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김연아(金姸兒, 1990년 9월 5일~)는 대한민국의 피겨스케이팅 선수이자 스포츠인이다. 그는 피겨 스케이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피겨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김연아는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 여자 싱글 금메달리스트이자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이며, 2009년과 2013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두 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2009년 4대륙 선수권 대회 우승, 그랑프리 파이널 3회 우승(2006, 2007, 2009)을 통해 동계 올림픽, 세계 선수권, 4대륙 선수권, 그랑프리 파이널 등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부문 4대 국제 대회를 모두 석권한 최초의 선수이다. 주니어 시절에도 2006년 세계 주니어 선수권 대회 우승과 2005년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을 기록하며, 주니어와 시니어를 통틀어 ISU 챔피언십 타이틀을 모두 획득한 최초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역사에 남았다.
김연아는 2009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ISU 채점 시스템 하에 여자 싱글 사상 최초로 총점 200점을 돌파한 207.71점을 기록했으며,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는 쇼트 프로그램 78.50점, 프리스케이팅 150.06점, 총점 228.56점이라는 경이로운 세계 최고 기록을 세워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그는 2007년 세계 선수권 쇼트 프로그램 이래로 여자 싱글 쇼트, 프리, 총점에서 총 11번의 세계 최고 기록을 수립했으며, 이 중 8번은 자신의 기록을 스스로 경신한 것이다. 김연아는 선수 경력 동안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단 한 번도 3위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는 '올포디움(All Podium)'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선수 은퇴 후에도 김연아는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성공적인 유치에 크게 기여했고, 2018년 개회식에서 최종 성화 봉송자로 나서 올림픽 성화에 불을 붙였다. 또한 유니세프 친선대사로서 다양한 사회 공헌 및 자선 활동을 펼치며 스포츠를 넘어선 사회적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뛰어난 기량과 압도적인 성과, 그리고 긍정적인 사회적 기여는 그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스포츠 영웅이자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2. 생애
김연아는 1990년 9월 5일 경기도 부천시에서 아버지 김현석과 어머니 박미희 사이에서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경주 김씨이다. 어린 시절 군포시로 이사했으며, 도장중학교와 수리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009년 3월부터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에 재학하여 2013년 2월 졸업했으며, 이후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체육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2.1. 어린 시절 및 교육
김연아는 6세 때인 1996년 과천시의 실내 빙상장에서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 당시 류종현 코치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피겨 스케이팅 선수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을 권유했다. 그의 어머니 박미희는 김연아의 성공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매일 빙상장으로 차를 태워주고, 모든 훈련에 참석하며, 코치, 매니저, 대변인, 멘토 역할을 자처했다. 그는 차 안에서 영어 카세트 테이프를 틀어 김연아의 영어 실력 향상을 도왔다.
김연아의 가족은 피겨 스케이팅 훈련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아버지가 사업 부진으로 레슨비를 내기 어려울 때는 집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언론의 주목을 피하며, 국제 대회에 동행하는 대신 집에서 김연아의 경기를 시청했다. 김연아는 자신의 성공이 부모님 덕분이라고 여겼다. 그는 또한 미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미셸 콴, 사샤 코언과 더불어 브라이언 주베르, 스테판 랑비엘, 토마시 베르너를 자신의 롤모델로 꼽았다.
김연아는 10세에 첫 트리플 토룹 점프를 성공했으며, 2년 후에는 트리플 악셀을 제외한 모든 종류의 트리플 점프를 깨끗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류종현 코치는 김연아의 성공 요인으로 그의 뛰어난 직업 윤리, 특히 훈련에 대한 노력, 헌신, 몰입을 꼽았다. 김연아 자신도 "나는 재능보다 좋은 도구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하며 자신의 신체 구조가 스케이팅에 완벽하다고 언급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성장으로 인해 부츠가 잘 맞지 않아 골반 근육 부상 등으로 한 달간 휴식해야 하는 등 여러 부상을 겪기도 했다.
2.2. 초기 경력
2002년, 김연아는 슬로베니아에서 열린 트리글라브 트로피 노비스 부문에서 5개의 트리플 점프를 성공시키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한국 여자 선수 최초의 국제 대회 우승이었다. 1년 후인 12세의 나이에 그는 한국 선수권 대회 시니어 부문에서 우승하며 역대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웠고, 이 기록은 2016년 11세의 유영이 경신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그는 또한 2003년 골든 베어 오브 자그레브 노비스 부문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김연아는 2003년부터 2006년까지 한국 선수권 대회에서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2.3. 주니어 경력
김연아는 2004-2005 시즌부터 ISU 주니어 그랑프리에 주니어 선수로 참가했다.
2.3.1. 2004-2005 시즌
2004-2005 시즌, 김연아는 주니어 국제 무대에 데뷔했다. 첫 출전한 ISU 주니어 그랑프리 헝가리에서 쇼트 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며 총점 148.55점으로 금메달을 획득, 한국 선수 최초로 주니어 그랑프리 대회에서 우승했다. 두 번째 대회인 ISU 주니어 그랑프리 중국에서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4번의 실수를 범하며 4위에 머물렀으나, 프리스케이팅에서 만회하여 총점 131.22점으로 최종 2위를 차지했다. 이 성과로 그는 2004-2005 ISU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하여 총점 137.75점으로 은메달을 획득, 한국 선수 최초로 이 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하는 기록을 세웠다.
2005년 한국 선수권 대회에서는 3년 연속 금메달을 획득했다. 프리스케이팅에서는 트리플-트리플 점프를 처음으로 성공시켰으나 트리플 러츠에서 넘어지는 실수가 있었다. 당시 만 15세 미만으로 세계 선수권 대회 출전 자격은 없었다. 그는 2005년 세계 주니어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서 쇼트 프로그램 6위에서 프리스케이팅 110.26점을 기록하며 역전, 총점 158.93점으로 은메달을 획득했다. 그의 '비밀 병기'인 트리플-트리플 점프 콤비네이션을 선보였으며, 이는 한국 선수 최초의 주니어 세계 선수권 대회 메달이었다.
2.3.2. 2005-2006 시즌
2005-2006 시즌, 김연아는 2006년 동계 올림픽에 출전할 연령이 되지 않아 대신 올림픽 성화 봉송에 참여했다. 그는 2005-2006 ISU 주니어 그랑프리 시리즈에 참가하여 슬로바키아와 불가리아에서 열린 두 대회에서 모두 우승했다. 2005년 ISU 주니어 그랑프리 슬로바키아에서는 총점 168.83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2005년 ISU 주니어 그랑프리 불가리아에서는 경기 직전에 새로 구매한 스케이트로 인한 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쇼트 프로그램 53.45점, 프리스케이팅 99.98점, 총점 153.43점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2005-2006 ISU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최연소 참가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쇼트 프로그램 57.51점, 프리스케이팅 116.61점, 총점 174.12점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2006년 한국 선수권 대회에서 총점 165.52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2006년 세계 주니어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서는 오른 발목 인대 부상에도 불구하고 쇼트 프로그램 60.86점으로 1위를 차지했으며, 프리스케이팅에서 116.68점을 기록하며 총점 177.54점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이 대회에서 프리스케이팅 100점을 넘긴 유일한 선수였다. 이로써 김연아는 한국 선수 최초로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과 세계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2004년 이후 김연아가 8개 대회 연속으로 1위 또는 2위를 차지한 기록이며, 2010년 동계 올림픽 금메달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2.4. 시니어 경력
2.4.1. 2006-07 시즌

2006-2007 시즌 시니어 데뷔를 준비하기 위해 김연아는 2006년 여름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과 함께 훈련한 후 토론토 크리켓 스케이팅 & 컬링 클럽에서 브라이언 오서 코치와 훈련을 시작했다. '인터내셔널 피겨 스케이팅'에 따르면, 그는 반복되는 무릎 부상과 부츠 문제로 자신감을 잃고 은퇴를 고려하고 있었기에 코치가 토론토 훈련을 제안했다. 3개월 후, 그는 어머니와 함께 한국인 거주 지역에 살며 토론토를 영구 훈련 기지로 삼기로 결정했다. 오서는 처음에는 김연아를 훈련시키는 것을 망설였지만, 그의 경쟁심에 공감하며 도전을 거부할 수 없다고 느꼈다. 김연아의 이적은 논란이 되었고, 그의 전 코치는 공개적으로 이를 비판했다. 오서는 코치로서의 목표 중 하나가 김연아를 웃게 만드는 것이었으며, 한국 빙상 관계자들로부터 "김연아를 더 행복한 스케이터로 만들어 달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김연아는 오서의 첫 정식 제자였다.
