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아오타 노보루는 야구선수, 지도자, 해설가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일본 야구계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그의 생애는 어린 시절부터 프로 야구 선수로서의 전성기, 그리고 지도자 및 은퇴 후 활동까지 아우른다.
1.1. 어린 시절 및 학창 시절
아오타 노보루는 1924년 11월 22일 효고현 미키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유도를 배웠으나, 고등 초등학교로 진학한 뒤 유도부가 없자 야구로 전향했다。 그의 고등 초등학교 2년 선배이자 구제 다키가와 중학교에 다니던 벳쇼 다케히코의 소개로 다키가와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입학 당시에는 벳쇼의 예비 투수였으나, 1940년에 감독으로 부임한 마에카와 하치로에 의해 외야수로 컨버전되었다. 그는 1940년과 1941년 봄 고시엔에 당시 에이스였던 벳쇼와 함께 출전했다. 1941년에는 우승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2회전에서 벳쇼가 골절상을 입는 불운 속에 기후 상업고등학교에 연장전 끝에 아쉽게 패했다. 하지만 아오타는 이 대회에서 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당시부터 그의 강한 어깨는 정평이 나 있었는데, 다키가와 중학교 3학년 때는 수류탄 던지기로 81.5 m의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1942년에는 벳쇼가 졸업하고 고바야시 아키요시가 에이스가 되면서 다키가와 중학교의 전력이 크게 보강되었으나, 전쟁 상황 악화로 고시엔 대회가 봄과 여름 모두 취소되었다. 이에 아오타는 같은 해 7월, 17세의 나이로 도쿄 교진군에 입단했다. 그의 계약금은 1000 JPY, 월급은 130 JPY였다.
1.2. 현역 선수 경력
아오타는 1942년 17세의 나이로 JBL의 도쿄 교진군에서 프로에 데뷔했다. 그해 여름 시즌에는 15타석에서 무안타에 그쳤으나, 가을 시즌에는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리그 최고 타율인 .389를 기록하며 뛰어난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1943년에는 상대 팀의 분석으로 인해 타격 부진에 빠지면서도 42 타점을 기록하여 타점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는 타율 .223, 홈런 0개로 기록한 역대 최저 타율 및 홈런 개수의 타점왕이라는 진기록으로 남았다.
1944년에 도쿄 교진군을 퇴단한 아오타는 자원하여 육군항공대에 입대했다. 가코가와 전투대에 배속되었고, 특공대에 자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결국 출격 명령을 받기 전에 종전을 맞았다. 1945년 8월 15일 종전 소식을 들은 그는 당일 다카사고시에 있는 형 부부의 집으로 걸어서 돌아왔다고 한다.
1945년 9월, 종전 후 가장 먼저 그를 영입하려 했던 한큐군에 입단하며 야구계에 복귀했다. 그는 전쟁 전에 요미우리 신문의 쇼리키 마쓰타로 사장과 종전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복귀하기로 약속했었으나, 당시 자이언츠 측의 수용 체제가 갖춰지지 않아 한큐에 대여하는 형태로 입단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한큐 입단 시 계약금은 없었으며, 1948년 자이언츠 복귀 시에도 순조롭게 이적이 이루어졌다. 1946년에는 노구치 지로와 함께 클린업 트리오를 형성하며 3번 타자로 나서 리그 11위의 타율 .294를 기록했다. 이 무렵 '자자마'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20 홈런의 프로 야구 기록을 세운 오시타 히로시에게 영향을 받아, 1947년에는 장거리 타자로서의 타격 방식 개조에 착수했다. 타격 코치도 없이 시합 후 백네트를 향해 왼손으로 200~300개의 공을 치는 독자적인 연습을 계속한 결과, 타율은 .233으로 크게 떨어졌지만 리그 3위인 11 홈런을 기록하며 홈런 개수를 크게 늘렸다.
1948년 미하라 오사무 총감독의 권유로 자이언츠에 복귀했다. 복귀 당시, 1947년 시즌 중 한큐의 지휘를 맡았던 하마사키 신지 감독과의 관계가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오타가 하마사키에게도 거취에 대해 상담했으며, 하마사키는 대타자인 가와카미 데쓰하루와 가까이에서 플레이하는 것이 아오타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자이언츠 복귀에 찬성해주었다고 한다. 한큐에서의 월급은 8000 JPY였으나, 자이언츠로 이적하자마자 1.60 만 JPY로 두 배나 뛰었다. 1948년 봄 벳푸 캠프에서는 아오타, 가와카미, 지바 시게루에 미하라까지 4명이 여관 지하실에서 연일 배트를 휘두르며 타격에 대해 논의하는 '밤의 타격 연구회'를 감행하여 '어떻게 하면 더 많은 홈런을 칠 수 있을까'에 몰두했다. 아오타는 훗날 가와카미, 지바와 함께 모이면 "그때의 타격 연구회가 그 후 일본 타격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주저 없이 말하곤 했다.

