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교황 베네딕토 9세(Benedictus IX라틴어, 1012년경~1056년경)는 로마의 강력한 귀족 가문인 투스쿨룸 백작 가문 출신으로, 본명은 테오필락투스(Theophylactus라틴어)이다. 그는 1032년 10월부터 1048년 7월 사이에 세 번의 교황 재위 기간을 가졌다. 첫 선출 당시 약 20세의 나이로, 역사상 최연소 교황 중 한 명이며, 역사상 유일하게 세 번 교황직을 역임하고, 또한 유일하게 교황직을 매각했던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통치는 스캔들과 논란으로 얼룩졌으며, 동시대인들과 후대 역사가들로부터 도덕적 타락, 성직 매매, 폭력적 행위에 대한 가혹한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베네딕토 9세의 행적은 당시 교황권의 명성을 심각하게 실추시켰으며, 11세기 교황권의 혼란스럽고 부패했던 시대적 배경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2. 초기 생애와 배경
베네딕토 9세의 본명, 출생 시기, 가문 배경 등 그의 초기 삶과 교황 선출 과정에서의 가문의 영향력을 다룬다.
베네딕토 9세의 본명은 테오필락투스이며, 1012년경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대 로마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귀족 가문인 투스쿨룸 백작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의 부친은 투스쿨룸 백작 알베릭 3세였으며, 그는 여러 선임 교황들과 밀접한 혈연 관계를 맺고 있었다.
2.1. 가문 관계와 교황 선출
베네딕토 9세의 가계는 교황직에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선임 교황이었던 교황 베네딕토 8세와 교황 요한 19세의 조카였고, 교황 요한 12세의 종손이었으며, 교황 요한 11세의 고종손이었다. 또한 교황 베네딕토 7세의 육촌 조카였고, 교황 세르기오 3세와도 먼 친척 관계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의 부친인 알베릭 3세는 로마인들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성직 매매를 통해 아들의 첫 교황 선출을 보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032년 10월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당시의 나이는 약 20세였다. 그러나 일부 자료에서는 그가 11세나 12세였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오세르의 성 게르마누스 수도원의 수도사 루퍼트 글라버(Rupert Glaber영어)의 검증되지 않은 증언에 기반한 것이다. 교황 요한 12세와 베네딕토 9세는 가톨릭교회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교황이 된 인물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3. 첫 번째 교황 재위 (1032년-1044년)

베네딕토 9세의 첫 번째 교황 재위 기간은 스캔들과 분파 투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가족의 이익을 위해 다른 로마 귀족들과의 갈등에서 가족의 편을 드는 등 족벌주의적 행태를 보였다. 많은 역사적 사료들은 그가 교황으로서 부적절했다고 묘사하며, 특히 페르디난트 그레고로비우스는 그의 행태에 대해 "사제의 탈을 쓴 지옥의 악마가 베드로좌를 차지하고 불손한 언행으로 교회의 거룩한 신비를 모독했다"고 비난했다. 역사학자 호레이스 K. 맨(Horace K. Mann영어)은 그를 "베드로좌의 수치"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동시대의 주요 비판자들 중 한 명이었던 교황 빅토르 3세는 자신의 저서 『대화록』 제3권에서 "그의 강간, 살인, 그리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폭력과 남색 행위. 교황으로서 그의 삶은 너무나 비열하고, 더럽고, 혐오스러워서,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고 기록했다. 피아첸차의 주교 벤노(Benno영어) 또한 베네딕토 9세가 "많은 추잡한 간음과 살인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또한 베드로 다미아노는 그의 저서 『고모라의 서』에서 베네딕토 9세가 일상적인 남색과 수간을 일삼았으며, 난교를 후원했다고 고발했다.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베네딕토 9세는 신학적으로는 정통 기독교 신앙에 충실한 입장을 유지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 레지널드 레인 풀(Reginald Lane Poole영어)은 이러한 비난들이 격렬한 정치적 적대감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증명보다는 개연성에 따라 믿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풀은 "교황직을 매각하여 스스로 불신을 초래하기 전까지는 그의 비행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은 바가 없으며, 시간이 흐르고 장소가 멀어질수록 그의 인격은 더욱 악화된다"고 언급하며, 베네딕토를 "게으른 교황이자 매우 방탕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면서도, 그에 대한 묘사가 반대파가 득세했던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그에게 친구나 지지자가 없었다는 점을 함께 언급한다.
