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년기와 학창 시절
김종훈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학업에 정진하며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키워나갔다. 이민자로서 겪었던 초기 어려움은 그를 더욱 단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1. 유년기와 이민 생활
김종훈은 1960년 8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부터 가난을 겪으며 성장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힘든 가정 환경에서 자랐으며, 아버지가 일자리를 찾아 나선 동안 여러 친척들의 손에서 자랐다. 숭덕국민학교와 고려중학교를 졸업했다.
1975년, 14세의 나이로 가족과 함께 미국 메릴랜드주로 이민을 갔으나, 그곳에서도 힘든 생활은 계속되었다. 이민 오기 전까지 영어를 한마디도 못 했던 그는 낯선 문화에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미국 아이들은 그를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라며 놀려댔고, 점심값 50센트가 없어 정부에서 저소득층에게 나눠주는 식권으로 끼니를 때워야 할 때도 있었다. 당시 그는 식권으로 밥을 먹는 것이 창피해서 차라리 점심을 거르는 날이 더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 나이에는 그게 왜 그렇게 싫었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돈이 없어서 공짜 밥 먹는다는 게. 그래서 이제 밥 안 먹는 이유를 대요. 밥 안 먹기도 힘들어요. 모르는 사람들이 있으면 살짝 보여줘서 먹고.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라고 당시의 일을 회고했다. 이 시기의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집에 돌아오면 늘 코피를 흘리기도 했다.
어눌한 영어 실력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 학교 감사관은 그의 지능이 낮은 것 아니냐며 별도로 IQ 검사를 받게 했다. 검사 결과, 분석력과 이해력이 뛰어나고 기억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를 통해 그는 "외울 게 많은 의사는 안 되겠군. 말도 못하니 변호사도 어림없지. 천상 물리학자나 공학자가 되어야겠다"고 일찌감치 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신문 배달, 식당 주방 보조, 잔디 제거, 슈퍼 계산대 점원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17세에는 아버지에 의해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의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이었던 댄 브레든(Dan Bredon영어)은 그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자신의 집 지하실에 월세를 받고 살게 해주었다. 수년 후 벤처 사업가로 크게 성공한 김종훈은 이 선생님의 이름을 기념하여 자신이 다녔던 고등학교에 기부를 하기도 했다. 1978년, 수학 선생님이 그에게 애플의 개인용 컴퓨터(PC영어)를 보여주자 그는 즉시 매료되었고, "스티브 잡스가 했는데 내가 못 할 리 없다"며 큰 꿈을 키우게 되었다. 그의 가난과 재능을 안타깝게 여긴 교장은 그에게 조기 졸업을 허락했다.
1.2. 교육 및 학업
김종훈은 K-12 교육 과정 내내 공립학교에 다녔으며, 고등학교를 한 학기 일찍 졸업했다. 전교 2등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명문 존스 홉킨스 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장학금을 받고 진학하여 3년 만에 우등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대학 시절 강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부족한 부분은 책을 통해 별도로 보충하며 학업에 매진했다. 그의 부지런함과 집중력은 대학 친구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한 번은 논문을 쓰다가 배가 고파 시계를 보니 2시였기에 점심을 먹으러 도서관을 나왔는데, 알고 보니 새벽 2시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밝을 줄 알고 나갔는데 깜깜했다"며 "12시간을 도서관에 앉아 집중하며 논문을 쓰다 보니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지 몰랐다"고 회고했다.
이 과정에서 첨단 분야에 눈을 뜨기 시작한 그는 후일 인터뷰에서 "대학 시절 컴퓨터에 미쳐서,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초기 PC를 개발했을 무렵 저건 세상을 바꿀 기술이라고 느끼고 내 자신의 컴퓨터를 만들고 싶었어요. 컴퓨터에 대단히 쏠려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군 복무 중에도 학업을 이어가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기술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전역 후에는 메릴랜드 대학교로 진학하여 2년 만에 신뢰성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이는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해당 분야에 수여된 첫 번째 박사 학위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학업과 병행하여 풀타임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1.3. 군 복무
존스 홉킨스 대학교 졸업 후 1982년 미국 해군에 입대하여 7년 동안 원자력 잠수함 승선 장교로 복무했다. 또한 미국 국방부 산하 핵무기 연구소에서 원자력 에너지 계획 및 정책 장교로 활동하며 국가 방위와 안보에 기여했다. 1989년 국방 공로 훈장을, 1987년에는 해군 성취 훈장을 받았다.
2. 경력과 주요 활동
김종훈은 기술 분야에서 기업가적 성공과 리더십을 발휘하며 혁신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경력은 초기 기술 연구에서부터 대기업의 최고 경영진, 그리고 새로운 모바일 기술 스타트업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이어진다.
