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김무정(金武亭, 1904년 ~ 1952년)은 본명 김병희(金炳禧)이며, 흔히 무정(武亭)으로 불린 북한의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항일 독립운동과 중국 홍군의 군인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중국 공산당 내에서 '혁명 지도자'로 불린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해방 후 조선인민군 창설에 기여하며 조선로동당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으나, 한국 전쟁 중 군사적 실패와 김일성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숙청되었다. 그의 생애는 격동의 중국 혁명과 한반도의 해방, 그리고 한국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던 한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군인의 비극적인 서사를 담고 있다. 그는 연안파의 주요 인물로서 북한 초기 정치사의 흐름과 김일성 1인 독재 체제 확립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김무정은 격동의 시대를 거치며 항일 독립운동가, 중국 홍군 장교, 조선인민군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그의 생애는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시작하여 중국에서의 망명과 혁명 활동, 그리고 해방 후 북한에서의 정치 군사적 행보, 한국 전쟁에서의 좌절과 비극적인 최후로 이어진다.
2.1. 출생 및 유년 시절
김무정은 1904년 함경북도 청진시 근동리(당시 경성군 룡성면)에서 아버지 김기준과 어머니 종산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김병희(金炳禧)였으며, 자는 명석(明石)이었다. 이후 이름을 무정(武亭)으로 바꾸었으며, 보통 성을 빼고 무정이라 불렸다. 일각에서는 그의 출생 연도를 1905년 또는 1902년으로 보기도 하며, 출생지는 당시 행정 구역상 경성군이었으나 1940년 청진부로 편입되어 청진시 출생 설과 경성군 출생 설이 동시에 존재한다. 본관은 김해 김씨이다.
그의 아버지 김기준은 양반가 출신으로 대지주였으며, 약 1.30 만 JPY 상당의 토지를 소유하여 유복한 생활을 영위했다. 김무정의 급한 성격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10년 룡성면 근동리 천마소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에 졸업했으며, 나남공립보통학교로 편입했다. 1917년 경성면의 경성농업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경신중학교에 편입학했다. 1919년 3월의 3·1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0년 중학교 재학 중 고향 경성에서 중매로 조선인 여성과 결혼하여 이듬해 아들 정신(正新)을 두었으나, 중국 체류 중 헤어지고 중국인 여성 텅치(腾绮)와 재혼하게 된다.
1919년 10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922년 3월 퇴학당하고 막노동에 종사했다. 같은 해 4월 경성기독청년회관 야간부에 입학하여 중국어, 일본어, 영어를 수강했으며, 1923년 2월 경성청년회에 가입하여 이영 등 간부들을 통해 공산주의 사상을 접했다. 1923년 3월 경성기독청년회관을 그만두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를 거쳐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했다. 같은 해 4월 허베이성 바오딩에 있는 보정군관학교 포병과의 단기 과정에 입학하여 포병술을 익혔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일본으로 유학 간 줄 알고 도쿄로 우편환을 보냈으나 반송되었고, 이후 그의 망명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무정의 집안은 조선총독부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김무정은 1942년 작성한 자신의 친필 약력에서 "나는 조선에서 청년운동과 로동운동에 참가하다가 일제에게 체포되여 세 번이나 옥살이를 하였다. 옥중에서 갖은 혹형을 받다가 도망쳐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에 온 후 대혁명에 참가하였고 사업의 실패로 두 차례나 옥살이를 하다가 만기 석방되였다. 1930년부터 지금까지 홍군에 참가하여 여러 가지 투쟁을 진행해왔다"고 기술했다.
2.2. 중국 망명 및 독립운동
1924년 3월 보정군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한 김무정은 중국 국민당군 포병 중위로 임관하여 염석산 부대에 배속되었다. 1925년 초 포병 대위로 진급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포병 중령으로 특별 진급했다. 같은 해 베이징에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후 상하이 조선인지부에서 활동하다가 루이진으로 건너가 중국로농홍군에 입대하여 홍군 대위가 되었다. 이후 중국 공산당의 해방구였던 루이진에서 홍군 포병 장교로 중국 국민당군과 전투를 벌였다.