김연아는 2006년 스케이트 캐나다 인터내셔널에서 시니어 국제 대회에 데뷔했으며, 오서는 코치로서 데뷔했다. 그는 쇼트 프로그램 1위, 프리스케이팅 4위를 기록하며 총점 168.48점으로 동메달을 획득, 한국 선수 최초로 시니어 그랑프리 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했다. 2006년 트로피 에릭 봉파르에서는 쇼트 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 모두 1위를 차지하며 총점 184.54점(당시 개인 최고 기록)으로 한국 선수 최초로 시니어 그랑프리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랑프리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김연아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첫 2006-2007 ISU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했다. 그는 쇼트 프로그램 3위, 프리스케이팅 1위를 기록하며 총점 184.20점으로 아사다 마오를 제치고 우승, 한국 선수 최초로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메달을 획득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쇼트 프로그램 후 김연아는 허리 통증으로 인해 자신의 연기에 대해 걱정했지만 결과에 만족한다고 밝혔다. 프리스케이팅 후에는 결과에 놀랐으며, 일본 선수들과의 경쟁이 즐거웠다고 말했다.
김연아는 2007년 1월 요추 추간판 탈출증 초기 진단을 받아 2007년 한국 선수권 대회에서 기권했다. 그는 척추가 신경을 누르고 디스크가 부어 탈장으로 발전할 수 있는 상태였으며, 2~4주간의 물리 치료로 완치될 수 있다고 진단받았다. 그는 진단 직후 서울에서 허리 근육 강화 및 균형 유지를 위한 치료를 시작했으며, 치료 중에는 훈련을 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2007년 동계 아시안 게임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김연아는 도쿄에서 열린 2007년 세계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 출전할 예정이었다. 만성 허리 통증으로 진통제를 복용하고 치료를 거의 받지 못한 상태에서도 그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71.95점을 기록하며 ISU 채점 시스템 하에 역대 최고 쇼트 프로그램 점수를 세웠다. '골든 스케이트'의 로잘린 케이는 김연아가 "나이에 비해 훨씬 뛰어난 강렬함과 성숙함"으로 쇼트 프로그램을 연기했다고 평가했다. 김연아는 쇼트 프로그램이 허리에 부담을 주었지만, 단일 사건이 통증을 악화시킨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미골 부상도 겪고 있었다. 김연아는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 점프로 쇼트 프로그램을 시작했으며, 두 점프 모두 충분한 속도로 착지했다.
세계 선수권 대회 프리스케이팅에서 케이는 "우아함과 뛰어난 스케이팅 기술이 훌륭하게 발휘되었다"고 평가했다. 김연아는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을 "놀라운 흐름과 환한 미소"로 성공시켰고, 그의 직선 스텝 시퀀스는 "가볍고 서정적"이었다. 그는 또한 두 번의 트리플 러츠에서 넘어졌고, 트리플 살코-더블 토룹 콤비네이션은 4번째 콤비네이션 점프로 간주되어 점수를 받지 못했다. 그는 이 부문에서 114.19점, 총점 186.14점으로 3위를 차지했다. 실수에도 불구하고 김연아는 첫 시니어 시즌 동안 동료 스케이터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2009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후, 2007년 쇼트 프로그램에서는 개인 최고 기록을 세웠지만 프리스케이팅에서는 그만큼 잘하지 못했다고 언급했다.
2.4.2. 2007-08 시즌
2007-2008 시즌 초, 오서 코치는 김연아를 위한 전문가 팀을 구성했다. 여기에는 세 차례 네덜란드 챔피언인 아스트리드 얀센이 스핀 코치로, 전 캐나다 아이스 댄서 트레이시 윌슨이 김연아의 전반적인 스케이팅 품질, 스트로킹 기술, 표현력 향상을 도왔으며, 데이비드 윌슨은 김연아의 전담 안무가가 되었다. 그의 팀은 오서가 "숙적 점프"라고 부르던 트리플 룹 점프에 집중했다. 오서는 김연아의 스케이팅 능력, 안무를 빠르고 잘 배우는 능력, 창의성, 그리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데 대한 개방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인터내셔널 피겨 스케이팅'은 김연아가 토론토에서 함께 훈련하는 어린 스케이터들에게 긍정적인 영향과 좋은 롤모델이 되었다고 보도했다. 김연아는 토론토에서의 훈련이 한국에서 매일 직면하는 엄청난 명성과 "미디어 서커스"로부터의 탈출구였다고 말했다.
김연아는 시즌을 시작하며 2007년 컵 오브 차이나에서 총점 180.68점으로 우승, 한국 선수 최초로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 쇼트 프로그램에서는 트리플 러츠, 더블 악셀, 세 번의 스핀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나, 트리플 플립-싱글 토룹 콤비네이션 실패로 3위에 그쳤다. '골든 스케이트'는 김연아가 키스 앤 크라이 존에 들어설 때 실망감이 역력했으며, 점프 실수 후 긴장했다고 나중에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프리스케이팅에서는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 트리플 룹, 트리플 러츠-더블 토룹 콤비네이션, 더블 악셀-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을 성공시켰다. 그는 122.36점을 기록했으며, 프리스케이팅에서 감점을 받지 않은 유일한 선수였다. 김연아는 나중에 자신의 프리스케이팅에 만족하지 못했으며, 다음 대회 전에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김연아는 2007년 컵 오브 러시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최초의 한국 선수였다. 그는 컵 오브 러시아 대회가 "매우 강한 경쟁"이었다고 말했다. 쇼트 프로그램에서 63.50점을 기록하며 시즌 최고 기록을 세웠다. 아나 콘드코바 기자는 이를 "거의 완벽한 연기"라고 불렀다. 김연아는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나, 트리플 러츠 착지에 어려움을 겪었고 더블 악셀은 싱글로 처리했다.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는 "훌륭한 왈츠 캐릭터를 표현했다." 그는 나중에 결과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김연아는 또한 프리스케이팅에서 133.70점을 기록하며 1위를 차지했고, 총점 197.20점으로 우승했으며, ISU 채점 시스템 하에 프리스케이팅 점수 세계 기록을 세웠다. 그는 나중에 점프가 불안정하게 느껴졌으며, 개선할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김연아는 2007-2008 ISU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했으며, 그와 아사다 마오 모두 최대 30점을 획득하여 진출했다. 그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64.62점을 기록하며 시즌 최고 기록을 세웠다. 마지막으로 스케이팅한 그는 "첫 점프의 실패를 제외하고 거의 완벽하게 연기했다."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의 첫 점프에서 균형을 잃어 두 손으로 얼음을 짚고 콤비네이션의 다음 점프를 싱글로 처리해야 했다. 한 번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머지 프로그램을 깨끗하게 스케이팅했다. '코리아 타임즈'는 김연아의 스파이럴 시퀀스가 "훌륭했다"고 보도했으며, 더블 악셀과 모든 스핀을 "흠 없이" 완료했다고 전했다. 김연아는 프리스케이팅에서 132.21점으로 2위를 차지했다。 아사다는 쇼트 프로그램 6위에서 프리스케이팅 1위로 역전하며 파이널에서 두 번째 연속 은메달을 획득했다. 김연아는 루틴 초반에 넘어졌지만, 6개의 트리플 점프를 성공적으로 착지했다. 총점 196.83점으로 김연아는 그랑프리 시리즈를 석권하고 두 번째 연속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을 차지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이를 달성했다.
김연아는 이미 세계 선수권 대회와 4대륙 선수권 대회에 진출할 자격을 획득했기 때문에 2008년 한국 선수권 대회에 참가할 필요가 없었지만, 고관절 부상과 만성 고관절 통증으로 4대륙 선수권 대회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진통제를 복용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연아는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다. 그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59.85점으로 5위를 기록했으나, 프리스케이팅에서 123.38점으로 1위를 차지하며 반등했다. 여러 차례 대회 기권을 심각하게 고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총점 183.23점을 기록하며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두 번째 연속 동메달을 획득했다. 프리스케이팅에서는 여러 콤비네이션 점프를 성공시켰으며, 유일한 실수는 두 번째 러츠 점프에서 발생했다. 그는 나중에 다음 두 달 동안 휴식을 취하고 부상을 치료한 후 캐나다로 돌아가 훈련할 계획이라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이는 한국 선수 최초로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연속 메달을 획득한 기록이었다.
