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년 11월 3일 ~ 1701년 11월 9일)는 조선 숙종의 빈이자 제20대 왕 경종의 생모이다. 본명은 장옥정(張玉貞)이며, 본관은 인동 장씨이다. 중인 계급 출신으로 궁녀의 신분에서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 후 사사(賜死)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녀의 생애는 조선 후기 정치사의 격변기인 환국(換局) 시기와 맞물려 있으며, 특히 서인과 남인 간의 치열한 당파 싸움의 중심에 있었다. 숙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권력을 얻었으나, 인현왕후의 폐위와 복위 과정에서 핵심적인 인물로 작용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희빈 장씨는 전통적으로 '조선 3대 악녀' 중 한 명으로 평가되며 권력욕과 질투에 사로잡힌 인물로 비판받아 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는 당시 정치적 상황과 사료의 편향성을 고려하여,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거나 복합적인 인간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그녀의 극적인 삶은 오늘날까지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등 대중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2. 생애
희빈 장씨의 일생은 숙종 시대의 격렬한 당쟁과 밀접하게 얽혀 있으며, 궁중 암투의 상징적인 인물로 남아있다.
2.1. 출생과 성장 배경
장옥정(張玉貞)은 1659년 11월 3일(음력 9월 19일), 한성부 상평방(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역원 봉사(종8품)를 지낸 장형(張炯, 1623~1669)이며, 어머니는 장형의 계실인 파평 윤씨(1626~1698)이다. 그녀에게는 아버지 장형의 전처인 제주 고씨 소생의 이복 오빠 장희식(1640~1718)과 윤씨 소생의 동복 언니 한 명, 동복 오빠 장희재(1651~1701)가 있었다.
장씨의 집안은 비록 문신 사대부 가문은 아니었으나, 역관(譯官)을 배출한 중인 계급으로서 상당한 재력과 사회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할아버지 장응인은 선조 때의 명역관으로 정3품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외할아버지 윤성립은 일본어 역관으로 사역원 첨정(종4품)을 지냈다. 외할머니 초계 변씨는 조선 최고의 갑부 역관으로 유명했던 변승업의 당고모였다. 외삼촌 윤정석은 육의전의 면포 상인으로 상당한 재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당숙부 장현은 효종과 숙종 대에 걸쳐 막대한 부를 쌓은 거물 역관이었다. 이러한 배경은 장씨 집안이 결코 빈궁하거나 천한 가문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장옥정은 당대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그녀의 매력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언급될 정도였다.
2.2. 궁궐 입궐과 초기 활동
장씨의 정확한 입궁 시기는 불분명하나, 어린 나이에 간택되어 궁녀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녀는 인조의 계비이자 숙종의 증조모뻘인 자의대비 조씨를 모시는 대왕대비전의 궁녀로 입궐하였다. 자의대비는 장씨를 각별히 아꼈으며, 훗날 장씨가 출궁되었을 때도 그녀를 돌보도록 주선하는 등 깊은 애정을 보였다.
1680년 10월,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로 승하하자, 장씨는 숙종의 승은(承恩)을 입어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숙종의 어머니인 대비 명성왕후 김씨는 장씨의 출신이 천하고 성품이 극악하다는 이유로 1680년 10월에서 1681년 3월 사이에 그녀를 궁 밖으로 내보냈다. 이는 명성왕후가 장씨가 자신의 친정 가문과 대립하던 남인 세력과 연관되어 숙종에게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또한, 인경왕후 사후 계비로 내정된 인현왕후 민씨를 위해 장씨를 숙종 곁에서 치운 것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출궁된 장씨는 오빠 장희재 부부의 집에서 어머니 윤씨와 함께 지냈다. 당시 그녀가 궁핍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그녀의 당숙부 장현 형제가 유배에서 풀려나 재물을 축적하고 오빠 장희재가 무관으로 재직하는 등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고 보기는 어렵다.
2.3. 후궁으로서의 삶
1683년 명성왕후 김씨가 승하하고, 1685년 그녀의 3년상이 끝나자, 인현왕후 민씨는 숙종의 뜻을 헤아려 장씨의 재입궁을 허락했다. 1686년 2월, 장씨는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
궁으로 돌아온 장씨는 숙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1686년 12월 10일, 숙종은 장씨를 정식 후궁인 종4품 숙원(淑媛)으로 책봉했다. 이는 내명부 수장인 중전의 고유 권한이었던 승은궁녀에게 첩지를 내리는 것을 숙종이 직접 단행한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에 서인과 인현왕후 민씨는 장씨를 견제하기 위해 서인 영수 김수항의 종손녀인 영빈 김씨를 간택 후궁으로 입궐시키고 특별 진봉을 거듭하며 장씨를 압박했다. 인현왕후는 장씨의 교만함을 훈계한다며 매질을 시키기도 했다.
