선정된다. 수상 기념 명패는 바이의 친척인 닉 브래디에게 전달되었고, 이후 페티 재단의 케네스 브로드에게 인계되어 스튜디오 투어 시 전시되고 있다.
5.3. 지속적인 영향과 보존
노먼 페티의 노어-바-잭 음반 레이블은 2016년에 "노어-바-잭 뮤직"으로 부활했으며, 노먼 페티 스튜디오의 승인을 받아 이전에 디지털 형태로 제공되지 않았던 페티 프로덕션을 재발매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이전에는 많은 페티 프로덕션이 영국의 에이스 레코드에 의해 CD로 발매된 바 있다.
노먼 페티의 전설적인 7번가 스튜디오는 여전히 사전 예약을 통해 일반인에게 공개 투어가 가능하며, "세계에서 가장 진정한 빈티지 녹음 스튜디오"로 평가받고 있다.
6. 외부 링크
- [http://norvajakmusic.com 노먼 페티 스튜디오 / 노어-바-잭 뮤직 공식 웹사이트]
- [http://www.norvajakmusic.com/documentary.html 올모스트 파라다이스: 완전한 역사 (DVD 다큐멘터리)]
- [https://www.facebook.com/normanpettystudios 노먼 페티 스튜디오/노어-바-잭 뮤직 페이스북]
- [http://www.rockabillyhall.com/NormanPetty1.html 노먼 페티 - Rockabillyhall.com]
- [http://www.classicbands.com/FireballsInterview.html 파이어볼스와의 인터뷰 - Classicbands.com]
- [http://www.songwriter.co.uk/page53.html 송라이터 매거진 인터뷰 (노먼 페티)]
- [https://digital.library.unt.edu/ark:/67531/metadc19761/m1/ 팝 크로니클스 인터뷰 (노먼 페티, 1968년 4월 녹음)]
- [http://repertoire.bmi.com/writer.asp?fromrow=101&torow=125&keyname=PETTY%20NORMAN&querytype=WriterID&keyid=267881&page=5&blnWriter=True&blnPublisher=True&blnArtist=True&affiliation=BMI&cae=24170226 BMI 작곡가 등록 정보]
- [https://www.findagrave.com/memorial/28075887/norman-eugene-petty 노먼 유진 페티 - Findagra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