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김동리는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문학적 신념을 지켜나갔다. 그의 생애는 문학 활동의 시작부터 일제강점기의 저항, 해방 후의 문단 활동, 그리고 만년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여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1.1. 출생과 가족 배경
김동리는 1913년 12월 21일(음력 11월 24일한국어) 경상북도 경주시 성건리에서 아버지 김임수(金任守한국어)와 어머니 허임순(許任順한국어)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선산 김씨이다. 16세 연상의 큰형인 김범부(金凡父한국어)는 저명한 한학자이자 동양 철학자로, 김동리의 독서와 문학적 소양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둘째 형은 김영봉이다. 어린 시절 그의 가족은 매우 가난하여, 김동리 자신은 배고픔이 일상적인 삶의 일부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심지어 아버지가 술을 마신 후 남은 술을 마셔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고 한다.
1.2. 어린 시절과 교육
김동리는 1920년 대구 대구제일교회 부속학교에 입학하여 초등 교육을 받았다. 1926년 대구 계성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인 1927년 경성부의 경신고등보통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다. 그러나 1929년 가정 형편으로 인해 경신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정규 교육을 중단한 그는 이후 독서에 전념하며 스스로를 단련했다. 철학, 세계 문학, 동양 고전 등 방대한 양의 서적을 섭렵하며 문학적 깊이를 더했다.
1.3. 문학 활동 시작과 등단
김동리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여러 신문에 시를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934년 시 〈백로〉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공식적으로 시인으로 등단했다. 이듬해인 1935년에는 단편 소설 《화랑의 후예》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소설가로서도 이름을 알렸다. 1936년에는 단편 소설 《산화》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연이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당선 상금 50 JPY을 가지고 다솔사에 들어가 창작에 몰두했으며, 여름에는 해인사로 거처를 옮겨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이 시기에 이주홍, 허민, 최인욱, 조연현, 홍구범 등 동료 문인들과 교류하며 문학적 기반을 다졌다.
1.4. 일제강점기 활동
김동리가 문단에 데뷔한 1930년대는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였다. 1934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소속 작가들이 대거 검거되고, 1938년에는 조선어 교육이 전면 금지되었으며, 1941년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되는 등 조선 문인들에게는 혹독한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김동리의 대표작들은 바로 이 시기에 탄생했다. 그는 1936년 발표한 단편 《산화》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적 경향을 보이기도 했으나, 당시의 프롤레타리아 문학 탄압 속에서 문학의 지향점을 순수 문학으로 전환했다. 그는 문학에서 현실 비판과 고발을 배제하고, 인간 존재의 양식 그 자체를 탐구하는 데 집중했다.
특히 김동리는 1940년 일제의 어용 문화 단체인 조선문인협회와 국민문학총맹 등의 가입을 단호히 거부하며 문학적 순수성을 지키고자 했다. 이러한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 평론 〈순수 의미〉와 〈신세대 문학 정신〉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일제 당국은 그의 작품 《소녀》와 《하현》을 검열하여 전문을 삭제하는 탄압을 가했다. 1942년에는 그가 설립하여 아동 교육에 힘쓰던 광명학원마저 폐쇄되었고, 큰형 김범부가 구속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일련의 사건들에 절망한 그는 1942년 절필하고 만주를 방랑하기도 했다.
1.5. 해방 이후 및 한국전쟁 시기
1945년 광복 직후 좌우 이념 대립의 혼란 속에서 김동리는 빠르게 민족진영에 합류했다. 1946년에는 조지훈 등과 함께 한국청년문필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했으며, 김병규, 김동석 등 좌익 문학자들의 당파적 문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당의 정치적 목적에 종속되는 좌익 문학이 자신의 순수 문학 사상과 대립한다고 보았으며, 그의 문학 이론은 해방 후 한국 문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 전쟁 정전 이후에는 전쟁 문학을 집필하는 한편, 문학의 진흥을 위해 활발히 활동했다. 1947년 경향신문 문화부장, 1948년 민국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으며, 1949년에는 순수 문학 잡지 『문예』의 주간을 맡았다. 같은 해 한국문학가협회 소설분과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서울대학교 예술대학과 고려대학교 문과대학에서 강사로 후학을 양성했다. 1950년에는 문교부 예술위원과 서울시 문화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52년 한국문학가협회 부위원장, 1953년 서라벌예술초급대학 교수 및 한국유네스코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6. 만년과 사망
김동리는 1990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건강이 악화되었다. 1995년 6월 17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소설가 손소희와 합장되었다. 사후인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가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에 이름을 올리며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렸다. 또한 그의 고향 경주에는 생전 그와 절친한 문학적 동지였던 시인 박목월과 함께 그의 문학적 발자취를 기리는 동리목월문학관이 건립되어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에게 그의 문학 세계를 알리고 있다.
