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대학 시절
네이트 서몬드는 오하이오주 애크런에서 태어나 애크런의 센트럴 고등학교에 다녔으며, 그곳에서 미래의 NBA 스타가 될 거스 존슨과 함께 뛰었다. 그는 고등학교 라이벌이었던 제리 루카스의 백업 선수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의 장학금 제안을 거절하고 볼링 그린 주립 대학교에서 대학 농구를 하기로 결정했다.
서몬드는 대학 3년 동안 미드-아메리칸 콘퍼런스에서 리바운드 부문 선두를 차지했으며, 대학 경력 동안 경기당 평균 17.0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했다. 1963년에는 더 스포팅 뉴스에 의해 퍼스트팀 올-아메리칸으로 선정되었다. 볼링 그린에서의 마지막 2년 동안, 그는 팀을 NCAA 토너먼트로 이끄는 데 기여했으며, 마지막 대학 경기에서 31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학교 기록을 세웠다.

2. 프로 경력
네이트 서몬드는 14년간의 NBA 경력 동안 주로 샌프란시스코/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시카고 불스,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서 활약하며 뛰어난 수비력과 리바운드 능력을 선보였다.
2.1. 샌프란시스코/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서몬드는 1963년 NBA 드래프트에서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현재의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전체 3순위로 지명되어 입단했다. 루키 시즌에는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센터 윌트 체임벌린의 보조 역할을 주로 수행하며, 평균 7득점과 10.4리바운드를 기록했고 1964년 NBA 올-루키 팀에 선정되었다.
다음 시즌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로 체임벌린이 트레이드된 후, 서몬드는 워리어스의 주전 센터로 성장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는 한 쿼터에 18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정규 시즌 리바운드 기록을 세웠고, 1966-67 시즌에는 경기당 평균 21.3리바운드, 1967-68 시즌에는 22.0리바운드를 기록했다. 1966-67 시즌 MVP 투표에서는 체임벌린에 이어 2위를 차지했으며, 1967-68 시즌부터 1971-72 시즌까지 매 시즌 평균 20득점 이상을 기록했다. 워리어스 소속으로 7차례 NBA 올스타 경기에 출전했다.
서몬드는 NBA에서 강력한 수비수로 명성을 떨쳤다. 카림 압둘-자바는 서몬드를 자신의 20년 프로 경력 동안 가장 상대하기 힘든 수비수였다고 평가했다. NBA 올스타 센터 밥 룰은 서몬드가 자신과의 첫 경기 전반전에 자신의 슛 7개 중 6개를 블록했다고 회상하며, 코치가 "계속 쏴라. 그가 모든 슛을 블록할 수는 없다"고 말하자 "만약 내가 그 레이업을 넣지 못했다면 전부 블록당했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릭 배리와 같은 스타 팀 동료들의 기여와 서몬드의 굳건한 센터 플레이에도 불구하고, 워리어스는 챔피언십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들은 1967년 NBA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체임벌린의 세븐티식서스에게 패했다. 흥미롭게도 워리어스가 다음으로 파이널에 진출하여 우승을 차지한 것은 서몬드가 트레이드된 이듬해인 1975년이었다.
2.2. 시카고 불스
1974-75 시즌을 앞둔 1974년 9월 3일, 33세의 서몬드는 클리퍼드 레이와 10.00 만 USD를 대가로 시카고 불스로 트레이드되었다. 불스는 레이, 톰 보어윙클, 데니스 오트리의 3인 로테이션 대신 한 명의 주전 센터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워리어스는 이 거래를 통해 재정적 안정성을 확보했다.
1974년 10월 18일, 애틀랜타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불스 데뷔전을 치른 서몬드는 22득점, 14리바운드, 13어시스트, 12블록슛을 기록하며 NBA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인 쿼드러플더블을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블록슛은 1973-74 시즌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았다.) 앨빈 로버트슨,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만이 쿼드러플더블을 달성한 다른 선수들이다.
