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강우규 선생은 한의사이자 교육자로서 활동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으며, 일제의 국권 침탈에 분개하여 망명길에 오르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1. 출생 및 초기 생애
강우규는 1855년 4월 20일 조선 평안도 덕천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때 경상도 진주시에서 유아기를 보냈고, 밀양시에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는 평안도 덕천으로 귀향한 후 어려서부터 한의학을 깊이 공부하며 의술을 익혔다. 그의 본관은 진주 강씨이다.
1.2. 교육 및 의료 활동
1884년부터 강우규는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이주하여 한의사로서 인술을 베풀었다. 동시에 아이들에게 성리학 학문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 그가 홍원으로 이주한 것은 모종의 애국운동에 연루되어 신변의 위협을 느껴 피신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교회의 학교에서 활동하며 학생들과 주변 한인들에게 항일 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특히 학생들에게 일본의 전쟁 범죄를 비판적으로 가르쳤으며, 때때로 마을 사람들을 학교 강당에 모아 민족의식을 함양하도록 독려했다.
1.3. 상업 활동 및 망명 준비
강우규는 홍원으로 이주한 후 농업 대신 상업에 주로 종사했다. 그는 홍원에 올 때 상당한 액수의 거금을 가지고 왔다고 알려져 있으며, 홍원의 중심가인 남문거리에서 아들 강중건과 함께 잡화상을 운영했다. 이 상점에서는 주로 물감, 담뱃대, 면사, 포목 등을 판매했으며, 상인들에게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며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국운이 기울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조선이 일본에 강점당하자, 당시 50세가 넘는 중노인이었던 강우규는 이에 크게 분개했다. 그는 국권 회복을 위해 망명을 결심하고, 1910년 가을 먼저 큰아들 강중건 부부와 자녀 3명을 하바롭스크가 있는 러시아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이듬해인 1911년 봄, 자신 또한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을 떠나 만주 북간도 두도구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며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졌다.
2. 독립운동 활동
강우규 선생은 만주와 시베리아를 오가며 한인 공동체를 건설하고 교육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헌신했으며, 국내 잠입 후에는 조선 총독 암살이라는 대담한 거사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2.1. 만주 및 시베리아 망명 생활
1914년 강우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 당시 계봉우와 같은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의 뜻을 함께했다. 1915년 그는 지린성 라오허현 요동으로 거주지를 옮겨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모의했다. 그는 요하 주변의 농토를 개간하여 한인촌인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하는 데 헌신했다. 이 신흥촌은 강우규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이후 시베리아와 북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다.
1917년에는 지린성 동화현에 광동중학교를 설립하여 동포 교육에 전념하며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그는 장로교 신자로서 교회의 학교를 활용하여 학생들과 인근 한인들에게 항일 감정을 심어주었다.
1919년 3·1 운동 소식을 접한 강우규는 신흥동에서 독립선포식을 거행하고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또한 광동중학교 학생들과 동포들을 규합하여 여현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조직했다. 그는 단순히 독립운동을 하는 것만으로는 나라의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동휘가 활동하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이승교, 김치보, 박은식 등이 결성한 대한민국노인동맹단에 가입하여 요하연 지부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의 폭을 넓혔다.
2.2. 국내 잠입 및 거사 계획
강우규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자 광동중학교와 신흥촌을 다른 한인 교포에게 넘긴 뒤, 일제 강점기 조선으로 비밀리에 잠입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1919년 러시아인으로부터 수류탄을 구입하고, 허형과 함께 원산부를 거쳐 경성부(현 서울)로 잠입했다. 당시 일본 측의 경비는 입국자들의 짐 검사를 철저히 실시했으나, 60세 이상의 고령자는 예외적으로 면제하는 허점이 있었다. 강우규는 이를 이용하여 수류탄을 하의 속에 차고 들어오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는 국내외 정세와 새로 부임할 총독의 동향을 면밀히 살폈다.
2.3. 사이토 총독 저격 미수 사건
1919년 9월 2일,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후임으로 사이토 마코토가 새로운 조선총독으로 임명되어 부임한다는 소식을 접한 강우규는 사이토의 내한 당일 거사를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현재 서울역인 남대문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터졌으나 사이토 총독을 빗나갔고, 폭발로 인해 주변에 있던 수많은 구경꾼들이 부상을 입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일제 관헌 및 그 추종자 37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여기에는 일본인 경찰과 기자, 그리고 1893년에 암살된 전 시카고 시장 카터 해리슨 시니어의 친척인 미국인 등 다수의 민간인도 포함되었다. 이 사건으로 남대문역 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일본 측에서는 이 사건을 '테러리즘'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3. 체포, 재판 및 순국
사이토 총독 저격 미수 사건 이후 강우규 선생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법정에서도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다가 결국 순국하여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남았다.
