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かいふ としき일본어, 1931년 1월 2일 ~ 2022년 1월 9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89년 8월 10일부터 1991년 11월 5일까지 제76대 및 제77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아이치현 나고야시에서 태어나 주오 대학과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1960년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된 이래 16선 의원으로 48년간 봉직하며 일본 정치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가이후는 리크루트 사건 등 일련의 정치 스캔들로 인해 다케시타 노보루와 우노 소스케 전 총리들이 사임한 혼란스러운 시기에 "깨끗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총리직에 올랐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일본은 버블 경제의 정점에 있었으나, 그는 국내적으로는 정치 개혁을 추진하고 국제적으로는 걸프 전쟁에 대한 기여를 통해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재정립하려 노력했다. 특히,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에 대한 외교적 고립을 해소하고, 자위대의 첫 해외 파견을 성사시키는 등 적극적인 외교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당내 기반이 약했던 그는 정치 개혁 시도가 좌절되면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퇴임 직전까지 높은 내각 지지율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내 반대 세력에 의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임한 '불완전 연소'의 총리로 평가받기도 한다.
2. 생애 및 배경
가이후 도시키는 1931년 1월 2일 나고야시 히가시구 나나마가리초(현 히가시구 히가시사쿠라 1초메)에서 6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업은 조부가 메이지 시대에 창업한 '나카무라 사진관'으로, 마쓰자카야 백화점 나고야 본점 북쪽에 위치했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1943년 3월, 나고야 시립 미나미히사야 국민학교(현 나고야 시립 사카에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구제 아이치이치중(현 아이치현립 아사히가오카 고등학교) 시험에 응시했으나 불합격했다. 같은 학교에서 시험을 본 11명 중 9명이 합격했지만, 가이후를 포함한 2명은 떨어졌다.
같은 해 4월, 구제 도카이 중학(현 도카이 중학교·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학도 동원으로 인해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히가시구 다이코초 공장에서 항공기 엔진 부품 조립에 매일 밤낮으로 매달렸다. 1945년에는 소년 비행병 학교에 합격하여 10월 입교가 결정되었으나, 입교 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었다.
구제 주오 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한 후에는 고노 긴쇼 의원의 비서가 되었다. 이후 신제 와세다 대학 제2법학부 법률학과에 편입했다. 주오 대학 재학 중에는 주오 대학 사달학회(변론부)에, 와세다 대학 재학 중에는 와세다 대학 웅변회에 소속되어 변론 실력을 갈고닦았다. 1956년에는 와세다 대학 대학원 법학연구과 석사 과정을 중퇴하고 학생 시절부터 맡았던 고노 긴쇼의 비서직에 전념했다.
3. 초기 정치 경력

1957년 11월 17일, 그는 기후현 미노시 출신의 여성인 야나기하라 사치요와 결혼했다. 그녀는 당시 중의원 의원이었던 야나기하라 사부로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1958년 3월 29일, 고노 긴쇼가 급사하자 가이후는 후계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었으나, 미키 다케오의 판단으로 고노의 아내인 고노 다카코가 지역구를 물려받게 되었다. 같은 해 4월 20일, 가이후는 다카코의 공설 비서가 되었고, 5월 22일 치러진 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다카코는 처음으로 당선되었다.
1960년 9월 16일, 고노 다카코를 대신하여 비서였던 가이후가 차기 중의원 선거 구 아이치현 제3구에 출마하기로 결정되었다. 같은 해 11월 20일 치러진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그는 전국 최연소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이후 16선 의원으로 총 48년간 봉직했다.
1960년 12월, 자민당 청년국 학생부장에 취임했다. 1964년에는 해외청년협력대 구상을 정리하고 아프리카를 횡단 조사하며 해당 단체의 창설에 힘썼다. 1965년에는 자민당 청년국장이 되었다.