2.4.3. 2008-09 시즌
김연아는 2008-2009 그랑프리 시즌에 2008년 스케이트 아메리카와 2008년 컵 오브 차이나에 배정되었다. 스케이트 아메리카 출전 일주일 전, 김연아는 고려대학교에 합격했다. 스케이트 아메리카에 출전하면서 그는 건강하다고 말했다. 피겨 스케이팅 기자 린 러더포드에 따르면, 그는 지난 시즌 그를 괴롭혔던 부상의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 오서 코치와 김연아 모두 그가 건강하며 새로운 물리 치료사와 트레이너가 있다고 전했다. 김연아는 이번 시즌 목표가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며, 부상에서 회복하고 예방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2008년 세계 선수권 대회 후, 김연아의 코칭팀은 그가 프로그램 음악 선택에 더 많은 의견을 낼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으며, 그들의 좋은 관계와 소통이 이 과정에 도움이 되었다고 언급했다. 오서 코치는 김연아가 "성숙과 발전 면에서 스스로의 길을 찾았다"고 느꼈다.
데이비드 윌슨과 안무가 셰이린 본이 쇼트 프로그램 음악으로 여러 제안을 한 후, 김연아는 카미유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를 사용했다. 프리스케이팅 음악으로는 4년 전 다른 스케이터가 사용하는 것을 본 후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를 선택했다. 김연아는 스케이트 아메리카 쇼트 프로그램에서 더블 악셀에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69.50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러더포드는 김연아가 훈련 중 "빛났다"고 보도했다. 그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클린 트리플-트리플 콤비네이션 점프를 성공시킨 유일한 선수였으며, 프로그램의 첫 점프인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에서 10.70점을 기록했다. 더블 악셀을 제외한 그의 8개 요소 모두 긍정적인 GOE(수행점수)를 받았다.
김연아는 프리스케이팅에서 123.95점을 기록하며 금메달을 획득했고, 총점 193.45점으로 우승했다. '코리아 타임즈'에 따르면, 김연아는 프리스케이팅에서 "거의 완벽한 점프와 유려한 스파이럴 시퀀스를 성공시켰다." 그는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을 포함한 6개의 트리플 점프를 착지했으며, 이는 심판에 의해 다운그레이드되지 않은 유일한 트리플-트리플 콤비네이션 점프였다. 그는 나중에 관중석의 많은 한국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김연아는 2008년 컵 오브 차이나에서 쇼트 프로그램 63.64점, 프리스케이팅 128.11점을 기록하며 두 부문 모두 1위를 차지하고 우승했다. 쇼트 프로그램에서 실수를 범했는데, 트리플 러츠를 두 발로 착지하고 회전수가 부족하여 더블 점프로 다운그레이드되었다. 프리스케이팅에서는 "강철 같은 의지"를 보여주며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룹을 포함한 5개의 클린 트리플 점프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첫 트리플 러츠에서 스텝 아웃 실수가 있었는데, 그는 이것이 점수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두 번째 트리플 러츠 끝에 더블 토 점프를 추가했다. 김연아는 휴식을 취하고 프로그램을 더욱 개선하기 위해 토론토로 돌아갔으며, 나중에 컵 오브 차이나 이후 "꽤 지쳤다"고 인정했다.
최고의 예선 점수로 김연아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2008-2009 ISU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했다. 그는 고양에 도착하면서 많은 압박감을 느꼈지만, 고국에서 스케이팅하는 것을 기대한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대회 티켓은 판매 시작 몇 분 만에 매진되었다. 김연아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개인 최고 기록에 훨씬 못 미치는 65.94점으로 1위를 차지했으며, 프리스케이팅에서는 120.41점으로 2위를 차지했다. 지난 두 시즌 동안 파이널에서 1위를 차지했던 그는 총점 186.35점으로 은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쇼트 프로그램 시작 시 "아름다운"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 점프를 성공시켰으나, 계획했던 트리플 러츠에서 실수를 범했고, 이후 더블 악셀을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그는 나중에 러츠의 타이밍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인정했지만, 다른 요소들에는 만족했으며, 지난 시즌 이후 실수에서 회복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김연아는 프리스케이팅을 강력한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으로 시작했으며, 이어서 더블 악셀-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을 성공시켰다. 계획했던 트리플 러츠에서 실수를 범하고 트리플 살코에서 넘어졌지만, 프로그램 마지막에 더블 악셀을 착지할 수 있었다. 그는 나중에 감기에 시달렸다고 불평했으며, 한국에서 스케이팅하는 것을 즐겼지만, 그곳에서 경쟁하는 것에 대한 압박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김연아는 이어서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2009년 4대륙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다. 그는 클린 연기로 쇼트 프로그램에서 72.24점의 새로운 세계 기록을 세웠다. 아사다는 쇼트 프로그램 후 "충격적인" 6위를 기록했다. "아름다운"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 점프로 시작한 김연아는 상위 6명의 여자 선수 중 트리플-트리플 콤비네이션 점프를 인정받은 유일한 선수였다. '아이스네트워크'의 로리 닐린에 따르면, "김연아는 명백한 결함 없이 스케이팅했으며, 점프를 연이어 성공시키고 관중을 열광시켰다." 그는 프리스케이팅에서 116.83점을 기록하며 총점 189.07점으로 선두를 유지하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코리아 타임즈'의 강승우는 김연아의 성공이 "동계 올림픽에서 극동 국가의 첫 피겨 스케이팅 메달에 대한 전망을 밝게 했다"고 언급했다. 김연아는 트리플 룹 점프 후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프리스케이팅 연기에 만족했다. 그는 트리플 러츠-더블 토룹-더블 룹 콤비네이션 점프를 착지했으며, 이는 다운그레이드되었지만, 더블 악셀-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 점프를 완료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2009년 세계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서 김연아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76.12점의 또 다른 새로운 세계 기록을 세웠으며, 자신의 이전 기록을 4점 경신했다. 오서 코치는 김연아가 잘 훈련되었다고 말했으며, 김연아의 쇼트 프로그램에 대해 "사람들이 항상 기억할 순간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심판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 점프로 프로그램을 시작했으며, '코리아 타임즈'의 윤철은 이를 "의심할 여지 없이 완벽하다"고 불렀다. 이어서 "훌륭한" 스파이럴 시퀀스가 이어졌다. 윤철은 김연아가 에너지와 자신감으로 스케이팅했으며, 관중들이 기립 박수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그는 나중에 쇼트 프로그램 동안 관중석의 한국 팬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김연아는 프리스케이팅에서 우승했으며, 총점 207.71점의 새로운 세계 기록을 세우며 첫 세계 선수권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ISU 채점 시스템 하에 200점을 돌파한 최초의 여자 스케이터가 되었다. 그의 우승은 그를 2010년 동계 올림픽의 강력한 우승 후보로 만들었다. '뉴욕 타임즈'의 줄리엣 매커는 김연아의 프리스케이팅에 대해 "이틀 연속으로 김연아는 관중과 심판을 매료시킨 또 다른 우아하고 effortless한 루틴을 선보였다"고 말했다. 그는 프로그램 시작 시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을 포함한 5개의 트리플 점프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이 중 3개는 콤비네이션이었다. 그는 트리플 룹을 이나 바우어에 이어 더블 악셀로 대체하기로 결정했는데, 트리플 룹이 더 많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지만, 점수 손실로 이어지는 실수가 더 흔했기 때문이다. 이나 바우어의 추가는 그의 구성 점수도 높였다. '코리아 타임즈'의 강승우는 "그는 경외심에 찬 관중 앞에서 유연성과 강력한 에너지를 보여주며 놀랍도록 카리스마 넘치는 춤을 선보였다"고 말했다. AP 통신은 김연아의 스텝이 "정교했으며" 그가 "여왕의 우아함으로 스케이팅했다"고 보도했다. 관중들은 김연아의 프리스케이팅이 끝나기 전에 기립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AP 통신은 그의 연기를 "마법 같았다"고 불렀으며, 끝날 무렵 관중들이 그의 실수를 잊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나중에 세계 선수권 대회 우승이 꿈의 성취였으며, 올림픽 전 마지막 세계 선수권 대회였기 때문에 우승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서 코치에 따르면, 김연아는 첫 세계 타이틀을 획득한 후 새로운 자신감을 얻었다. 매커는 이것이 김연아 경력의 가장 큰 목표였다고 보도했다.
2.4.4. 2009-10 시즌

2009-2010 시즌 김연아의 목표는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프로그램과 표현력, 캐릭터, 메이크업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뉴욕 타임즈'의 줄리엣 매커는 김연아의 쇼트 프로그램이 "섹시하고 자신감 넘치는 본드걸"을 묘사하며 "매혹적이었고", 김연아가 프리스케이팅 프로그램을 "프리마 발레리나의 우아함으로" 연기했다고 말했다.
김연아는 2009-2010 ISU 그랑프리 시즌에 2009년 트로피 에릭 봉파르와 2009년 스케이트 아메리카에 배정되었다. 트로피 에릭 봉파르에서 그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76.08점을 기록하며 1위를 차지했다. 연기 후 그는 주먹을 쥐고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210.03점으로 대회에서 우승했다. 김연아는 프리스케이팅과 총점 모두에서 자신의 세계 기록을 경신했다.
