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궈쑹링은 청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 초기까지의 혼란기에 군인으로서 성장하며 다양한 정치 세력과 교류했다.
1.1. 초기 생애 및 교육
궈쑹링은 1883년(일부 자료에는 1882년으로 기록) 청나라 봉천성 (현 랴오닝성 선양시) 교외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본래 산시성 뤼량시 펀양현 출신이었다. 1905년 22세의 나이로 만주 총독 자오얼쉰이 설립한 봉천 육군소학당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듬해에는 베이징 북부의 명문 군사학교인 보정육군속성학당에 추천받아 진학했으며, 1907년에 졸업 후 청나라 신식 군대인 북양육군 제3진 소속으로 봉천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1.2. 혁명 활동과 초기 군 경력
1909년, 주칭란 장군이 봉천의 위병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궈쑹링은 그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주칭란이 쓰촨성으로 전임하자 궈쑹링도 그를 따라 쓰촨성으로 이동하여 위병 관대(管帶)로 임명되었다. 주칭란이 관할하는 부대들에는 혁명 비밀 단체인 중국동맹회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고, 궈쑹링은 1910년에 동맹회에 가입했다.
1911년 사천보로운동이 발생하여 쓰촨성 동맹회 회원들이 청나라 정부에 대항하여 봉기하고 청두를 포위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궈쑹링은 이 봉기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고, 당시 청두 북부의 대대장이었던 그는 외교적인 방법으로 유혈 사태 없이 봉기를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공화주의에 동조한다는 의심을 받았던 궈쑹링은 쓰촨 총독 자오얼펑에 의해 지휘권을 해제당했으나, 그의 후원자인 주칭란의 중재로 지휘권을 되찾았다. 같은 해 말 신해혁명이 발발하여 쓰촨성으로 확산되면서 쓰촨성은 독립을 선언하고 청두에 '사천 중화군정부'를 수립했다. 이 과정에서 주칭란과 같은 타 지역 출신 장교들이 군정부에서 배제되자, 궈쑹링은 사임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1917년 7월, 쑨원은 북양군벌에 대항하여 호법운동을 선언하고 광저우에 군사 정부를 수립했다. 궈쑹링의 후원자인 주칭란은 쑨원과 연대하여 광둥성 총독 직을 맡았고, 궈쑹링은 스승을 따라 광둥성으로 갔다. 이 시기에 궈쑹링은 광둥, 광시, 후난성 변경 감독청의 참모로 일하며 광둥 군대 대대장을 겸임했다. 젊은 장교로서 그는 쑨원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18년 5월, 군벌들의 압력으로 쑨원이 광저우 군사 정부를 해체하자 궈쑹링은 실망감을 안고 봉천으로 돌아왔다.
1.3. 봉계군벌에서의 성장
봉천으로 돌아온 궈쑹링은 육군대학 동기인 친화 참모장의 추천으로 봉천독군서 중교참모로 임용되었다. 1919년 2월, 장쭤린이 동삼성 육군강무당(東三省陸軍講武堂)을 재건하자 궈쑹링은 전술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장쉐량이 강무당에서 학습하고 있었으며, 궈쑹링의 탁월한 능력과 식견에 깊은 존경심을 표했다. 1920년 봄 장쉐량이 강무당을 졸업하고 봉천군 여단장으로 임명되자, 장쉐량의 추천으로 궈쑹링은 그의 참모장 겸 제2단 단장으로 발탁되었다.
궈쑹링은 참모장으로서 장쉐량의 여단을 훈련시켰고, 이 여단은 곧 봉천군 내에서도 손꼽히는 정예 부대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직환전쟁이 발발하자 궈쑹링은 장쭤린으로부터 직례군벌과의 연합군 선봉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참전했다. 그는 톈진 샤오잔(小站)에서 안휘파의 두 여단을 섬멸하는 큰 공을 세웠고, 이후에도 동북 지역의 비적 토벌에 기여하며 장쭤린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1921년 5월, 장쭤린이 봉천군을 10개 혼성 여단으로 확장하면서 장쉐량은 제3혼성 여단장으로, 궈쑹링은 제8혼성 여단장으로 발탁되었다. 제3여단과 제8여단은 연합 사령부를 구성했으며, 장쉐량은 군대 운영 및 훈련에 대한 실제적인 책임을 궈쑹링에게 위임했다. 1922년 4월, 제1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여 봉천군이 큰 패배를 겪었으나, 장쉐량과 궈쑹링이 이끄는 정예 제3혼성 여단과 제8혼성 여단은 큰 피해 없이 질서정연하게 후퇴할 수 있었다. 이후 장쭤린은 육군정리처를 설치했고, 장쉐량이 참모총장으로, 궈쑹링이 참모총장 대리로 임명되어 군대의 정리 및 훈련을 담당했다. 이때 궈쑹링은 장쭤린에게 한동안 민력을 휴양시키고 내정을 현대화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 장쭤린에 대한 불만과 반란
궈쑹링은 장쭤린의 정책, 특히 양위팅과의 갈등, 자신의 역량에 대한 저평가, 그리고 장쭤린의 친일 정책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점차 불만을 품게 되었다.
