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나폴리 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Maria Cristina Amelia Teresa di Borbone-Due Sicilie마리아 크리스티나 아멜리아 테레사 디 보르보네-두에 시칠리에이탈리아어, 1779년 1월 17일 ~ 1849년 3월 11일)는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공주이자, 사르데냐의 샤를 펠릭스 국왕의 왕비로서 1821년부터 1831년까지 사르데냐의 왕비였습니다. 그녀는 페르디난도 1세 국왕과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의 딸입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왕비는 왕실의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문화와 예술, 특히 고고학 발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학문적 진보에 기여했습니다. 그녀의 이러한 노력은 단순한 왕실의 취미를 넘어, 고대 유적 발굴을 통해 역사적 지식을 확장하고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자녀는 없었으나, 문화 및 학문 분야에 대한 그녀의 헌신은 후대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2. 유년기와 배경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나폴리 시칠리아의 공주로 태어나 왕실의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녀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특히 어머니의 총애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1. 출생과 유년기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1779년 1월 17일, 카세르타 궁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양시칠리아의 페르디난도 1세 국왕과 그의 왕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의 여섯 번째 자녀이자 네 번째 딸이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 마리아 카롤리나는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었습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어머니의 가장 총애하는 자녀였습니다.

2.2. 가족 관계 및 성장 배경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는 쌍둥이 자매인 마리아 크리스티나 아멜리아가 있었으나, 그녀는 1783년 2월 26일, 네 살의 나이에 천연두로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지배 가문인 부르봉-양시칠리아 가문에 속해 있었습니다.
3. 결혼 및 제노바 공작부인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사보이 가문의 샤를 펠릭스 왕자와 결혼하여 그의 왕위 계승 전까지 제노바 공작부인으로 지냈습니다.
3.1. 샤를 펠릭스와의 결혼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1807년 4월 6일 팔레르모에서 사보이의 샤를 펠릭스 왕자와 결혼했습니다. 샤를 펠릭스 왕자는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다섯째 아들로, 당시에는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희박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형들에게 남자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1821년에 그의 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가 퇴위하면서 샤를 펠릭스가 사르데냐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사르데냐 왕가의 사보이아 가문은 살리카법에 따른 계승법을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3.2. 제노바 공작부인 (1807년-1821년)
남편 샤를 펠릭스가 1821년 사르데냐 국왕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제노바 공작부인'으로 불렸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왕실의 일원으로서 공식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새로운 지위에 적응했습니다.
4. 사르데냐 왕비 (1821년-1831년)
남편 샤를 펠릭스가 국왕으로 즉위한 후,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사르데냐 왕비로서 여러 왕실 저택에 거주하며 문화 예술 분야에 대한 후원 활동을 펼쳤습니다.
4.1. 왕실 저택 및 문화 후원
왕실 부부는 예술과 예술가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아글리에에 있는 왕실 저택과 프라스카티에 있는 루피넬라 별장을 편안한 거주지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샤를 펠릭스의 통치 기간 동안 그들은 키아블레세 궁전에서 거주했으며, 이곳에서 1831년 남편이 사망했습니다.
4.2. 고고학 발굴 지원
마리아 크리스티나 왕비는 고대 문화유산 보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고고학 발굴 작업에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1825년, 왕비는 고고학자 루이지 비온디 후작(1776-1839)에게 투스쿨룸 발굴 작업을 의뢰하고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이 발굴은 고대 로마 도시 투스쿨룸의 유적을 발굴하여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이후 1839년과 1840년에는 건축가이자 고고학자인 루이지 카니나(1795-1856)가 왕실의 의뢰를 받아 투스쿨룸의 극장 지역을 발굴했습니다. 발굴된 고대 예술품들은 피에몬테에 있는 사보이 공작의 아글리에 성으로 보내져 보존되었습니다. 왕비의 이러한 후원 활동은 이탈리아 고고학 연구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고대 문명의 유산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5. 만년과 사망
왕비로서의 삶을 마친 후,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홀로 여생을 보내다가 1849년 사보나에서 사망했습니다.
5.1. 과부 시절 및 말년
샤를 펠릭스 국왕은 10년간의 통치 후 1831년에 사망했습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남편이 사망한 후 과부로서 여생을 토리노, 나폴리, 아글리에, 그리고 프라스카티 등지에서 보냈습니다.
5.2. 사망 및 매장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1849년 3월 11일 리구리아의 사보나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녀는 프랑스 생피에르드쿠르티유에 있는 오트콤브 수도원에 남편과 함께 안치되었습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샤를 펠릭스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6. 가계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가계는 나폴리 시칠리아의 부르봉 가문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이어집니다.
- 1. 나폴리 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 2. 양시칠리아의 페르디난도 1세
- 3.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 4.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
- 5.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 6. 신성 로마 제국의 프란츠 1세
- 7.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 8. 스페인의 펠리페 5세
- 9. 엘리사베타 파르네세
- 10. 폴란드의 아우구스트 3세
- 11.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
- 12. 로렌 공작 레오폴트
- 13. 오를레앙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 14.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6세
- 15. 브라운슈바이크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7. 유산과 평가
마리아 크리스티나 왕비는 사르데냐의 왕비로서 약 10년간의 재위 기간 동안 왕실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습니다. 그녀의 가장 두드러진 유산은 문화 예술, 특히 고고학 분야에 대한 깊은 관심과 적극적인 후원이었습니다.
그녀는 고고학자 루이지 비온디 후작과 루이지 카니나와 같은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의 연구와 고대 유적 발굴에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특히 고대 로마 도시 투스쿨룸의 발굴은 그녀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귀중한 역사적 유물이 발굴되어 보존되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단순한 예술품 수집을 넘어 고대 문명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고 이탈리아의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왕실 내에서의 그녀의 역할은 남편 샤를 펠릭스 국왕의 문화적 관심사와 조화를 이루며 왕실이 예술과 학문의 후원자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비록 자녀를 두지 않았으나, 마리아 크리스티나 왕비는 왕실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당대의 학문적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후대에 문화적 유산을 남긴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녀의 삶은 정치적 권력보다는 문화적 영향력을 통해 사회에 기여한 왕족의 전형을 보여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