2.3.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1975-76 시즌 13경기를 치른 후인 1975년 11월 27일, 서몬드는 롤랜드 개럿과 함께 스티브 패터슨과 에릭 펀스텐을 대가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트레이드되었다. 당시 35세였던 서몬드의 코트 위 기동성은 보다 정적인 센터를 위해 구축된 공격 시스템과 잘 맞지 않아, 팀이 9연패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출전 시간이 줄어들었다. 클리블랜드에서 서몬드는 부상당한 짐 초네스를 대신하여 벤치에서 출전하며 클리블랜드의 "리치필드의 기적" 팀을 1976년 NBA 동부 콘퍼런스 파이널로 이끌었으나, 보스턴 셀틱스에게 패했다.
제한된 출전 시간과 한 자릿수 득점 및 리바운드를 기록하는 역할 선수로 전락한 서몬드는 1976-77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3. 통계적 업적 및 기록
네이트 서몬드는 NBA 경력 동안 다음과 같은 주요 통계적 업적과 기록을 남겼다.
- NBA 역사상 최초로 쿼드러플더블을 기록한 선수: 1974년 10월 18일, 시카고 불스 (120) 대 애틀랜타 호크스 (115) 연장전 경기에서 기록.
- 22득점, 14리바운드, 13어시스트, 12블록슛.
- 이 경기는 서몬드의 시카고 불스 데뷔전이었다.
- 앨빈 로버트슨,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만이 쿼드러플더블을 달성한 다른 선수들이다. 블록슛은 1973-74 시즌 이전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 NBA 역사상 경력 평균 최소 15리바운드를 기록한 5명의 선수 중 한 명: 15.0 리바운드 (총 964경기에서 14,464개).
- 윌트 체임벌린, 빌 러셀, 밥 페티트, 제리 루카스도 이 기록을 달성했다.
- NBA 역사상 한 시즌 평균 최소 20리바운드를 기록한 5명의 선수 중 한 명: 1966-67 시즌 21.3리바운드, 1967-68 시즌 22.0리바운드.
- 빌 러셀, 윌트 체임벌린, 밥 페티트, 제리 루카스도 이 기록을 달성했다.
- NBA 역사상 한 경기에서 40개 이상의 리바운드를 기록한 4명의 선수 중 한 명: 1965년 11월 9일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전에서 42개 기록.
- 빌 러셀, 윌트 체임벌린, 제리 루카스도 이 기록을 달성했다.
- NBA 정규 시즌 한 쿼터 최다 리바운드 기록: 1965년 2월 28일 볼티모어 불리츠 전에서 18개 기록.
- 통산 리바운드: 14,464개 (역대 10위).
-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구단 역사상 최다 리바운드: 12,771개.
3.1. 정규 시즌
연도 | 팀 | 경기 수 | 선발 출전 | 경기당 출전 시간 | 야투 성공률 | 3점슛 성공률 | 자유투 성공률 | 경기당 리바운드 | 경기당 어시스트 | 경기당 스틸 | 경기당 블록 | 경기당 득점 |
---|---|---|---|---|---|---|---|---|---|---|---|---|
1963-64 | 샌프란시스코 | 76 | - | 25.9 | .395 | - | .549 | 10.4 | 1.1 | - | - | 7.0 |
1964-65 | 샌프란시스코 | 77 | - | 41.2 | .419 | - | .658 | 18.1 | 2.0 | - | - | 16.5 |
1965-66 | 샌프란시스코 | 73 | - | 39.6 | .406 | - | .654 | 18.0 | 1.5 | - | - | 16.3 |
1966-67 | 샌프란시스코 | 65 | - | 42.5 | .437 | - | .629 | 21.3 | 2.6 | - | - | 18.7 |
1967-68 | 샌프란시스코 | 51 | - | 43.6 | .411 | - | .644 | 22.0 | 4.2 | - | - | 20.5 |
1968-69 | 샌프란시스코 | 71 | - | 45.2 | .410 | - | .615 | 19.7 | 3.6 | - | - | 21.5 |
1969-70 | 샌프란시스코 | 43 | - | 44.6 | .414 | - | .754 | 17.7 | 3.5 | - | - | 21.9 |
1970-71 | 샌프란시스코 | 82 | - | 40.9 | .445 | - | .730 | 13.8 | 3.1 | - | - | 20.0 |
1971-72 | 골든스테이트 | 78 | - | 43.1 | .432 | - | .743 | 16.1 | 2.9 | - | - | 21.4 |
1972-73 | 골든스테이트 | 79 | - | 43.3 | .446 | - | .718 | 17.1 | 3.5 | - | - | 17.1 |
1973-74 | 골든스테이트 | 62 | - | 39.7 | .444 | - | .666 | 14.2 | 2.7 | .7 | 2.9 | 13.0 |