2009년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김연아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76.28점을 기록하며 다시 1위를 차지했으며, 가장 가까운 경쟁자인 미국의 레이첼 플랫을 앞섰다. 김연아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새로운 세계 기록을 세웠으며, 이는 4개 대회 연속으로 세계 기록을 경신한 것이었다. 린 러더포드는 '아이스네트워크'에서 "그의 세계 기록은 안전하지 않다. 그는 계속해서 기록을 깰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연아는 나중에 모든 대회가 자신에게 중요했으며, 올림픽을 위한 연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쇼트 프로그램 후 김연아는 본드 영화 음악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확신이 없었지만, 윌슨이 만든 안무가 마음에 들었고 올림픽 해에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국 그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오서 코치는 김연아의 여러 우승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김연아는 프리스케이팅에서 111.70점으로 2위를 차지했지만, 187.98점으로 대회에서 우승했다. 한국 신문 '조선일보'는 김연아를 밴쿠버에서 "금메달의 확실한 우승 후보"이자 "자신만의 리그에 있다"고 불렀다.
김연아는 두 그랑프리 대회에서의 우승으로 2009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09-2010 ISU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했으며, 모든 예선 참가자 중 가장 높은 30점을 획득했다. 그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65.64점으로 2위를 차지했다. 다음 날, 그는 프리스케이팅에서 123.22점으로 우승했다. 그 결과, 김연아는 2009년에 참가한 모든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총점 188.86점으로 세 번째 그랑프리 파이널 타이틀을 획득했다. 12월 중순, 그는 두 번째로 올림픽 성화 봉송자로 선정되어 토론토에서 훈련하던 곳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온타리오주 해밀턴 시내에서 약 300 m를 달렸다.

2010년 2월, 김연아는 2010년 동계 올림픽 여자 싱글 부문에 출전하여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 2010년 3월, 김연아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2010년 세계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다. 김연아는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후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가할 동기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김연아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60.30점으로 7위를 기록했으며, 이는 그의 경력에서 세 번째로 낮은 점수이자 처음으로 5위 안에 들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프리스케이팅에서 130.49점으로 1위를 차지하며 반등했고, 총점 190.79점으로 은메달을 획득했다. 김연아는 나중에 세계 선수권 대회가 정신적으로 힘들었으며, 대회 기권을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인정했다.
2.4.5. 2010-11 시즌

2010년 8월, 김연아와 브라이언 오서 코치는 결별했다. AP 통신에 따르면, 이는 "오서 코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 움직임"이었고,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결정에 대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오서 코치는 자신의 해고가 "갑작스러웠다"고 말했다. 데이비드 윌슨은 이 결별을 "악몽 같았다"고 표현했다. '토론토 스타'는 같은 달 오서 코치가 김연아가 다음 시즌에 사용할 예정이었던 프리스케이팅 음악을 허락 없이 유출했으며, 이는 피겨 스케이팅에서 지양되는 행동이라고 보도했다. 처음에는 김연아가 코치 없이 토론토에서 훈련을 계속했으며, 새로운 코치를 고용할 계획은 없었다. 2010년 가을, 그는 미셸 콴의 가족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로스앤젤레스 이스트 웨스트 아이스 팰리스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10월, 그의 소속사가 윌슨에게 코치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한 후, 그는 피터 오피가드를 고용하고 윌슨과 안무가로서 계속 협력했다.
김연아는 2010-2011 ISU 그랑프리 시즌에 2010년 컵 오브 차이나와 2010년 컵 오브 러시아에 배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랑프리 시리즈에 참가하지 않고, 시즌의 유일한 대회이자 1년여 만의 첫 대회인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2011년 세계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코치 프랭크 캐롤은 오랜 공백 후의 경쟁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그것을 해낼 용기와 강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결과에 집중하기보다는 즐기고 자신의 다른 면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김연아는 이전 올림픽이 에너지를 소진시켰기 때문에 2011년 4대륙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도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세계 선수권 대회에는 한국과 일본의 많은 기자들이 참석했지만, 김연아는 올림픽 때만큼의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다. '지젤' 음악에 맞춰 스케이팅한 그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65.91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그는 트리플 러츠에서 비틀거려 계획했던 트리플-트리플 콤비네이션 점프를 포함할 수 없었지만, 콤비네이션 점프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계획했던 트리플 플립에 더블 토룹을 추가했다. 오피가드 코치는 나중에 김연아가 1년 만의 첫 대회였기 때문에 긴장했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김연아는 훈련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려웠으며, 계속할 동기가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김연아는 프리스케이팅에서 128.59점으로 2위를 차지했으며, 총점 194.50점으로 은메달을 획득했다. 한국 음악에 맞춰 스케이팅한 그는 이를 "내 나라에 보내는 러브레터"라고 불렀다. 김연아는 첫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 점프를 착지했으며, 또 다른 트리플 러츠와 두 번의 트리플 살코를 착지했으나, 플립 점프에서 실수를 범했다. '골든 스케이트'는 김연아가 2005년 주니어 그랑프리 이후 참가한 모든 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하는 "인상적인 기록을 이어갔다"고 보도했다.
김연아는 2018년 동계 올림픽의 한국 유치 성공을 위한 홍보 활동으로 인해 다음 그랑프리 시리즈에 불참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2011년 10월 18일, 그는 주니어 및 시니어 경력에서 처음으로 2011-2012 피겨 스케이팅 시즌 전체를 쉬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는 나중에 밴쿠버 올림픽을 앞두고 느꼈던 높은 기대와 압박감 때문에 휴식을 취했다고 말했다.
2.4.6. 2012-13 시즌
2012년 7월, 김연아는 러시아 소치에서 열리는 2014년 동계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2012-2013 피겨 스케이팅 시즌에 경쟁적으로 스케이팅할 의사를 밝혔다. 그는 나중에 AP 통신의 낸시 아머에게 "다시는 압박감에 질식당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올림픽 우승 후 오랜 공백 끝에 경쟁으로 돌아오는 것이 어려웠지만, 승리에 대한 절박함이 덜했기 때문에 압박감을 덜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경쟁 스케이팅에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쉬는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며,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소치를 다시 시작할 기회로 여긴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그는 또한 휴식 기간 동안 국내에서 훈련하면서 어린 한국 스케이터들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과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김연아는 2012-2013 ISU 그랑프리 피겨 스케이팅 시리즈에 초청받지 못했기 때문에 2013년 세계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 진출할 충분한 기술 점수를 얻기 위해 소규모 대회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김연아는 오피가드 코치와 결별하고 어린 시절 코치였던 신혜숙과 류종현 코치와 훈련을 시작했다. 그의 코치들은 오랜 공백 후에도 김연아의 기술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훈련에서 체력 향상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혜숙 코치는 김연아의 전반적인 훈련을, 류종현 코치는 체력 훈련과 컨디셔닝을 담당했다. 김연아는 쇼트 프로그램 음악으로 1963년 영화 '뱀파이어의 키스'의 음악을, 프리스케이팅 음악으로는 뮤지컬 '레 미제라블'의 곡들을 선택했다. 그는 새로운 것을 사용하고 싶었기 때문에 영화 및 뮤지컬 사운드트랙을 사용했다.
김연아의 시즌 첫 대회는 독일 도르트문트에서 열린 2012년 NRW 트로피였다. 이는 2011년 이후 그의 첫 대회였다. 문광립 기자는 이를 "인상적인 복귀"라고 불렀다. NRW 트로피 티켓은 6시간 만에 매진되었으며, 보통 이 대회에 참석하는 소수의 언론 매체 대신 여러 뉴스 매체를 포함한 50개 이상의 취재 허가가 발급되었다. 대회 우승이 중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72.27점으로 1위를 차지했으며, 프리스케이팅에서도 129.34점으로 우승하여 금메달을 획득했다. '아이스 네트워크'의 클라우스-라인홀트 카니는 NRW 트로피가 소규모 국제 대회였기 때문에 ISU가 김연아의 쇼트 프로그램 점수를 시즌 최고 순위 목록에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의 점수는 그 시즌 기록된 가장 높은 점수였다. 그는 2013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 진출하기 위해 프리스케이팅에서 48점의 기술 요소 점수를 획득해야 했는데, 이를 쉽게 달성했다. 그는 충분한 점수를 얻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2012년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에 참가 신청을 했지만, NRW 트로피 후 신청을 철회했다.
