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권상하의 삶은 학문적 탐구와 정치적 격변이 교차하는 조선 후기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는 스승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하며 노론의 핵심 인물로 성장했고, 만동묘 설립 등 주요 활동을 통해 스승의 유지를 실천했다.
1.1. 어린 시절과 학문 수련
권상하는 1641년 사헌부 집의를 지낸 권격(權格권격중국어, 1620~1671)의 아들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유학자인 남동생 권상명(權尙明권상명중국어, 1652~1684)과 권상유(權尙游권상유중국어, 1656~1724)가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자질을 보여 시남(市南) 유계(兪棨유계중국어)의 칭찬을 받았다. 이후 유계, 송시열(宋時烈송시열중국어), 송준길(宋浚吉송준길중국어)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웠으며, 특히 송시열의 총애를 받아 그의 수제자이자 학문적 적장자로 불렸다. 그의 동생 권상유 또한 송시열과 송준길에게서 배우다가 이후 권상하의 문하에서도 수학하게 된다.
1660년(현종 1년) 19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어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했으나, 1659년(효종 10년) 효종의 국장 기간 중 자의대비의 상복 문제로 발생한 예송 논쟁으로 스승 송시열이 덕원부(德源府)로 유배되자 관직 진출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할 것을 다짐했다. 부모의 3년상을 마친 뒤에는 송시열을 따라 화양(華陽)에서 사서(四書), 계몽(啓蒙), 계사(繫辭), 홍범(洪範) 내편(內篇) 등을 강론하며 학문에 매진했다.
1.2. 정치 활동과 관직
권상하는 학문 연구에 전념하고자 관직을 사양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여러 차례 중요한 관직에 임명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668년 스승 송시열이 남인 좌의정 허적(許積허적중국어), 남인 거두 윤휴(尹鑴윤휴중국어), 외척 김석주 등과의 불화로 우의정을 사직하자, 그는 송시열의 상소를 받지 말고 유임시킬 것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1672년에는 스승 송준길의 임종을 지켰고, 그의 3년상을 마쳤다. 1674년 예송 논쟁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송시열의 죄를 묻는 남인 유생들의 상소가 계속되자, 권상하는 스승 송시열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린 뒤 낙향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후 공릉 참봉(恭陵參奉)을 시작으로 순릉 참봉(順陵參奉),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 공조 정랑(工曹正郞) 등을 거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발탁되었다. 이어서 장령(掌令), 집의(執義) 등을 지내고,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 시강원 진선(侍講院進善), 종부시정(宗簿寺正) 등을 역임했다. 송시열과 김수항(金壽恒김수항중국어)의 사후에는 그들의 유지를 받들어 단종의 묘호를 회복하고 복권시킬 것, 그리고 사육신, 생육신 외에도 단종을 위해 순절한 신하들의 충의를 현창하고 포상할 것을 여러 차례 상소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했으나, 그는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1698년(숙종 24년) 특별히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승진했고,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어 세자시강원 찬선(贊善)과 성균관 좨주를 겸했다. 1701년 희빈 장씨의 취선당 저주 사건으로 무고의 옥이 터져 남인이 완전히 몰락했을 때도 그는 출사하지 않고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1703년 세자시강원 찬선으로 나갔다가 1704년 특명으로 호조 참판으로 승진했다. 그해 이조참판, 찬선을 거쳐 1705년 관작을 사퇴하고 물러났는데, 바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이때부터 1716년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1712년 한성부 판윤에 이어 이조판서를 역임했고, 1717년 의정부좌찬성으로 특진하고 이어 우의정이 되었다. 그 뒤 좌의정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1721년(경종 1년) 경종 즉위 초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1.3. 학문 연구와 사상
권상하는 이이(李珥이이중국어)와 성혼(成渾성혼중국어)을 개조로 하고 김장생(金長生김장생중국어)과 김집(金集김집중국어)을 거쳐 송시열에게 계승된 기호학파의 지도자로서,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기발이승일도설중국어)"을 지지하며 이를 정론으로 삼았다. 그는 정호(程顥정호중국어)와 주희(朱熹주희중국어)의 서적을 교정하고 번역하여 보급하는 데 힘썼으며, 송시열의 영향을 받아 여성들에게도 사자소학과 사서삼경의 한글 번역본을 인쇄하여 보급했다.