같은 해 아오타는 가와카미와 치열한 홈런왕 경쟁을 벌여, 1946년 오시타가 세운 20 홈런 기록을 넘어선 당시 프로 야구 기록인 25 홈런을 기록하며 둘이서 홈런왕을 공동 수상했다. 또한 그해 타율도 야마모토 가즈토 및 고즈루 마코토와 근소한 차이로 경쟁했는데, 폐막 경기인 난카이 호크스 전에서 3루수 야마모토 바로 앞에 세이프티 번트를 성공시켜 승리하며 타율 .306으로 수위 타자도 획득, 타격 2관왕에 올랐다. 또한 처음으로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었다. 그해 174 안타는 가네다 마사야를, 284 루타는 오시타 히로시를 넘어서는 당시 일본 기록이었다 (모두 이듬해 후지무라 후미오가 갱신). 1949년 오프 시즌에 발생한 미하라 감독 배척 운동에서는 "미하라가 아오타를 트레이드로 방출하려 한다"는 소문을 믿고 운동에 참여했다. 결국 미하라는 물러나 총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는 자이언츠 프런트에서 나온 아오타 트레이드 안을 미하라가 저지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듬해 1950년 봄에는 미하라로부터 만약 니시테쓰 클리퍼스 감독이 된다면 함께 규슈로 가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아오타는 배척 운동에서의 경위도 있어 즉시 수락했다고 한다。 이 해에는 타율 .332 (리그 3위), 33 홈런, 134 타점 (리그 4위)으로 타격 3부문 모두 팀 최고 성적을 남겼으며, 두 번째 베스트 나인을 획득했다. 또한 도루 수는 29개로 트리플 쓰리를 아쉽게 놓쳤다. 그해 20회의 맹타상은 당시 일본 기록이었다 (1952년 요나미네 와요가 갱신). 같은 해 오프 시즌, 미하라가 자이언츠를 퇴단하고 니시테쓰 감독으로 취임함에 따라 아오타도 니시테쓰로 이적하려 했다. 처음에는 니시테쓰 구단 간부들도 자이언츠로부터 아오타를 강제로 퍼시픽 리그 구단으로 데려오는 것을 주저했으나, 1949년 말 아오타의 계약 갱신에서 "2년 계약으로 100.00 만 JPY, 1년 경과 후 절반인 50.00 만 JPY를 돌려주면 자유"라는 계약을 맺었으며, 그 계약서를 보고 간부들도 영입을 결단했다고 한다. 1951년 1월 20일 아오타는 자이언츠 퇴단을 표명했고, 1월 23일 미하라와 가와사키 도쿠지 주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니시테쓰 대표인 니시 마타지로와 계약까지 체결했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먼저 미하라와 아오타를 서일본 파이리츠와 계약시킨 뒤, 서일본과 니시테쓰의 합병을 통해 두 사람을 퍼시픽 리그 소속으로 만드는 절차까지 결정되었다.
그 후 아오타는 고베로 귀성했지만, 센트럴 야구 연맹의 간사이 지사장이었던 고지마 젠페이로부터 선수 자격 박탈을 암시하며 요미우리 신문 부사장 야스다 쇼지와 협의하도록 권유받았다. 미하라로부터 전혀 연락이 없어 불안감을 느끼던 아오타는 귀경을 결심하고, 고지마와 함께 요미우리 신문 본사로 향했다. 본사 현관에는 훗날 센트럴 리그 회장이 되는 스즈키 류지가 기다리고 있었고, 응접실에는 우노 쇼지 구단 대표를 비롯해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 가와카미, 지바, 후지모토 히데오, 벳쇼 등 주력 선수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서 구단 간부 및 주력 선수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고, 이튿날 신문에는 아오타가 자이언츠에 복귀했다는 기사가 나와 2월 6일 아오타의 자이언츠 잔류가 결정되었다. 아오타는 "자신의 문제로 양 리그의 협조가 깨지는 것을 피하고 싶어, 자신만 자이언츠로 돌아가면 원만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하라에게 양해를 구했지만, 서일본과의 계약이 옳지만 너의 의지를 구속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자이언츠 복귀 성명을 발표했다.

1951년 시즌에는 타율 .312 (리그 9위)를 기록하면서도 32 홈런과 105 타점으로 리그 선두를 기록하며 두 번째 타격 2관왕에 올랐고, 타율 .377을 기록한 가와카미와 타격 3부문을 독점했다. 아오타는 최우수 선수(MVP)는 자신이 받을 수 있다고 자부했지만, 기자 투표에서 가와카미에게 패했다. 화가 난 아오타는 센트럴 리그 회장 스즈키 류지에게 MVP를 받지 못한 이유를 물었고, MVP는 기록뿐 아니라 품격도 요구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같은 해 가을에 열린 미일 야구에서는 메이저리그 선발팀을 상대로 아오타는 일본 선발팀 중 최고 타율인 .333을 기록했다. 이 대회에서 페리스 페인으로부터 메이저리그 투수의 강속구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배트를 세우는 것이 좋다는 조언을 받았다. 그 전까지 아오타는 배트를 눕힌 자세에서 크게 백스윙을 하여 그 반동을 이용해 스윙했으나, 이 조언을 받은 후 다시 타격 방식 개조에 착수했다. 그러나 타격 방식 개조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아, 1952년에는 타율 .260, 18 홈런으로 성적이 크게 떨어졌다. 같은 해 오프 시즌, 자이언츠는 아오타를 히로시마 카프로 트레이드하려 했다. 표면적으로는 부진한 성적이 이유였지만, 매년 계약 갱신에서 마찰을 빚었던 우노 구단 대표가 늘 방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점, 와세다 대학의 강타자였던 이와모토 다카시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던 점도 이유였다고 한다. 결국 아오타는 트레이드 제안을 거절하고 B급 10년 선수 자격을 이용하여 1953년 1월 14일 요쇼 로빈스 (후에 다이요 웨일스)로 이적했다.