[https://www.dmgyeongju.com 동리목월문학관 공식 웹사이트]
2. 연보
김동리의 주요 활동과 생애의 중요한 사건들을 연도별로 정리한 표이다.
| 연도 | 주요 활동 및 사건 |
|---|---|
| 1913년 | 경상북도 경주시 성건리에서 출생. |
| 1920년 | 대구 대구제일교회 부속학교 입학. |
| 1926년 | 대구 계성중학교 입학. 아버지 김임수 사망. |
| 1927년 | 경성부 경신고등보통학교 3학년으로 편입. |
| 1929년 | 경신고등보통학교 중퇴 후 귀향. |
| 1934년 | 시 〈백로〉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문단 데뷔. |
| 1935년 | 단편 《화랑의 후예》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당선 상금 50 JPY을 가지고 다솔사에 들어가 창작에 몰두. 여름에는 해인사로 거처를 옮김. |
| 1936년 | 단편 《산화》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상경 후 실의에 빠져 다시 다솔사로 들어감. |
| 1937년 | 서정주, 김달진 등과 동인 잡지 『시인부락』 창간. 다솔사 전도관을 빌려 광명학원 설립, 아동 교육에 힘씀. |
| 1939년 | 김월계와 결혼. |
| 1940년 | 조선문인협회, 국민문학총맹 등 일제 어용 문화 단체 가입 거부. 평론 〈순수 의미〉, 〈신세대 문학 정신〉 발표. 작품 《소녀》, 《하현》 검열 삭제. |
| 1942년 | 광명학원 폐쇄. 큰형 김범부 구속. 절필 후 만주 방랑. |
| 1945년 | 광복 직후 사천청년회 회장 취임. |
| 1946년 | 조지훈 등과 한국청년문필가협회 결성 및 회장 취임. 좌익 문학 비판. |
| 1947년 | 경향신문 문화부장 취임. 평론 〈문학과 자유의 옹호〉, 〈민족문학론〉, 〈본격문학과 제3세계관〉 발표. |
| 1948년 | 김월계와 이혼. 민국일보 편집국장 역임. 평론 〈김동인론〉, 〈이효석론〉, 〈김소월론〉, 〈삼가시인론〉 발표. |
| 1949년 | 순수 문학 잡지 『문예』 주간. 한국문학가협회 소설분과위원장.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강사. |
| 1950년 | 문교부 예술위원, 서울시 문화위원 위촉. 평론 〈문화구국론〉 발표. |
| 1952년 | 한국문학가협회 부위원장. |
| 1953년 | 소설가 손소희와 재혼. 서라벌예술초급대학 교수 및 한국유네스코위원회 위원. |
| 1954년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선출. |
| 1955년 | 제3회 아시아 자유문학상 수상. 장편 《사반의 십자가》 연재 시작. |
| 1957년 | 장편 《춘추》 연재 시작. |
| 1958년 |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부문 작품상 수상.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
| 1959년 | 장편 《자유의 기수》 연재 시작. |
| 1960년 | 장편 《이곳에 던져지다》 연재 시작. |
| 1963년 | 장편 《해풍》 연재 시작. |
| 1967년 | 3·1문화상 예술 부문 본상 수상. |
| 1970년 |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서울시 문화상 수상.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
| 1972년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학장. 장편 《아도》, 《삼국기》 연재 시작. |
| 1982년 | 불교아동문학회 회장. |
| 1983년 | 5·16 민족문학상 수상. |
| 1984년 | 평론 〈문학이란 무엇인가〉 발표. |
| 1986년 | 단군개국비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
| 1987년 | 두 번째 부인 소설가 손소희 사망. 소설가 서영은과 세 번째 결혼. |
| 1989년 | 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
| 1990년 | 뇌졸중으로 쓰러짐. |
| 1995년 6월 17일 | 지병으로 사망. |
| 1999년 |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에 이름 올림. |
3. 문학 세계
김동리의 문학 세계는 순수 문학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한국적 전통, 그리고 인간의 근원적인 운명에 대한 탐구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작품을 통해 샤머니즘과 휴머니즘이 결합된 독특한 미학을 선보였다.