1974-75 | 시카고 | 80 | - | 34.5 | .364 | - | .589 | 11.3 | 4.1 | .6 | 2.4 | 7.9 |
1975-76 | 시카고 | 13 | - | 20.0 | .444 | - | .444 | 5.5 | 2.0 | .3 | .9 | 3.7 |
1975-76 | 클리블랜드 | 65 | - | 17.4 | .418 | - | .514 | 5.3 | 1.0 | .3 | 1.3 | 4.6 |
1976-77 | 클리블랜드 | 49 | - | 20.3 | .407 | - | .642 | 7.6 | 1.7 | .3 | 1.7 | 5.5 |
경력 | 964 | - | 37.2 | .421 | - | .667 | 15.0 | 2.7 | .5 | 2.1 | 15.0 | |
올스타 | 5 | 2 | 20.8 | .326 | - | .375 | 8.8 | .4 | .0 | .0 | 6.2 |
3.2. 플레이오프
연도 | 팀 | 경기 수 | 선발 출전 | 경기당 출전 시간 | 야투 성공률 | 3점슛 성공률 | 자유투 성공률 | 경기당 리바운드 | 경기당 어시스트 | 경기당 스틸 | 경기당 블록 | 경기당 득점 |
---|---|---|---|---|---|---|---|---|---|---|---|---|
1964 | 샌프란시스코 | 12 | - | 34.2 | .438 | - | .679 | 12.3 | .8 | - | - | 10.0 |
1967 | 샌프란시스코 | 15 | - | 46.0 | .433 | - | .571 | 23.1 | 3.1 | - | - | 15.9 |
1969 | 샌프란시스코 | 6 | - | 43.8 | .392 | - | .588 | 19.5 | 4.7 | - | - | 16.7 |
1971 | 샌프란시스코 | 5 | - | 38.4 | .371 | - | .800 | 10.2 | 3.0 | - | - | 17.6 |
1972 | 골든스테이트 | 5 | - | 46.0 | .434 | - | .750 | 17.8 | 5.2 | - | - | 25.4 |
1973 | 골든스테이트 | 11 | - | 41.8 | .398 | - | .800 | 13.2 | 3.6 | - | - | 14.5 |
1975 | 시카고 | 13 | - | 19.5 | .368 | - | .486 | 6.7 | 2.4 | .4 | 1.6 | 3.5 |
1976 | 클리블랜드 | 13 | - | 28.8 | .468 | - | .406 | 9.0 | 2.2 | .5 | 2.2 | 6.7 |
1977 | 클리블랜드 | 1 | - | 1.0 | - | - | - | 1.0 | .0 | .0 | 1.0 | .0 |
경력 | 81 | - | 35.5 | .416 | - | .621 | 13.6 | 2.8 | .4 | 1.9 | 11.9 |
4. 개인 생활 및 은퇴 후 활동
은퇴 후 서몬드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빅 네이트 바비큐"(Big Nate's BBQ빅 네이트 바비큐영어)라는 레스토랑을 열었다. 그는 20년 동안 레스토랑을 운영한 후 매각했으며, 아내 마르시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했다. 2019년 기준으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홈 경기장인 체이스 센터에는 그의 경력을 기리는 요리를 제공하는 빅 네이트 바비큐 키오스크가 입점해 있다.
그는 워리어스 구단으로부터 "워리어스 레전드 & 앰버서더"(Warriors Legend & Ambassador워리어스 레전드 & 앰버서더영어)라는 칭호를 받았다.

5. 사망
네이트 서몬드는 2016년 7월 16일, 75번째 생일을 9일 앞두고 백혈병과의 짧은 투병 끝에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016-17 시즌 동안 워리어스는 그의 등번호를 유니폼에 새겨 서몬드를 기렸다.
6. 유산 및 평가
네이트 서몬드는 1985년 네이스미스 기념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1996년에는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5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2021년에는 NBA 75주년 기념팀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의 등번호 42번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두 팀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그는 "네이트 더 그레이트"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특히 수비와 리바운드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명수비수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