김연아는 나중에 프리스케이팅 전 워밍업 중 긴장했지만, 긴장을 잘 조절했으며, 소규모 대회에서 스케이팅하는 것을 긍정적인 경험으로 여겼다고 인정했다. 그는 또한 요소에 집중했지만, 프리스케이팅의 안무와 감정적인 측면을 개선할 의향이 있으며, 한국 선수권 대회와 2014년 올림픽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광립 기자는 김연아가 "지울 수 없는 침착함과 숭고한 우아함으로... 겁 없이 점프를 시작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착지했다"고 보도했다. 카니는 김연아의 첫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 점프를 "훌륭했다"고 불렀다. 김연아는 또한 +2 GOE를 받은 트리플 플립, 두 개의 추가 트리플, 이나 바우어에서 이어지는 더블 악셀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지만, 첫 악셀을 싱글로 처리하고, 계획했던 두 번의 더블 토룹을 싱글 점프로 바꾸었으며, 트리플 살코-더블 토 콤비네이션 점프 중 넘어졌다. 그러나 카니는 그가 끝 무렵 피곤해 보였지만, 나머지 프로그램은 "견고했다"고 말했다. 기술 자격을 충족한 후, 김연아의 소속사는 그가 2013년 한국 피겨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와 2013년 세계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연아는 또한 신혜숙 코치와 류종현 코치와의 재회가 즐거웠으며, 한국에서 훈련하는 것을 그리워했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김연아는 한국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할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그는 클린 쇼트 프로그램을 스케이팅하며 64.97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그는 또한 프리스케이팅에서 145.80점, 총점 210.77점으로 우승했다. 그는 다섯 번째 국내 타이틀을 획득하고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획득했다. 연합뉴스 고동욱 기자는 김연아의 프리스케이팅을 "흠 없는 연기"라고 부르며, 연습 중 넘어졌기 때문에 프리스케이팅을 앞두고 긴장했지만, 실수 없이 프로그램을 완료했다고 보도했다.

2013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두 번째 세계 타이틀을 노리던 김연아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69.97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그는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 점프, 스케이트의 잘못된 엣지에서 이륙하여 다운그레이드된 트리플 플립, 그리고 더블 악셀을 완료했다. 그는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 점프와 이나 바우어에서 이어지는 더블 악셀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코리아 헤럴드'에 따르면, 그는 또한 "나머지 구간에서 흠 없는 스핀과 스텝 시퀀스를 선보였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점수에 실망했지만, 쇼트 프로그램에 대해 후회는 없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그는 또한 나중에 스케이팅하는 것이 더 긴장되었기 때문에 "중간 순서에서" 스케이팅하는 것을 즐겼다고 말했다.
김연아는 또한 클린 프로그램으로 148.34점을 획득하며 프리스케이팅에서 우승했다. 총점 218.31점으로 김연아는 두 번째 세계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다른 경쟁자들을 20.43 pt 차이로 제쳤는데, 이는 ISU 채점 시스템이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사용된 9년 동안 금메달과 은메달 사이의 가장 큰 점수 차이였다. AP 통신의 낸시 아머는 김연아가 "프로그램 후반부에 중앙 얼음에 서 있었어도 우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연아는 압박감을 덜 느꼈다고 기자들에게 말했으며, 또한 "순간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머는 김연아가 소치에서 그렇게 스케이팅을 계속한다면 올림픽에서 그를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추측했다. 김연아는 프리스케이팅에 대해 기립 박수를 받았는데, '시카고 트리뷴'의 필립 허쉬는 이를 "초월적인 빛나는 프리스케이팅"이라고 불렀다. 마지막으로 스케이팅한 그의 프리스케이팅에는 6개의 "흠 없는" 점프가 포함되었으며, 이 중 하나는 콤비네이션이었다. 김연아는 나중에 자신의 프리스케이팅에 만족한다고 말했으며, 또한 결과에 더 이상 집중하지 않고 스케이팅과 경쟁 모두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때까지 김연아는 주니어 및 시니어 수준에서 참가한 30개 국제 대회 모두에서 메달을 획득했으며, 이 중 19개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2.4.7. 2013-14 시즌

2013-2014 ISU 그랑프리 시즌에 김연아는 2013년 스케이트 캐나다 인터내셔널과 2013년 트로피 에릭 봉파르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9월 26일, 과도한 훈련으로 인한 오른발 중족골 부상(뼈 타박상)으로 인해 김연아가 그랑프리 시리즈에 불참할 것이라고 발표되었으며, 회복에는 최대 6주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김연아는 9개월 만의 첫 대회인 2013년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에 참가했다. 그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73.37점으로 1위를 차지했으며, 프리스케이팅에서 131.12점으로 우승했다. 연합뉴스 유재호는 김연아가 쇼트 프로그램 음악으로 '어릿광대를 보내주오'를 선택한 것이 최근의 "더 강력한 곡"들과는 다른 선택이었으며, 안무가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김연아가 "일련의 정교한 스텝과 스핀"으로 이를 만회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높은 쇼트 프로그램 구성 점수와 그 시즌 그랑프리에서 가장 높은 쇼트 프로그램 점수를 획득했다. 그의 총점은 그의 경력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점수였으며, 200점을 돌파한 세 번째 연속 기록이었다.
1월 초, 김연아는 2014년 한국 피겨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다. 그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80.60점으로 개인 최고 기록을 세우며 1위를 차지했으며, "흠 없는" 프리스케이팅에서 147.26점으로 우승했다. 김연아는 총점 227.86점으로 여섯 번째 국내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이는 역대 두 번째로 높은 점수였다. 연합뉴스는 김연아의 우승이 올림픽에서 두 번째 금메달 획득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고 보도했다.

2014년 2월, 김연아는 2014년 동계 올림픽에 참가하여 카타리나 비트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하고 경쟁 스케이팅에서 은퇴할 의사를 밝혔다. '코리아중앙데일리'의 문광립에 따르면, 그는 부담감이나 압박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고 후회 없이 경력을 마치고 싶었다. 그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74.92점으로 간신히 1위를 차지했다. 김연아는 국제 순위가 낮았기 때문에 다른 강력한 경쟁자들보다 먼저 스케이팅했지만, 나중에 이것이 압박감을 덜어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프리스케이팅에서 마지막으로 스케이팅했다. 김연아는 나중에 밴쿠버 때만큼 동기 부여가 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그의 총점은 219.11점으로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의 점수보다 5.5 pt 낮았다. 그의 은메달 획득은 그레이엄 기자가 "논란이 많았다"고 불렀으며, "피겨 스케이팅을 다른 모든 스포츠와 차별화하는 예술성에 타격을 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부패의 냄새를 풍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레이엄은 소트니코바의 프리스케이팅 점수 149.95점이 지난 1년 동안 그의 평균 점수보다 40점 높았고 김연아의 밴쿠버 프리스케이팅 점수보다 1점 미만이었다는 점, 그리고 두 명의 심판에 대한 부적절한 점을 논란의 이유로 꼽았다. 김연아는 올림픽 후 기자회견에서 논란에 대해 언급하기를 거부했으며, 2020년 필립 허쉬에게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2023년, 대한체육회는 IOC에 소트니코바가 그해 초 첫 도핑 테스트에 실패했다고 인정한 후 소치 올림픽 여자 피겨 스케이팅 결과에 대해 재조사를 요청했지만, IOC는 거부했다. 예상대로 김연아는 2014년 올림픽이 그의 경쟁 스케이팅 경력의 끝을 알릴 것이며, 2014년 세계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2016년 인터뷰에서 데이비드 윌슨은 그의 은퇴에 대해 "매우 실망했다"고 말했다.
2.5. 코치 및 훈련
김연아의 선수 경력 동안 함께한 주요 코치진과 훈련 환경은 다음과 같다.
- 신혜숙** (2012-2014 시즌): 김연아의 어린 시절 코치 중 한 명으로, 2012년 복귀 시즌부터 류종현 코치와 함께 김연아의 훈련을 다시 맡았다. 신혜숙 코치는 김연아의 전반적인 훈련을 담당했다.
- 류종현** (2000-2002 시즌, 2012-2014 시즌): 김연아에게 처음 피겨를 권유한 코치로, 어린 시절부터 김연아의 재능을 알아보고 훈련을 지도했다. 2012년 복귀 시즌부터는 김연아의 체력 훈련과 컨디셔닝을 담당했다.
- 피터 오피가드** (2010-2011 시즌): 2010년 브라이언 오서 코치와의 결별 이후 김연아가 영입한 미국인 코치이다. 그는 페어 선수 출신으로, 김연아의 우상인 미셸 콴의 형부이기도 하다.
- 브라이언 오서** (2006-2010 시즌): 김연아의 시니어 데뷔 시즌부터 밴쿠버 올림픽 금메달까지 함께한 캐나다 코치이다. 오서 코치는 김연아의 기술적 완성도와 표현력 향상에 큰 기여를 했다。 그는 김연아의 훈련 환경을 토론토로 옮기며 전문적인 팀을 구성하여 훈련을 체계화했다. 오서는 김연아의 첫 정식 제자였다.
