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김간 (金簡진간중국어; ᡤᡳᠨ᠋ᡤᡳᠶᠠᠨ긴기얀만주어, 1721년 ~ 1794년)은 청나라의 관료이자 조선 출신 팔기 한군 정황기 소속의 조선인 정치인이다. 자는 可亭가정중국어이며, 건륭제의 후궁인 숙가황귀비의 친오빠이다. 그는 내무부 총관대신, 사고전서 부총재, 호부 시랑, 공부 상서, 이부 상서 등 청나라의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행정, 재정, 문화 사업 등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사고전서》의 편찬과 베트남 후 레 왕조의 망명객 처리 등 중요한 국가 업무를 담당하며 건륭제 시대의 핵심적인 중신으로 활약했다.
2. 생애 및 가문 배경
김간의 생애는 조선에서의 출신과 청나라 팔기로의 귀부, 그리고 그 가족들의 활동을 통해 당시 조선인들이 청나라 사회에서 어떻게 정착하고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2.1. 출신과 초기 가문
김간의 가문은 원래 조선 의주 출신의 김씨 가문이었다. 그의 증조부인 三達理삼달리중국어는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귀부하였다. 이후 김간의 가문은 청나라의 내무부 소속 정황기 포의(包衣)에 편입되었다. 특히 청나라 초기부터 설치된 고려좌령(高麗佐領)은 내무부 내 유일한 좌령으로, 정황기 포의 제4참령(正黃旗包衣第四參領)에 속했으며, 김씨와 한씨가 가장 두드러진 두 성씨였다. 이들 가문은 군공(軍功)으로 공적을 세웠고, 세습직을 얻으며 만주 귀족들의 우대와 중시를 받아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가문으로 성장했다. 김간의 증조부 삼달리는 장형인 辛達禮신달례중국어와 함께 후금에 귀부하여 통역관으로 일했으며, 홍타이지가 조선을 공략할 때 정황기 포의에 편입되어 고려좌령을 맡았다. 신달례는 고려 제2좌령과 내무부 삼기 화영 총관사를 겸임했다. 김간의 조부인 상명(尚明)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불분명하다.
2.2. 가족 관계
김간의 아버지인 김삼보金三寶김삼보중국어는 상사원경(尙四院卿)을 지냈고, 순시 장로 염정(巡視長蘆鹽政)을 거쳐 무비원경(武備院卿)으로 승진했으며, 공중좌령(公中佐領)을 겸임하며 제3좌령과 제4좌령을 맡았다. 김간의 큰형인 金鼎김정중국어은 남령시위(藍翎侍衛)를 지냈고, 둘째 형인 金輝김휘중국어는 병부 만주 좌시랑을 역임했다. 김간의 여동생은 건륭제의 후궁인 숙가황귀비淑嘉皇貴妃숙가황귀비중국어였다. 김간에게는 缊布온포중국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역시 청나라 관료로 성장하여 몽골 정홍기 부도통, 한군 양홍기 도통, 내무부 총관대신, 병부 시랑, 공부 상서 등을 지냈다.
3. 주요 경력 및 활동
김간은 청나라 건륭제 시기의 핵심 관료로서 다양한 행정 업무와 정책에 참여했으며, 특히 국가적인 문화 사업과 국제 관계 문제 처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1. 관직 임명 및 승진 과정
김간은 1772년 건륭제 37년에 내무부 총관대신總管內務府大臣총관내무부대신중국어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 무영전(武英殿)의 관리를 담당하며 《사고전서》 부총재四庫全書副總裁사고전서부총재중국어를 겸임하여, 서적 편찬과 관원 독려를 총괄했다. 1774년 건륭 39년에는 호부 시랑戶部侍郎호부시랑중국어에 임명되어 전법당(錢法堂)을 관할했으며, 한군 양황기 부도통을 겸임하며 공작령(孔雀翎)을 하사받았다. 1775년 건륭 40년에는 윤달에 화로용 부채를 폐지할 것을 청원하여 건륭제의 재가를 얻었다.
