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곽광(霍光Huò Guāng중국어)은 전한 중기의 권신으로, 명장 곽거병의 이복동생이자 한 무제의 황후 위자부의 조카이다. 그의 초기 생애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가족 관계와 성장 배경이 그의 후일 경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1. 출생 및 가족 관계
곽광은 하동군 평양현(平陽縣Píngyáng Xiàn중국어, 현재 산시성 린펀시 일대) 출신으로, 아버지 곽중유(霍仲孺)와 그의 정실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복형인 곽거병은 곽중유가 결혼 전 평양후(平陽侯Píngyáng Hóu중국어) 조수(曹壽)의 첩이었던 위소아(衛少兒, 위자부의 언니)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였다. 곽거병은 원정 중 친아버지 곽중유를 만나게 되었고, 이후 곽광을 장안으로 데려와 함께 자라게 했다. 곽광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불분명하나, 이복형 곽거병의 후기 원정 성공 시기에 10대 초반이었던 점을 미루어 기원전 130년대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따르면 곽광은 키가 크고 피부가 희며, 숱이 적고 아름다운 눈썹과 수염을 가진 당대의 미남자로 알려져 있다.
1.2. 초기 경력
곽광의 초기 관직 생활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는 기원전 121년, 이복형 곽거병의 추천으로 10세 무렵에 낭군(郎君), 조관(曹官), 시중(侍中) 등의 직책을 맡으며 관직에 발을 들였다. 기원전 117년 곽거병이 사망한 후에도 곽광은 한 무제의 신임을 계속 받아 봉거도위(奉車都尉)와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승진했다. 기원전 91년에는 중복야(中僕射) 하라(何羅)의 모반 음모를 저지하는 데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이 공로로 박륙후(博陸侯)에 봉해졌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곽광이 기원전 88년경, 즉 한 무제 서거 직전부터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본다.
2. 한 무제 시대의 활동
곽광은 한 무제 치세 말기에 황제의 깊은 신임을 얻어 어린 황태자를 보좌할 핵심 인물로 지목되었다.
기원전 87년 3월, 무제는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막내아들 유불릉(劉弗陵, 훗날 한 소제)을 후계자로 지명하며 곽광에게 어린 황태자를 보좌할 것을 부탁했다. 무제는 곽광을 대사마(大司馬) 대장군(大將軍)에 임명하고, 흉노 출신 관리 금일제(金日磾)와 황실 근위대 사령관 상관걸(上官桀)과 함께 소제의 공동 섭정으로 삼았다. 이들 중 곽광이 실질적으로 정부의 총책임을 맡게 되었다. 무제의 유언에 따라 세 사람은 모두 후(侯Hóu중국어) 작위를 받았으나, 곽광을 비롯한 세 명 모두 이를 사양했다.
3. 한 소제 시대의 섭정 및 권력 장악
한 소제가 즉위한 후, 곽광은 섭정으로서 권력을 공고히 하고 다른 권신들과의 갈등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3.1. 섭정 임명 및 권력 공고화
기원전 87년 한 무제가 사망하고 8세의 어린 소제가 즉위하자, 곽광은 금일제, 상관걸과 함께 공동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곽광은 대사마대장군으로서 이들 중 가장 큰 권한을 행사하며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소제가 스스로 국정을 결정할 수 없었던 기원전 87년부터 기원전 81년까지 6년간, 곽광은 홀로 조정의 모든 업무를 처리하며 나라를 평화롭게 유지했다. 그는 기원전 85년 1월, 박륙후(博陸侯Bólù Hóu중국어)에 봉해지며 공식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3.2. 금일제, 상관걸, 상홍양과의 관계
공동 섭정 체제 하에서 곽광은 금일제와 상관걸과 협력했으나, 기원전 85년 금일제가 사망하자 곽광과 상관걸 사이의 권력 갈등이 심화되었다. 곽광은 자신의 딸을 상관걸의 아들 상관안(上官安)과 결혼시켜 사돈 관계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상관걸은 곽광의 막강한 권한에 질투심을 품게 되었다.