1971년경까지 이치노미야시 신세이에서 셋집에 살다가, 이후 같은 시 헤이와잇초메에 자택 겸 사무실을 마련했다. 그는 미키파에서 고모토파로 전환된 이후 1994년 탈당할 때까지 고모토 도시오를 실질적인 2인자로서 지지했다. 그러나 고모토와 달리 자금 기여가 적어 '지갑 폐쇄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시모토 류타로, 후지나미 다카오 등과 함께 '네오 뉴 리더'로 불리며 차기 리더를 노리는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와세다 대학 웅변회 선배인 다케시타 노보루 등 와세다 출신들과의 친분이 깊어 '현 주소 고모토파, 본적 다케시타파'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4. 정치 경력 및 공직
가이후 도시키는 오랜 기간 중의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주요 공직을 수행했다.

1966년 노동정무차관, 1972년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 1973년 자민당 인사국장, 1974년 자민당 부간사장 등 요직을 역임했다.
4.1. 장관 재임
1974년에는 미키 내각의 내각관방부장관으로 취임했다. 그는 내각관방장관 이데 이치타로를 대신하여 랑부이예 정상회의 조정을 담당했으며, 1975년 파업권 파업 문제 발생 시에는 정부의 창구로서 노정 교섭 및 야당 대응, 언론 토론을 담당했다.
1976년 9월,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12월, 후쿠다 다케오 내각에서 문부대신으로 첫 입각했다. 그는 이시하라 신타로와 함께 쇼와 시대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장관이 되었다. 1985년 제2차 나카소네 내각에서 다시 문부대신을 지냈다. 문부대신 재임 시절의 주요 업적으로는 '대학 공통 1차 학력시험' 도입이 꼽힌다.
4.2. 총리 재임
1989년 7월 24일, 우노 소스케 총리가 제1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 당시 주요 유력 의원들은 대부분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책임을 지고 탈당했고, 아베 신타로, 미야자와 기이치, 와타나베 미치오 등 뉴 리더들은 자민당이 정한 '1년간 또는 다음 총선거까지 당직을 사퇴한다'는 내규의 대상이 되어 근신 중이었다. 이로 인해 4대 파벌 모두 총재 후보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케시타 노보루는 와세다 대학 웅변회 후배이자 친분이 깊은 가이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가이후의 깨끗한 이미지는 리크루트 사건 이후의 상황에 적합했으며, 재등판을 염두에 두고 영향력을 유지하려던 다케시타에게는 젊지만 결정적인 세대교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선호되었다. 무엇보다 중소 파벌 출신으로 독자적인 강력한 정치 기반이 없는 가이후는 다케시타가 통제하기 쉬운 존재였다.
7월 29일, 가이후는 가족과 함께 야쓰가타케 산기슭의 호텔로 피신했다. 이 무렵 가이후도 각오를 굳히고 가족에게 "나도 정치인으로서 죽어야 하니, 그 전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가족 모두가 반대했다. 이틀 밤을 보내고 도쿄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비로소 아내가 뜻을 굽혔다.
8월 2일, 가이후는 기자회견을 열고 총재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같은 해 8월 8일 치러진 1989년 8월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는 가이후 외에 미야자와파의 지원을 받은 니카이도파의 하야시 요시로와 아베파의 이시하라 신타로가 입후보했다. 모두 파벌의 수장이 아니라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총재 선거였으나, 최대 파벌인 다케시타파의 지지를 얻은 가이후가 두 후보를 제치고 자유민주당 총재로 선출되었다.
4.2.1. 제1차 및 제2차 내각

참의원 선거 결과 자민당이 과반수 의석을 잃으면서 뒤틀린 국회 상황이 되었다. 총리 지명 선거에서는 자민당이 여전히 과반수를 차지한 중의원에서는 가이후를, 야당이 과반수를 확보한 참의원에서는 일본사회당 위원장 도이 다카코를 지명했다. 일본국 헌법 제67조 제2항 규정에 따라 양원협의회에서 협의했으나, 양원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중의원에서 지명된 가이후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가이후는 최초의 쇼와 시대 출신 총리이기도 하다.
