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교황 요한 21세Ioannes XXI요한네스 21세라틴어, 본명 페드루 줄리앙Pedro Julião페드루 줄리앙포르투갈어은 1276년 9월 8일부터 1277년 5월 20일까지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었던 제187대 교황이다. 그는 역사상 유일한 포르투갈인 출신 교황이다. (다만 교황 다마소 1세는 현재의 포르투갈 지역에서 태어났으나 포르투갈인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그는 종종 논리학자이자 약초학자인 페트루스 히스파누스Petrus Hispanus페트루스 히스파누스라틴어와 동일시되는데, 이 경우 그는 의사 출신으로는 유일한 교황이 된다. 요한 21세는 실제로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교황 중 20번째이지만, 교황 요한 20세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21세로 불린다. 그의 짧은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제2차 리옹 공의회의 교령을 번복하고, 십자군 원정을 시도하며, 동방 교회와의 일치를 추진하고, 기독교 국가들 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그의 학문적 배경은 중세 유럽의 지성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페드루 줄리앙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매진하여 다양한 분야를 탐구하며 학자로서의 기초를 다졌다.
페드루 줄리앙은 1210년에서 1220년 사이에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산슈 1세와 아폰수 1세의 재상이었던 줄리앙 파이스와 그의 아내 모르 멘데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리스본 대성당의 주교 학교에서 학업을 시작했으며, 이후 파리 대학교에 입학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가 몽펠리에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2.1. 교육 및 학문적 탐구
그가 어디에서 공부했든, 그는 의학, 신학, 논리학, 물리학, 형이상학,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 연구에 집중했다. 그는 전통적으로 논리학과 약리학 발전에 중요한 인물인 의학 저술가 페트루스 히스파누스와 동일시된다. 페트루스 히스파누스는 1240년대에 시에나 대학교에서 가르쳤다.
3. 학자로서의 경력
페드루 줄리앙은 교황이 되기 전, 페트루스 히스파누스라는 이름으로 학문적 활동을 펼쳤으며 중세 유럽 지성사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의 저술 활동은 특히 논리학과 의학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3.1. 논리학과 "논리학 총론"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논리학 총론Summulae Logicales숨물라에 로기칼레스라틴어》은 이후 3세기 동안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대학 교재로 사용되었다. 이 책은 "유럽 13세기에 간행된 가장 전형적인 스콜라 논리학서"로 평가되며, "중세 대학의 교양 과정에서 수백 년간 사용되었고 수백 판을 거듭한 저명한 교재"로, 오늘날 중세 유럽 학문의 기초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서적으로 여겨진다.
3.2. 의학 및 기타 저술
페드루는 의학자로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가난한 자의 보물Thesaurus Pauperum테사우루스 파우페룸라틴어》이라는 의학 저서를 남겼는데, 이 책은 성교 전후의 피임법과 월경을 유도하는 방법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지침서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의 설명 중 상당수는 현대 연구에서도 효과적인 것으로 평가되어, 고대 여성들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출산을 조절했다는 견해가 최근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의 보물》의 저자가 요한 21세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또한 그는 눈에 대한 연구를 담은 다른 의학 저술도 남겼다.
4. 교회 및 왕실 봉사
학자로서 명성을 얻은 후, 페드루 줄리앙은 리스본으로 돌아와 포르투갈 왕국의 아폰수 3세 국왕의 교회 관련 문제에 대한 고문이자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그는 기마랑이스의 수도원 부원장이 되었다. 그는 브라가 대교구의 수석부제였으며, 리스본의 대주교가 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대신 그는 리스본 학교장이 되었다. 페드루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재임 초기에 그의 주치의로 발탁되었다.
5. 추기경 시절
1273년 3월, 페드루는 브라가 대주교로 선출되었으나, 실제로 그 직책을 맡지는 않았다. 대신 1273년 6월 3일,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 의해 투스쿨룸의 주교급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6. 교황 재임
교황 요한 21세의 재임 기간은 짧았지만, 그의 선출 과정부터 주요 정책, 그리고 교황청 행정 전반에 걸쳐 중요한 측면들을 보여주었다.
