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고바야시 마사키는 1916년 2월 14일 일본 제국 홋카이도의 항구 도시 오타루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상류 중산층에 속했는데, 아버지 고바야시 유이치(小林雄一)는 미쓰이 물산에서 일했고 어머니 고바야시 히사코(小林ひさ子)는 상인의 딸이었다. 그에게는 두 명의 형과 한 명의 여동생이 있었으며, 배우이자 감독인 다나카 키누요와는 6촌 관계였다. 고바야시 가문은 시모노세키시의 사무라이 혈통을 계승한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을 도쿄에서 보냈지만, 17세까지는 오타루에서 성장했다. 그의 집안은 따뜻하고 관용적이었으며, 부모님은 예술적 탐구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그는 7세 때 처음 영화를 접한 이후 어머니와 함께 자주 영화를 보고 미술 전시회, 콘서트, 연극 공연을 관람하며 예술적 감수성을 키웠다. 그의 형 야스히코(康彦)는 대학에서 영화 연구 모임에 참여하며 고바야시의 영화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고바야시는 구 오타루 중학교(현 홋카이도 오타루 초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도쿄의 와세다 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그는 동양 미술을 전공했으며, 시인이자 역사가인 아이즈 야이치(會津八一)를 스승으로 모셨다. 아이즈는 고바야시의 삶과 예술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이즈는 특히 나라 시대의 불교 미술을 전문으로 했으며, 자주 학생들을 불교 사찰로 데려갔다. 고바야시는 수업 외적으로도 아이즈와 함께 나라현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아이즈의 집을 방문하며 교류를 이어갔다. 아이즈의 영향으로 고바야시는 동양 미술과 철학을 깊이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졸업 논문은 나라에 위치한 불교 사찰인 무로지에 관한 것이었으며, 논문 연구를 위해 한 달 동안 무로지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고바야시는 훗날 1996년에 아이즈 야이치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와세다 대학 재학 중, 고바야시는 6촌인 다나카 키누요가 일하는 쇼치쿠 스튜디오를 방문하곤 했다. 이 시기에 그는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1941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고바야시는 8개월 동안 쇼치쿠에서 감독 견습생으로 일했다. 쇼치쿠에서 그는 시미즈 히로시 감독의 《새벽의 합창》과 오바 히데오 감독의 《바람 향기로운 정원》의 조감독으로 참여했다. 이 시기에 그는 군대에 입대한 동양 미술 학자에 대한 소설을 나라를 배경으로 집필하기 시작했다.
1.2. 군 복무 경험
1942년 1월, 고바야시는 일본 제국 육군 아자부 제3연대에 징집되었다. 3개월간 중기관총 사수 훈련을 받은 뒤, 그는 만주 하얼빈 근처로 파견되었다. 1943년 9월, 고바야시의 부대는 우수리강을 따라 순찰 임무를 수행했다. 1944년 6월, 그의 연대는 필리핀으로 이동하기 위해 일본으로 귀환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 잠수함의 방해로 필리핀에 도달하지 못하고 대신 오키나와섬으로 향했다. 오키나와로 이동하던 중, 고바야시의 부대는 류큐 열도의 미야코섬으로 우회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그의 부대는 비행장 건설 작업에 투입되었다. 미야코섬에서의 생활은 매우 힘들었으며, 그의 부대는 생존을 위해 메뚜기와 개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그는 미야코섬에서 일기를 쓰며 전쟁 경험을 기록했는데, 여기에는 젊은 시절의 상실에 대한 사소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일기에서 고바야시는 일본의 전쟁 노력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전쟁이 초래한 죽음과 파괴에 대해 한탄했다. 고바야시는 군 복무 기간 동안 한 번도 최전선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평화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로 여겼으며, 이등병 이상의 계급으로 진급하는 것을 거부하며 저항적인 태도를 보였다.
전쟁이 끝난 후, 고바야시는 오키나와현 카데나의 포로수용소에서 거의 1년 동안 노동 포로로 지냈다. 수용소에서 고바야시는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연극단을 운영하며 여러 공연을 제작했다. 그는 1946년 11월에 수용소에서 풀려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945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형 야스히코가 1944년에 중국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2. 영화 경력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영화 경력은 사회 비판적 시선과 예술적 깊이를 동시에 추구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조감독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 세계를 구축했으며, 특히 전쟁과 사회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작품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드러냈다.