서인들은 장씨를 천재지변의 원인으로 지목하거나 여색을 멀리해야 한다는 이유 등으로 장씨를 궁 밖으로 쫓아낼 것을 수차례 종용했으나 실패했다. 숙종은 장씨를 중궁전과 후궁의 처소가 있는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에 새로운 처소를 마련해주며 그녀를 보호하려 했다.
1688년, 장씨는 정2품 소의(昭儀)로 승격되었고, 같은 해 10월 27일 숙종의 첫 아들인 왕자 윤(昀), 즉 훗날의 경종을 낳았다. 왕실이 그토록 고대하던 원자의 탄생이었으나, 서인들은 자의대비의 국상 중임을 내세워 축하 인사조차 드리지 않았다. 다음 달, 장씨의 생모 윤씨가 숙종의 어명을 받고 옥교(덮개가 달린 가마)를 타고 입궁하려 하자, 지평 이익수를 비롯한 사헌부 관원들이 윤씨를 가마에서 강제로 끌어내리고 하인들을 매질하는 '옥교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당하관 역관의 아내인 윤씨가 옥교를 타는 것이 참람하다는 명분이었으나, 실제로는 장씨에 대한 서인들의 반감을 표출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숙종을 크게 자극하여 훗날 서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의 빌미가 된다.
1689년 1월 11일, 숙종은 왕자 윤에게 원자(元子) 명호를 내릴 뜻을 밝히고, 닷새 후인 1월 15일에 이를 종묘사직에 고했다. 동시에 소의 장씨를 정1품 빈(嬪)으로 책봉하여 후궁 중 최고위인 희빈(禧嬪)으로 삼았다. 서인들은 후궁 소생이 원자가 되는 것에 반대했으나, 숙종은 반대하는 이들을 파직시켰다. 2월 1일, 인현왕후의 외가 친척인 송시열이 원자 정호 철회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진노하여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을 대거 파직하고 남인을 조정으로 불러들여 요직을 교체했다. 이와 함께 숙종은 장씨의 선조 3대(아버지 장형, 할아버지 장응인, 증조부 장수)를 정승으로 추증하고, 외조부 윤성립을 2품 정경으로 추증하며 외삼촌 윤정석에게 관직을 내리는 등 장씨 가문의 위상을 높였다.
2.4. 왕비 책봉과 실각
1689년 5월 2일, 숙종은 기사환국을 단행하여 인현왕후 민씨를 폐서인하고 강제로 출궁시켰다. 숙종은 민씨가 시부모의 계시를 빙자하여 거짓을 고하고, 왕의 육체를 조롱하며, 투기로 국정을 어지럽히고, 궁인들의 당파를 나누어 붕당을 일으켰다는 죄목을 내세웠다. 인현왕후 폐출 후 숙종은 새로운 계비를 간택하지 않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을 것을 선포했다. 이는 후궁 소생의 원자가 왕비 소생의 정통성을 얻게 되는 사건이자, 중인 출신 궁녀가 국모의 자리에 오르는 조선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1690년 10월 22일, 장씨는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었고, 6월 16일에는 원자 윤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690년 7월 19일, 왕비 장씨는 숙종의 차남이자 첫 대군인 성수(盛壽)를 출산했다. 숙종은 대군의 탄생을 매우 기뻐하여 담당 의관에게 종1품 숭록의 위를 제수하려 할 정도였다. 그러나 성수는 태어난 지 100일이 되지 않은 9월 16일에 급사했다. 숙종은 둘째 아들을 잃은 슬픔에 조정 백관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왕비로 책봉된 후 장씨는 두통과 종기 등 지병을 앓았으며, 1694년 후궁으로 강등되기 직전까지 치료를 받았다. 한편, 장씨가 왕비가 된 후 남인 세력이 조정을 장악하고 권력을 남용하자 숙종은 점차 남인과 장씨에게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1693년, 숙종은 숙빈 최씨를 총애하기 시작했는데, 숙빈 최씨는 폐위된 인현왕후를 지지하며 그녀의 복위를 주장했다.