요쇼로 이적한 후에도 계속해서 3번 타자를 맡았다. 1953년에는 배트를 눕히는 원래의 폼으로 돌아왔지만, 형태만 원래대로 돌렸을 뿐 타이밍이 맞지 않아 타율 .245, 9 홈런으로 성적이 더욱 떨어졌다. 하지만 같은 해 4월 23일 옛 소속팀인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했다. 1954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회복세를 보이며, 8월 한 달 동안 13 홈런을 포함한 31 홈런으로 3년 만에 홈런왕을 차지했고, 타율도 .294 (리그 11위)를 기록했다. 1955년에도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여 8월 23일 한신 타이거스 전에서는 3 홈런을 터뜨렸으나, 연장전에서 오사키 미쓰오로부터 사구를 맞아 왼손을 골절당해 이 경기까지 기록한 17 홈런에서 더 이상 숫자를 늘리지 못했다. 1956년에는 25 홈런, 1957년에는 22 홈런으로 2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했으며, 두 해 모두 베스트 나인 외야수로 선정되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1956년 5월 6일 가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히로시마와의 더블헤더 경기에서 4타석 연속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1958년에는 전반기에는 좋은 컨디션을 유지했으나, 6월 29일 주니치 드래건스 전에서 2루로 슬라이딩하다가 왼쪽 발목을 골절당했다. 전치 3개월의 중상으로 남은 시즌을 쉬게 되었다.
이 해 오프 시즌, 니시테쓰의 감독이었던 미하라가 다이요의 감독으로 취임하는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고, 기동력을 중시하는 미하라의 구상에서 벗어난 아오타는 자유계약이 되었다. 한편, 미하라의 다이요 입단 소식은 곧 언론에 의해 특종 보도되었고 (아오타 본인은 자신이 언론에 유출했다고 훗날 말했다), 니시테쓰의 만류를 받은 미하라는 잔류하게 되었다. 신인 시절 감독이었던 후지모토 사다요시로부터 연락을 받아, 1958년 12월 30일 아오타는 12년 만에 한큐에 복귀했지만, 왼쪽 발목 골절 후유증으로 충분한 활약을 하지 못했고, 1959년 12월 11일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
1.3. 지도자 및 감독 경력
현역 은퇴 후 1960년에는 지인의 회사에 근무했고, 1961년부터는 스포츠 호치 평론가를 지냈다.
1961년 11월 15일, 한신 타이거스의 후지모토 사다요시 감독이 "내년에 우리 팀으로 와서 코치로 도와주겠나?"라고 요청했고, 아오타는 이를 수락하여 한신 1군 타격 코치 (실질적으로는 헤드 코치)에 취임했다. 계약금은 800.00 만 JPY였다. 공격 시의 모든 사인을 맡기는 등 후지모토의 오른팔로서 1962년 센트럴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이때, 아오타가 존경하는 미하라 오사무가 감독을 맡았던 옛 소속팀 다이요와 우승 경쟁을 벌였는데, 아오타는 어떤 경기를 앞두고 '미하라 모나카'라는 일본 과자를 선수들에게 주며 "자, 미하라를 먹어라"라고 선수들을 독려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이 이끄는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2승 4패 1무로 패했다. 당초 1년 계약이었으나, 후지모토 감독의 후임 요청을 거절하고, 후지모토와 한신의 만류로 코치로서 1년 계약을 연장한 뒤 1963년을 끝으로 한신을 퇴단했다. 당시 그의 지도를 받은 요시다 요시오는 "아오타 씨는 가르치는 달인이었다"고 말했다.
한신 퇴단 후, 마이니치 방송 야구 해설가 (1964년)를 거쳐,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요청으로 11월 25일 한큐의 헤드 코치에 취임했다. 아오타는 니시모토에게 자신을 코치로 영입한 이유를 물었고, 니시모토는 "코치로 부임한 첫날부터 선수들에게 '이 자식!' 하고 소리칠 수 있는 코치는 당신밖에 없다"고 답했다. 니시모토에게는 고바야시 요네자부로 구단주와의 우승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7년에는 구단 최초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으며, 타격 코치로서 나가이 도쿠시, 야마구치 후지오, 모리모토 기요시 등을 지도했다. 특히 대학 시절 강타자가 아니었던 나가이에게 배팅 머신으로 몸쪽 강속구를 맹훈련시키는 특훈을 시켜 리그를 대표하는 홈런 타자로 성장시킨 공이 크다. 나가이는 은퇴 후에도 "나는 아오타 씨에 의해 만들어진 홈런 타자"라고 언급했다. 아오타 이론을 흡수한 나가이는 세이부 라이온스의 타격 코치로서 아키야마 고지에게도 같은 특훈을 시켜 길러냈다. 한큐에서도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11월 30일 또다시 퇴단했다. 그는 "코치로서 가장 좋지 않은 것은 그 구단에 오래 머무는 것이다. 자신의 목을 길게 이으려고 감독의 눈치를 보고, 아첨하는 것만을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한큐 퇴단 후, 닛폰 TV 야구 해설가 (1968년~1971년)를 거쳐 1971년 10월 19일 다이요 웨일스의 헤드 코치에 취임했다. 1972년에는 시즌 도중 벳토 가오루 감독이 휴양에 들어가자 8월 31일부터 아오타가 감독 대행을 맡았다. 그러나 1승 14패 (2무)로 성적을 내지 못했고, 아오타 역시 건강 악화 (담낭결석)로 휴양에 들어가 미야자키 쓰요시가 대행의 대행을 맡았다. 시즌 종료 후 주부 겐키치 구단주로부터 장래에 아키야마 노보루를 감독으로 하고 싶으니, 그 전까지 임시로 감독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아오타는 계약금은 필요 없지만 리그 우승 시에는 일본 시리즈 구단 수입의 20%를 달라고 제안했으며, 1972년 11월 14일 감독으로 승격했다. 1973년에는 5월 25일까지 16승 6패를 기록하며 5월 하순에는 선두를 달리는 등 시즌 초반에는 호조를 보였다. 그러나 5월 말부터 급격히 추락하여 결국 5위에 그쳤고, 10월 24일 사의를 표명했다.