2.1. 영화계 입문과 조감독 시절
1946년 일본으로 돌아온 고바야시는 쇼치쿠에 조감독으로 재입사했다. 처음에는 사사키 케이스케 감독의 조감독으로 배정되었으나, 이후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게 되었다. 키노시타 감독과 함께 일하면서 고바야시는 그의 연출에 대한 연민, 지성, 기술에 감탄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전쟁 경험과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공통된 아픔을 통해 유대감을 형성했다. 고바야시의 키노시타 감독 아래 첫 작업은 1947년 《불사조》의 제2조감독이었다. 1948년에는 《파계》의 수석 조감독으로 승진했으며, 키노시타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는 남은 기간 동안 계속 수석 조감독으로 활동했다. 1949년, 고바야시는 키노시타와 함께 《깨진 북》의 각본을 공동 집필했다. 고바야시가 키노시타 감독을 보좌한 마지막 영화는 1953년에 개봉한 《일본의 비극》이었다. 1953년, 키노시타는 고바야시의 감독 데뷔작으로 각색할 만한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키노시타는 쇼치쿠가 소설 《인공정원》의 판권을 구매하도록 했으며, 이 소설이 고바야시의 데뷔작으로 사용될 의도였다. 그러나 키노시타는 결국 1954년 영화 《여인의 정원》에서 직접 이 소설을 각색했다.
고바야시의 감독 데뷔작은 1952년 중편 영화 《아들의 청춘》이었다. 이 영화는 신인 감독들을 소개하기 위한 쇼치쿠의 "자매 영화"라는 단편 영화 제작 계획의 일환이었다. 1952년 4월 1일, 고바야시는 쇼치쿠의 여배우 후미야 치요코(文谷千代子)와 결혼했다. 1953년에는 고바야시의 첫 장편 영화인 《진심》이 개봉했는데, 이 영화는 그의 스승인 키노시타 케이스케가 각본을 썼다. 《아들의 청춘》과 《진심》 모두 고바야시의 가족과 어린 시절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일부 등장인물은 그의 가족 구성원들을 모델로 했다.
2.2. 초기 연출작과 사회 비판
1953년, 고바야시는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된 B급 및 C급 전범에 대한 영화 《두꺼운 벽의 방》의 촬영을 마쳤다. 이 영화는 실제 전범들의 일기를 바탕으로 했으며, 당시 쇼치쿠가 일반적으로 제작하던 영화들과는 상당히 다른 유형의 작품이었다. 쇼치쿠는 처음에는 영화의 내용이 연합군 점령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어 미국을 불쾌하게 할 것을 우려하여 수정 없이는 《두꺼운 벽의 방》을 개봉하지 않으려 했다. 고바야시는 내용 삭제를 거부했고, 결국 이 영화는 1956년이 되어서야 개봉될 수 있었다. 《두꺼운 벽의 방》은 쇼치쿠 내에서 고바야시의 평판을 손상시켰고, 그는 이후 네 편의 영화를 쇼치쿠의 전형적인 스타일에 가깝게 제작하며 자신의 입지를 재건하려 했다.
1954년에는 《세 가지 사랑》이 개봉했는데, 이 영화에는 고바야시와 후미야 치요코가 결혼식을 올렸던 바로 그 교회 내부에서 촬영된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같은 해 후반에는 《이 넓은 하늘 어딘가에》가 개봉했다. 이 영화에는 고바야시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이후 그의 영화 6편에 출연하게 될 사다 케이지가 처음으로 출연했다. 1956년에는 《샘》이 개봉했는데, 이 영화는 고바야시의 작품 중 쇼치쿠의 전형적인 스타일과 가장 유사한 마지막 영화였다.