2.1. 초기 경력
대학 시절인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스타트업 기술 기업인 디지투스(Digitus영어)에서 일하며 회사의 파트너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지분으로 상당한 재정적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졸업 후 그는 자신에게 기회를 준 미국에 보답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여 디지투스를 떠나 1982년 미국 해군에 입대, 1989년까지 원자력 잠수함 장교로 복무했다.
디지투스가 컴퓨터 산업의 빠른 통합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자, 김종훈은 해군 전역 후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여 디지투스의 실수를 피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사업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자, 1990년부터 1993년까지 해군 연구소에서 얼라이드시그널(AlliedSignal)의 계약직 엔지니어로 근무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다양한 전자 통신 방식을 연결하는 비동기 전송 기술(asynchronous transfer technology영어)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미래의 통합 기술과 현재 사용 중인 다양한 시스템 사이의 간극을 메울 필요성을 인식했다. 특히 군사 분야에서는 통신 인프라가 부족한 원격 지역에서 음성, 영상, 데이터 등 분리된 시스템들을 연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2.2. 유리시스템즈 설립과 성공
1992년, 김종훈은 타 시스템 간의 효율적인 전자 의사소통 연구를 위해 '인터그레이티드 시스템스 테크놀로지'(Integrated Systems Technology영어)를 창업했다. 이후 1996년 자신의 딸 이름을 따 유리시스템즈(Yurie Systems영어)로 사명을 변경했다. 그는 군사적으로도 활용 가능한 강력한 야전 시스템을 개발하여 음성, 데이터, 영상 전송을 지원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기는 김종훈의 기업가적 모험 정신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주는데, 그는 자신의 집을 담보로 40.00 만 USD를 빌렸고, 신용카드의 한도액을 모두 사용하기도 했다.
유리시스템즈는 곧 무선 장치를 위한 비동기 전송 방식(ATM) 스위치 개발을 이끌었다. 김종훈은 자신의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을 회사에 영입하기도 했으며,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부 장관을 이사로 초빙했다. 방위 계약에서 상업용 비동기 전송 모드(ATM) 표준을 활용하는 잠재력을 인정받으면서, 1997년까지 그는 기술 기업가들 사이에서 가장 인정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러한 유리시스템즈를 두고 한국의 한 대기업은 한국인이 대표로 있는 작은 미국 기업을 어떻게 믿겠느냐며 무시한 일화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회사는 매우 성공했으며, 1997년 기업공개(IPO)를 단행한 이후 1998년 루슨트 테크놀로지스에 11.00 억 USD에 매각되었다. 1998년 포브스지는 김종훈을 미국 400대 갑부에 선정했으며, 당시 그의 재산은 5.60 억 USD에 달했다. 1999년 포춘이 발표한 "미국 40세 이하 부자" 랭킹 선정 당시 그의 재산은 약 4.30 억 USD로 추정되었다. 그는 회사 매각 당시 임직원들에게 주식의 40%를 나눠주었으며, 이로 인해 20명 이상의 직원이 백만장자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아무리 잘나고 똑똑하다 해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훌륭한 팀워크만이 성공의 길이다"라고 강조했다.
2.3. 루슨트 테크놀로지스 활동
유리시스템즈를 매각한 후 37세의 나이에 루슨트 테크놀로지스에 남아 여러 핵심 직책을 역임했다. 그는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캐리어 네트워크 부문 사장을 지냈고, 2000년부터 2001년까지 광학 네트워킹 그룹 사장을 맡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사업 개선을 지휘하여 루슨트의 전 세계 광학 시장 점유율을 4분기 만에 4위에서 1위로 끌어올렸다.
1999년에는 케네스 브로디(Kenneth Brody영어) 및 프랭크 브로센스(Frank Brosens영어)와 함께 이벤트 중심의 다중 전략 헤지 펀드 운용사인 타코닉 캐피털 어드바이저스(Taconic Capital Advisors LLC영어)를 공동 설립하기도 했다. 2001년 루슨트 테크놀로지스를 떠나 메릴랜드 대학교의 신뢰성 공학 및 전자공학 교수로 임명되어 2005년까지 재직했다. 교수 재직 중인 2002년에는 루슨트에서 잠시 휴식기를 가지며, 투자자 그룹을 모아 이동통신 요금 교환 서비스 제공업체인 사이버넷(Cibernet영어)을 인수하고 2003년 3월부터 2005년 7월까지 회장직을 역임했다.
2.4. 벨 연구소 소장
2005년 김종훈은 다시 루슨트 테크놀로지스로 돌아왔다. 루슨트는 이후 프랑스 통신 대기업 알카텔(Alcatel영어)과의 합병을 통해 알카텔-루슨트가 되었고, 알카텔-루슨트는 다시 노키아에 인수되었다. 그는 벨 연구소의 소장(President)으로 취임했으며, 이는 벨 연구소 80년 역사상 11번째 소장이자 외부에서 영입된 첫 번째 인물이었다.