재임 중에는 홈구장인 가와사키 구장에서의 경기와 근처 가와사키 경륜장의 개최일이 겹쳤을 때, 타격 투수 겸 통역이었던 고가 히데히코를 불러내 도박 자금을 맡겨 경륜장으로 보내곤 했다. 당시 직장인 초봉에 해당하는 5.00 만 JPY를 걸기도 여러 번 있었으며, 예상이 맞았을 때는 고가에게 팁을 후하게 주었다. 선수들의 플레이에 대해서는 엄격한 요구를 했지만, 경기 종료 후에는 개별 선수들의 플레이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작전 지시도 거의 코치들에게 맡겼고, 경기 중에도 빨간색 연필을 핥으며 경륜 예상을 하고 있었다. 당시 구단 내에 '반(反)아오타' 성향의 선수 코치들이 있어서, 고의로 아오타의 사인을 무시하기도 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같은 해 6월 4일 가와사키시 나카하라구 도도로키의 다마가와 합숙소에서 열린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아오타를 비롯한 수뇌부가 보이(Boy) 역할을 맡았으며, 닭꼬치 800개, 영계 200마리, 쇠고기 7 kg, 생맥주 40 L (총 24.00 만 JPY 상당)가 준비되었다. 에토 신이치, 마쓰바라 마코토 등 선수들은 주빈 역할을 하며 야외 비어홀에서 식사를 즐기고 기운을 북돋았다. 테리 이토는 자신의 저서에서 그를 "너무 뜨거워서 한순간에 타버린 '야구 소년' 감독"이라고 평했다.
1.4. 은퇴 후 활동
다이요 퇴단 후에는 닛폰 TV (1974년), NET TV (1975년~) 등에서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라디오 간토 야구 해설가를 거쳐 1979년 시즌 종료 후 10월 21일 26년 만에 헤드 코치로서 자이언츠에 복귀했다. 당시 자이언츠는 팀을 지탱하던 베테랑 선수들의 노쇠화가 뚜렷하여 차세대 선수 육성이 시급하다고 생각한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의향이었다. 시즈오카현 이토 스타디움에서 열린 '지옥의 이토 캠프'에서는 에가와 스구루, 니시모토 다카시, 가토리 요시타카, 가쿠 미쓰오 (후에 아키오), 시노즈카 가즈노리 (후에 카즈노리), 마쓰모토 다다시 등 젊은 선수들을 철저히 단련시켰다. 나가시마와 아오타는 두 사람 모두 전해 들어서만 알던, 자이언츠가 전전에 군마현 다테바야시시의 모린지에서 가졌던 캠프를 이 이토 캠프에 비유했다. 이 '이토 캠프'는 훗날 회자되며, 이 캠프 멤버들은 1980년대 자이언츠를 지탱하는 주력 선수들이 되었다.
2. 논란 및 사건
1979년 10월, W영의 나카다 하루오가 야구 도박 빚을 비관하여 아타미 온천에서 자살한 사건을 선데이 마이니치가 취재하는 과정에서 효고현경과 츠키테이 가초 등 관계자들로부터 아오타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이에 선데이 마이니치지는 1979년 12월 말부터 다음 해 1980년 2월 3일호까지 아오타 취재를 포함한 야구 도박 관련 기사를 매주 게재했다. 아오타를 직접 인터뷰한 기사에서는 고베의 아오타 자택 근처 야키니쿠 가게에서 아오타가 술을 마셔 언성이 높아졌고, 1969년~1971년의 '검은 안개 사건'으로 아오타 자신이 야구 도박과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을 때 기자를 향해 "이거 선데이 마이니치라니, 한심한 놈들이야, 바보라고 진짜 이 놈들은"이라고 손님에게 소리치며 "핀 보케", "공부 부족", "바카야로!!", "아기 오줌" 등 폭언을 쏟아냈다고 한다. 아오타는 친형이 효고현경에서 유도 사범으로 일하고 있어 "효고현경에서 내 이름이 나올 리가 없다"고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아오타는 고베시 산노미야에서 운영하던 배팅 센터가 1960년 붐이 사그라들면서 도산했고, 같은 장소에서 렌터카 회사를 운영했으나 그것도 실패하여 폭력단에게 협박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스포츠 관계자들 사이에서 계속 돌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아오타는 폭력단에게 협박받는 것은 아니라고 부정했으며, 3000.00 만 JPY를 손해 보면 6000.00 만 JPY를 지불하는 것은 사업가로서는 당연하다며 매달 20.00 만 JPY의 이자를 갚고 있다고 인정했으나, 이는 통상적인 이자보다 훨씬 높은 금액이었다. 아오타는 핸디캡 전문가라는 소문이나 야구 도박과의 관계는 전면 부정했지만, 폭력단과는 친밀한 관계임을 인정하며 "왜 야쿠자와 어울리는 것이 나쁜가"라고 되려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오 사다하루나 나가시마 시게오도, 야마모토 고지가 히로시마에서 공동회 일행들에게 '야, 고지, 이쪽으로 같이 와서 밥 먹지 않을래'라고 불렸을 때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라고는 쉽게 말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시를 들기도 했다.
