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계응상 박사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문에 정진하여 국내외에서 심도 있는 교육을 받았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북한에서의 활동을 통해 그의 학문적 여정과 사회적 기여가 이어진다.
1.1. 유년기 및 교육
계응상 박사는 1893년 12월 27일 평안도 정주군의 가난한 화전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수안 계씨이다. 어려운 유년기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울과 일본에서 사설 학업을 병행하며 학비를 스스로 마련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농업 분야에서 학사, 석사, 그리고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하지만 졸업 후에도 바로 직업을 얻지 못해 한동안 어려운 생활을 하기도 했다.
1.2. 일제강점기 활동
일제강점기 동안 계응상 박사는 학업을 마친 후 일본과 중국에서 생리학 교수로 활동하였다. 1930년에는 중국 광저우의 한 대학에서 농업 교수로서 8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는 하이퐁, 하노이, 고베, 홍콩 등지를 오가며 과학 연구를 시도했으며, 특히 황해남도 재령군의 잠업 연구소에서 과학 연구를 진행하려 했으나, 일본 제국의 식민 당국의 제약으로 인해 연구에 한계가 있었다. 이 시기 그는 누에의 해부학, 생리학, 유전학에 관한 5편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3. 해방 이후 북한에서의 활동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자, 계응상 박사는 일본과 중국에서의 교육자 활동을 그만두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해방 직후 그는 조선의 잠업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으나, 미군정 치하에서는 연구를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3.1. 월북과 초기 연구 기반 구축
1946년, 계응상 박사는 북한으로 월북하여 평양의학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그는 김일성 당시 조선로동당 위원장을 처음으로 만났다. 김일성은 북한으로 온 계응상 박사를 만나 북한 잠업을 발전시킬 구체적인 방향에 대해 논의하며 그의 연구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3.2. 교육 및 학술 활동
계응상 박사는 과학 연구 성과와 현장에서의 생산 실천적 경험들을 꼼꼼히 기록하고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여 수많은 논문과 과학 기술 도서들을 집필하였다. 1948년에는 교수로 임명됨과 동시에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는데, 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박사증 제1호였다. 같은 해 그는 원산농업대학 잠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중앙잠업시험장의 장장과 원산농업대학 잠학부 부장을 겸임하였다.
1952년 4월에는 조선 과학원의 원사로 선출되었고, 1956년 1월 10일 농업과학위원회가 구성되자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북한 과학계와 정치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3.3. 리센코 학설 비판과 과학적 소신
계응상 박사는 소련의 트로핌 리센코가 주장한 유전학 이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리센코의 이론은 멘델 유전학을 부정하고 "유전자와 환경적 요인이 혼합된 유전"을 주장하며 획득 형질의 유전을 인정했는데, 이는 소련의 영향으로 북한에서 점차 주류 학설로 자리 잡고 있었다.
1949년, 북한은 리센코주의를 지지하며 고전 유전학을 폐지하려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계응상 박사를 해임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리센코주의를 수용하기를 거부하고 고전 유전학에 기반한 연구를 북한에서 계속 이어나갔다.
이와 관련하여 김일성이 직접 개입하여 그의 철직을 막은 일화가 전해진다. 1949년 초가을, 김일성은 당시 중앙잠업시험장 장장이자 원산농업대학 잠학부 부장이었던 계응상 박사를 해임하기로 결정했다는 검열단의 소식을 듣고 급히 중앙잠업시험장을 찾아갔다. 김일성은 검열단에게 철직 결정을 재고하라고 지시하며 그 이유를 추궁했다.