1694년, 서인의 김춘택과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을 꾀하다 발각되자, 남인 영수 민암 등은 이를 기회 삼아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 대규모 옥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숙종은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옥사를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했으며, 남인 핵심 인물들을 유배 보냈다. 이와 동시에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등을 등용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는데, 이를 갑술환국이라 한다.
갑술환국 발발 12일째인 1694년 4월 11일, 숙종은 장희재를 긴급 구속하고, 폐비 민씨의 서궁(西宮, 덕수궁) 입처를 명했다. 다음 날 민씨가 서궁으로 입처하자, 숙종은 민씨가 죄를 뉘우치고 두 자전(장렬왕후, 명성왕후)의 삼년상을 함께 보낸 아내이므로 폐출은 지나친 처사였다며 그녀를 중전으로 복위시켰다. 그리고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는 것은 고금을 통하는 의리"라며 중전 장씨의 왕후새수(王后璽綬)를 거두어 희빈의 옛 작호를 돌리고 거처를 창경궁 취선당으로 옮기라는 비망기를 내렸다. 이로 인해 장씨의 부모인 장형과 윤씨·고씨의 부원군과 부부인 작호는 취소되었다.
2.5. 말년과 죽음
1701년 8월 14일(음력), 오랜 지병을 앓던 인현왕후가 승하했다. 인현왕후의 국상이 준비되는 가운데, 조정 일부에서는 희빈 장씨를 다시 왕비로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1701년 9월, 인현왕후와 함께 노론에 속했던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는 숙종에게 희빈 장씨가 취선당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발고했다.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가 병이 아닌 장씨의 저주에 의해 시해당했다고 주장했다. 인현왕후의 오빠 민진후 형제도 인현왕후가 생전에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한 바 있음을 숙종에게 고했다.
실제로 희빈 장씨는 취선당에 신당을 짓고 굿을 한 사실이 있었다. 그러나 장씨의 측근들은 1699년 세자 윤이 천연두에 걸리자 쾌유를 기원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했다. 세자의 병이 완쾌되었음에도 무당의 말에 따라 신당을 철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숙종은 숙빈 최씨의 발고를 바탕으로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몰래 신당을 차렸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무고의 옥(巫蠱-獄)'이라 불리며, 사건 조사 당시의 편파성과 증거 부족, 고문으로 인한 증언의 신빙성 문제 등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숙종실록》에는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 민씨를 저주한 내용은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숙종은 먼저 제주 유배 중이던 장희재에게 처형을 명하고, 이어서 희빈 장씨에게 자진(自盡)을 명하는 비망기를 내렸다. 대신들이 반대하자 숙종은 한무제의 구익부인의 예를 들며 태자의 어미가 살아있으면 훗날 화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숙종의 나이가 젊으니 한무제와 경우가 다르다며 반대했다.
결국 숙종은 태자방 궁인들의 증언과 장희재의 첩 숙정, 무녀 오례 등에게 고문을 가해 자백을 받아낸 후, 1701년 10월 7일, 후궁이 왕비로 승격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10월 8일, 승정원을 통해 공식적으로 장씨에게 자진을 명했다. 10월 10일, 희빈 장씨는 취선당에서 자진한 것으로 공표되었다. 향년 43세였다.
장씨의 죽음은 《인현왕후전》이나 《수문록》 등 노론의 입장에서 집필된 야사에서는 숙종에 의해 사약(賜藥)을 받고 강제로 사사된 것으로 묘사되지만, 정사 기록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자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숙종실록》에는 숙종이 사약 대신 '공족(公族)의 사죄(死罪)는 목매어 죽인다'는 《주례》의 규정을 언급하며 사사(賜死)가 아닌 자진(自盡)을 명했음을 시사하는 기록이 존재한다.
3. 가계
희빈 장씨의 가계는 역관 집안으로서 조선 시대 중인 계급에 속했지만, 상당한 재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명문이었다.