이 기사는 큰 파장을 일으켰고, 아오타와 폭력단에 관한 소문은 야구계에 뿌리 깊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스포츠 신문 등도 크게 보도하며 문제가 확산되었다. 기사가 나오자마자 스즈키 류지 센트럴 리그 회장은 하세가와 마사오 자이언츠 구단 대표에게 조사를 지시했고, 조사 결과 자이언츠 구단은 1980년 1월 9일 아오타가 무고하다고 발표하며 엄중 주의 처분에 그쳤다. 이 보고를 받은 스즈키 센트럴 리그 회장은 관계없는 다른 구단의 스타 선수를 끌어들인 것에 대해 "불미스러운 것을 넘어섰다"며 격분했고, 가벼운 처분에 불복을 표명했다. '검은 안개 사건' 이후 10년이 지나 다시 야구계에 나쁜 이미지가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자이언츠 구단에 재고를 촉구했고, 1980년 1월 18일 아오타는 코치직을 사임했다.
3. 개인 생활 및 대인 관계
아오타 노보루의 애칭은 자자마였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에서도 유래했지만, 젊은 시절부터의 자유분방한 언행에서도 비롯된 별명이었다. 한편, 애교 있고 미워할 수 없는 행동과 인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으며, 그의 교우 관계는 매우 넓었다.
- 전후 오랫동안 클린업 트리오를 함께했던 가와카미 데쓰하루와는 앙숙이라고도 불렸지만, 아오타에 따르면 가와카미는 "매우 낯가림이 심하지만, 친해지면 끝까지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었다고 하며, 실제로 가와카미가 허물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또한 1947년 여름, 당시 고베(고베시 나다구 고모)의 다세대 주택에 살던 가와카미가 옆집이 비었다며 지인 집에 머물던 아오타에게 이사를 권유했고, 두 사람은 이후 1년 반 정도 이웃 관계를 유지했다. 이때 가와카미의 생활을 직접 보고 들었던 경험이 아오타의 이후 인생에 매우 유용했다고 한다.
- 동기 입단으로 6세 연상이었던 후지모토 히데오에게는 입단이 3개월 정도 늦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후지모토"라고 막 불렀지만, 후지모토 사다요시 감독에게 막말이 너무 심하다고 주의를 받아 서로 "후얀", "아오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아 50년 이상 평생 교류했다고 한다.
- 홈런왕을 다퉜던 오시타 히로시, 그리고 다키가와 중학교 선후배 사이였던 벳쇼 다케히코와 셋이서 매일 밤 긴자의 바를 돌아다니며 '긴자의 3악인''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 구제 다키가와 중학교 시절, 학교 근처 포장마차 초밥집에서 "초밥 재료 100개를 먹으면 공짜에 상금 1엔"이라는 가게 자랑에 도전하여, 아오타는 도중에 기권했지만 70개의 재료를 다 먹었다. 벳쇼는 쌀만으로도 2말 분의 재료 100개를 완식하여, 1개 3전짜리 초밥값을 아낀 데다 상금까지 손에 넣었다.
- 자이언츠 2년 차였던 1943년에 이미 전설적인 투수였던 사와무라 에이지와 1년간만 동료였지만, 둘이서 함께 식사를 하러 가거나, 미국 원정 이야기를 들려주는 등 아오타는 사와무라에게 매우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 아오타는 그의 아내가 오랜 로마 가톨릭 신자(기독교인)였고 자녀들도 모두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투병 중이던 1997년 10월 가톨릭 세례를 받고 공식적으로 신자가 되었다. 그의 세례명은 요셉이었다.
4. 평가와 유산
아오타 노보루는 선수, 지도자, 해설가로서 다방면에서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강렬한 개성과 뛰어난 실력은 많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특히 전후 일본 야구의 부흥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4.1. 긍정적 평가 및 기여
아오타는 일본 프로야구 초창기의 진정한 슬러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비록 키는 1.7 m에 체중은 77.56 kg에 불과했지만, 통산 265 홈런이라는 당시의 NPB 최고 기록을 세울 정도로 호쾌한 타격을 자랑했다. 그는 타격 2관왕 (1948년), 홈런왕 (1948년, 1951년, 1954년, 1956년, 1957년), 타점왕 (1943년, 1951년) 등 수많은 개인 타이틀을 획득하며 당대 최고의 타자로 군림했다. 또한 5차례의 베스트 나인 수상은 그가 꾸준히 리그 최고 수준의 외야수였음을 입증한다.