가이후가 총리에 취임할 무렵은 거품 경제의 한가운데로 경제는 호황이었지만, 이른바 리크루트 사건 등으로 국민들 사이에 정치 불신이 강해져 있었다. 그만큼 참신한 이미지로 등장한 가이후에게 당 안팎의 기대감이 컸다. 그는 내각 구성 시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정치인 대신, 리크루트와 관계가 적은 정치인들을 우선적으로 기용했다. 이로 인해 당내 불만이 고조되었고, 이는 훗날 정치개혁 4법이 폐기되는 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제1차 가이후 내각 출범 직후, 내각관방장관 야마시타 도쿠오의 여성 스캔들이 불거졌다. 가이후는 즉시 야마시타를 경질하고, 환경대신 모리야마 마유미를 여성 최초의 관방장관으로 임명했다(후임 환경청 장관은 시가 세쓰). 그는 각종 행사에 부부가 동반 참석하는 등 여성층의 지지 확대를 꾀했다.
가이후에게 첫 번째 큰 과제는 총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중의원 임기 만료가 임박한 가운데, 자민당은 다음 총선거에서 참의원 선거와 같은 패배를 피해야만 했다. 그 결과, 1990년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을 대승으로 이끌었다. 자민당은 단독으로 275석을 얻었고, 보수계 무소속 11석을 더해 286석으로 과반수를 넘겼다. 1990년에는 총리로서 아키히토 천황의 즉위의 예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1990년 9월 28일, 뉴욕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1991년 7월 10일 보스턴 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4.2.2. 정치 개혁 시도
가이후는 당내 기반이 취약했다. 그가 총재 선거에서 승리한 것 자체가 전 총리 다케시타가 자신의 파벌 수로 가이후를 밀어붙인 것에 불과했다. 예를 들어, 제1차 가이후 내각 발족 시에는 총리 지명 1시간 후에 먼저 당 3역이 결정되었고, 즉시 오자와 이치로 신임 간사장 등이 당 본부 간사장실에서 각 파벌과 연락하며 가이후 없이 내각 구성을 진행했다. 옆 응접실에서 기다리던 가이후는 일절 관여하지 못했다. 그 후 총리 관저로 가이후와 3역이 이동하여 오자와 등의 인선 그대로 정식 내각 구성이 진행되었고, 총리 지명 후 불과 5시간 만에 신임 각료 명단이 발표되었다.
이시하라 노부오의 회고록에는 "가이후는 중요한 법안 등을 결정할 때 가네마루 신, 다케시타 노보루 양 씨의 판단을 구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자민당 간사장 오자와 이치로로부터도 "가이후는 정말 바보구나. 우노가 훨씬 낫다"는 혹평을 받았다. 이는 오자와의 "짊어질 가마는 가볍고 멍청한 게 좋다"는 발언과 함께 가이후의 당내 영향력 부족을 보여주는 사례로 인용되기도 한다. 이처럼 가네마루, 다케시타, 오자와로 이어지는 '금죽소(金竹小)' 라인이 가이후 이상으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가이후는 소선거구제 도입 반대파인 가토 고이치, 야마자키 다쿠,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YKK' 등 당내 맹렬한 총리 퇴진 운동에 직면했다. 그는 정치개혁 4법의 성립에 의욕을 불태웠으나, 국회에서 심의 미진으로 폐기되자 "중대한 결의로 임하겠다"고 발언했다. 이는 중의원 해산을 의미하는 발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총리에게 '비장의 카드'로 불리는 중의원 해산권은 총리대신의 전권 사항이다. 그러나 자민당 내 반가이후 세력으로부터 강한 반대가 일어났다(가이후 끌어내리기). 결국 가이후를 지원해야 할 다케시타파 친오자와 세력마저 명확하게 해산 반대를 표명하면서, 가이후는 해산을 단행하지 못했다.