1927년 상하이 쿠데타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체포령이 내려지자 지하로 잠적하여 비밀 공작 활동에 참여했다가 우창에서 체포되어 군사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만 명의 중국인 학생들의 석방 요구 시위와 동지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탈주하여 상하이로 피신했다. 1929년 상하이 폭동을 배후에서 지휘하다 체포되어 징역 2개월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31년 루이진의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30년 6월 후베이성 양신에 있던 펑더화이의 홍군 제5군에 합류하여 일본군과 교전 중 포탄 20여 발을 쏘아 10여 발을 일본군 전차와 적함에 명중시켜 일본군 함대를 물리쳤다. 이 사건으로 무정은 홍군의 전설적인 포사격 영웅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30년 7월 홍군이 후난성 평강에서 산포련대(山炮連隊)를 조직했으나 혼란이 지속되자, 1930년 말 무정은 산포련대의 제3대 련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31년 5월 장시성 피두에 홍군 중앙군사위원회 포병사령부가 설치되었으나 초대 사령관의 실책으로 6월 무정이 제2대 홍군 중앙군사위 포병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중국 공산당 군사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홍군 특과학교 포병과 교관, 포병과장, 특과학교 제2대 교장 등을 역임했다.
1934년 10월 중국 공산당이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군과의 교전에서 패해 루이진에서 연안으로 약 1.25 만 km를 이동한 장정에 홍군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참여했다. 당시 장정 시작 시점에는 30여 명의 조선인이 있었으나, 산시성 북부에 도달한 이는 무정과 양림뿐이었다. 1935년 11월 홍군학교 특과영 영장(營長)이 되었고, 1936년 6월 홍군 육군대학 제1기 제1과에 입학하여 같은 해 12월 졸업했다.
중일 전쟁이 발발한 1937년 8월, 홍군이 팔로군으로 개편되자 팔로군 총사령부 작전과장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산시성 린펀시에 파견되어 포병 부대 창설에 참여했으며, 1938년 1월 28일 린펀시에서 팔로군 총사령부 포병단이 공식적으로 창설되자 단장에 취임했다. 1938년 8월에는 제115사단과 협동하여 펀리(汾離) 공로의 일본군을 복병하여 큰 성공을 거두어 마오쩌둥과 주더의 표창과 격려를 받았다. 1939년 9월 제115사단 제688단과 협동하여 허베이성 구청현으로 진공했다. 1940년 봄, 태항산 근거지로 진공해 온 스유산 등의 부대를 격퇴했으며, 1940년 8월 백단대전에 팔로군 포병 부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명성을 굳혔다. 그는 팔로군에 있으면서 펑더화이의 부관으로 근무했으며, 그의 재혼 또한 펑더화이가 주선해주었다.
1939년 최창익과 함께 중국 공산당 측 인사를 참여시켜 친선 단체 조중연대를 조직했다. 1940년 가을부터 중앙당학교와 항일군정대학 재학생 및 졸업생인 조선인들을 규합하여 청년 단체 조직에 착수했다. 1941년 1월 10일 한인들로 구성된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1942년 7월 10일에는 이를 확대 개편한 조선독립동맹의 결성에 참여하여 김두봉, 허정숙, 최창익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10월 중국 연안에서 결성된 동방각민족반파시스트대동맹에 참가했다. 같은 해 7월 연안에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부 창설에 참여했으며, 1941년 6월부터 1942년 4월 사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에 반발한 조선의용대 일파가 조선독립동맹으로 오자 그는 이들을 받아들여 세력을 확장했다. 1942년 7월 14일, 태항산에 있던 조선청년연합회 소속 병사들이 하북성에 도착하자, 같은 날 하북성 섭현에서 김두봉, 박효삼 등과 함께 조선의용군을 발족시키고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1942년 11월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중국 체류 중 그는 중국 여성 텅치(腾绮)와 재혼하여 1943년 첫 딸 연려(延麗)와 1944년 아들 연진(延震)을 두었다. 이들의 이름은 최용건이 지어주었으나, 김무정의 성을 '무(武)'씨로 알고 '무연려', '무연진'으로 이름 지었다가 나중에 어머니의 성을 따라 '텅연려', '텅연진'으로 바뀌었다. 아들 텅연진은 1970년에 결장암으로 사망했다. 김무정은 1945년 5월 귀국 전 텅치와 이혼했다.