1036년, 베네딕토 9세는 일시적으로 로마에서 축출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의 도움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로 복귀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이 밀라노의 대주교 헤리베르트(Heribert영어)를 불법적으로 파직하자 황제를 파문하는 등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1044년 9월, 그의 방탕한 생활 방식에 대한 반대 여론이 거세지면서 그는 다시 로마에서 쫓겨났고, 이어서 실베스테르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4. 두 번째 교황 재위 (1045년)와 교황직 매각
1045년 4월, 베네딕토 9세의 지지 세력은 로마로 돌아와 경쟁자였던 실베스테르 3세를 축출하고 베네딕토 9세의 교황 복귀를 허용했다. 이로써 그는 두 번째 교황직을 재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베네딕토 9세는 자신의 입지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사촌과 결혼하기를 원했으며, 결국 1045년 5월 교황직을 사임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자신의 대부이자 경건한 사제였던 요한 그라티아누스(John Gratian영어)와 상의하여, 교황직 선출에 들었던 비용을 보상해준다면 교황직을 양도하겠다고 제안했다. 요한 그라티아누스는 베네딕토 9세에게 거액의 돈을 지불했고, 그 대가로 교황 그레고리오 6세로 인정받아 교황좌에 올랐다. 일본 소식통에 따르면 매각 수익은 금 650 kg 이상에 해당했다고 하며, 다른 소식통은 1,500 '파오'(Pao베트남어)의 금을 받고 교황직을 팔았다고 전한다. 베드로 다미아노는 이러한 변화를 환영하며 새 교황에게 이탈리아 교회의 스캔들을 처리하도록 촉구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베네딕토 9세는 교황직을 매각한 것을 곧 후회했고, 다시 로마로 돌아와 그레고리오 6세를 폐위시키려 시도했다. 이 시기에 실베스테르 3세 또한 자신의 교황권 주장을 다시 내세우면서, 사실상 세 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며 교회가 극심한 혼란에 빠지는 전례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5. 세 번째 교황 재위 (1047년-1048년)와 최종 폐위

베네딕토 9세가 교황직 매각을 후회하고 로마로 돌아온 이후에도 교황권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그레고리오 6세가 진정한 교황으로 인정받는 와중에도, 실베스테르 3세 또한 자신의 주장을 재차 내세웠다. 이에 영향력 있는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알프스산맥을 넘어 개입하여 질서를 회복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인리히 3세는 개입하여 1046년 12월 수트리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에서 베네딕토 9세와 실베스테르 3세는 교황직이 박탈되었음을 선언받았다. 그레고리오 6세의 경우, 그가 베네딕토 9세와 맺은 계약이 성직 매매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사임이 권고되었다. 공의회는 독일인인 클레멘스 2세를 그레고리오 6세의 후임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베네딕토 9세는 수트리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폐위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047년 10월 클레멘스 2세가 사망하자, 베네딕토 9세는 그 해 11월 라테라노 궁전을 장악하며 다시 교황이 되었다. 하지만 1048년 7월, 독일군에 의해 그는 또다시 로마에서 축출되었다. 권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독일 출신인 다마소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보편적으로 그의 정당성이 인정되었다. 베네딕토 9세는 1049년 성직 매매 혐의로 소환되었으나 출두를 거부했고, 결국 파문당했다.