3.2. 주요 행정 및 정책 참여
1778년 건륭 43년, 건륭제는 김간에게 《사고회요四庫會要사고회요중국어》 편찬을 주관하게 했으며, 공부 상서工部尚書공부상서중국어 직무를 대행하게 했다. 같은 해, 그는 성경(盛京)으로 파견되어 성경 장군 홍상(弘賞)을 도와 국고 부족 사태를 조사했으며, 국고를 횡령한 라사례(拉薩禮)와 이륜(怡倫) 등을 법에 따라 처벌했다. 건륭제가 동순(東巡) 중 성경의 많은 성벽이 무너진 것을 발견하자, 그는 군기대신들과 함께 수리 비용을 측정하고 예산을 할당하는 업무를 맡아 공부의 업무를 일시적으로 관리했다. 1781년 건륭 46년에는 정식으로 공부를 관리하게 되었다. 1783년 건륭 48년에는 공부 상서로 승진했으며, 한군 양황기 도통직을 계속 겸임했다.
1784년 건륭 49년, 김간은 경사(京師) 및 주변 지역의 수로 통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疏浚(소준) 방법을 사용했다. 1785년 건륭 50년에는 천수연(千叟宴)에 참석했으며, 얼마 후 《사고전서》가 완성되자 공로를 인정받았다. 같은 해, 건륭제는 유용(劉墉)과 덕보(德保)에게 명하여 명나라의 13개 능을 보수하고, 죽사릉(築思陵)의 월대(月臺)를 추가하며 향전(享殿)과 궁문(宮門)을 확장하도록 했다.
3.3. 베트남 망명객 관련 업무
1790년 건륭 55년, 안남의 후 레 왕조 마지막 황제인 레 찌에우 통Lê Chiêu Thống레 찌에우 통베트남어이 경성으로 망명하자, 건륭제는 그와 그를 따르는 망명객들을 한군 양황기 안남 좌령(安南佐領)에 편입시켰다. 당시 한군 양황기 도통으로 재직 중이던 김간이 이들을 팔기에 편입시키는 일을 총괄 담당했다. 1791년 건륭 56년에는 레 찌에우 통을 따르던 신하인 황익효(黃益曉)와 여광제(黎光霽) 등이 안남으로 귀국을 희망하자, 건륭제는 김간과 다른 장수들에게 그들을 호송하여 귀국시키는 임무를 맡겼다. 1792년 건륭 57년, 김간은 이부 상서吏部尚書이부상서중국어로 자리를 옮겼다.
4. 사망
김간은 1794년 건륭 59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건륭제는 김간의 죽음에 애도하는 조서를 발표하고, 황손인 면근(綿勤)에게 김간을 제사 지내도록 했다. 김간은 사망 후 건륭제로부터 '근각'(勤恪)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았다.
5. 사후 평가 및 영향
김간은 청나라 건륭제의 신임을 받으며 중요한 직책을 두루 거쳤던 인물로, 그의 죽음은 황실의 애도 속에 이루어졌으며, 가문에는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5.1. 사후 추모 및 명예
김간이 사망한 후, 건륭제는 그를 추모하는 특별한 의례를 지시했다. 황손인 면근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한 것은 김간에 대한 황실의 깊은 애도와 예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근각'이라는 시호는 그의 성실함과 엄격함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이는 당시 청나라 관료 사회에서 매우 명예로운 일이었다.
5.2. 가문의 변화
김간의 사망 후인 1795년 가경제 원년에 김씨 가문은 성씨를 금가ᡤᡳᠨᡤᡳᠶᠠ긴기야만주어 (金佳)로 변경하고, 소속 팔기도 한군 정황기에서 만주 정황기로 이적하였다. 이러한 성씨 변경과 팔기 이적은 김씨 가문이 단순한 조선인 귀부 가문에서 벗어나 만주족의 귀족 계층으로 완전히 동화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청나라 사회 내에서 그들의 지위와 정체성이 더욱 확고해졌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