그는 주로 정치 현실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선배 유학자들인 서경덕, 이황, 기대승, 이이(李珥이이중국어), 성혼(成渾성혼중국어) 등으로부터 제기되던 조선시대 성리학적 기본 문제에 대하여 연구하고 규명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동시에 남인과 소론의 학문을 이단이라고 공격하여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1.3.1. 인성과 물성의 상이론
권상하는 인성(人性인성중국어)과 물성(物性물성중국어)의 동이논쟁(同異論爭동이논쟁중국어), 즉 호락논쟁이 제자 이간(李柬이간중국어)과 한원진(韓元震한원진중국어) 사이에 제기되자 오래 고민하던 중 한원진의 편을 들었다. 그는 '인성(人性인성중국어)이 물성(物性물성중국어)과 다른 것은 기(氣기중국어)의 국(局국중국어) 때문이며, 인리(人理인리중국어)가 곧 물리(物理물리중국어)인 것은 이(理이중국어)의 통(通통중국어) 때문'이라고 한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이통기국중국어)설을 들어 한원진의 상이론(相異論상이론중국어)에 동조했다.
인성(人性인성중국어)과 물성(物性물성중국어)은 서로 상이한 것이며 인성(人性인성중국어)이 물성(物性물성중국어)을 통제해야 한다고 확신한 그의 주장은, 본성을 후천적인 기질의 다름에 따라 달리할 수 있는 것임을 주장하여 동물성으로부터 분별하고 보호하려는 데 있었다. 본성의 문제를 물성(物性물성중국어)과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태도는 인성론이 자연물에까지 확대된 형이상학적 전개로서, 이황과 이이 이래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발전상을 보여준다. 또한 17세기 이후 성리학이 예학(禮學예학중국어)에 의해 구체적인 사회 규범으로써 경직되어가는 학문 풍토에서 인성·물성 상이론(相異論상이론중국어)의 제기는 예학적 학문 이론을 활성화하고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입장은 기호학파가 호론파와 낙론파로 양분되는 계기가 되었다.
1.4. 스승 및 동시대 인물과의 관계

권상하는 유계(兪棨유계중국어), 송시열(宋時烈송시열중국어), 송준길(宋浚吉송준길중국어)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특히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계승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송시열의 적통이라는 평을 들었다. 1672년 스승 송준길의 임종을 지켰고, 1689년 송시열이 국문을 받으러 가다가 사사당할 때는 스승의 임종을 지켰다. 두 스승이 죽은 뒤에는 3년상을 마쳤다.
그는 일생 동안 스승 송시열의 정적이었던 허목(許穆허목중국어)과 윤휴(尹鑴윤휴중국어)를 적으로 여겼다. 특히 송시열의 문하에서 함께 배운 윤증(尹拯윤증중국어)과는 처음에는 교류했으나, 회니시비와 윤선거(尹宣擧윤선거중국어)의 묘비문 문제로 윤증과 송시열이 갈라서자 윤증과 절교를 선언하고 그를 적으로 여기며 공격했다.
1715년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와 유계의 공저였으나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유계의 손자 유상기 사이에 저작자 논쟁이 일어났을 때, 권상하는 서문을 써주면서 유계의 저술이라고 밝혀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에 그는 윤증이 스승을 배신했다며 그를 맹렬히 공격했다. 이 사건 이후 권상하는 윤증과 완전히 원수가 되었다.
그는 송시열의 비문을 찬하면서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는 내용을 비문에 기록했다. 이에 소론계 유생 유규(柳奎유규중국어) 등 8백여 명의 성균관 소론계 유생들과 사간원대사간 이관명(李觀命이관명중국어), 홍문관수찬 어유구(魚有龜어유구중국어) 등 소론 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받았으나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윤휴를 지칭할 때마다 항상 적휴(賊鑴적휴중국어), 참적(斬賊참적중국어)이라 불렀고, 허목을 지칭할 때는 독물(毒物독물중국어), 독극물, 흉목(凶穆흉목중국어)이라 불렀으며, 이러한 표현을 공문서와 다른 사람의 묘지명, 묘갈명, 신도비문 등에서도 사용했다.