6. 비판과 논란
베네딕토 9세의 교황 재위 기간은 그의 개인적인 행위와 교황권의 부패를 상징하는 수많은 논란과 비판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의 통치는 "스캔들투성이"였으며, 동시대인들과 후대 역사가들로부터 한결같이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그를 비판한 이들 중 한 명인 페르디난트 그레고로비우스는 베네딕토 9세를 "성직자의 옷을 입은 지옥의 악마"에 비유하며, "오만한 행실로 종교의 성스러운 신비를 더럽혔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역사학자 호레이스 K. 맨(Horace K. Mann영어)은 그를 "베드로좌의 수치"라고까지 불렀다.
교황 빅토르 3세는 그의 저서 『대화록』에서 베네딕토 9세의 삶에 대해 "그의 강간, 살인, 그리고 다른 입에 담을 수 없는 폭력과 남색 행위... 교황으로서 그의 삶은 너무나 비열하고, 더럽고, 혐오스러워서,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고 기록하며 극도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피아첸차의 주교 벤노(Benno영어) 또한 베네딕토 9세가 "많은 추잡한 간음과 살인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특히 베드로 다미아노는 그의 유명한 저서 『고모라의 서』에서 베네딕토 9세가 일상적인 남색과 수간을 저질렀으며, 심지어 난교를 후원했다고 고발했다. 그는 베네딕토 9세를 "방탕을 즐기는 자"이자 "사제의 형상으로 위장한 지옥의 악마"라고 묘사하며, 베네딕토 9세가 교황궁인 라테라노 궁전에서 연회와 향연을 벌였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비난들은 당시 교황권의 권위와 도덕성을 심각하게 훼손시켰으며,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역사학자 레지널드 레인 풀(Reginald Lane Poole영어)은 이러한 비난의 신빙성이 당시의 첨예한 정치적 적대감에 의해 좌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며, 시간이 흐르고 장소가 멀어질수록 베네딕토 9세의 인격에 대한 묘사가 더욱 악화되었다고 언급했다. 그는 베네딕토 9세를 "무책임하고 매우 방탕했을 가능성이 있는 교황"으로 보면서도, 그에 대한 이미지가 반대파의 시각에서 그려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도덕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베네딕토 9세가 정통 기독교 신앙에 전적으로 충실한 입장이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7. 말년과 죽음
최종적으로 교황직에서 폐위되고 파문당한 후 베네딕토 9세의 삶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그는 결국 교황좌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교황 레오 9세는 그에게 내려진 파문을 철회했을 가능성도 있다.
베네딕토 9세는 1056년경에 사망하여 이탈리아의 그로타페라타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로타페라타 수도원의 수도원장인 성 바르톨로메오(Bartholomew of Grottaferrata영어)의 기록에 따르면, 베네딕토 9세는 만년에 자신이 교황으로서 저질렀던 모든 죄를 뉘우치고 참회했다고 전해진다. 일부 기록에서는 그가 수도 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고도 하지만, 이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의 사망 시기는 1055년 12월 또는 1056년 1월이라는 설과 1065년경, 심지어는 1085년경까지 다양한 추정치가 존재한다.
8. 역사적 평가와 유산
베네딕토 9세는 일반적으로 가톨릭교회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고 최악의 교황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그의 파란만장하고 스캔들로 가득 찬 통치는 11세기 교황권의 부패와 혼란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진다. 그의 행위, 특히 교황직 매각은 교회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다.
많은 교회 역사가들은 베드로 다미아노와 마찬가지로 그의 도덕적 타락과 부도덕한 행태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당시 로마와 교황권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이 그의 몰락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며, 그의 행동을 이러한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베네딕토 9세의 이야기는 교회 문제에 정치적 개입이 미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사례로 남아 있다. 그의 삶은 성직 매매와 도덕적 타락이 교황권의 명성과 영적 권위에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그의 유산은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동시에 교회의 개혁과 순수성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왜 필요한지 일깨우는 역사적 증거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