선수 은퇴 후 지도자로서의 공헌도 지대하다. 그는 한신 타이거스와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헤드 코치를 맡아 두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우승 청부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특히 한큐 시절에는 나가이 도쿠시와 같은 젊은 선수들에게 혹독한 훈련을 시켜 리그를 대표하는 홈런 타자로 성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가이는 훗날 "나는 아오타 씨에 의해 만들어진 홈런 타자"라고 말하며 그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는 아오타가 단순히 기술적인 지도자를 넘어 선수 개개인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데 탁월했음을 보여준다. 197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 시절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과 함께 진행한 '지옥의 이토 캠프'는 에가와 스구루, 니시모토 다카시, 시노즈카 가즈노리 등 1980년대 자이언츠의 주축이 될 젊은 선수들을 육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캠프는 훗날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훈련으로 기억된다.
해설가로서도 그는 '야구계의 오피니언 리더'로 불리며 날카로운 분석과 거침없는 발언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는 오 사다하루의 공식전 통산 홈런 기록(868개)이 세계 기록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을 때, 일본 시리즈, 올스타전, 미일 야구, 시범경기, 동서 대항전 등 비공식 경기에서의 홈런까지 합산하여 총 1032개를 계산하는 등, 통계와 기록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솔직하고 때로는 통렬한 발언은 많은 팬들에게 신선함을 주었으며, 안티 자이언츠 팬들조차 그를 '오얏상(아저씨)'이라 부르며 따랐다.
4.2. 비판 및 논란에 대한 평가
아오타 노보루의 경력 중 가장 큰 논란은 1980년 '선데이 마이니치'에 의해 불거진 야구 도박 의혹과 그 과정에서의 설화(舌禍) 사건이었다. 그는 야구 도박과의 직접적인 연루를 부정했지만, 폭력단과의 친밀한 관계를 인정하고 언론과 관계자들에게 무례한 발언을 한 점은 당시 사회적으로 큰 비판을 받았다. 이 사건은 그가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직에서 사임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1960년대 '검은 안개 사건' 이후 잠잠했던 일본 야구계의 어두운 면모를 다시금 드러내며 리그 전체의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언행은 때로는 호탕함으로, 때로는 무모함으로 평가받았다. 다이요 감독 시절 경기 중 경륜 예상을 하거나, 야구 도박 자금을 직접 지시해 전달하는 등 구단 운영에 대한 불성실한 태도와 도박 습관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선수들에게는 엄격하면서도 인간적으로는 허물 없는 모습을 보였고, 경기 후에는 선수들의 플레이에 대해 직접적인 불평을 하지 않는 등 자신만의 독특한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오타는 2009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그의 공헌과 업적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는 그의 과오와 논란을 넘어선 선수 및 지도자로서의 뛰어난 업적과 일본 야구 발전에 대한 기여가 더욱 크게 평가되었음을 의미한다.
4.3. 야구계에 미친 영향
아오타 노보루는 선수로서 '최초의 슬러거'로서 일본 프로야구의 공격적인 야구 스타일을 선도했다. 그의 호쾌한 타격은 전후 어려운 시기 일본 국민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하며 야구의 인기를 견인하는 데 일조했다. 그가 기록한 수많은 타이틀과 기록들은 후대 강타자들에게 하나의 목표가 되었고, 특히 통산 홈런 기록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는 금자탑이었다.
지도자로서는 한신과 한큐의 우승을 이끌며 '우승 청부인'의 면모를 보여주었고, '지옥의 이토 캠프'를 통해 자이언츠의 젊은 선수들을 핵심 전력으로 성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훈련 방식과 선수 육성 철학은 나가이 도쿠시와 같은 후대 선수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나가이의 지도를 받은 아키야마 고지에게까지 이어지는 등 일본 야구의 타격 이론과 훈련법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해설가로서는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넘나들며 거침없는 비판과 날카로운 분석으로 '야구계의 오피니언 리더'로서 대중들에게 야구의 재미와 깊이를 전달했다. 그의 독특한 캐릭터와 솔직한 언변은 후대 야구 해설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단순한 중계자가 아닌 야구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진 인물로 기억된다. 그의 삶은 일본 프로야구의 격동적인 시대를 그대로 보여주며, 야구계의 발전과 더불어 그림자도 함께 드리워져 있었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5. 수상, 타이틀 및 주요 기록
아오타 노보루는 현역 선수 시절 및 지도자 경력 동안 여러 타이틀과 표창, 그리고 주요 기록을 달성했다.