- 김세열** (초기 경력)
- 지현정** (초기 경력)
- 훈련 환경 및 방식:**
김연아는 2007년 이전까지는 국내에서 주로 훈련했으며, 해외 전지훈련을 가기도 했다. 2007년부터 2010년 8월까지는 캐나다 토론토 크리켓 스케이팅 & 컬링 클럽에서 훈련했다. 토론토에서의 훈련은 김연아가 한국에서 겪는 엄청난 유명세와 미디어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었다. 2010년 이후로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이스트 웨스트 아이스팰리스와 서울의 고려대학교 빙상장 및 태릉선수촌 빙상장 등에서 훈련했으며, 주 훈련지는 태릉선수촌 빙상장이었다.
김연아의 경기 프로그램과 갈라 안무는 거의 2006년부터 함께한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이 만들었다. 윌슨은 김연아의 작업 윤리를 칭찬하며, 그가 "자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는 김연아가 자신을 믿어주었기에 보람을 느꼈으며, 김연아가 자신에게 무례하거나 변덕을 부린 적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김연아를 함께 일하기에 "완벽한 꿈"이라고 불렀고, 인간으로서의 그의 진실성도 칭찬했다.
3. 주요 업적 및 활동
3.1. 스케이팅 기술 및 스타일

김연아는 "얼음 위에서의 움직임에서 공기처럼 가벼운 우아함", 점프, 스피드, 그리고 ISU 채점 시스템의 요구 사항에 대한 깊은 이해로 잘 알려져 있다. 미셸 콴에 따르면, 김연아는 "점프의 질, 스핀의 질, 엣지에 관해서" 심판들이 찾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이나 바우어,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 점프, 그리고 "트레이드마크"인 레이오버 스핀(일명 '연아 카멜')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009년 AP 통신은 김연아의 편안함, 가벼움, 스피드, 파워, 강인함, 그리고 착지를 칭찬했다. 2020년 스콧 해밀턴은 김연아가 ISU 채점 시스템 하에 가장 많은 점수를 얻는 방법, 특히 그의 구성 점수에서 최고의 모델이었으며, 그의 스피드, 기술, 스파이럴 시퀀스를 칭찬했다.

김연아가 주니어 시절에는 한국에 피겨 스케이팅 시설이 제한적이었고, 이는 그의 훈련에 영향을 미쳤다. 김연아의 스케이팅 경력 초기에 그의 부모님은 가장 중요한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으며, 한국 빙상계는 그의 훈련 비용을 지불하기 위한 보조금을 제공했다. 김연아의 초기 한국인 코치 중 한 명인 류종현은 김연아가 초기에 겪었던 부상을 "거의 일상적인 것"으로 여겼다. 한국 뉴스 매체 'KBS 글로벌'은 2005년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을 김연아가 장애물을 극복하는 능력과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 예시로 보았다. 2006년 여름, 김연아는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과 코치 브라이언 오서와 함께 훈련하기 위해 토론토로 이주했다. '뉴욕 타임즈'의 줄리엣 매커는 이를 "그의 경력의 전환점"이라고 불렀다. 그의 전문가 팀은 그의 발표 기술, 대인 관계 기술, 그리고 부상 치료 및 예방에 대해 그와 함께 노력했다. 2010년 오서 코치는 김연아가 한국에서 겪었던 엄청난 명성 없이 토론토에서 "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09년 그는 '골든 스케이트'에 "완벽하게 준비되는 것"을 좋아하며, 그렇게 했을 때 더 나은 연기를 할 수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의 배영은은 김연아가 "예술성 면에서 라이벌이 없었다"고 말했다. 음악은 그의 스케이팅에서 요소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그의 성공의 이유 중 하나였다. 스케이터로서 느꼈던 압박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나 조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스케이팅했다고 말했다. 김연아는 그의 스케이팅과 발표 기술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의 필립 허쉬는 밴쿠버 올림픽 후 김연아에 대해 "선수와 예술가가 김연아만큼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적은 없었다. 이 두 가지 자질을 모두 가진 스케이터가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대회에서 그들을 그렇게 흠 없이 보여준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미셸 콴의 코치였던 프랭크 캐롤은 김연아가 새로운 채점 시스템 하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운동 능력과 창의성을 결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 데이비드 윌슨과의 협력**
데이비드 윌슨은 2006년 주니어 세계 챔피언 타이틀 직후인 2006-2007 시즌 이전에 김연아와 안무가로서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는 2007-2008 시즌부터 2014년 은퇴할 때까지 김연아의 모든 경쟁 프로그램을 안무했다. 윌슨은 나중에 김연아와 소통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감정 표현이 거의 없었고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으며, 처음 3개월 동안 김연아를 웃게 만드는 데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결국 김연아는 긴장을 풀고 얼굴 표정을 사용하여 관중과 심판 모두를 사로잡는 법을 배웠다. 윌슨은 김연아의 작업 윤리를 칭찬하며, 그가 "자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는 김연아가 자신을 믿어주었기에 보람을 느꼈으며, 김연아가 자신에게 무례하거나 변덕을 부린 적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김연아를 함께 일하기에 "완벽한 꿈"이라고 불렀고, 인간으로서의 그의 진실성도 칭찬했다.
3.2. 프로그램
김연아는 선수 시절 및 프로 활동 시기에 다양한 음악과 안무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그의 프로그램은 뛰어난 예술성과 기술적 난이도를 겸비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시즌 | 쇼트 프로그램 | 프리스케이팅 | 갈라 프로그램 |
---|---|---|---|
2013-2014 | 스티븐 손드하임의 '어릿광대를 보내주오' (뮤지컬 '어 리틀 나이트 뮤직' 중) |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아디오스 노니노' | 지아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중 '네순 도르마' |
2012-2013 | 제임스 버나드의 영화 '뱀파이어의 키스' OST | 클로드 미셸 쇤베르그의 뮤지컬 '레 미제라블' | 영화 '물랑 루즈' OST '록산느의 탱고' |
2011-2012 | 시즌 불참 | 비욘세의 '피버' | |
2010-2011 | 아돌프 아당의 '지젤' | 한국 전통 음악 '오마주 투 코리아' (아리랑 포함) | 라 루의 '불릿프루프' |
2009-2010 | 영화 '007' OST '제임스 본드 메들리' | 조지 거슈윈의 '피아노 협주곡 바장조' | 쥘 마스네의 오페라 '타이스' 중 '타이스의 명상곡' |
2008-2009 | 카미유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 |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 | 린다 에더의 '골드' (뮤지컬 '카미유 클로델' OST) |
2007-2008 |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박쥐' | 클로드 미셸 쇤베르그의 '미스 사이공' | 맨디 무어의 '온리 호프' (영화 '워크 투 리멤버' OST) |
2006-2007 | 영화 '물랑 루즈' OST '록산느의 탱고' | 랠프 본 윌리엄스의 '종달새의 비상' |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리플렉션' (영화 '뮬란' OST) |
2005-2006 | 영화 '물랑 루즈' OST '록산느의 탱고' | 미셸 르그랑의 '파파, 캔 유 히어 미?' (영화 '옌틀' OST) | 니콜 키드먼의 '원 데이 아일 플라이 어웨이' (영화 '물랑 루즈' OST) |
2004-2005 | 게오르기 스비리도프의 '눈보라' | 미셸 르그랑의 '파파, 캔 유 히어 미?' (영화 '옌틀' OST) | 마이클 잭슨의 '벤' |
2003-2004 | 게오르기 스비리도프의 '눈보라' | 조르주 비제의 '카르멘' | |
2002-2003 | 자크 오펜바흐의 '캉캉' | 조르주 비제의 '카르멘' | |
2001-2002 | 자크 오펜바흐의 '캉캉' | 카미유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
3.3. 주요 기록 및 성과
김연아는 그의 경력 동안 수많은 기록과 성과를 달성하며 피겨 스케이팅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 역대 최고 점수 기록:** 여자 싱글 총점, 쇼트 프로그램, 프리스케이팅 점수에서 세계 최고 기록을 보유했던 선수이다. 그는 ISU 채점 시스템 하에 총 11번의 세계 기록을 경신했다.
-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쇼트 프로그램 78.50점, 프리스케이팅 150.06점, 총점 228.56점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 점수 기록을 세웠다.
- 여자 선수 최초로 프리스케이팅 150점, 총점 200점 및 220점을 돌파했다.
- 올포디움 (All Podium) 기록:** 노비스, 주니어, 시니어 모든 경쟁 경력에서 단 한 번도 시상대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는 유일한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다.
- 그랜드 슬램 달성:** 올림픽, 세계 선수권, 4대륙 선수권, 그랑프리 파이널 등 ISU 4대 주요 국제 대회를 모두 우승한 최초의 여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다.