3.1. 문학 철학과 이념
김동리는 문학의 본질적 순수성을 강조하며 '순수 문학'을 강력히 옹호했다. 그는 문학이 정치적 이념이나 사회적 목적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으며, 특히 좌익 문학의 당파적 성격을 비판했다. 그는 문학의 역할이 '인생의 구경(究境)을 탐구하는 문학 정신'에 있다고 보았으며,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양식과 운명의 문제를 형상화하는 데 집중했다. 이러한 문학 철학은 그의 평론인 〈순수 의미〉, 〈신세대 문학 정신〉(1940), 〈순수문학의 진의〉(1946), 〈민족문학론〉(1948)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문학이 현실 비판이나 고발의 도구가 아닌, 인간의 내면과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순수한 예술 영역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3.2. 주요 주제와 문체
김동리 작품의 핵심적인 주제는 '운명'이다. 그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직면했을 때 보이는 저항과 수용의 과정을 깊이 있게 다루었다. 그의 문학은 전통적인 신비주의와 휴머니즘적 사실주의가 혼합된 특징을 보인다. 한국의 전통적인 정신세계가 외래 문화와 충돌하는 양상을 통해 운명의 개념과 우주 속 인간의 위치를 탐색했다.
초기 작품인 《무녀도》(1936), 《역마》(1948), 《황토기》(1939) 등은 전통 신화적 요소를 강하게 차용하여 샤머니즘과 유교, 기독교와 불교 간의 관계, 그리고 숙명론과 자연주의의 대립을 탐구한다. 예를 들어, 《역마》는 방랑자로서의 운명에 저항하다 결국 이를 받아들이는 한 남자의 모습을 그린다. 《무녀도》는 무당인 어머니와 기독교인 아들 사이의 갈등을 묘사하며,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샤머니즘의 몰락과 새롭게 유입된 기독교의 부상을 예견한다.
한국 전쟁 이후 김동리는 작품의 주제를 확장하여 전쟁으로 인한 정치적 충돌과 그로 인한 인간의 고통을 다루기 시작했다. 《흥남철수》(1955)는 실제 흥남 철수 작전을 배경으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이념적 갈등을 파고든다. 《실존무》(1955)는 북한 남자와 남한 여자 사이의 사랑이 남자의 북한 아내가 다시 나타나면서 갑작스럽게 끝나버리는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비극성을 보여준다. 이들 작품에서 작가는 한국의 전통적 요소와 정신적 정체성을 당대 현실에 투영하여 보편화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사반의 십자가》(1957)는 예수 옆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한 남자의 가상 이야기를 통해 정치적 투쟁의 주제를 숙명론적 태도와 서구 문화에 대한 비판과 결합시킨다. 반면 《등신불》(1961)은 《사반의 십자가》에서 제시된 초월적이고 멀리 떨어진 신의 이미지 대신, 인간의 고통을 포용하는 신의 모습을 제시한다.
3.3. 주요 작품
김동리는 시, 단편 소설, 장편 소설, 평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펼쳤다. 특히 그의 단편 소설은 한국 현대 문학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3.3.1. 단편 소설
- 《화랑의 후예》(1935)
- 《산화》(1936)
- 《무녀도》(1936)
- 《바위》(1936)
- 《술》(1936)
- 《산제》(1936)
- 《어머니》(1937)
- 《솔거》(1937)
- 《팥죽》(1937)
- 《허덜풀에》(1937)
- 《잉여설》(1937)
- 《생일》(1937)
- 《황토기》(1937)
- 《찔레꽃》(1937)
- 《소녀》(1940, 검열 삭제)
- 《하현》(1940, 검열 삭제)
- 《윤회설》(1946)
- 《달》(1947)
- 《혈거부대》(1947)
- 《지연기》(1947)
- 《이맛살》(1947)
- 《역마》(1948)
- 《형제》(1949)
- 《범정》(1949)
- 《한내마을 전설》(1950)
- 《남로행》(1950)
- 《인간동의》(1950)
- 《귀환장정》(1950)
- 《피난기》(1952)
- 《상병》(1952)
- 《살벌한 황혼》(1952)
- 《흥남철수》(1955)
- 《실존무》(1955)
- 《밀다원 시대》(1955)
- 《용》(1955)
- 《청자》(1955)
- 《진달래》(1955)
- 《목공 요셉》(1955)
- 《여수》(1955)
- 《고왕생가》(1955)
- 《수로부인》(1955)
- 《강유기》(1959)
- 《당고개 무당》(1959)
- 《자매》(1959)
- 《어떤 고백》(1959)
- 《고우》(1959)
- 《아호량기》(1959)
- 《학정기》(1959)
- 《등신불》(1961)
- 《천사》(1962)
- 《심장 비맞다》(1964)
- 《성문저리》(1965)
- 《송추에서》(1966)
- 《백설가》(1966)
- 《부정》(1966)
- 《까치소리》(1966)
3.3.2. 장편 소설
- 《해방(제1부)》(1949, 동아일보 연재)
- 《사반의 십자가》(1955, 현대문학 연재)
- 《춘추》(1957, 평화신문 연재)
- 《자유의 기수》(1959, 자유신문 연재)
- 《이곳에 던져지다》(1960, 한국일보 연재)
- 《해풍》(1963, 국제신문 연재)
- 《극락조》(1968, 중앙일보 연재)
- 《아도》(1972, 『지성』 연재)
- 《삼국기》(1972, 서울신문 연재)
3.3.3. 시와 평론
- 시
- 〈백로〉(1934,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거미〉(1935)
- 〈바람의 부는 날 하오〉(1935)
- 〈구강산〉(1937)
- 〈행로음〉(1937)
- 〈내 홀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가느뇨〉(1937)