4.2.3. 외교 정책


1991년, 걸프 전쟁 전비로 다국적군에 130.00 억 USD의 자금 제공을 결정했다. 처음에는 전후 쿠웨이트 신문에 실린 감사 광고에 일본의 국기가 게양되지 않았으나, 이후 수정되었다. 130.00 억 USD라는 막대한 지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적 지원은 전쟁 종결 후 자위대가 소해정을 파견한 것에 그쳐 '수표 외교', '투 리틀, 투 레이트(too little, too late, 너무 적고 너무 늦다)'라는 국내외 비판을 받았다. 정전 후, 자위대 창설 이래 첫 해외 실전 임무로 해상자위대 소해 부대를 페르시아만에 파견했다.
1991년에는 소련 정상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본을 방문한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회담했다.

천안문 사건 이후, 휴스턴의 제16회 선진국 정상회의에서 엔 차관 재개를 표명하고, 세계적으로 고립되었던 중국에 천안문 사건 이후 서방 선진국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방문하여 엔 차관을 재개시켰다. 휴스턴 정상회의를 앞두고 가이후는 대중 제재 반대파인 나카소네 야스히로, 스즈키 젠코,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들로부터 제재 해제를 압박받았다. 가이후 본인은 "중국에 대해 원칙을 관철했다"고 말하며, 방중 시 천안문 광장에서 헌화를 통해 천안문 사건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미국 의회와 대립할 정도로 제재 전면화에 소극적이었으며, 비밀리에 헨리 키신저나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를 중국에 파견하여 민주화 운동가 팡리즈의 출국을 둘러싼 협상을 진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팡리즈의 출국을 조건으로 일본이 중국에 융자 재개를 제안했다는 설도 있으며, 부시 대통령은 제16회 선진국 정상회의에서 대중 엔 차관 재개를 표명한 가이후 총리에게 동조했다.
1991년에는 민주화 이후 첫 대한민국 대통령인 노태우와 회담하여 현안이었던 재일 한국인의 지문 날인 폐지를 약속했고, 이후 이는 실행되었다. 또한, 총리 재임 당시 야스쿠니 신사에 공식 참배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모처럼 형성된 한일 간의 우호 관계를 심각하게 망쳐버린다"는 일본의 철학자 우메하라 다케시의 만류로 야스쿠니 참배 법안 제정을 중단하기도 했다.
4.2.4. 내각 총사퇴
걸프 위기나 유엔 평화협력법안 폐기 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정권 지지율은 대체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며 가이후는 정권 운영에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정치개혁 4법의 성립에 의욕을 불태웠으나, 국회에서 심의 미진으로 폐기되자 "중대한 결의로 임하겠다"고 발언했다. 이는 중의원 해산을 의미하는 발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총리에게 '비장의 카드'로 불리는 중의원 해산권은 총리대신의 전권 사항이다. 그러나 자민당 내 반가이후 세력으로부터 강한 반대가 일어났다(가이후 끌어내리기). 결국 가이후를 지원해야 할 다케시타파 친오자와 세력마저 명확하게 해산 반대를 표명하면서, 가이후는 해산을 단행하지 못했다. 또한, 그동안 가이후를 지지해왔던 다케시타파 친오자와 세력이 가이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미야자와 기이치, 미쓰즈카 히로시, 와타나베 미치오 등 반가이후 파벌의 수장들이 총재 선거 출마를 표명했다. 이로 인해 가이후를 지지하는 세력은 자신의 소수 파벌인 고모토파뿐이 되었고, 총재 선거에서 재선될 길은 막혔다.
1991년 11월 5일, 가이후는 총리대신직을 사임했다. 재임 중에는 다케시타파에 발목이 잡혀 뜻대로 정권 운영을 하지 못했으며, PKO(유엔 평화유지활동)나 정치 개혁과 같은 중요 과제는 다음 정권으로 넘어갔다. 거품 경제 말기와 냉전 체제 종식이라는 격동의 시기에 총리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이후 본인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흔적은 거의 없으며, 정권으로서 눈에 띄는 실적은 미미하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실정이 있었다고 여겨지지도 않았고, 그의 깨끗하고 상쾌한 이미지는 뿌리 깊은 국민적 지지를 계속 얻었다. 재임 중 내각 지지율은 최고 64%에 달했으며, 퇴임 직전에도 50%를 넘는 등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완전 연소 속에서 퇴진했다.