2.3. 해방 후 북한 활동
한반도가 해방된 1945년 8월 15일 이후, 김무정은 조선의용군과 함께 북조선으로 귀국하려 했으나, 소련군의 무장 해제 방침에 따라 병사들은 무장 해제되고 그는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이로 인해 그는 김일성과 소련군에 반감을 품고 여러 곳에서 이들을 비판하는 유세를 벌였다. 그가 북한으로 귀국하자 김일성은 그의 명망과 자신에게 쉽게 복종하지 않는 태도에 불편함을 느끼며 그를 강력한 정적으로 인식했다. 무정은 연안파 출신인 조선의용군과 조선독립동맹 단원들의 북조선 귀국 편의를 봐주었다. 경성부(서울)에 있던 조선공산당 재건파와 장안파를 모두 인정하지 않던 무정은 1945년 10월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촉진위원회를 따로 조직했다. 1945년 11월 평양역에 직접 나가 귀국한 의용군들의 북조선 정착을 지원했다. 그 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제2비서가 되었다.
1945년 10월 21일 소련군 주도로 북조선 내 군사 단체들이 통합되어 적위대가 조직되었는데, 이 간부 연수에서 김무정은 자신처럼 총을 맞아가며 혁명한 사람에 대한 선전은 없고 특정 인물(김일성)만 선전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술을 폭음했으며, 술에 취하면 김일성을 비난하여 둘 사이의 관계가 틀어졌다. 12월 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1비서가 되었다. 1945년 12월 말부터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의에 반발하며 강력한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로동당이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서자 무정 역시 입장을 바꾸었다.
1946년 그는 보안간부훈련대대부 포병담당 부사령관으로 선발되었고, 같은 해 2월 평양 체류 중 서울에서 조직된 민족주의민주전선의 대의원으로 추대되었다. 중국에서 활동하며 친중파로 분류되었던 그는 간도 문제와 백두산 영유 문제를 두고 중국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대한민국 통일원 자료에 따르면 1948년부터 북한과 중국 간에 백두산 영유 문제로 의견 차이를 보였다고 한다. 김무정은 조선로동당 제2비서가 되었으나, 1946년 김일성은 그의 명성과 불복종적인 태도를 불편해하며 그를 보안간부훈련대대부의 포병사령관으로 강등시켰다.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총참모장이던 안길이 병사하자 임시 대리직을 맡았는데, 이때 김일성에게 상의 없이 독자적인 지휘 방침을 세우거나 독단적으로 명령을 내려 김일성의 눈 밖에 났다.
그는 이후에도 종종 자신의 경력을 과시하며 김일성과 대립했다. 그의 명성과 중국 공산당과의 연줄로 인해 즉각 숙청되지는 않았으나, 그가 이끄는 연안파는 실전 경험과 군사 이론에서 다른 파벌보다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후원을 받는 만주파에 밀려 요직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정치 투쟁 능력이 부족하여 김일성에 대한 개인 숭배를 비판하며 자신의 입지를 악화시켰다.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설 이후에는 인민군 제2지휘소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48년 3월의 제2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으로 재선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후 민족보위성 부상이 되었으며, 1948년 4월의 제1차 남북협상에 참가하고, 8월 해주에서 개최된 제2차 남북협상에도 참여했다. 9월 2일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3. 한국 전쟁 참전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김무정은 민족보위성 부상 겸 조선인민군 포병사령관, 인민군 제2군단장 자격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전쟁 초기 김광협 소장이 춘천 전투 실패로 참모장으로 강등되자, 1950년 7월 무정이 제2군단장으로 후임 임명되었다.
제2군단은 한반도 남부까지 진격했으나, 인천 상륙 작전에 이은 국군과 유엔군의 대규모 반격으로 패퇴했다. 무정은 부하들을 함부로 총살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 해임되었고, 평양 방위 사령관으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평양을 상실하자, 후방 부대인 제7군단장으로 좌천되었다.