6.1. 선출 및 재임
교황 하드리아노 5세가 1276년 8월 18일 선종한 후, 페드루 줄리앙은 9월 8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대관식은 일주일 후인 9월 20일에 거행되었다. 그는 1277년 5월 20일 선종할 때까지 교황직을 수행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8개월에 불과했다.
6.2. 주요 정책 및 활동
요한 21세의 짧은 재임 기간 동안 그가 행한 몇 안 되는 중요한 조치 중 하나는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통과된 콘클라베에 관한 교령을 번복한 것이었다. 이 교령은 추기경들이 후임 교황을 선출할 때까지 고립된 장소에 감금하고, 협의가 길어질 경우 음식과 포도주 공급을 점진적으로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요한 21세는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을 시도했고, 동방 교회와의 일치를 추진했으며, 기독교 국가들 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그는 아폰수 3세가 주교 선거에 개입한 것에 대해 그를 파문했으며, 쿠빌라이 칸에게 사절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는 타타르족을 개종시키기 위한 선교를 시작하려고 했으나, 실행에 옮기기 전에 선종했다.
6.3. 교황청 행정 및 영향
요한 21세의 짧은 교황 재임 기간 동안 교황청의 많은 행정은 강력한 추기경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훗날 교황 니콜라오 3세)에 의해 주도되었다. 요한 21세는 외부의 방해 없이 조용한 환경에서 의학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비테르보에 있는 교황궁에 별도의 아파트를 증축했다.
7. 사망
1277년 5월 14일, 교황 요한 21세가 홀로 비테르보 교황궁에 증축한 아파트에 머물던 중 천장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는 잔해 속에서 살아남았으나, 심각한 부상을 입고 5월 20일에 선종했다. 그의 사망은 압궤 증후군의 초기 기록 사례일 가능성이 있다. 그는 비테르보 대성당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무덤은 현재까지도 그곳에 남아있다. 원래의 반암으로 된 석관은 16세기 대성당 개축 중에 파괴되었고, 교황의 조각상이 있는 좀 더 소박한 석재 무덤으로 교체되었다. 19세기에는 살다냐 공작 주앙 카를루스가 교황청 주재 포르투갈 대사로서 필리포 냐카리니가 조각한 새로운 석관으로 교황의 유해를 이장했다. 2000년에는 리스본 시의회 주도로 새로운 석회석 기념비가 건립되었고, 원래의 교황 석상이 그 위에 놓여 익랑의 더 적절한 위치로 옮겨졌다.

8. 유산 및 역사적 평가
요한 21세의 사후에는 그에 대한 다양한 소문과 평가가 뒤따랐다. 특히 그의 학문적 업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문학 작품에서도 언급되었다.
8.1. 문학적 언급 및 사후 소문
그의 사망 후, 요한 21세가 실제로는 강령술사(necromancer)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는 중세 교황들 중 소수의 학자들에게 종종 제기되던 의혹이었다 (예: 교황 실베스테르 2세). 또한 그의 죽음이 이단적인 논문을 완성하는 것을 막기 위한 신의 행위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업적은 높이 평가받았으며, 단테 알리기에리는 그의 저서 《신곡》의 '천국편'에서 다른 위대한 종교 학자들의 영혼과 함께 '피에트로 스파노'를 태양의 천구에 배치하며 긍정적으로 언급했다.
8.2. 학문적 영향력 및 평가
그의 논리학 저술인 《논리학 총론》은 중세 대학에서 수백 년간 교재로 사용될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졌다. 이는 중세 유럽 학문의 기초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텍스트로 평가된다. 의학 저술인 《가난한 자의 보물》 또한 당시의 의학 지식에 기여한 바가 크다. 비록 일부 저작의 저자성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그의 지적 유산은 후대 학문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학자로서의 그의 가치는 높게 평가된다.
9.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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