3.3. 딸의 황후 책봉
기원전 84년, 상관걸은 자신의 손녀이자 곽광의 외손녀인 5세의 상관씨(上官氏)를 11세의 소제에게 시집보냈다. 이는 상관걸이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계략의 일환이었으며, 곽광은 처음에는 이를 반대했으나 결국 기원전 83년 4월 상관씨가 황후로 책봉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로 인해 상관걸 일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곽광과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3.4. 상관걸의 모반 시도
기원전 80년, 곽광과 상관걸 사이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상관걸은 소제의 이복형인 연왕(燕王Yān Wáng중국어) 유단(劉旦), 소제의 고모인 악읍공주(鄂邑公主),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관리인 상홍양(桑弘羊)과 공모하여 곽광을 역모죄로 거짓 고발했다. 그러나 곽광을 신뢰했던 소제는 이 고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공모자들은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상관걸과 상홍양을 포함한 대부분의 공모자들은 처형되었고, 유단과 악읍공주는 자살을 강요당했다. 상관걸 일족 중에서는 곽광의 외손녀이자 소제의 황후였던 상관황후(上官皇后)만이 살아남았다. 이 사건 이후 곽광은 소제에게 권한을 돌려주려 했으나, 소제는 여전히 곽광을 신뢰하며 그에게 국정 운영을 맡겼다. 곽광은 대사마대장군으로서 소제의 거의 유일한 고문이자 정치적 멘토 역할을 수행하며, 사면령 발부, 값비싼 대외 전쟁 자제, 유능한 관리 등용 및 승진, 조사 및 재판 없는 처벌 금지, 농업 장려, 기근 방지를 위한 곡물 보존 등을 반복적으로 설득했다. 이로 인해 소제는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4. 창읍왕 폐위와 한 선제 즉위
한 소제 사후, 곽광은 황위 계승에 직접 개입하여 부적격한 황제를 폐위하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렸다.
기원전 74년 6월, 21세의 한 소제는 후사 없이 사망했다. 곽광은 소제의 살아있는 형제들이 황위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숙고 끝에 그는 소제의 조카이자 창읍왕 유하(昌邑王 劉賀)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유하는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소제의 상중에 부적절한 행동을 일삼고 사치와 방탕에 빠졌다. 그는 황궁에 200명의 수하를 데려왔고, 즉위 후에도 음란하고 무도한 행위를 일삼으며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심지어 소제의 궁녀들과 관계를 맺고 황태후의 수레를 노비에게 사용하게 하는 등 황실의 법도를 어지럽혔다. 불과 27일 만에 유하는 1,127가지의 잘못된 행동을 저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곽광은 유하를 폐위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중국 역사상 전례 없는 조치였다. 곽광의 외손녀인 상관황태후(上官皇太后)의 명의로 조서가 발표되었고, 유하는 즉위 27일(일부 기록에는 28일) 만에 폐위되어 왕의 칭호 없이 옛 창읍왕국으로 추방되었다.
적합한 황실 후계자를 찾던 중, 곽광은 다른 고위 관리인 병길(丙吉)의 제안을 받아들여 한 무제의 증손자이자 유거(劉據) 태자의 손자인 유병이(劉病已, 훗날 한 선제 유순(劉詢))를 황제로 옹립했다. 유병이의 할아버지 유거는 무제의 태자였으나, 무고로 인해 죽임을 당했고 그의 자손들은 황실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곽광은 이처럼 황실의 적통이 아닌 인물을 황제로 세우는 파격적인 결정을 통해 한나라의 안정을 도모했다.
5. 한 선제 시대의 활동
한 선제가 즉위한 후에도 곽광은 섭정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유지했으며, 황제와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통치를 이어갔다. 그러나 곽씨 일족의 오만함과 전횡은 결국 몰락의 씨앗이 되었다.