또한 사계 박세당(朴世堂박세당중국어)이 주자(朱子)의 사서육경에 독자적인 주석을 달자 그는 이를 공격하며 박세당과 논쟁했다. 이경석의 묘갈명에서 송시열을 불상인(不詳人)이라고 비평한 박세당을 성토하고, 노론 언관들을 시켜 박세당에 대한 공격 여론을 주도했다. 이경석의 비석 문제를 걸고 넘어지는 가운데 이경석의 손자와 갈등하기도 했다.
권상하는 이단하(李端夏이단하중국어), 박세채(朴世采박세채중국어), 김창협(金昌協김창협중국어) 등과 교유하며 학문적 교류를 이어갔다.
1.5. 주요 활동 및 업적
권상하는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계승자로서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여러 중요한 활동을 수행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스승 송시열이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국문받으러 상륙하자, 권상하는 송시열의 다른 문도들을 이끌고 광양으로 내려가 그를 맞이했다. 이후 스승 송시열의 한성부로 가는 길을 도보로 동행했다. 그러나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되자, 권상하는 그곳까지 가서 스승 송시열에게 눈물로 이별을 고하고, 스승의 의복과 책을 유품으로 물려받으며 그의 유지를 계승했다.
송시열이 사사되기 직전 그에게 남긴 유언은 "내가 일찍이 아침에 도(道)를 깨닫고 저녁에 죽기를 기대하였는데, 지금 끝내 도를 깨닫지 못한 채 죽게 되었다. 앞으로는 오직 치도(致道치도중국어)만 믿는다.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위주로 삼고 사업은 마땅히 효종(孝宗효종중국어)의 대의(大義대의중국어)를 위주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또한 그에게 결별을 고하는 편지에서 '곧을 직(直직중국어)' 자의 의의를 거듭 강조하며 유도(儒道)의 맥을 이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송시열의 상에 3년복을 입고 3년상을 마친 권상하는 스승의 유언을 받들어 청주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만동묘중국어)를 세워 명나라의 신종(神宗신종중국어)과 의종(毅宗의종중국어)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는 만동묘에 명나라 신종을 제향하여 임진왜란 때 파병을 한 은혜에 보답하는 의리(義理)를 다하고, 명나라 의종(숭정제)을 추가 배향하여 나라가 망하면 국왕이 죽음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도(正道정도중국어)를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또한 숙종의 특명을 받고 명나라의 임진왜란 파병에 감사하는 대보단(大報壇대보단중국어)을 세워 명나라 장병들의 넋을 기렸다. 만동묘는 이후 화양동 서원으로 발전하여 세도정치 이전까지 집권 노론의 인재 양성 산실 역할을 했다.
1.6. 은거 생활과 후학 양성
1674년(숙종 즉위) 이후 권상하는 관직 진출을 단념하고 청풍의 산중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며 제자들을 모아 유학을 강론했다. 1686년 10월에는 한수재(寒水齋한수재중국어)를 건설하고, 11월에는 열락재(悅樂齋)를 지어 성리학 강학에 힘썼다.
송시열의 제자들 가운데는 민정중(閔鼎重민정중중국어), 민시중(閔蓍重민시중중국어), 김수항(金壽恒김수항중국어), 민유중(閔維重민유중중국어), 김창협(金昌協김창협중국어), 김익훈(金益勳김익훈중국어), 송규렴(宋奎濂송규렴중국어), 윤증(尹拯윤증중국어) 등 저명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나, 권상하는 윤증이 송시열과 결별한 이후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사문지적전중국어)'으로 불릴 정도로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 이러한 학파적 위치로 인해 그는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문하에서 수백 명의 제자를 배출했는데, 특히 이름이 알려진 제자로는 한원진(韓元震한원진중국어), 이간(李柬이간중국어), 윤봉구(尹鳳九윤봉구중국어), 이이근(李頤根이이근중국어), 현상벽(玄尙璧현상벽중국어), 최징후(崔徵厚최징후중국어), 채지홍(蔡之洪채지홍중국어), 성만징(成晩徵성만징중국어) 등이 있으며, 이들을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강문팔학사중국어)'라 부른다. 그의 학통은 외암 이간, 남당 한원진, 홍계희(洪啓禧홍계희중국어), 도암 이재(李縡이재중국어), 임성주(任聖周임성주중국어) 등으로 이어졌다.