1956년, 마침내 《두꺼운 벽의 방》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같은 해 후반에는 야구 스카우트의 부패를 다룬 《당신이 사겠습니다》가 개봉했다. 1957년에는 미국 점령 기간 동안 그리고 그 이후 일본 내 미군 기지 주변에서 발생한 범죄와 매춘을 다룬 《검은 강》이 개봉했다. 이 영화는 나카다이 타츠야가 고바야시 감독 영화에서 주요 역할을 맡은 첫 작품이었다. 나카다이는 이후 고바야시의 다음 13편의 영화 중 9편에 출연하며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2.3. 대표작과 국제적 명성

1959년부터 1961년까지 고바야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일본의 평화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다룬 삼부작 《인간의 조건》을 연출했다. 이 영화는 고미카와 준페이의 장편 반전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총 상영 시간이 거의 10시간에 달하여 극장 개봉을 위해 제작된 영화 중 가장 긴 작품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 대작은 전쟁 중 일본군의 폭력과 이에 저항한 지식인 병사의 역경, 그리고 패전과 도피, 죽음을 훌륭하게 그려내며 마이니치 예술상,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감독상, 베네치아 영화제 산 조르조상 등을 수상했다.

1962년, 그는 타키구치 야스히코의 소설 《이문 낭인기》를 원작으로 한 하시모토 시노부의 각본을 바탕으로 《할복》을 연출했다. 고바야시 스스로 "내 작품 중 가장 밀도가 높다"고 자부한 이 첫 시대극은 1963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1964년, 고바야시는 라프카디오 헌의 책에서 발췌한 네 편의 괴담을 엮은 그의 첫 컬러 영화 《괴담》을 제작했다. 이 3시간짜리 대작은 1965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으며, 아카데미상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르며 세계적으로 극찬을 받았다. 이 영화의 촬영은 폐허가 된 항공기 격납고에 대규모 세트를 구축하여 진행되었으며, 미술을 담당한 토다 시게마사의 재능이 빛을 발했다. 다케미츠 토루의 음악은 영상 및 연기와 상호작용하는 음향 효과를 최대한 발휘하여 환상적인 세계를 창조했다. 그러나 대규모 세트, 장기간의 촬영, 그리고 스태프와 출연진을 포함한 8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력으로 인해 제작비가 크게 부풀어 올랐고, 수많은 명작을 세상에 내놓았던 독립 제작사 "분게이 프로덕션 니진 클럽"은 막대한 부채를 안고 도산하는 아픔을 겪었다.

1967년, 고바야시는 미후네 프로덕션의 첫 작품인 《사무라이 반란》을 연출하여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상을 수상했으며, 키네마 준보 베스트 원에 선정되었다.
2.4. 후기 작품 활동
1968년, 구로사와 아키라, 키노시타 케이스케, 이치카와 곤 그리고 고바야시는 젊은 세대를 위한 영화를 제작하려는 시도로 감독 그룹인 四騎の会Shiki no kai일본어('사기노카이', 사기사 클럽)를 결성했다. 1969년에는 제19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영화에서 하차한 후 《도라! 도라! 도라!》의 일본 시퀀스 연출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대신 후카사쿠 킨지와 마스다 토시오가 선정되었다.
1971년에는 칸 영화제 25주년 기념으로 세계 10대 감독 중 한 명으로 공로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부터 하이유자 영화 방송 제작의 《내 목숨을 걸고》를 감독했으며, 이노우에 야스시의 장편 소설을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함과 동시에 영화로도 제작한 1975년의 《화석》 등 화제작들을 발표했다.
1982년에는 5년에 걸쳐 미국 국방부 보관 필름과 국내외 뉴스 영상 등을 연결하여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을 다룬 장편 기록 영화 《도쿄 재판》을 완성했다. 《도쿄 재판》은 타치바나 타카시 등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난징 사건에 관한 영상에 중국 국민 정부가 제작한 신뢰성이 낮은 《중국지노후》 필름을 삽입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는 등 평가가 엇갈렸다. (다만 작품 내에서는 '이것은 중국 측 필름이다'라는 자막을 표기하여 중립성을 고려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이노우에 야스시 원작의 《둔황》 영화 기획을 오랫동안 구상하며 각본까지 완성했지만, 제작을 결정한 신생 다이에이 사장 토쿠마 야스요시와의 방침 차이로 인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985년에는 엔치 후미코 원작의 연합 적군 사건을 소재로 한 《식탁이 없는 집》을 감독했는데, 이 작품이 그의 마지막 영화 연출작이 되었다.
1990년, 고바야시는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소수장을,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3. 작품 세계와 주제 의식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작품 세계는 일관되게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 존엄성을 탐구하는 비판적 주제 의식을 담고 있다. 그는 특히 전쟁의 참상과 그로 인한 개인의 고통, 그리고 일본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불합리한 권력 구조와 부패를 날카롭게 고발했다.