3.1. 조상
장희빈의 조상은 다음과 같다.
| 구분 | 인물 | 본관 | 생몰년 | 비고 |
|---|---|---|---|---|
| 증조부 | 장수(張壽) | 인동 | 불명 | 추증 영의정 |
| 할아버지 | 장응인(張應仁) | 인동 | 불명 | 추증 우의정, 선조 때 명역관 |
| 할머니 | 남포 박씨(藍浦 朴氏) | 남포 | 불명 | 산학 별제 박심의 딸 |
| 외할아버지 | 윤성립(尹成立) | 파평 | 불명 | 추증 정경, 일본어 역관 |
| 외할머니 | 초계 변씨(草溪 卞氏) | 초계 | 불명 | 갑부 역관 변승업의 당고모 |
3.2. 가족 관계
장희빈의 직계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 구분 | 인물 | 본관 | 생몰년 | 비고 |
|---|---|---|---|---|
| 아버지 | 장형(張炯) | 인동 | 1623년 ~ 1669년 | 사역원 봉사, 추증 옥산부원군 |
| 어머니 | 파평 윤씨(坡平 尹氏) | 파평 | 1626년 ~ 1698년 | 장형의 계실, 추증 파산부부인 |
| 이복 오빠 | 장희식(張希植) | 인동 | 1640년 ~ 1718년 | 역관 |
| 언니 | 장씨(張氏) | 인동 | 불명 | 김지중에게 출가 |
| 오빠 | 장희재(張希載) | 인동 | 1651년 ~ 1701년 | 무과 급제, 내금위, 포도부장 |
| 남편 | 숙종(肅宗) | 전주 | 1661년 ~ 1720년 | 조선 제19대 국왕 |
| 장남 | 경종(景宗) | 전주 | 1688년 ~ 1724년 | 조선 제20대 국왕 |
| 차남 | 이성수(李盛壽) | 전주 | 1690년 ~ 1690년 | 요절 |
4. 평가 및 논란
장희빈은 조선 시대 정치사의 격변 속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되며, 그녀에 대한 시각은 시대와 관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4.1. 역사적 평가
장희빈은 흔히 연산군의 후궁 장녹수,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의 오라버니 윤원형의 첩 정난정과 함께 '조선 3대 악녀' 또는 '조선 3대 요녀'로 불려왔다. 이러한 평가는 주로 그녀의 권력욕, 질투, 그리고 정치적 파벌 싸움에 개입하여 초래한 사회적 혼란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인현왕후전》이나 《수문록》과 같은 야사에서는 그녀를 극도로 악독하고 잔인한 인물로 묘사하며,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시해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평가는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과 인현왕후의 친정 가문(민진원 등)의 시각이 강하게 반영된 결과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조선왕조실록》 또한 영조 시대에 편찬되었는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가 장희빈과 대립 관계에 있었으므로 장희빈에게 불리한 내용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숙종실록보궐정오》와 《승정원일기》 등 다른 사료에서는 장희빈의 '천민 출신설'이나 '조사석과의 사통설' 등이 명확히 허위로 정정되거나 언급되지 않는 등, 전통적인 악녀 이미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내용이 많다.
현대에 와서는 장희빈을 단순히 권력욕에 사로잡힌 악녀로만 볼 것이 아니라, 중인 출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최고 권력에 도전했던 입지전적인 여인이자, 치열한 당파 싸움의 희생양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녀의 삶은 극적이고 비극적인 면모를 동시에 지니고 있어,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4.2. 비판 및 논란
장희빈에 대한 주요 비판과 논란은 다음과 같다.
- 권력욕과 질투**: 숙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후궁에서 왕비로 승격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과도한 권력욕과 다른 후궁, 특히 인현왕후에 대한 질투가 비판의 대상이 된다.
- 주술(저주) 혐의**: 인현왕후의 죽음과 관련하여 신당을 설치하고 저주 굿을 했다는 '무고의 옥' 사건은 그녀의 이미지를 악화시킨 결정적인 요인이다. 비록 현대에는 이 사건의 진실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지만, 당시에는 그녀가 인현왕후를 시해하려 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 정치적 파벌 싸움 개입**: 그녀의 오빠 장희재를 비롯한 친정 식구들이 남인과 결탁하여 조정을 농단하고 반대 세력을 숙청하는 데 깊이 관여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는 기사환국과 갑술환국이라는 대규모 정치적 숙청으로 이어져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
- 아들 경종에 대한 학대 논란**: 일부 야사에서는 장희빈이 아들 경종(이윤)을 심하게 구타하여 그가 후사를 잇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내용이며,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를 간절히 바랐던 장희빈의 입장에서 아들을 해쳤다는 것은 모순된다는 반론이 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장희빈이 당시 조선 사회의 엄격한 신분 제도와 여성에 대한 제약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 했던 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당파 싸움의 격랑 속에서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을 가능성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5. 영향
장희빈의 삶은 당시 조선 사회와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며 문화적 파급력을 보여주었다.