전화기를 발명한 그레이엄 벨의 이름을 따 설립된 벨 연구소는 1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미국의 자존심으로 꼽히는 세계적인 전기통신 및 기초 과학기술 연구소이다. 루슨트는 김종훈의 혁신과 도전 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시장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던 연구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자 그를 영입하려 했다. 하지만 김종훈은 몇 차례 소장 제의를 고사했는데, 벨 연구소 역사상 소장 제의를 거절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아직은 자격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결국 루슨트 측의 삼고초려 끝에 2005년, 그는 벨 연구소의 수장에 올랐다. 그는 벨 연구소의 최연소 소장이자 최초의 외부인 출신 소장이었다. 김종훈 부임 이후 연구소는 급격히 변화했다. 그는 기술을 통합하는 팀과 제품을 빠르게 개발하여 시장에 출시하는 벤처팀을 만드는 등 적극적인 상용화 전략을 펼쳤다. 이로 인해 그는 벨 연구소를 위기에서 구한 최고의 리더로 평가받고 있다. 벨 연구소 소장 재임 기간(2005년~2013년)의 마지막 2년 동안인 2012년 7월부터는 모기업인 알카텔-루슨트의 최고전략책임자(CSO영어)를 겸임하며 회사 전체의 전략 부문을 총괄했다. 연구소를 다시 일으켜 세운 자신의 일에 대해 그는 "저는 이 일이 쉬워서 맡은 게 아닙니다. 이 일이 어렵기 때문에 맡은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2.5. 키스웨이 모바일 활동
2013년 알카텔-루슨트에서 퇴임한 김종훈은 인터랙티브 모바일 비디오에 중점을 둔 스타트업인 키스웨이 모바일(Kiswe Mobile Inc.)을 공동 설립하고 현재까지 회장직을 맡고 있다.
2.6. 기타 활동
김종훈은 현재 삼성, 아리스 그룹(Arris Group), 핵위협방지구상(NTI) 등의 이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전에는 프랑스의 슈나이더 일렉트릭(Schneider Electric SA), 맥클라우드USA(McLeodUSA), MTI 마이크로 연료전지(MTI MicroFuel Cells), 인큐텔(In-Q-Tel), 스페인의 방크인터 혁신 재단(Bankinter Foundation of Innovation), 나스닥 상장 및 청문 심의회, 존스 홉킨스 대학교 응용물리연구소 등 다양한 기업 및 비영리 기관의 이사직을 역임했다. 한국에서는 2000년대 초 유리자산운용을 설립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모뉴멘털 스포츠 앤 엔터테인먼트(Monumental Sports & Entertainment)의 소수 지분 소유주로 활동하며 내셔널 하키 리그(NHL)의 워싱턴 캐피털스, 내셔널 농구 협회(NBA)의 워싱턴 위저즈, 여자 내셔널 농구 협회(WNBA)의 워싱턴 미스틱스, 아레나 풋볼 리그(Arena Football League)의 워싱턴 발러를 비롯해 캐피털 원 아레나 경기장을 소유하고, 케틀러 캐피털 아이스플렉스와 조지 메이슨 대학교의 이글뱅크 아레나를 운영하고 있다.
과거에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 조지타운 대학교, 메릴랜드 대학교, 스탠퍼드 대학교의 프리먼 스폴리 국제학연구소(Freeman Spogli Institute for International Studies영어) 이사회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미국 대통령 정보위원회(U.S. Presidential Commission on Review of U.S. Intelligence) 위원, 중앙정보국(CIA) 외부 자문 위원, 미국 국가기술혁신상 심사 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3. 기부 활동
김종훈은 자신의 성공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한 다양한 기부 및 자선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벤처 필란트로피 파트너스(Venture Philanthropy Partners)의 창립 파트너 중 한 명으로, 저소득층 아동과 청소년의 삶을 개선하고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자금, 전문 지식, 인맥 등을 제공하는 투자 조직에 참여했다.
그는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부 장관의 이름을 따 스탠퍼드 대학교에 한국학 석좌교수직을 신설하는 데 기여했으며, 2007년에는 페리 전 장관과 함께 북한의 개성공단을 방문하기도 했다.
또한 메릴랜드 대학교에 큰 규모의 기부를 하여, 그의 이름을 딴 공과대학 건물인 '김종훈 공학 및 응용과학 빌딩'(Jeong H. Kim Engineering and Applied Science Building영어)이 세워졌다. 그는 현재 워싱턴 시민들을 위한 스포츠 팀을 만들기 위해 워싱턴 위저즈 농구팀과 워싱턴 캐피털스 하키팀의 공동 구단주로 활동하며 스포츠 문화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
4. 대한민국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지명 및 사퇴
2013년 2월,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의해 대한민국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야당은 청문회 시작 전부터 그에 대한 여러 의혹을 제기하며 장관 임명을 반대했다.