5.1. 타이틀
- 수위 타자: 1회 (1948년)
- 홈런왕: 5회 (1948년, 1951년, 1954년, 1956년, 1957년)
- 타점왕: 2회 (1943년, 1951년)
- 최다 안타: 1회 (1948년) - 당시 연맹 표창은 없었으나, 1994년부터 공식 타이틀로 제정
5.2. 표창
- 베스트 나인: 5회 (외야수 부문: 1948년, 1950년, 1951년, 1956년, 1957년)
- 야구 전당 엑스퍼트 부문 (2009년)
- 베스트 파더 옐로 리본상 (1987년)
5.3. 주요 개인 기록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1942년 7월 16일, 대 다이요군 9차전 (고라쿠엔 구장), 7번 좌익수로 선발 출장, 2타수 0안타
- 통산 100 홈런: 1950년 11월 3일, 대 쇼치쿠 로빈스 20차전 (고라쿠엔 구장), 오시마 노부오로부터 (역대 6번째)
- 통산 1000 안타: 1951년 9월 27일, 대 쇼치쿠 로빈스 19차전 (고라쿠엔 구장), 고바야시 쓰네오로부터 (역대 8번째)
- 통산 150 홈런: 1952년 9월 6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6차전 (도카이치초에이 구장), 오타가키 요시오로부터 (역대 2번째)
- 통산 1000경기 출장: 1953년 4월 25일, 대 나고야 드래건스 3차전 (오사카 스타디움) (역대 16번째)
- 통산 200 홈런: 1955년 7월 16일, 대 히로시마 카프 16차전 (미요시 시영 구장), 마쓰야마 노보루로부터 (역대 2번째)
- 통산 250 홈런: 1957년 8월 25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23차전 (가와사키 구장), 이나 쓰토무로부터 (역대 최초)
- 끝내기 만루 홈런: 2회 (역대 최다 타이 기록)
- 1947년 6월 7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전 (고라쿠엔 구장), 9회에 다다 후쿠조로부터, 스코어 4대 0 (역대 2번째, 전후 최초)
- 1954년 4월 27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전 (니시쿄고쿠), 9회에 가사하라 마사유키로부터, 스코어 9대 8 (역대 6번째, 센트럴 리그 최초, 복수 달성자 중 역대 최초)
- 사이클링 히트: 1회 (1953년 4월 23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3차전, 고라쿠엔 구장) (역대 9번째)
- 외야수 시즌 척살 수: 391개 (1948년) (역대 2위)
- 510경기 연속 출장: 1946년 8월 24일 ~ 1950년 7월 30일 (당시 역대 최장)
- 4타석 연속 홈런: 1956년 5월 6일 (역대 최초, 역대 2위 타이)
- 4타수 연속 홈런: 동상 (역대 최초, 역대 2위 타이)
- 올스타전 출장: 6회 (1951년 ~ 1953년, 1955년 ~ 1957년)
5.4. 등번호
아오타 노보루는 선수와 지도자 경력 동안 다음과 같은 등번호를 사용했다.
- 32 (1942년 ~ 1943년, 도쿄 교진군)
- 12 (1946년 ~ 1947년, 한큐군·한큐 브레이브스)
- 23 (1948년 ~ 195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다이요 쇼치쿠 로빈스·요쇼 로빈스·다이요 웨일스)
- 1 (1959년, 한큐 브레이브스)
- 63 (1962년 ~ 1963년, 한신 타이거스 1군 타격 코치)
- 40 (1965년 ~ 1967년, 한큐 브레이브스 1군 수석 코치)
- 50 (1972년 ~ 1973년, 다이요 웨일스 1군 코치·감독)
- 75 (198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수석 코치)
5.5. 연도별 타격 성적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 번트 | 희생 플라이 | 볼넷 | 고의 4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42년 | 도쿄 교진군 | 42 | 135 | 124 | 20 | 44 | 4 | 0 | 1 | 51 | 18 | 7 | 5 | 2 | -- | 7 | -- | 0 | 5 | -- | .355 | .389 | .411 | .801 |
1943년 | 84 | 346 | 323 | 25 | 72 | 10 | 6 | 0 | 94 | 42 | 10 | 10 | 1 | -- | 22 | -- | 0 | 21 | -- | .223 | .272 | .291 | .563 | |
1946년 | 한큐 | 96 | 437 | 411 | 57 | 121 | 28 | 5 | 3 | 168 | 51 | 21 | 6 | 0 | -- | 19 | -- | 2 | 23 | -- | .294 | .329 | .409 | .737 |
1947년 | 118 | 507 | 473 | 55 | 110 | 19 | 4 | 11 | 170 | 63 | 22 | 7 | 0 | -- | 34 | -- | 0 | 26 | -- | .233 | .284 | .359 | .643 | |
1948년 | 요미우리 | 140 | 593 | 569 | 95 | 174 | 31 | 2 | 25 | 284 | 99 | 19 | 11 | 1 | -- | 20 | -- | 2 | 52 | -- | .306 | .332 | .499 | .831 |
1949년 | 134 | 600 | 557 | 93 | 153 | 28 | 3 | 28 | 271 | 102 | 6 | 4 | 1 | -- | 37 | -- | 4 | 58 | -- | .275 | .324 | .487 | .811 | |
1950년 | 137 | 602 | 557 | 94 | 185 | 22 | 3 | 33 | 312 | 134 | 29 | 15 | 0 | -- | 42 | -- | 2 | 41 | 11 | .332 | .381 | .560 | .941 | |
