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수 경력
네레오 로코는 주로 미드필더의 측면 공격수로 활약하며 선수 경력을 쌓았다. 그의 선수 생활은 비교적 평범했지만, 주로 고향 팀인 트리에스티나와 나폴리, 그리고 파도바와 같은 클럽에서 보냈다.
1.1. 클럽 경력
로코는 11시즌 동안 세리에 A에서 총 287경기에 출전하여 69골을 기록했다. 그의 선수 시절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팀의 핵심 선수로 꾸준히 활약하며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1.2. 국가대표팀 경력
로코는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경기에 한 차례 출전했다. 그는 비토리오 포초 감독의 지휘 아래 1934년 3월 25일 그리스와의 1934년 FIFA 월드컵 예선전 홈 경기에 나섰으며, 이 경기는 이탈리아의 4-0 완승으로 끝났다.
2. 감독 경력
네레오 로코는 선수 은퇴 후 곧바로 감독직에 뛰어들어 이탈리아 축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감독 경력은 여러 클럽을 거치며 다양한 성공을 경험했다.
2.1. 초기 감독 경력 (트리에스티나, 트레비소)
로코는 1947년 고향 팀인 트리에스티나에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는 데뷔 시즌에 팀을 세리에 A 2위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이끌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트리에스티나 구단 역사상 최고 성적으로 남아있다. 몇 년 후, 그는 구단 수뇌부와의 의견 불일치로 트리에스티나를 떠났다. 1951년에는 트레비소를 잠시 지휘하기도 했으며, 1953년에는 다시 트리에스티나로 복귀하여 짧은 기간 동안 팀을 이끌었다.
2.2. 파도바 시절과 카테나치오
1953년, 로코는 세리에 B 소속의 파도바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팀을 강등 위기에서 구해냈고, 이듬해에는 세리에 A 승격을 달성했다. 로코가 파도바를 이끌었던 세리에 A 시절은 구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시기로 기억된다. 비록 작은 규모의 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57-58 시즌에는 리그 3위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시기에 로코는 이탈리아 축구 전술의 상징이 된 빗장 전술의 초기 주창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파도바 감독 재임 중 주세페 비아니와 함께 이탈리아 올림픽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1960년 로마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여 4위를 기록했다.
2.3. 첫 번째 AC 밀란 시대
1961년, 로코는 밀란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며 구단의 가장 성공적인 시대 중 하나를 열었다. 그는 젊은 스타 플레이메이커인 잔니 리베라를 중심으로 견고하고 수비적으로 안정된 팀을 구축했다. 리베라의 창의적인 플레이 스타일은 로코의 전술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으며, 로코와 리베라는 선수 생활 내내 중요한 관계를 유지하며 밀란의 성공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은 함께 1962년 세리에 A 우승과 1963년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하며 밀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2.4. 토리노 및 두 번째 AC 밀란 시대
밀란에서의 첫 번째 성공적인 임기 후, 로코는 토리노에서 잠시 감독직을 수행했다. 토리노에서도 그는 위대한 토리노 시대 이후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67년, 로코는 다시 밀란으로 복귀했다. 복귀하자마자 그는 또 다른 세리에 A 우승과 컵위너스컵 우승을 달성하며 밀란에서의 성공을 이어갔다.
2.5. 말년의 활동 (피오렌티나, 기술위원장)
로코는 1973년까지 밀란을 지휘하며 1969년 유러피언컵 추가 우승, 인터콘티넨털컵 우승, 두 차례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 그리고 또 한 차례의 컵위너스컵 우승을 이끌었다. 밀란을 떠난 후 1974년부터 1975년까지 피오렌티나에서 1년간 감독직을 맡았으며, 1975년에 감독 경력을 마무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1977년, 그는 밀란의 기술위원장으로 복귀하여 당시 감독이었던 닐스 리드홀름을 보좌했다. 로코는 총 459경기(총감독 323경기, 기술위원장 136경기)에서 밀란을 지휘하며 구단 역사상 최장 기간 재임한 감독으로 기록되었다.