검열단은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는 잠업시험장에서 개발하여 보급한 누에 품종 '국잠43'과 '국잠47'이 생활력이 약해 병으로 인해 농가에 수확을 거두지 못한 피해가 발생했다는 점이었다. 둘째는 그가 연구를 위해 소련에서 "부르주아 학문"으로 비판받던 서구 유전학을 적극적으로 익혔으며, 초파리를 모건 유전학 실험의 주요 소재로 모건 유전학 강의에 이용했다는 점이었다. 검열단은 이를 두고 계응상 박사의 사상성이 의심스러워 우선 보직을 해임하고 사상 검열을 진행할 계획이었다고 보고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과학자들의 사상성을 검열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부 연구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칠 수도 있고 과거 그들이 일제 기관에서 일했던 잘못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과학 연구를 하다 보면 항상 성공만 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들도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억압과 차별을 경험했고 이데올로기적 지향까지는 아니지만 반제국주의에 대한 신념은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인민들의 생활이 더욱 풍요로워지도록 도와주기 위해 밤낮을 잊고 연구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검열단이 다시 "그래도 이미 소련에서 부르주아 학문이라고 판명한 서구 유전학을 따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자, 김일성은 "소련의 결정을 그대로 따른다는 것은 문제가 많다. 소련은 소련의 실정이 있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실정이 있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그 어떤 이론이든지 그의 진리성이 확증되자면 그렇게 인정할 만한 충분한 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논거들 중에서도 실천을 통하여 검증되고 인민들에게 파악된 진리보다 더 위력적인 것은 없다"고 강조했다. 김일성은 계응상 박사가 "새 조국 건설에 절실히 필요한 훌륭한 비단실 누에 품종을 수없이 육종하여 수백만 농민들에게 안겨주었다"며, "우리 인민들이 명주옷뿐만 아니라 비단옷을 입고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데서 이렇게 특출한 공로를 세운 과학자를 조그마한 실수를 이유로 반동 학자라고 규정하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한 잠업시험장을 해산시키려는 시도를 정부의 새로운 인텔리 정책에 반하는 "추태"라고 비판하며, 즉시 회의를 열어 철직 결정을 재고할 것을 명령했다.
계응상 박사는 이처럼 정치적 압력 속에서도 고전 유전학을 고수하며 과학적 진실을 옹호한 소신 있는 과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유전학대회에서 리센코의 농업 이론을 따르면 소련 농업이 붕괴할 것이라고 발언했으며, 소련의 국가 과학원에서 리센코와 직접 학문적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2. 주요 업적
계응상 박사는 평생에 걸쳐 잠업 연구와 품종 개량에 헌신하며 다수의 중요한 과학적 성과를 남겼다. 그의 연구는 북한의 농업 발전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
2.1. 잠업 연구 및 품종 개량
그는 북한의 기후에 적합한 여러 누에 품종을 개발했는데, 특히 "가둑누에 54"와 "가둑누에 64" 품종이 대표적이다. 그는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가둑누에와 피마주누에 (아주까리누에) 고치 생산 기술을 체계화했다. 또한 다양한 뽕누에 품종과 가둑누에 품종을 육성하였다.
특히 주목할 만한 업적으로, 피마주누에 원유종을 출발 재료로 삼고 야생 가중나무누에를 교잡하여 온대 지방에서 겨울을 나는 피마주누에 품종을 세계 최초로 육성해냈다. 이는 특정 환경 조건에 맞춘 새로운 품종을 개발함으로써 잠업 생산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2.2. 주요 저서
계응상 박사는 자신의 연구 성과와 지식을 집대성한 여러 학술 저서를 집필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다음과 같다.
- <작잠학>: 가둑누에에 대한 전문 서적.
- <피마잠>: 피마주누에 (아주까리누에)에 대한 연구를 담은 서적.
- <계응상선집> (1~3권): 그의 생애 동안 발표한 논문과 저술들을 모아 엮은 선집.
3. 사상 및 철학
계응상 박사의 과학 사상과 철학은 고전 유전학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과학적 진리 추구의 중요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과학 연구가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지시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실증적인 연구와 인민의 삶에 대한 실제적 기여를 통해 그 진리성이 입증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특히 리센코 학설에 대한 그의 비판적 입장은 이러한 과학적 소신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는 당시 소련과 북한에서 강요되던 유사 과학적 이론에 굴하지 않고, 유전학의 기본 원리를 굳건히 지키며 과학자로서의 지적 독립성과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과학적 진보가 외부의 간섭 없이 독립적인 탐구 정신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반영한다.
4. 사망
계응상 박사는 1967년 4월 25일, 74세의 나이로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5. 평가 및 유산
계응상 박사는 북한의 과학 기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의 업적과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5.1. 긍정적 평가 및 수상
계응상 박사는 한평생을 누에 연구에 바친 탁월한 유전학자이자 잠학자로 평가된다. 특히 트로핌 리센코의 환경 유전설과 혼합 유전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과학적 소신을 지킨 용기 있는 과학자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조선로동당과 북한 정부는 그의 헌신적인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1963년에 그에게 로력영웅 칭호와 인민상 (공화국 인민상)을 수여했다.
5.2. 영향 및 기념
계응상 박사의 사망 후, 그의 유해는 평양의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그의 학문적 공헌과 교육자로서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0년에는 황해북도 사리원시에 위치한 사리원농업대학이 그의 이름을 따서 계응상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는 그가 북한의 농업 과학 기술 발전에 미친 지대한 영향과 함께, 후대 과학자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