4. 실각 및 최후
1950년 11월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에게 패배하고 후퇴한 김무정은 제2군단장에서 해임되고 제7군단장으로 임명되어 자강도로 이동했다. 자강도 만포시를 순찰하던 중, 그와 친분이 있던 팔로군 출신 병사가 부상당한 것을 목격했다. 무정은 즉시 부상당한 병사를 야전 병원으로 데려가 군의관을 겸하고 있던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위생부장 이청산에게 진료를 부탁했다. 그러나 이청산은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격분한 무정은 위협용으로 총을 쏘았다가 이청산이 현장에서 즉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평북 야전군 병원에서의 이 사건이 문제가 되어 김무정은 즉시 보직 해임되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특별 전원회의가 1950년 12월 4일 만포군 별오리에서 개최되었는데, 당 제3차 전원회의가 열리기 전이었다. 이 회의에서 김무정은 패전 책임과 명령 불복종, 전투 조직의 불성실, 그리고 퇴각 시의 불법 살인 등의 죄목으로 조선인민군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숙청되었다. 이때 회의에서는 "질서 정연하게 후퇴하지 못한 책임"과 "불법적인 살인 및 명령 불복종"이 강하게 비판받고 규탄되었다. 당시 북한에는 다수의 중국인민지원군이 진주해 있었고, 김무정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은 김일성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이 당 대회에서의 처분은 김무정을 제외한 모든 인물이 얼마 지나지 않아 복당 및 복직된 것과 대비된다.
김무정은 군적을 박탈당하고 죄수 부대에 편입되어 작업대장으로 평양 모란봉 지하 극장 건설 현장에 보내졌다. 이후 지병인 위궤양이 악화되자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의 중재로 중국 공산당에 인계되어 한때 중국 동북부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병세는 회복되지 않았고, 본인의 희망으로 북한에 귀국한 직후인 1952년 10월 평양 교외의 군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원인은 위장병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각에서는 숙청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의 유해는 평양의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5. 평가 및 유산
김무정의 죽음은 북한 권력의 한 축이었던 연안파의 몰락을 의미했다. 1952년 김무정이 사망하자, 그가 이끌던 연안파는 1956년의 8월 종파 사건과 1958년의 최창익 숙청을 통해 궤멸되었다. 이후 김일성의 1인 독재 체제가 확립되었다.
5.1. 긍정적 평가
김무정은 중국 홍군 내에서 포병술의 전문가로 높이 평가받았다. 그의 포격술은 매우 뛰어나 소련군 고문들 앞에서 한쪽 눈을 감고 엄지손가락을 뻗어 목표물을 조준한 뒤 대포를 발사하면 백발백중이었다는 증언도 있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무정의 화북 지방 독립운동에서의 큰 역할과 중국 공산당에서의 활약을 기술하며 그의 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김무정은 한국 전쟁 이후 비판을 받고 군직에서 사임했으나, 병에 걸리자 특별히 중국에서 치료를 받았고 장례식도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는 조선인민군 육군 대장과 민족보위상으로 추서되었고, 국기훈장 1급이 수여되었다. 윤공흠 사건과 8월 종파 사건으로 사후 격하되기도 했으나, 1994년 다시 복권되어 평양 신미리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5.2. 비판 및 논란
김무정은 강직하고 호탕한 성격의 전형적인 무인 스타일이었으나, 종종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는 단점이 있었다. 주영복은 그를 "강직하고 냉혈하며, 평소에도 부하들에게 거칠게 대하고 누구에게나 '개새끼', '상놈새끼'라고 불렀다"고 비판하며, "팔로군에는 '상관은 병사를 소중히 해야 한다'는 모토가 있는데, 무정은 중국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다"고 회고했다. 또한 그의 호통치는 방식은 구 일본군의 전지 지휘관과 흡사했다고 지적된다.