3. 감독 스타일 및 전술
네레오 로코는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특히 이탈리아에서 빗장 전술의 초기 주창자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카를 라판의 전술에서 영감을 받아 최후방 수비수를 수비 라인 뒤에 배치하여 공을 걷어내는 1-3-3-3 포메이션을 주로 사용했다.
그의 팀은 높은 활동량과 강한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단순하지만 효과적이고 실용적인 전술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축구보다는 수비적인 견고함과 공을 되찾은 후 긴 패스를 통한 빠른 역습으로 득점을 올리는 데 집중했다. 밀란 시절에는 잔니 리베라를 중원의 플레이메이커로 활용하여 팀의 공격 기회 창출을 전담하게 했다.
로코는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데 탁월했으며, 선수들과 강한 개인적인 유대 관계를 형성하여 좋은 팀 분위기를 조성하고 승리 정신을 고취시켰다. 그는 훈련장에서 칠판을 사용하는 대신, 선수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팀 전술과 선수들의 대인 방어 역할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선호했다.
내성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로코는 전술적 지성 외에도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 뛰어난 리더십, 그리고 유머 감각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경기 중 벤치에서 매우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선수들과 기자들에게 자주 재치 있는 말을 건네는 것으로도 인기를 얻었다. 그는 파도바 시절, 상대방이 "최고의 팀이 이기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할 때마다 "제발 그러지 않기를!"이라고 답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고향인 트리에스테 방언을 능숙하게 구사하여 도사(El Paròn엘 파론Friulian)라는 별명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로코 밑에서 뛰었던 전 파르마 감독 네비오 스칼라는 로코의 카리스마와 훈련 중 전술 및 세트 플레이에 덜 중요성을 두어 선수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하는 방식에 영감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4. 사망 및 유산
네레오 로코는 이탈리아 축구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사망 후에도 그를 기리는 다양한 기념 사업이 이어졌다.
4.1. 사망
로코는 1979년 2월 20일, 향년 66세의 나이로 그의 고향인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에서 영면했다.
4.2. 유산 및 영향력
로코의 전술은 이후 많은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은 로코의 전술에서 영감을 받아 이탈리아의 '혼합 지역 방어'(zona mista조나 미스타이탈리아어) 또는 '이탈리아식 경기'(gioco all'italiana조코 알 이탈리아나이탈리아어) 전술의 주요 주창자가 되었다. 이 전술은 이탈리아의 빗장 전술과 같은 대인 방어 시스템의 요소와 네덜란드의 토탈 풋볼과 같은 지역 방어 시스템의 요소를 결합한 것이었다.
로코를 기리기 위해 1992년 10월 18일, 그의 이름을 딴 새로운 경기장인 스타디오 네레오 로코가 트리에스테에 개장했다. 이는 그가 이탈리아 축구, 특히 고향 트리에스테에 남긴 지대한 공헌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한 기념비적인 사업이다. 그의 독특한 지도 방식과 전술적 혁신은 이탈리아 축구의 발전에 중요한 초석을 놓았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축구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5. 수상 경력
네레오 로코는 감독으로서 수많은 팀 우승과 개인적인 영예를 안았다.
5.1. 감독으로서의 수상
AC 밀란
- 세리에 A: 1961-62, 1967-68
- 코파 이탈리아: 1971-72, 1972-73, 1976-77
- 유러피언컵: 1962-63, 1968-69
- UEFA 컵위너스컵: 1967-68, 1972-73
- 인터콘티넨털컵: 1969
5.2. 개인 수상
- 황금 파종자상(Seminatore d'Oro세미나토레 도르이탈리아어): 1962-63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2
- 프랑스 풋볼 역대 최고의 감독 17위: 2019
- 월드 사커 역대 최고의 감독 36위: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