1.7. 말년과 최후
권상하는 말년에도 학문과 관직을 오가며 활동했다. 1703년 세자시강원 찬선에 임명되고, 이듬해 호조참판이 되었다가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1705년 이조참판에 이어 찬선이 되고 이후 1716년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했다. 1712년 한성부 판윤에 이어 이조판서, 1717년 의정부좌찬성에 이어 우의정‧좌의정, 1721년(경종 1)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1717년 병환으로 요양 중 온양의 온천에 가서 목욕하던 중 갑자기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이에 그는 바로 괴산(槐山)의 시골집으로 나아가 머물면서 상소를 올려 놓고 처분을 기다렸는데, 숙종이 우대하는 비답(批답)을 내리고 사관을 명하여 같이 오라고 명했다. 그가 계속 사양하니 숙종은 그를 우의정에 임명하려고, 일부러 '관직의 사양을 허락하고 백의(白衣백의중국어)의 신분으로 들어와 볼 수 있다' 하는 등 특별히 예우했다. 이에 그는 할 수 없이 '임금이 행궁(行宮)에 갈 때 호위하고 수행하는 의의'에 따라 융복(戎服)을 입고 상경하여 숙종을 알현(謁見알현중국어)했다.
숙종이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앞으로 가까이 오도록 하여 머물러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 뒤 백성을 잘 다스리어 편안케 하는 방도에 관해 질문하자, 그는 "천하의 일은 임금의 마음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고 마음을 다스리는 요점은 또한 '곧을 직(直직중국어)'자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신의 스승 송시열(宋時烈송시열중국어)이 임종(臨終임종중국어)할 때 또한 이것으로 문인(門人문인중국어)들에게 훈계하였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어서 우암 송시열이 견지하던 춘추대의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면서 숙종에게 효종의 뜻을 계승할 것을 권면했다. 또한 "전하(殿下)께서는 춘추가 많다는 이유로 일을 하려는 뜻을 게을리하지 마소서. 옛날 위 무공(衛武公)은 나이 90에도 억계(抑戒억계중국어, 신중히 하여 빈틈없이 경계하라는 뜻)의 시(詩)를 지었습니다."라고 하니, 숙종이 안색을 바꾸고 가상히 받아들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관직을 사양하는 상소를 남기고 곧바로 출발하여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숙종은 다시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승진시켜 임명했으나 또한 극력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717년 아들 권욱(權煜권욱중국어)의 죽음을 겪었다. 1721년(경종 1년) 경종 즉위 초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그는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간결하고 힘이 넘쳤다. 그해 8월 29일에 향년 8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관학(館學관학중국어)의 유생(儒生유생중국어)들이 모두 신위(神位신위중국어)를 모신 곳으로 달려가 곡(哭곡중국어)했고 상복(喪服상복중국어)을 입은 문인(門人문인중국어)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2. 저서
권상하는 여러 문집과 작품을 남겼으며, 그의 사상과 학문적 깊이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 《한수재집》(寒水齋集한수재집중국어)
- 《삼서집의》(三書輯疑삼서집의중국어)
- 《기백이태연표》(箕伯李泰淵表기백이태연표중국어)
- 《형참권극화표》(刑參權克和表형참권극화표중국어)
- 《부사과이숙표》(副司果李塾表부사과이숙표중국어)
3. 개인사
권상하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 조부: 권성원(權聖源권성원중국어, 1602 ~ 1662)
- 조모: 강선여(姜善餘강선여중국어)의 딸 진주 강씨
- 부친: 권격(權格권격중국어, 1620 ~ 1671)
- 외조부: 이초로(李楚老이초로중국어, 1603 ~ 1678)
- 외조모: 전첨(典籤) 변제원(卞悌元변제원중국어)의 딸 밀양 변씨
- 모친: 함평 이씨(咸平李氏함평 이씨중국어, 1622 ~ ?)