그의 대표작인 《인간의 조건》 삼부작은 전쟁이 한 평화주의자에게 미치는 비극적인 영향을 통해 전쟁의 무의미함과 인간성 상실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이 작품은 전쟁의 폭력성과 개인의 양심 사이의 갈등을 심도 있게 다루며, 그의 평화주의적 신념을 명확히 드러낸다.
초기작인 《두꺼운 벽의 방》은 무고한 B급 및 C급 전범의 투옥을 통해 연합군 점령 하의 일본 사회와 전쟁 책임 문제를 비판적으로 조명했다. 또한 《당신이 사겠습니다》는 프로 야구의 부패를, 《검은 강》은 미국 기지 주변의 범죄와 매춘을 통해 전후 일본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폭로했다.
그의 사무라이 영화인 《할복》과 《사무라이 반란》은 단순한 시대극을 넘어선다. 이 작품들은 봉건 시대의 사무라이 계급 사회가 강요하는 비인간적인 규율과 명예의 허상을 비판하며,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에 대한 저항을 그린다. 특히 《할복》은 사무라이의 명예로운 자결 의식 뒤에 숨겨진 잔인하고 위선적인 사회 구조를 폭로하며 충격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첫 컬러 영화인 《괴담》은 라프카디오 헌의 일본 괴담을 바탕으로 하지만, 단순한 호러 영화를 넘어선다. 이 영화는 독창적이고 환상적인 미장센, 그리고 다케미츠 토루의 실험적인 음악을 통해 인간 내면의 공포와 비극적인 운명을 시각적으로 구현해냈다. 대규모 세트와 장기간의 촬영, 그리고 미술과 음악의 조화는 이 작품을 시각적, 청각적으로 매우 독특한 예술 작품으로 만들었다.
후기 다큐멘터리인 《도쿄 재판》은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의 과정을 방대한 자료를 통해 재구성하며 역사적 진실에 대한 고바야시의 탐구 정신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복잡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제시하며 관객에게 비판적 사고를 요구한다.
전반적으로 고바야시 마사키의 영화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하며, 부조리한 권력에 저항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일본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반영하며,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질문을 던진다.
4. 필모그래피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이 연출하거나 각본, 기획에 참여한 주요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 《息子の青春Musuko no Seishun일본어》 (1952) - 감독
- 《まごころMagokoro일본어》 (1953) - 감독
- 《この広い空のどこかにKono Hiroi Sora no Dokoka ni일본어》 (1954) - 감독
- 《三つの愛Mittsu no Ai일본어》 (1954) - 감독
- 《美わしき歳月Uruwashiki Saigetsu일본어》 (1955) - 감독
- 《두꺼운 벽의 방》(壁あつき部屋Kabe Atsuki Heya일본어) (1956) - 감독
- 《당신이 사겠습니다》(あなた買いますAnata Kaimasu일본어) (1956) - 감독
- 《泉Izumi일본어》 (1956) - 감독
- 《검은 강》(黒い河Kuroi Kawa일본어) (1957) - 감독
- 《인간의 조건 제1부/제2부》(人間の條件・第一・第二部Ningen no Jōken Dai-ichi, Dai-ni-bu일본어) (1959) - 감독
- 《인간의 조건 제3부/제4부》(人間の條件・第三・第四部Ningen no Jōken Dai-san, Dai-yon-bu일본어) (1959) - 감독
- 《인간의 조건 완결편》(人間の條件・完結篇Ningen no Jōken Kanketsu-hen일본어) (1961) - 감독
- 《뒤얽힌 관계》(からみ合いKarami-ai일본어) (1962) - 감독
- 《할복》(切腹Seppuku일본어) (1962) - 감독
- 《괴담》(怪談Kwaidan일본어) (1965) - 감독
- 《사무라이 반란》(上意討ち 拝領妻始末Jōi-uchi: Hairyō-tsuma shimatsu일본어) (1967) - 감독
- 《일본의 청춘》(日本の青春Nihon no Seishun일본어) (1968) - 감독
- 《내 목숨을 걸고》(いのちぼうにふろうInochi Bō ni Furou일본어) (1971) - 감독
- 《화석》(化石Kaseki일본어) (1975) - 감독
- 《燃える秋Moeru Aki일본어》 (1978) - 감독
- 《도쿄 재판》(東京裁判Tōkyō Saiban일본어) (1983) - 감독
- 《식탁이 없는 집》(食卓のない家Shokutaku no Nai Ie일본어) (1985) - 감독
- 《파열된 북Yabure Daiko일본어》 (1949,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 - 각본
- 《도데스카덴Dodesukaden일본어》 (1970,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 기획
- 《도라헤이타Dora-Heita일본어》 (2000, 이치카와 곤 감독) - 각본
5. 수상 및 영예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이 받은 국내외 주요 수상 경력 및 정부 서훈은 다음과 같다.