5.1. 정치적 영향
장희빈은 숙종 시대의 주요 정치적 사건인 환국(換局)의 중심에 있었다. 그녀의 입궁과 총애는 서인과 남인 간의 당파 싸움을 더욱 격화시켰고, 이는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이라는 대규모 정치적 숙청으로 이어졌다. 장희빈이 왕비에 오르면서 남인이 집권하고, 그녀의 폐위와 인현왕후의 복위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는 등, 그녀의 신분 변화는 곧 정치 권력의 교체를 의미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파직되거나 유배, 사사되는 등 조선 정치사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
특히, 장희빈의 죽음 이후 숙종이 '빈어(嬪御: 임금의 첩)에서 후비(后妃: 임금의 정실)로 승격되는 일을 금지'하는 법을 반포한 것은 조선 왕실의 후궁 제도와 왕위 계승 질서에 중대한 영향을 미 미쳤다. 이 법은 이후 영조 시대에 '후궁 소생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원칙으로 굳어져, 후궁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한하고 왕비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5.2. 문화적 영향
장희빈의 극적인 삶은 대중문화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묘사되며 대중의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주로 '조선 3대 악녀'라는 이미지로 소비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정치적 희생양으로서의 면모나 비극적인 사랑을 한 여인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장희빈을 소재로 한 주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영화**:
- 1961년 《장희빈》 (배우: 김지미)
- 1968년 《요화 장희빈》 (배우: 남정임)
- 드라마**:
- 1971년 MBC 《장희빈》 (배우: 윤여정)
- 1981년 MBC 《장희빈》 (배우: 이미숙)
- 1988년 MBC 《인현왕후》 (배우: 전인화)
- 1995년 SBS 《장희빈》 (배우: 정선경)
- 2002년 KBS2 《장희빈》 (배우: 김혜수)
- 2007년 KBS1 《HDTV 문학관 -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배우: 이재은)
- 2010년 MBC 《동이》 (배우: 이소연)
- 2012년 tvN 《인현왕후의 남자》 (배우: 최우리)
- 2013년 SBS 《장옥정 사랑에 살다》 (배우: 김태희, 강민아)
- 2015년 MBC 《툰드라쇼》 (배우: 신보라)
- 2016년 SBS 《대박》 (배우: 오연아)
- 예능**:
- 2012년 JTBC 《신화방송》 (출연: 신화 멤버들)
- 2018년 ~ 2019년 SBS 《코미디빅리그》 '장희빈' 코너 (출연: 박나래)
이처럼 장희빈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끊임없이 소비되며, 역사적 사실을 넘어선 상상력의 영역에서 다채로운 모습으로 재창조되고 있다.
6. 묘 및 추모
장희빈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그녀의 묘와 위패는 왕실의 예우를 받으며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6.1. 대빈묘
장희빈의 묘는 '대빈묘(大嬪墓)'라 불리며, 원래 경기도 광주 인장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도시화 개발 계획으로 인해 묘가 도시 확장을 가로막게 되자, 1969년 6월 현재의 서오릉 경내로 이장되었다. 대빈묘는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한 서오릉 내 명릉(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묘)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장희빈의 묘 뒤편에는 큰 바위가 있고, 그 바위를 뚫고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는 장희빈의 기(氣)가 매우 강했음을 보여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부 한국 웹사이트에서는 장희빈이 강인한 여성이었기에, 남자친구를 원하는 젊은 미혼 여성들이 대빈묘를 찾아 참배하면 곧 사랑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고 보고하기도 한다.
장희빈의 장례는 여느 후궁들과 달리 궁에서 주관하고 치러졌으며, 종친부 1품의 예로 받들어졌다. 그녀의 무덤 또한 왕실 종친과 예조참판이 직접 길지를 찾아 조성했으며, 왕과 왕후의 장례에 준하는 파격적인 예우를 받았다.
6.2. 칠궁
장희빈의 위패는 '대빈궁(大嬪宮)'이라는 이름으로 칠궁에 모셔져 있다. 칠궁은 역대 왕들의 생모 중 왕비가 아닌 후궁들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에 위치한다. 대빈궁은 왕후만이 사용하는 원형 기둥 등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데, 이는 장희빈이 한때나마 국모의 자리에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7. 관련 항목
- 숙종
- 인현왕후
- 경종
- 숙빈 최씨
- 장희재
- 서인
- 남인
- 노론
- 소론
- 기사환국
- 갑술환국
- 무고의 옥
- 대빈묘
- 칠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