5.1. 황제와의 권력 분점
기원전 73년, 곽광은 선제에게 모든 권한을 돌려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선제는 이를 거절하고 모든 중요한 사안은 곽광에게 먼저 보고된 후 자신에게 상주되어야 한다고 재확인했다. 이는 곽광의 권위와 중요성을 인정한 것이었다. 곽광은 계속해서 대사마대장군으로서 한나라의 정치를 총괄했으며, 선제와 함께 실질적으로 제국의 권력을 분점했다. 그는 황제에게 대사면령을 내리고, 국력을 소모하는 값비싼 전쟁을 지양하며, 유능한 관리를 선발하고 승진시키며, 조사와 재판 없는 처벌을 피하고, 농업을 장려하고 곡물을 비축하여 기근을 예방하도록 조언하는 등 중요한 정책들을 추진했다. 이 시기 한나라는 '소선중흥(昭宣中興Zhāoxuān Zhōngxīng중국어)'이라 불리는 번영기를 맞이하며 국력이 한 문제와 한 경제 시대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5.2. 곽씨 일족의 행적
곽광은 선제 치세에도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누렸으나, 그의 일족은 이러한 권세를 믿고 오만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곽광의 아들 곽우(霍禹)와 조카 곽운(霍雲), 곽산(霍山, 곽거병의 손자)은 조정의 핵심 관직을 맡았고, 사위인 범명우(范明友)와 등광한(鄧廣漢)은 고위 군사 지휘관이 되었다.
기원전 71년, 곽광의 아내 곽현(霍顯) 부인은 자신의 딸 곽성군(霍成君)을 황후로 만들기 위해 의사에게 뇌물을 주고 선제의 황후 허평군(許平君)을 독살했다. 허평군 황후는 선제가 미천했을 때부터 함께한 아내였으며, 황후가 된 후에도 황태자 유석(劉奭)을 낳았다. 선제는 허평군을 잊지 못했으나, 곽씨 일족의 세력이 워낙 강대하여 이를 추궁할 수 없었다. 결국 기원전 70년 4월, 곽성군이 황후로 책봉되었다. 곽씨 일족은 황실과 유사한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며 그들의 오만함이 극에 달했다. 선제는 겉으로는 곽광에게 존경심을 표했지만, 내심 그를 "등에 박힌 가시(芒刺在背máng cì zài bèi중국어)"처럼 두려워했으며, 곽광이 자신의 친척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이러한 곽씨 일족의 행적은 훗날 그들의 몰락을 초래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6. 사망과 곽씨 일족의 몰락
곽광의 사망은 곽씨 일족의 권력 유지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결국 그들의 오만함과 음모는 황제에 의한 철저한 숙청으로 이어졌다.
6.1. 곽광의 사망
기원전 68년 4월 21일(지절(地節Dìjié중국어) 2년 3월 경오일), 곽광은 병에 걸려 사망했다. 향년 63세였다. 한 선제와 상관황태후(곽광의 외손녀)는 거의 전례 없이 직접 곽광의 조문에 참석하여 애도를 표했으며, 곽광을 위해 인상적인 규모의 능묘를 건설했다. 그의 시신은 시안의 무릉에 안장되었고, 선성(宣成Xuānchéng중국어)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곽광의 사망 직후인 기원전 68년 5월, 선제는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6.2. 일족의 오만과 음모
곽광 사후에도 그의 아들, 사위, 조카들은 여전히 중요한 관직을 유지하고 후(侯Hóu중국어) 작위를 받았다. 곽광의 아내 곽현 부인은 곽광의 노비장이었던 풍자도(馮子都)와 관계를 맺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다. 곽씨 일족은 곽광의 위세를 믿고 황실과 유사한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며 오만함이 극에 달했다.