2.1. 불만 고조의 배경
1924년 9월, 제2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궈쑹링은 진위군 제3군 부군장 겸 제6사 사단장으로 임명되어 봉천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장쉐량과 궈쑹링은 징위 주둔군 정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진위군 총사령부 참모장(총사령은 장쭤린)이 된 양위팅(楊宇霆)은 궈쑹링을 자신의 최대 정적으로 여겨 그를 제거하려 했고, 양측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또한 궈쑹링은 장쭤린의 전쟁 지속 정책에 대해서도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궈쑹링은 제2차 직봉전쟁 중 이미 펑위샹(馮玉祥)과 연계를 시도하며 장쭤린 타도 계획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25년 10월, 궈쑹링은 군사 시찰을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 그러나 이 방문을 통해 군사적 확장을 계속하는 장쭤린의 뒤에 일본이 있으며, 장쭤린이 일본에 다양한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궈쑹링은 장쭤린과 일본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더욱 키웠다. 같은 달 귀국한 그는 장쉐량의 위임을 받아 톈진에서 제3방면군(3개 군으로 구성)을 조직하고 제10군 군장으로 임명되었다.
11월, 봉천군과 펑위샹이 이끄는 국민군 간의 충돌이 발생하자 장쭤린은 궈쑹링에게 국민군 토벌을 명령했으나, 궈쑹링은 이를 거부했다. 그는 황화강 72열사 중 한 명인 린줘민의 형이자 중화민국 임시약법 제정으로 알려진 린창민(林長民)을 비서장으로 삼고, 장쭤린과 양위팅을 토벌하려 했다. 그러나 린창민은 1924년 『일본인에게 고함』이라는 책을 통해 일본의 대중국 정책을 비판한 바 있어, 궈쑹링 또한 관동군에게 적대적인 인물로 간주되었다. 궈쑹링은 장쉐량까지도 자신의 계획에 참여시키려 했으나, 장쉐량은 궈쑹링의 내전 중단 주장에는 동의했지만 병변 실행에는 반대했다.
2.2. 동북국민군 봉기
장쭤린의 봉천군은 앞서 언급했듯이 펑위샹 휘하의 국민군과 긴장 상태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쑨촨팡, 우페이푸 등 다른 군벌들과도 대립을 이어가고 있었다. 1925년 11월 22일, 궈쑹링은 장쭤린의 하야를 요구하며 병변을 발동하고 '동북국민군'(東北國民軍)의 결성을 선언하며 장쭤린과 양위팅 타도를 목표로 군사 활동을 시작했다. 궈쑹링의 부대는 약 5만에서 7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봉천군 내에서도 가장 정예 부대로 평가받았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장쭤린은 장쉐량을 파견하여 상황을 수습하려 했으나, 궈쑹링은 이를 거부했다. 궈쑹링은 11월 28일 산해관을 공략했으며, 12월 1일 만주로 진입했다. 그는 11월 30일 산해관으로 사령부를 이동하고 친황다오에 주재하는 일본 무관에게 '동북국민군'이 만주로 진주할 것이니 일본군은 엄정 중립을 지켜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12월 7일에는 진저우까지 점령했다. 궈쑹링군의 이러한 맹렬한 공세에 장쭤린은 한때 하야까지 고려했을 정도였다. 궈쑹링의 반란 소식은 중국과 만주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갔고, 평소 친일파들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만주 및 몽골의 몽골족을 비롯하여 식민지배를 받던 민족의 독립운동 세력까지 이에 호응했다.