- 여동생: 권계강(權季姜권계강중국어, 1657 ~ ?)
- 남동생: 권상명(勸尙明권상명중국어, 1652 ~ 1684)
- 남동생: 권상유(權尙游권상유중국어, 1656 ~ 1724)
- 여동생: 권차강(權次姜권차강중국어, 1663 ~ ?)
- 부인: 군수 이중휘(李重輝이중휘중국어)의 딸 전주 이씨
- 아들: 권욱(權煜권욱중국어, 1658 ~ 1717)
- 손자: 권양성(權養性권양성중국어, 1675 ~ 1746)
- 손자: 권정성(權定性권정성중국어)
- 손녀: 이사휘(李思輝이사휘중국어)의 처
- 아들: 권욱(權煜권욱중국어, 1658 ~ 1717)
4. 사후 평가 및 유산
권상하는 비록 성균관문묘에는 종사되지 못했으나, 우암 송시열(宋時烈송시열중국어)의 학통을 계승한 정통으로 평가되었다. 그의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손동리에 안장되었으며, 묘소 앞에는 먼저 사망한 아들 권욱(權煜권욱중국어)의 묘소가 있다.
그의 사후, 이이(李珥이이중국어)와 성혼(成渾성혼중국어), 김장생(金長生김장생중국어), 송시열을 계승한 노론 학파의 정통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호락논쟁으로 노론 학통이 낙론(경기)과 호론(충청)으로 분파된 뒤에도 그의 제자 이간(李柬이간중국어)은 그를 스승으로 각별하게 받들어 기호학파의 정통으로 존숭되었다. 그는 충주의 누암서원(樓巖書院누암서원중국어), 청풍의 황강서원(黃岡書院황강서원중국어), 정읍의 고암서원(考巖書院고암서원중국어), 보은의 산앙사(山仰祠산앙사중국어), 성주(星州)의 노강서원(老江書院노강서원중국어), 예산의 집성사(集成祠집성사중국어), 송화의 영당(影堂영당중국어) 등에 배향되었다. 기호학파로는 송준길과 함께 영남 지역의 사당에 배향된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망 직후인 1721년, 노론의 영수로 지목되어 소론 신치운(申致雲신치운중국어)의 상소로 관작이 삭탈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1724년 영조 즉위 후 복관되고 치제(致祭치제중국어)하도록 하였으며, 그해 시장(諡狀시장중국어)을 심의하지 않고 바로 문순(文純문순중국어)의 시호를 내렸다. 1979년 그의 저서 《한수재집》이 양장으로 영인, 간행되었다.
권상하는 조선 후기 성리학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나, 동시에 그의 학문적, 정치적 입장은 당시 사회의 당쟁을 심화시키고 학문적 교조화를 초래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적 평가도 따른다. 특히 송시열의 죽음을 순교로 해석하고, 윤증, 윤휴, 허목 등을 맹렬히 비판하며 노론의 정통성을 수호하려 한 그의 노력은 노론과 소론 간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켰다. 그의 학문적 깊이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당파적 대립 속에서 그의 유산은 학문적 발전과 함께 사회적 분열의 한 축을 형성했다는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5. 관련 항목
- 권상유
- 김수항
- 김수흥
- 김익훈
- 김장생
- 김집
- 김창협
- 김춘택
- 김만기
- 김만중
- 대보단
- 만동묘
- 민암
- 민유중
- 민정중
- 민종도
- 박세당
- 박세채
- 성수침
- 성혼
- 송갑조
- 송시열
- 송이창
- 송준길
- 예송
- 윤선도
- 윤선거
- 윤증
- 윤휴
- 이간
- 이이
- 주자학
- 허목
- 허적
- 홍우원
- 한원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