3.1. 체포 및 재판 과정
거사 직후 강우규는 현장에서 몸을 피하여 오태영의 소개로 장익규, 임승화 등의 집에 숨어 지냈다. 그러나 도피 중이던 그는 독립운동 탄압과 검거를 전문으로 하던 조선총독부 고등계 형사 김태석에게 체포되어 그해 9월 17일 수감되었다. 이 폭탄 투척 사건과 관련하여 강우규 외에도 5명이 추가로 체포되었다. 그는 총독부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총독 암살 미수 혐의와 민간인 사상 혐의로 사형을 구형받았다. 강우규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당하기까지 법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고 시종일관 당당한 태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2. 순국과 유언
강우규는 사형 선고가 확정된 후에도 매일 성경을 읽고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며 평온한 마음으로 마지막 날을 기다렸다. 1920년 11월 29일,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며,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옥중에서 강우규는 아들 강중건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마라. 평생 조국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부끄럽다. 잠시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젊은이들의 교육이다. 내 죽음이 젊은이들의 마음에 작은 자극이라도 준다면,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바이다." 그는 또한 비공식적으로 자신의 유언을 전국 학교와 교회에 전파해달라고 당부했다.
순국 직전, 그는 다음과 같은 한시를 남겼다. 이 시는 현재 독립기념관에 어록비로 보존되어 있다.
단두대상에 홀로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斷頭臺上 猶在春風)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有身無國 豈無感想)
4. 사후 평가 및 영향
강우규 선생은 순국 후에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서훈되었으며, 그의 의거는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4.1. 서훈 및 기념
강우규의 유해는 처음에는 현재 은평구 신사동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54년 수유리로 이장되었고, 1967년에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3월 강우규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여 그의 공훈을 기렸다.
2011년 9월 2일, 강우규 의사 기념사업회는 3년간 모금한 기금과 정부 지원금을 포함한 총 8.20 억 KRW를 재원으로 하여 서울역 앞에 높이 4.9 m에 달하는 강우규 동상을 건립했다. 이 동상은 그가 폭탄을 투척했던 서울역 바로 앞에 위치하여 그의 의거를 기리고 있다.
독립기념관에는 그의 순국 직전 남긴 한시가 새겨진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강우규의 유가족으로는 아들 강중건이 있었으나 2015년에 별세했으며, 손녀 강영재 또한 1985년에 별세하여 후손은 절손되었다.

4.2. 역사적 평가 및 비판
강우규의 의거는 다양한 역사적 평가를 받아왔다. 당시 경기도 경찰부장이었던 지바는 강우규에 대해 "미운 마음은 없습니다. 입장을 바꿔보면 강우규는 우국지사였습니다."라고 평가하며 그의 행동에 대한 경외감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대의 일부 인물들은 그의 행동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 윤치호는 강우규의 폭탄 투척 소식을 듣고 "어떤 얼간이가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는데, 그를 빗나간 폭탄으로 인해 몇몇 구경꾼이 부상당했다는 에비슨 박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경악했다.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조선인들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이 한일 병합을 촉진했다는 사실을 잊었단 말인가. 바보들 같으니."라고 비판하며, 테러리즘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측에서는 이 사건을 다수의 민간인을 사상시킨 '테러'로 규정하기도 했다.

4.3.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강우규의 의거는 1919년 3·1 운동 이후 발생한 최초의 대규모 의열 투쟁이었다. 이는 새로 부임하는 조선총독 사이토에게 강력한 경고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그의 의거는 물론, 체포된 후 재판 과정과 수형 생활, 그리고 처형 과정에서도 시종일관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재판 과정 자체가 독립운동의 연속선상에서 많은 한인들에게 깊은 감동과 영감을 주었다. 강우규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서, 동포들의 독립 의지를 더욱 확고히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순국은 젊은 세대의 각성을 촉구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되어, 이후의 독립운동에 중요한 정신적 동력이 되었다. 사건 이후 일본은 한반도 내 경찰 병력을 12,000명에서 20,000명으로 증강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