1951년 | 114 | 521 | 471 | 101 | 147 | 27 | 2 | 32 | 274 | 105 | 22 | 8 | 0 | -- | 47 | -- | 3 | 39 | 9 | .312 | .378 | .582 | .960 | |
1952년 | 114 | 468 | 427 | 77 | 111 | 18 | 1 | 18 | 185 | 79 | 6 | 3 | 1 | -- | 38 | -- | 2 | 32 | 15 | .260 | .323 | .433 | .757 | |
1953년 | 요쇼 다이요 | 105 | 438 | 404 | 45 | 99 | 18 | 4 | 9 | 152 | 40 | 2 | 2 | 2 | -- | 31 | -- | 1 | 30 | 14 | .245 | .300 | .450 | .751 |
1954년 | 124 | 506 | 469 | 65 | 138 | 23 | 0 | 31 | 254 | 74 | 3 | 2 | 0 | 1 | 33 | -- | 3 | 52 | 17 | .294 | .344 | .542 | .885 | |
1955년 | 103 | 414 | 381 | 40 | 102 | 23 | 1 | 17 | 178 | 54 | 3 | 1 | 0 | 2 | 29 | 9 | 2 | 45 | 10 | .268 | .321 | .467 | .788 | |
1956년 | 129 | 539 | 502 | 48 | 130 | 13 | 2 | 25 | 222 | 65 | 1 | 3 | 0 | 2 | 35 | 6 | 0 | 69 | 16 | .259 | .306 | .442 | .748 | |
1957년 | 129 | 527 | 497 | 53 | 136 | 19 | 1 | 22 | 223 | 61 | 1 | 3 | 0 | 1 | 29 | 5 | 0 | 56 | 13 | .274 | .313 | .449 | .762 | |
1958년 | 76 | 276 | 260 | 21 | 67 | 8 | 0 | 7 | 96 | 30 | 1 | 0 | 0 | 1 | 14 | 1 | 1 | 29 | 7 | .258 | .297 | .369 | .666 | |
1959년 | 한큐 | 64 | 151 | 141 | 9 | 38 | 5 | 0 | 3 | 52 | 17 | 2 | 0 | 0 | 2 | 6 | 0 | 2 | 15 | 6 | .270 | .305 | .369 | .673 |
통산 : 16년 | 1709 | 7060 | 6566 | 898 | 1827 | 296 | 34 | 265 | 2986 | 1034 | 155 | 80 | 8 | 9 | 443 | 21 | 24 | 593 | 118 | .278 | .326 | .455 | .781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성적을 나타낸다.
- 요쇼(요쇼 로빈스)는 1955년에 다이요(다이요 웨일스)로 구단명을 변경했다.
5.6. 감독 경력 성적
아오타 노보루의 감독으로서의 팀 성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소속팀 | 경기 수 | 승 | 패 | 무 | 승률 | 순위 |
---|---|---|---|---|---|---|---|
1972년 (시즌 도중 대행) | 다이요 웨일스 | 17 | 1 | 14 | 2 | .067 | 6위 |
1973년 | 다이요 웨일스 | 130 | 60 | 64 | 6 | .484 | 5위 |
통산 | 147 | 61 | 78 | 8 | .439 |
6. 저서 및 출연 활동
아오타 노보루는 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여러 저서와 미디어 출연을 통해 대중과 소통했다.
6.1. 저서
- 青田昇の空ゆかば戦陣物語아오타 노보루의 하늘로 가면 전진 이야기일본어 (고진샤, ISBN 476980234X)
- 육군 특별 간부 후보생 및 육군항공대 시절의 일화가 담겨 있다.
- ジャジャ馬一代 遺稿・青田昇自伝자자마 일대 유고・아오타 노보루 자전일본어 (더 마사다, 1998년 1월 발매, ISBN 978-4915977541)
- 그의 마지막 유고작이 되었다.
- サムライ達のプロ野球 沢村栄治からONまで 青田昇交友録사무라이들의 프로야구 사와무라 에이지부터 ON까지 아오타 노보루 교우록일본어 (파루 출판, 1994년 1월 발매, ISBN 978-4893863645)
- 전전부터 전후까지의 프로야구 선수 23명의 사무라이들을 소개한다. 1996년 7월 분게이슌주에서 문고본으로 출간되었다.
6.2. 미디어 출연
- ミスターベースボール青田昇미스터 베이스볼 아오타 노보루일본어 (1976년, MBS 라디오에서 아침에 방송된 프로그램)
- MBS 베이스볼 파크 (MBS 라디오 프로 야구 중계의 현행 타이틀, 해설자 출연)
- 다음 순간, 뜨거워져라. THE BASEBALL (닛폰 TV 프로 야구 중계의 현행 타이틀, 해설자 출연)
- 줌인!! 아침! (닛폰 TV, '프로 야구 이레코미 정보' 코너, 히라타 쓰바사와 교대로 출연하는 오피니언 리더 역할)
- プロ野球BOXシート프로 야구 BOX 시트일본어 (닛폰 TV, 코멘테이터)
- 라디오 닛폰 자이언츠 나이터 (RF 라디오 닛폰, 해설)
- 青田昇と高山栄のジャジャ馬直球勝負아오타 노보루와 다카야마 사카에의 자자마 직구 승부일본어 (RF 라디오 닛폰, 다카야마 사카에와 함께 퍼스낼리티)
- 青田昇と高山栄のスポーツアイランド아오타 노보루와 다카야마 사카에의 스포츠 아일랜드일본어 (RF 라디오 닛폰, 다카야마 사카에와 함께 퍼스낼리티)
- 골든 나이터 (NET TV → TV 아사히, 해설. MBS TV가 NET 계열이던 1964년에도 출연)
- 격생! 스포츠 TODAY (TV 도쿄)
- M10 (1992년 10월, TV 아사히)
- 화요 서스펜스 극장「허구의 항로」 (1987년 12월, NTV 계열 / 다이에이 영상) - 여행사 사장 역
- 맛잇치몬메 (1995년, TV 아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