- 커리어 슈퍼 그랜드 슬램 달성:**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과 세계 주니어 선수권 대회까지 포함한 모든 ISU 챔피언십 타이틀을 획득한 최초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다.
- 주요 대회 우승 기록:**
- 올림픽:**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 금메달,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 은메달. 한국 선수 최초의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메달리스트이다.
- 세계 선수권:** 2009년, 2013년 세계 선수권 금메달. 2007년, 2008년 세계 선수권 동메달, 2010년, 2011년 세계 선수권 은메달.
- 4대륙 선수권:** 2009년 4대륙 선수권 금메달.
- 그랑프리 파이널:** 2006-07, 2007-08, 2009-10 그랑프리 파이널 금메달. 2008-09 그랑프리 파이널 은메달. 최연소로 2년 연속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을 차지했다.
- 한국 선수권:**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13년, 2014년 한국 선수권 금메달 (총 6회 우승).
- 주니어 세계 선수권:** 2006년 주니어 세계 선수권 금메달, 2005년 주니어 세계 선수권 은메달.
-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2005-06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금메달, 2004-05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은메달.
- 기타 국제 대회 우승:**
- 2002년 트리글라브 트로피 (노비스) 금메달. 한국 여자 선수 최초의 국제 대회 우승이다.
- 2004년 ISU 주니어 그랑프리 헝가리 금메달. 한국 여자 선수 최초의 주니어 그랑프리 대회 우승이다.
- 2006년 스케이트 캐나다 인터내셔널 동메달. 한국 선수 최초의 시니어 그랑프리 대회 메달리스트이다.
- 2006년 트로피 에릭 봉파르 금메달. 한국 선수 최초의 시니어 그랑프리 대회 우승이다.
- 2007년 컵 오브 차이나 금메달. 한국 선수 최초의 이 대회 우승이다.
- 2007년 컵 오브 러시아 금메달.
- 2008년 스케이트 아메리카 금메달.
- 2008년 컵 오브 차이나 금메달.
- 2012년 NRW 트로피 금메달.
- 2013년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 금메달.
- ISU 세계 랭킹 1위:** 2008-09 시즌부터 2009-10 시즌까지 ISU 세계 랭킹 1위를 기록했다.
4. 영향력 및 유산
4.1. 피겨 스케이팅에 미친 영향

2005년부터 김연아의 성공은 한국에서 피겨 스케이팅의 인기를 높였으며, 그는 '피겨 여왕'으로 불렸다. 2010년 올림픽 직전 필립 허쉬는 김연아만큼 자국에서 유명한 피겨 스케이팅 선수는 없다고 말했다. 2005년 김연아의 코치였던 전 스케이터 지현정은 김연아의 성공이 한국 피겨 스케이팅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더 많은 경쟁자를 배출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2020년 그의 코치 브라이언 오서는 김연아의 2010년 올림픽 연기가 역대 최고 중 하나였으며, 수천 명의 한국 소녀들이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하도록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인터내셔널 피겨 스케이팅' 잡지는 2009년 일부 사람들이 그가 피겨 스케이팅에 필요한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느꼈다고 언급했다. 2010년 '포브스' 잡지에 따르면, 그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입을 올리는 운동선수 중 한 명이었다.
김연아와 일본 스케이터 아사다 마오는 주니어 시절부터 라이벌로 불렸다. 2009년 김연아가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고 아사다가 2위를 차지했을 때, AP 통신은 그들의 라이벌 관계를 "요즘 스케이팅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불렀으며, 그것이 각국에서 그들의 명성의 이유라고 말했다.
4.2. 사회적 영향 및 홍보 활동

2005년, 김연아는 한국 올림픽 위원회의 2014년 동계 올림픽 유치 실패에 대한 홍보대사로 임명되었다. 2010년, 그는 2018년 올림픽 유치를 홍보하기 위해 선정된 24명의 한국 선수 위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나중에 한국이 유치에 성공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2011년 10월, 김연아는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및 패럴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2018년 올림픽 공식 홍보대사로 지명되었다. 그는 최종 성화 봉송자로 등장하여 2018년 동계 올림픽 개회식에서 올림픽 성화에 불을 붙였다. 2022년 2월, 그는 한국 강원도에서 열리는 2024년 동계 청소년 올림픽의 명예 홍보대사로 임명되었고, 조직위원회 위원으로도 임명되었다.
김연아는 음악, 텔레비전, 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 왔다. 2021년에는 그의 후원 계약으로 인해 은퇴 후에도 한국에서 가장 높은 수입을 올리는 운동선수 중 한 명이었다고 보도되었다. 2023년 초, 그가 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진 피해 복구 지원을 위해 1.27 억 KRW (10.00 만 USD)를 기부했을 때, 김연아의 "자선 활동의 역사"가 보도되었다. 2010년, 그는 유니세프의 친선대사로 임명되었다.
4.3. 미디어 이미지
김연아는 한국에서 '국민의 여동생', '피겨 퀸', '피겨의 요정' 등으로 불리며 큰 인기를 누렸다. 그의 활약으로 한국 피겨 스케이팅의 인기는 크게 높아졌다. 한국 피겨 선수 등록자는 2006년 237명에서 2009년 348명으로 증가했다.
2009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을 때, 미국 '포브스'지는 그를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유명인"으로 선정했다. 2010년 4월에는 '타임'지 온라인 투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영웅 부문에서 2위에 선정되었다. 2010년 8월 NHK와 한국 KBS가 실시한 한일 시민 의식 조사에서 그는 "상대국인 중 떠오르는 인물" 6위(3%)에 선정되었다. 같은 해 8월, 한국계 미국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하는 것을 기념하여 로스앤젤레스 시의회는 8월 7일을 '김연아의 날'로 지정하고 그에게 명예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는 2008년과 2009년 주요 한국 신문에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고, 2010년 올림픽 이전 3년 동안 갤럽 여론 조사에서 한국 최고의 운동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는 '타임 100'(2010)과 여러 '포브스' 목록(2016)을 포함한 다양한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4.4. 아이스쇼 출연
김연아는 2006년 시니어 데뷔 직전 한국 아이스쇼 '슈퍼스타즈 온 아이스'에 참가했으며, 다음 해에는 일본 아이스쇼 '드림스 온 아이스'에 참가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그는 자신의 소속사 IB 스포츠가 제작한 '페스타 온 아이스'에 출연했다. 2008년 12월 25일 서울에서 2008년 세계 선수권 동메달리스트 조니 위어와 10명의 어린 한국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과 함께 자선 아이스쇼 '엔젤스 온 아이스'를 주최했다. 김연아는 지역 팬들의 성원에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2009년 4월, 그는 한국에서 세 차례 아이스쇼의 헤드라이너로 나섰다. IB 스포츠는 2009년 8월 14일부터 16일까지 서울에서 또 다른 아이스쇼 '아이스 올 스타즈'를 제작했으며, 미셸 콴도 출연했다.

2010년 4월, 김연아는 IB 스포츠를 떠나 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매니지먼트 회사인 올댓스포츠(AT Sports)를 설립했다. 그들은 2020년 현재 매년 개최되는 아이스쇼 '올댓 스케이트'를 조직했다. 2010년 10월, AT 스포츠는 로스앤젤레스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한국 아이스쇼 브랜드의 미국 버전인 '올댓 스케이트 LA'를 선보였다. 데이비드 윌슨이 연출한 이 쇼에는 김연아를 포함한 세 가지 스케이팅 종목의 현 올림픽 챔피언과 많은 세계 챔피언들이 출연했다. 이 쇼는 미국에 새로운 스타일의 스케이팅 쇼를 선보이고 전반적인 높은 제작 품질로 피겨 스케이팅 팬과 비평가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2012년 6월, 김연아는 중국에서 열린 '아티스트리 온 아이스'에 참가했다. 쇼 주최사인 SECA의 리 성 사장은 김연아를 유치하는 데 2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는 "김연아가 상하이 공연에만 참가했지만, 이는 아티스트리 온 아이스와 심지어 중국 피겨 스케이팅 역사에 있어서도 돌파구였다"고 덧붙였다. 김연아는 2014년 경쟁에서 은퇴한 후 서울에서 고별 아이스쇼를 개최했다. 2018년, 그는 4년 만에 처음으로 얼음 위에서 공연하며 '올댓 스케이트' 쇼에 특별 출연했다. 그는 영화 '팬텀 스레드' 사운드트랙의 '하우스 오브 우드콕' 음악에 맞춰 스케이팅했는데, 이 곡이 화려하거나 극적이지 않고 자신에게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4년 동안 대화하지 않았던 데이비드 윌슨과 캐나다에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김연아는 쇼 프로그램에 점프를 포함하지 않았지만, "순수하고 아름다운, 극적이지 않은" 프로그램을 원했다. 그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이나 바우어와 연아 카멜, 그리고 새로운 트위즐 스핀으로 "관중을 매료시켰다". 관중들은 그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또한 2018년, 그는 하비에르 페르난데스가 주최한 스페인 아이스쇼 '레볼루션 온 아이스'에 출연했다. 그는 스케이터 출연료를 유니세프에 기부했다. 2019년, 김연아는 다시 '올댓 스케이트'에 출연하여 러시아 노래 '어두운 눈동자'의 변주곡과 2017년 줄리아 마이클스의 노래 '이슈스' 음악을 사용했다. 윌슨과 산드라 베직이 프로그램의 안무를 만들었다.