선제는 곽씨 일족의 오만함에 불만을 품고 점차 그들의 실질적인 권력을 박탈해 나갔다. 기원전 67년 5월, 선제는 사망한 허황후의 아들인 유석(劉奭, 훗날 한 원제)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이는 곽현 부인을 크게 분노하게 만들었고, 그녀는 자신의 딸인 곽황후(곽성군)에게 황태자를 살해하도록 지시했다. 곽황후는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 무렵 선제는 곽씨 일족이 허황후를 살해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고, 이는 그가 곽씨 일족의 실권을 더욱 박탈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원전 66년, 곽현 부인은 자신의 아들과 조카들에게 자신이 허황후를 살해했음을 고백했다. 황제가 실제 증거를 확보할 경우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을 두려워한 곽현 부인과 그녀의 아들 곽우, 조카 곽운, 곽산, 그리고 사위들은 황제를 폐위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6.3. 곽씨 일족의 숙청
곽씨 일족의 음모는 발각되었고, 한 선제는 즉시 곽씨 일족 전체를 숙청했다. 곽우는 요참(腰斬, 허리를 베어 죽이는 형벌)에 처해졌고, 그의 생모와 자매들을 포함한 곽씨 일족은 모두 살해당했다. 이 사건으로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연루되어 목숨을 잃었다. 곽광의 시신은 주련(朱聯)으로 옮겨졌다. 곽황후(곽성군)는 폐위되어 소태궁(昭泰宮)에 유폐되었고, 12년 후인 기원전 56년 자살했다. 이 숙청은 훗날 사마광(司馬光)이 그의 저서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곽광의 공헌에 대한 선제의 배은망덕함을 비판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7. 역사적 평가 및 유산
곽광은 중국 역사에서 매우 독특하고 역설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의 뛰어난 능력과 국가에 대한 헌신은 높이 평가되지만, 동시에 그의 독단적인 통치 방식과 일족의 전횡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7.1. 공적 및 긍정적 평가
곽광은 한 무제 사후 어린 한 소제와 한 선제를 보좌하며 20년 가까이 섭정으로서 한나라를 통치했다. 그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제국을 능숙하게 운영하고, 부적격한 황제 창읍왕 유하를 과감히 폐위하며 유능한 선제를 옹립하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렸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한나라는 '소선중흥(昭宣中興Zhāoxuān Zhōngxīng중국어)'이라 불리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곽광은 대사면령을 자주 내리고, 무제 시대의 잦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흉노와의 화친 정책을 추진하며 농업을 장려하고 곡물을 비축하는 등 실용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공헌으로 그는 헌신적이고 현명하며 결단력 있는 대신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후대 역사에서 곽광은 상나라의 이윤(伊尹), 주나라의 주공 단(周公 旦), 촉한의 제갈량(諸葛亮), 명나라의 장거정(張居正)과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섭정 대신 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다. 한 선제는 비록 곽씨 일족을 숙청했지만, 곽광 개인에 대해서는 일정한 존경심을 유지했다. 기원전 51년, 선제는 자신의 궁궐 대청에 11명의 위대한 공신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는데, 곽광의 초상화가 목록의 첫 번째에 놓였으며, 그의 이름 대신 직책과 성(姓)만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다른 공신들보다 더 큰 영예를 부여했다. 이는 곽광의 공로를 인정하는 선제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7.2. 비판 및 논란
곽광은 뛰어난 행정 능력과 국가를 위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인 통치 방식과 친족 등용(nepotism), 그리고 일족의 무례한 행동을 통제하지 못한 점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러한 특성이 그의 사후 곽씨 일족의 몰락을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한 선제가 공신 곽광의 일족을 전멸시킨 것을 곽광의 공헌에 대한 배은망덕한 행위로 비판하기도 했다.
곽광이 권신이었는지 아니면 현명한 신하였는지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까지 학자들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의 폐립 행위는 국가를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황권을 위협하는 독단적인 선례를 남겼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7.3. 중국 역사에 미친 영향
곽광의 행적은 중국 역사에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그는 부적합한 황제를 폐위하고 유능한 황제를 옹립함으로써 국가의 이익을 위해 과감한 결정을 내리는 대신의 기준을 세웠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독단적인 권력 행사와 일족의 전횡은 후대 권신들의 전횡을 비유하는 사례가 되었다. 훗날 많은 권신들은 곽광처럼 국가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권력을 장악하려 했고, 황제들은 역신들을 비난할 때 종종 그들을 "곽광처럼 행동하려는 자"로 비유했다.