장관 내정 17일 후인 3월 4일, 김종훈은 자진하여 후보직을 사퇴하고 다음 날 미국으로 출국했다. 그는 한국에서의 감회를 묻는 3월 20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너무 순진했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 정치권과 관료 사회의 변화에 대한 저항 세력들이 자신의 국적 문제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 부족 가능성을 이유로 장관 임명을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민자로서 겪는 충성심 논란과 한국 사회의 변화 저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이 자진 사퇴한 이유에 대해 "한국의 정치와 비즈니스 환경에서 이방인인 내가 장관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져 포기했다"고 밝혔다.
5. 개인 생활
김종훈은 1987년에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6. 수상 및 영예
김종훈은 그의 경력 동안 학술적, 사업적, 사회적 기여를 인정받아 수많은 상과 영예를 얻었다.
- 2023년: 국가기술혁신상(National Medal of Technology and Innovation)
- 2016년: 호레이쇼 알저 협회(Horatio Alger Association of Distinguished Americans) 호레이쇼 알저 상
- 2013년: 프랑스 정부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 2012년: 스티븐스 공과대학교(Stevens Institute of Technology) 명예 공학 박사
- 2011년: 뉴저지 발명가 명예의 전당(New Jersey Inventors Hall of Fame영어) 이사상(Trustees Award영어)
- 2010년: 메릴랜드 대학교 동문 명예의 전당(Alumni Hall of Fame영어)
- 2010년: 포항공과대학교 명예 이학 박사
- 2009년: 중국 공학자 협회(Chinese Institute of Engineers영어) 평생 공로상
- 2009년: CIA 국장상 (두 번째 수상)
- 2009년: 아시아계 미국인 공학자상(Asian American Engineer of the Year Special Awards) 특별상
- 2007년: 메릴랜드 상공회의소 비즈니스 명예의 전당(Maryland Chamber of Commerce Business Hall of Fame영어)
- 2007년: 워싱턴 상공회의소 비즈니스 명예의 전당(Washington Chamber of Commerce Business Hall of Fame영어)
- 2006년: 뉴저지 주 5개 부문상(5 Sectors Award영어)
- 2005년: 메릴랜드 대학교 총장 특별 동문상(President's Distinguished Alumnus Award영어)
- 2005년: 미국 팬 아시아계 미국인 상공회의소 선정 "비즈니스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인의 아시아계 미국인"
- 2004년: 메릴랜드 대학교 혁신 명예의 전당(Innovation Hall of Fame영어)
- 2004년: 존스 홉킨스 대학교 블루멘탈 상(Blumenthal Award영어)
- 2004년: 미국 공학한림원 회원 선출
- 2001년: CIA 국장상 (첫 번째 수상)
- 200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 1999년: ICAS 자유상(ICAS Liberty Award영어)
- 1999년: 엘리스 아일랜드 명예 훈장(Ellis Island Medal of Honor영어)
- 1999년: 존스 홉킨스 대학교 자랑스러운 동문상(Distinguished Alumnus Award영어)
- 1999년: 미국 이민 법률 재단 이민 성취상(American Immigration Law Foundation Immigrant Achievement Award영어)
- 1999년: BETA 상(Baltimore's Extraordinary Technology Advocate영어)
- 1999년: KPMG 피트 마르윅(KPMG Peat Marwick영어) 하이테크 기업가상
- 1998년: 어니스트 앤 영(Ernst & Young) 전국 신흥 기업가상
- 1998년: 메릴랜드 대학교 자랑스러운 공학 동문상
- 1998년: 미국 성취 아카데미 골든 플레이트 상(Golden Plate Award영어)
- 1998년: 코리아 소사이어티 밴 플리트상
- 1998년: KAA 올해의 사업가상
- 1997년: 메릴랜드 하이테크 위원회 올해의 기업가상
- 1989년: 미국 국방부 국방 공로 훈장
- 1987년: 미국 해군 해군 성취 훈장
7. 기념물
김종훈의 이름을 딴 '김종훈 공학 및 응용과학 빌딩'(Jeong H. Kim Engineering and Applied Science Building영어)은 메릴랜드 대학교 캠퍼스 내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그의 학교에 대한 기여를 기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8. 함께 보기
- 벨 연구소
- 루슨트 테크놀로지스
- 알카텔-루슨트
- 미래창조과학부
- 존스 홉킨스 대학교
- 메릴랜드 대학교
- 윌리엄 페리
- 미국 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