수상 연도 | 상 이름 | 수여 기관 | 국가 | 영화 제목 (해당하는 경우) |
---|---|---|---|---|
1960 | 산 조르조상 | 베네치아 영화제 | 이탈리아 | 《인간의 조건》 |
파시네티상 | ||||
1961 | 최우수 작품상 |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 일본 | 《인간의 조건》 |
최우수 감독상 | ||||
1962 | 최우수 작품상 | 《할복》 | ||
1963 | 심사위원 특별상 | 칸 영화제 | 프랑스 | |
1965 | 《괴담》 | |||
1967 | 올해의 최우수 작품상 | 키네마 준보 | 일본 | 《사무라이 반란》 |
최우수 감독상 | ||||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상 |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 | |||
최우수 작품상 |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 일본 | ||
1975 | 최우수 작품상 | 《화석》 | ||
1983 | 최우수 작품상 | 블루리본상 | 《도쿄 재판》 | |
1984 | 자수포장 | 일본 정부 | 일본 | |
1990 | 예술문화훈장 | 프랑스 정부 | 프랑스 | |
욱일소수장 | 일본 정부 | 일본 | ||
1996 | 특별상 |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 ||
1996 | 회장 특별상 | 일본 아카데미상 | 일본 |
6. 개인사
1952년 4월 1일, 고바야시 마사키는 쇼치쿠의 여배우 후미야 치요코와 결혼했다. 그는 또한 6촌 관계인 배우 다나카 키누요의 말년을 돌보았다. 다나카는 암으로 투병 중이었고 빚이 많아 저택이 저당 잡혀 있었다. 고바야시는 다나카의 법적 상속권이나 임대차 증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직접 빚을 내어 저당권을 해제하고 다나카의 입원비까지 부담했다. 다나카가 사망한 후인 1985년, 고바야시 자신이 병으로 쓰러졌을 때, 그의 노력으로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에 다나카 키누요상이 급히 제정되어 일본 영화계 발전에 공헌한 여배우들에게 수여되게 되었다.
7. 사망
만년에 고바야시는 대학 시절 은사였던 아이즈 야이치에 대한 전기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6년 10월 4일, 그는 도쿄도 세타가야구 자택에서 80세의 나이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골은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의 엔가쿠지와 다나카 키누요의 출생지이자 묘지가 있는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의 시립 시모노세키 중앙 영원에 나뉘어 안치되었다.
8. 유산과 평가
고바야시 마사키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일본 사회를 가장 훌륭하게 묘사한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들은 전쟁의 비극, 사회적 부조리, 그리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통해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후대 영화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016년 2월 14일, 그의 탄생 100주년이자 사망 20주년을 기념하여 쇼치쿠 웹사이트에 "영화감독 고바야시 마사키 탄생 100주년 기념 프로젝트"가 개설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 유탁 업무 간사회인 게이유카이(芸游会)와 여러 관련 회사들이 주관했으며, 전국적으로 기념 상영회와 기획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2016년 12월에는 이와나미 쇼텐에서 『영화감독 고바야시 마사키』라는 평전이 출간되었는데, 이 책에는 지인들의 회고록, 본인 인터뷰, 그리고 전시에 작성한 일기 등이 수록되어 그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각도로 조명했다. 또한 2016년 7월 16일부터 9월 15일까지 도쿄 세타가야 문학관에서 "고바야시 마사키전"이 열려 그의 자필 자료 등이 전시되기도 했다. 이러한 기념 사업들은 고바야시 마사키가 일본 영화계에 남긴 예술적 유산과 사회적 반향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9. 외부 링크
- [https://www.imdb.com/name/nm0462030/ 고바야시 마사키 IMDb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