1945년 11월 조선의용군이 선양에 머무는 동안 중국 공군의 공격을 받자, 김무정은 측근만을 데리고 트럭으로 선양을 빠져나갔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연안파 내부에서 인망을 잃게 되었다. 연안에서 활동하던 시기, 최창익과는 방침 차이로 대립했으며, 충칭에서 온 김두봉은 깊이 신뢰하지 않았다. 박일우와는 중국 공산당의 신임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관계였다. 이러한 지도부의 복잡한 관계는 연안파의 결속력 부족을 초래했으며, 이는 만주파에 패배하여 숙청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그의 한국 전쟁 참전 당시 행적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그는 평양 방어 명령을 어기고,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하는 병사들을 즉결 처분하여 군 내부의 사기를 저하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자강도 만포시에서 발생한 야전병원에서의 이청산 살인 사건은 그의 숙청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명령 불복종, 전투 조직 불성실, 불법 살인 등의 죄목으로 그가 군사 재판에 회부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6. 개인사
김무정은 함경북도 경성군 룡성면에서 태어나 경신중학교 재학 중이던 1920년 고향에서 조선인 여성과 결혼하여 이듬해 아들 정신(正新)을 두었다. 그러나 중국 망명 후 본부인과 헤어지고 중국 여성 텅치(腾绮)와 재혼했다. 텅치와의 사이에서 1943년 딸 연려(延麗)와 1944년 아들 연진(延震)을 낳았다. 이들은 김무정의 성을 무씨로 오해하여 무연려, 무연진으로 불렸으나, 나중에 어머니의 성을 따서 텅연려, 텅연진으로 개명했다. 아들 연진은 1970년에 결장암으로 사망했다. 1945년 5월, 그는 귀국 전 텅치와 이혼했으며, 텅치는 후에 다른 중국인 남성과 재혼했다. 북한 귀국 후에는 조선인 여성 김영숙과 세 번째로 재혼했다. 텅치의 친오빠는 중국 공산당의 고위 간부였던 텅다이위안(滕代远)이었다.
김무정의 성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그는 강직하고 호탕한 무인 스타일이었으나, 성질이 급하고 거칠어 부하들에게도 종종 고압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요시찰인물 보고서에 따르면 그의 성격이 '음험한 편'이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7. 같이 보기
김무정의 생애는 여러 주요 인물 및 역사적 사건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 김일성: 해방 후 김무정과 북한 권력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했던 인물로, 김무정의 숙청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펑더화이: 김무정이 중국 홍군에서 그의 부관으로 활동했으며, 김무정의 재혼을 주선해주고 병으로 위독할 때 중국으로의 이송을 돕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 최창익: 김무정과 함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조직한 연안파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으나, 연안 시기부터 방침 차이로 대립하기도 했다. 그는 김무정 사후 8월 종파 사건으로 숙청되었다.
- 김두봉: 조선독립동맹 주석이자 연안파의 수장으로, 김무정의 정치적 동지였다.
- 박일우: 김무정과 함께 연안파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중국 공산당의 신임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였다.
- 양림: 중국 홍군 장정 당시 김무정과 함께 생존한 몇 안 되는 조선인 중 한 명이다.
- 이청산: 김무정의 숙청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 야전병원 살인 사건의 희생자이다.
- 간도 및 백두산 영유 문제: 해방 후 김무정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마찰을 빚었던 영토 문제로, 그의 친중파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으로서의 영토 의식을 보여주었다.
- 중국 홍군의 장정: 김무정이 중국 공산당 군사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참여하여 '조선인'으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한 사건이다.
- 백단대전: 1940년 김무정이 팔로군 포병 부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중일 전쟁의 주요 전투이다.
- 한국 전쟁: 김무정이 조선인민군 주요 지휘관으로 참전했으나, 군사적 실패와 내부 갈등으로 숙청되는 비극을 맞이한 전쟁이다.
- 연안파 숙청: 김무정의 죽음 이후 1956년 8월 종파 사건과 1958년 최창익 숙청으로 이어지며 북한 내 연안파가 궤멸되고 김일성 1인 독재 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 애국렬사릉: 김무정의 유해가 안장된 평양의 국립묘지이다.
- 조명선
- 강건
- 류경수
- 김책
- 허가이
- 김원봉
- 보안대대부
8. 외부 링크
- [http://news.joins.com/article/2648413 무정... 비운의 혁명가:하(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4)]
-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18683 현대사 아리랑 백발백중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 (상)]
- [http://go.paowang.net/news/3/2005-10-12/20051012221257.html 北朝鲜名将传略:武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