- 〈오월에〉(1947)
- 〈무제〉(1957)
- 〈꽃〉(1957)
- 〈탄생〉(1957)
- 〈추억〉(1957)
- 〈광주에서〉(1959)
- 〈분란〉(1959)
- 평론
- 〈순수 의미〉(1940)
- 〈신세대 문학 정신〉(1940)
- 〈순수문학의 진의〉(1946)
- 〈조선문학의 지표〉(1946)
- 〈문학과 자유의 옹호〉(1947, 『백민』 6,7 합병호)
- 〈민족문학론〉(1947)
- 〈본격문학과 제3세계관〉(1947)
- 〈김동인론〉(1948)
- 〈이효석론〉(1948)
- 〈김소월론〉(1948)
- 〈삼가시인론〉(1948)
- 〈문화구국론〉(1950)
- 〈문학이란 무엇인가〉(1984)
3.4. 번역 작품
김동리의 주요 작품들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국제적으로도 소개되었다.
- 《을화》
- 영어: The Shaman Sorceress, ULHWA the Shaman
- 스페인어: ULHWA, la exorcista
- 독일어: Ulhwa, die schamanin
- 중국어: 乙火
- 프랑스어: La Chamane
- 《사반의 십자가》
- 영어: The Cross of Shaphan
- 프랑스어: La Croix de Schaphan
- 단편 소설 선집
- 영어: A Descendant of the Hwarang (A Ready-made Life: Early Masters of Modern Korean Fiction 수록), Greedy Youth (Collected Short Stories from Korea 수록)
- 일본어 번역 작품
- 《들장미》(신건 역, 1940)
- 《혈거부대》(가지이 타카시 역, 1974)
- 《등신불》(고야마 코레오 편, 1981)
- 《무녀도》(오무라 마스오 역, 1984)
- 《흥남철수》(나가 아키요시 역, 1988)
- 《귀환장정》(강상구 역, 1992)
4. 평가와 영향
김동리는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의 작품과 문학 사상은 후대 작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문학적 업적과 그에 대한 비평, 그리고 한국 문단에 남긴 유산은 다음과 같다.
4.1. 수상 경력
김동리는 그의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아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 1955년 아시아 자유문학상
- 1958년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부문 작품상
- 1958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
- 1967년 3·1문화상 예술 부문 본상
- 1970년 서울시 문화상
-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 1983년 5·16 민족문학상
-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4.2. 비평 및 논란
김동리는 '순수 문학'을 옹호하고 '이념 문학'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며 한국 문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해방 후 좌우 이념 대립이 격화되던 시기에 좌익 문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문학의 정치적 도구화를 경계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당시 문단 내에서 다양한 논쟁과 비평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그의 초기작 중 일부에서 나타났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적 경향이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순수 문학으로 전환되었다는 평가는 그의 문학적 선택에 대한 논의를 야기하기도 했다.
4.3. 문학적 유산
김동리는 한국 현대 문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 감각을 융합하여 한국 문학의 독자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특히 운명, 샤머니즘, 휴머니즘 등 보편적인 주제들을 한국적인 정서로 풀어내어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의 문학 이론은 해방 후 한국 문단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순수 문학의 기틀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며 한국 문학의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고향인 경주에는 박목월과 함께 동리목월문학관이 건립되어 그의 문학 정신과 발자취를 보존하고 있다.
5. 개인적인 삶
김동리는 생애 동안 세 번의 결혼을 했다. 1939년 김월계와 결혼했으나, 1948년 이혼했다. 이후 1953년 동료 소설가인 손소희와 재혼하여 1987년 손소희가 사망할 때까지 부부 관계를 유지했다. 같은 해인 1987년 소설가 서영은과 세 번째 결혼을 했다.
김동리는 김월계와의 사이에서 다섯 아들과 한 딸을 두었다. 장남은 문학평론가 김재홍, 차남은 변호사 김평우이다. 김평우는 정치인 김진만의 사위이며,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당시 박근혜 측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이외에도 김양우, 김치홍, 김기홍 세 아들과 딸 김복실이 있다.
6. 관련 항목
- 한국 문학
- 한국 소설가 목록
- 대한민국예술원
- 동리목월문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