특히, 곽광의 폐립 행위는 상나라의 이윤이 태갑(太甲Tàijiǎ중국어)을 폐위한 고사와 함께 '이곽지사(伊霍之事Yī Huò zhī Shì중국어)'라는 고사성어로 불리며, 신하가 황제를 폐립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긍정적 의미(국가를 위한 현명한 조치)와 부정적 의미(황권을 침해하는 전횡)를 동시에 내포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왕망(王莽)과 같은 인물은 곽광을 본받는다고 주장하며 권력을 장악하고 결국 전한을 찬탈하기도 했다.
8. 사생활
곽광의 사생활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으나, 그의 가족 관계는 그의 정치적 행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곽광의 정실 부인은 동려씨(東閭氏)였으며, 이후 현씨(顯氏, 이름은 곽현)와 재혼했다. 곽현 부인은 곽광 사후 곽씨 일족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곽광에게는 아들 곽우(霍禹)와 최소 7명의 딸이 있었다. 그의 장녀는 상관걸의 아들 상관안과 결혼하여 상관황후를 낳았고, 이 상관황후는 한 소제의 황후이자 곽광의 외손녀가 된다. 막내딸인 곽성군(霍成君)은 한 선제의 두 번째 황후가 되었으나, 곽현 부인의 음모로 허황후를 독살한 사건에 연루되어 폐위되고 자살했다. 곽광의 가족들은 그의 권세 아래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으나, 이는 동시에 황제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켜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9. 영향 및 관련 사건
곽광의 정치적 행보는 중국 역사뿐만 아니라 주변국의 역사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실질적인 재상이었던 관백(関白)이라는 칭호는 곽광의 권력 행사 방식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곽광이 한 선제 즉위 초기에 정권을 위임받을 때 사용된 문구인 "관여하여 아뢰다(関り白すKanwari mōsu일본어)"에서 '관백(関白Kanpaku일본어)'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관백의 다른 이름으로 '박륙(博陸Hakuroku일본어)'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는 곽광이 박륙후(博陸侯Bólù Hóu중국어)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의 초대 관백인 후지와라노 모토쓰네(藤原基経)가 요제이 천황(陽成天皇)을 폐위하고 황족의 원로인 고코 천황(光孝天皇)을 옹립한 행위는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서 창읍왕 유하를 폐위하고 선제를 맞이한 곽광의 행위에 비유되며 칭송받기도 했다.
고려 시대 1388년 위화도 회군 직후, 윤소종은 이성계(훗날 조선 태조)에게 《한서(漢書)》의 〈곽광전(霍光傳Huò Guāng Zhuàn중국어)〉을 바쳤는데, 이는 이성계에게 곽광이 창읍왕 유하를 폐위한 것처럼 우왕(禑王)을 폐위하라고 권유한 것이었다. 이는 곽광의 폐립 고사가 한국 역사에서도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사례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베트남 쩐 왕조(陳朝) 시대에는 호꾸이리(胡季犛)가 전횡을 일삼자, 상왕 쩐응에똥(陳藝宗)은 임종 전에 호꾸이리에게 주공 단, 제갈량, 소헌성(蘇憲誠)과 함께 곽광의 초상화를 그린 '사부(四傅Sì Fù중국어)' 그림을 하사하며 어린 황제를 잘 보필하고 찬탈하지 말라는 경고를 주었다. 그러나 호꾸이리는 결국 쩐 왕조를 찬탈하고 호 왕조(胡朝)를 세웠다. 이러한 사례들은 곽광의 폐립 행위가 동아시아 각국에서 권력의 정당성과 전횡의 상징으로 인용되었음을 보여준다.
10. 묘소 및 기념
곽광의 묘소는 산시성 시안에 위치해 있으며, 그의 죽음 이후 한 선제와 상관황태후의 지시로 매우 웅장하게 조성되었다.
현재 상하이 성황묘(城隍廟)에는 곽광을 기리는 제단이 중앙에 위치해 있다. 이는 곽광이 중국 역사상 중요한 인물로 인식되어 후대에도 기념되었음을 보여준다.
11. 관련 항목
- 곽거병
- 허평군
- 곽성군
- 상관걸
- 금일제
- 한 선제
- 창읍왕 유하
- 한 소제
- 한 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