2010년, 김연아는 CNN의 수잔나 팔크에게 자신이 헤드라이너로 나선 쇼의 티켓이 판매 시작 몇 분 만에 매진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동료 출연자들이 관중들의 반응 때문에 자신의 쇼에 다시 출연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2009년, 캐나다 싱글 스케이터 패트릭 챈은 자신과 캐나다 아이스 댄서 테사 버츄와 스콧 모이어를 포함한 다른 스케이터들이 관중들의 열광적인 반응 때문에 김연아의 아이스쇼에서 공연하는 것을 즐겼다고 말했다.
5. 개인 생활
5.1. 가족 및 종교
김연아는 2008년 어머니와 함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서울의 한 스포츠 클리닉에서 무릎 부상 치료를 받던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주치의를 통해 지역 수녀들과 가톨릭 단체들과 접촉하면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그의 세례명은 라틴어로 '바다의 별'을 의미하는 '스텔라 마리스'에서 유래한 '스텔라'이다. 2014년 '내셔널 가톨릭 레지스터'는 그를 "신앙을 공개적으로 살아가는 모범"이라고 불렀으며, 그가 밴쿠버 올림픽과 다른 대회에서 얼음 위에서 기도하고, 성호경을 긋고, 경기 전에 고개를 숙였다고 보도했다. 2010년, 그는 한국 주교들과 함께 묵주를 대중에게 설명하는 전국 캠페인에 참여했다. 그는 묵주 반지를 착용했는데, 많은 팬들이 이를 약혼 반지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자선 기부를 하고 가톨릭 병원, 대학교, 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2020년 기준으로 김연아는 사생활에 대해 "매우 보호적"이었으며, 인스타그램 게시물은 드물고 2018년 이후 트위터 게시물은 없었다. 2022년 7월 25일, 김연아가 3년 동안 교제해 온 크로스오버 사중창 그룹 포레스텔라의 멤버인 성악가 고우림과 결혼할 것이 확인되었다. 그들은 포레스텔라가 공연했던 2018년 '올댓 스케이트' 쇼에서 만났다. 그들은 2022년 10월 22일 서울 호텔신라에서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다.
6. 평가 및 논란
6.1. 긍정적 평가
김연아는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수많은 긍정적인 평가와 찬사를 받았다. 그의 업적, 기여, 그리고 긍정적인 영향은 동시대인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 피겨 스케이팅의 역사적 인물:** 그는 피겨 스케이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자 싱글 스케이터 중 한 명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피겨 여왕'이라는 별명은 그의 압도적인 기량과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 기술적 완벽성:** 그의 점프, 스핀, 스텝, 스파이럴 등 모든 기술 요소는 교과서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 점프와 '연아 카멜' 스핀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의 기술은 ISU 피겨 스케이팅 기술 세미나에서 교본으로 사용될 정도였다.
- 예술적 표현력:** 기술적 기량뿐만 아니라 뛰어난 음악 해석력, 풍부한 표현력, 그리고 우아한 스케이팅으로 관중과 심판 모두를 매료시켰다. 그는 운동 능력과 예술성을 완벽하게 조화시킨 선수로 평가받았다.
- 기록 경신:** ISU 채점 시스템 하에 여자 싱글 최초로 총점 200점을 돌파했으며, 쇼트, 프리, 총점 모두에서 여러 차례 세계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이는 그의 압도적인 실력을 증명하는 객관적인 지표이다.
- 올포디움 기록:** 경쟁 경력 동안 단 한 번도 시상대 밖으로 밀려나지 않은 '올포디움' 기록은 그의 꾸준함과 강한 멘탈을 보여주는 전례 없는 업적이다.
- 국가적 영웅:** 한국 피겨 스케이팅의 불모지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하며 한국 피겨 스케이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 미쳤다. 그의 성공은 수많은 '연아 키즈'를 탄생시켰고, 한국에서 피겨 스케이팅의 대중적 인기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 사회 공헌:** 올림픽 유치 활동, 유니세프 친선대사 활동, 그리고 꾸준한 자선 기부를 통해 스포츠를 넘어선 사회적 책임감을 보여주었다. 그의 선행은 대중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 강한 멘탈:** 중요한 대회에서 압박감을 이겨내고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는 그의 강한 정신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들은 김연아가 단순한 스포츠 선수를 넘어선 문화적 아이콘이자 사회적 모범으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준다.
6.2. 비판 및 논란
김연아의 경력과 관련하여 몇 가지 비판적 시각이나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들은 주로 판정, 코치와의 결별, 그리고 미디어 보도와 관련이 있다.
- 판정 논란:**
- 2008년 컵 오브 차이나 에지 판정:** 2008년 컵 오브 차이나에서 그의 플립 점프에 '롱 엣지' 판정이 내려지자, 브라이언 오서 코치는 "이대로 넘어갈 수 없다"며 비공식적인 경로로라도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반발했다. 이지희 국제 심판도 김연아의 플립 점프가 '주의' 정도면 충분한데 '롱 엣지' 판정은 너무 가혹하다고 지적했다. 이후 2013년 세계 선수권 쇼트 프로그램에서 다시 롱 엣지 판정을 받았을 때, 김연아는 "솔직히 화가 났지만 무시했다"고 말했다.
-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 판정:** 소치 올림픽 여자 싱글 경기에서 김연아가 은메달을 획득하자, 결과에 대한 광범위한 논란이 일었다. 많은 피겨 스케이팅 전문가들과 언론은 러시아의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에게 금메달이 주어진 판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카타리나 비트, 커트 브라우닝, 딕 버튼 등 피겨계의 거물들은 김연아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으며, 프랑스의 '레퀴프', 이탈리아의 '코리에레 델로 스포르트', 미국의 '시카고 트리뷴', '월스트리트 저널' 등 다수의 국제 언론이 판정의 부당함을 지적했다. 2014년 3월 21일, 대한체육회는 한국 빙상경기연맹과 연명으로 국제빙상연맹(ISU) 징계위원회에 심판 구성의 윤리 규정 위반을 주장하며 제소 방침을 발표했다. 그러나 ISU는 2014년 6월 4일 "심판의 행동에 불순한 점이 없고 오심도 존재하지 않는다"며 기각했다. 2023년, 대한체육회는 소트니코바가 도핑 테스트에 실패했다고 인정한 후 IOC에 소치 결과 재조사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 코치와의 결별:**
- 브라이언 오서 코치와의 결별:** 2010년 8월 브라이언 오서 코치와의 결별은 세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며, 오서 코치는 자신이 이유 없이 해고되었다고 주장하며 논란이 되었다. 김연아 측은 이를 부인하며 양측 간의 비난전이 벌어졌다.
- 매니지먼트사와의 분쟁:** 김연아는 이전에 소속되어 있던 IMG 코리아와 IB 스포츠와의 계약 해지 및 이적 과정에서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2010년 11월에는 IB 스포츠에 미지급금 약 6000.00 만 KRW를 청구하기도 했다.
- 미디어 보도 및 명예 훼손:**
- 일본 언론 보도에 대한 항의:** 김연아의 매니지먼트사인 올댓스포츠는 일본 후지 TV의 '진상보도 반키샤!'가 김연아의 연습 장면을 몰래 촬영하여 방영한 것에 대해 항의 서한을 보내고 일본 빙상연맹 및 ISU에 공식 제재를 요청했다. 2013년 4월에는 일본의 한 프리랜서 작가가 김연아의 채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저서에 대해 손해배상 소송을 검토하기도 했다。
- 교수 비판에 대한 명예 훼손 소송:** 2012년 6월, 고려대학교 교직 과정에서 진행한 교육 실습 내용에 대해 연세대학교 황상민 교수가 라디오에서 비판하자, 김연아는 교수를 명예 훼손으로 고소했다. 그러나 6월 15일 고소를 취하했다.
이러한 논란들은 김연아가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로서 겪어야 했던 높은 관심과 압박감을 반영하며, 그의 업적만큼이나 복잡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의 경험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