2.3. 일본군의 개입과 패배
궈쑹링의 동북국민군이 연전연승하며 순식간에 만주를 장악하려 하자, 일본 측은 만주 군벌 교체의 가능성과 동시에 궈쑹링이 펑위샹과 연계하고 중국 국민당의 영향까지 받고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 관동군은 궈쑹링의 의도를 "장쭤린을 축출하고 스스로 그 자리를 차지하여 국민당의 삼민주의를 실현하려 하는 것은 명백하며, 동삼성(만주)을 전란에 휩쓸리게 하고 만주에 소련의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국방 및 만몽 정책에 간과할 수 없는 사태를 초래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남만주철도 사장 야스히로 한이치로도 궈쑹링의 반란 성공으로 인해 "동삼성이 적화운동에 유린되고 만철과 관동주가 존재하지 않는 '자유지대'가 출현하여 일본의 권익이 침해될 것"을 우려했다.
요시다 시게루 봉천 총영사와 아리타 하치로 톈진 총영사를 포함한 일본 외무성 당국자들도 궈쑹링이 만주를 장악하면 국민당의 진출을 초래하여 '적화'의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장쭤린의 세력을 유지시켜 현상 유지를 꾀하는 것이 일본에 이득이 된다고 결정했다. 우가키 가즈시게 육군상 또한 "대국적인 불이익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장쭤린의 존재를 지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제국을 위해 이득"이라고 인식했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일본군은 궈쑹링의 동북국민군이 연전연승하며 순식간에 만주를 장악하려 하자, 궈쑹링에 접근하여 장쭤린 타도에 협조해 줄 테니 이권을 장쭤린과 마찬가지로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궈쑹링은 이미 장쭤린군과의 전투에서 승기를 잡았고 평소 일본 제국주의를 경계하던 터라 일본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일본은 다시 장쭤린에게 접근하여 비밀 조약을 체결했고, 장쭤린은 일본의 만주와 몽골에서의 이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일본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12월 8일, 관동군은 궈쑹링에게 경고를 보내 남만주철도와 그 부속지 20리 이내에서의 작전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이를 통해 장쭤린은 반격을 위한 병력 동원이 가능해졌다. 일본군의 출병과 철도 및 도로 봉쇄로 곤경에 처한 동북국민군은 봉천을 눈앞에 두고 1925년 12월 23일 또는 24일 경 신민툰 일대에서 우쥔성(吳俊陞)과 장쭤린 군대의 공격을 받고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만주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관동군)의 장쭤린 지원이 없었다면 궈쑹링이 패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3. 죽음
1925년 12월 23일 또는 24일, 궈쑹링과 그의 부인 한숙수(韓淑秀)는 전투에서 패배한 후 도주하던 중 체포되었다. 이틀 뒤인 12월 25일, 궈쑹링과 한숙수는 봉천성 랴오중현 백기보(현 신민현 백기보)에서 나란히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궈쑹링은 향년 43세, 한숙수는 향년 35세였다.
4. 평가와 영향
궈쑹링은 공화주의적 이상을 지닌 인물로, 쑨원의 호법운동에 참여했던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장쉐량의 군사 교관으로서 그의 군사적 능력뿐만 아니라 정치적 식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장쉐량은 궈쑹링을 깊이 존경했으며, 이는 훗날 장쉐량이 중국 국민당 및 장제스와 협력하게 되는 배경 중 하나로 작용했다.
궈쑹링의 반란은 군벌 시기 봉천군벌 내부의 권력 갈등과 장쭤린의 친일 정책에 대한 심각한 불만을 표출한 사건이었다. 특히 그의 봉기는 군벌 간의 단순한 권력 다툼을 넘어,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 침략 야욕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관동군의 노골적인 개입은 궈쑹링의 패배를 확정 지으며, 일본이 만주 지역의 지배력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군사력을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궈쑹링의 반란 실패는 봉천군벌의 내부 단결을 약화시켰고, 이후 장쭤린과 장쉐량 간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궈쑹링과 연계했던 펑위샹은 궈쑹링의 죽음 이후인 1926년 1월 초 하야를 선언하고 외몽골을 거쳐 소련으로 피신하게 되면서 군벌 판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궈쑹링의 죽음은 만주 지역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더욱 공고해지는 결과를 낳았으나, 동시에 중국 내부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과 민족주의적 각성을 더욱 고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