총리 재임 일수 818일은 일본국 헌법 하에서 중의원에서 내각 불신임 결의가 가결되지 않은 내각의 총리 중 최장 기록이다.
5. 정당 활동 및 지도력
가이후 도시키는 자유민주당 내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당내 파벌과의 관계 속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1994년 6월 29일, 자민당 총재 고노 요헤이가 당의 정권 복귀를 위해 일본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와 자사사 연립 정권 구상에 합의하고, 총리 지명에서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 투표하기로 결정하자, 가이후는 이를 거부하고 자민당을 탈당했다.
5.1. 신진당 대표
같은 해 7월, 자유개혁연합을 결성하고 대표에 취임했다. 같은 해 12월 10일, 신진당을 창당하고 초대 당수에 취임했다. 자민당 총재를 지낸 인물이 탈당하여 다른 당의 당수가 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2024년 현재 유일한 사례). 같은 구 아이치 3구 출신인 에자키 테쓰마도 신진당 창당에 참여했다.
1994년 11월 21일, 정치개혁 4법에 따른 소선거구의 구체적인 구획 법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가이후와 에자키 테쓰마는 이치노미야시를 포함하는 아이치 10구의 공천을 주장하며 양보하지 않았으나, 1995년 3월 17일 신진당 본부의 조정으로 가이후는 아이치 9구, 에자키는 아이치 10구로 결정되어 두 현직 의원 간의 충돌은 피할 수 있었다.
5.2. 자유민주당 복당
신진당 분당 후 1년 1개월간 무소속 생활(원내 교섭단체 '무소속의 회')을 거쳐, 자민당과의 연립 정권에 참여한 자유당에 입당했다. 2000년 자유당 분열 시에는 자민당 연립 지속파인 보수당에 소속되었다.
보수신당으로 개편하여 임한 2003년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당 신인 오카모토 미쓰노리에게 비례대표 부활을 허용했지만, 소선거구에서 승리하여 연속 당선 기록을 이어갔고, 선거 직후 흡수 합병되는 형태로 자민당에 복당했다. 복당 후에는 옛 고모토파의 후계인 다카무라파로 돌아가지 않고, 니카이 도시히로 등 함께 복당한 옛 보수신당 의원들과 니카이 그룹을 결성했다. 자민당 복당 당시 자민당 간사장 아베 신조로부터 복당을 "두 팔 벌려 환영한다"는 말을 들었으며, 탈당 당시 철거되었던 가이후의 초상화도 다시 걸렸다.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소선거구에서 민주당의 오카모토에게 8만 표 이상의 큰 차이로 참패했고, 당의 73세 정년제 때문에 중복 입후보할 수 없어 비례대표로도 부활하지 못하고 낙선했다. 같은 날 정계 은퇴를 표명했다. 가이후는 총리 재임 중의 성과를 강조하며 선거에 임했지만, 가이후의 총리 시절을 모르는 젊은 세대 유권자가 늘어난 것도 낙선의 한 원인으로 꼽힌다. 총리 경험자가 낙선한 것은 1963년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이시바시 단잔, 가타야마 데쓰 이후 46년 만이었으며, 자민당 총재 경험자로는 이시바시 이래 두 번째였다. 해산 당시 가이후의 연속 당선 횟수는 16회, 근속 연수는 48년 9개월로 중의원 의원 중 현직 최고였다. 이때 당선되었더라면 오자키 유키오나 스승인 미키 다케오 등에 이어 중의원 의원 재직 50년에 도달할 수 있었다.
6. 개인 생활
1957년 11월 17일, 가이후는 중의원 의원 비서였던 야나기하라 사치요와 결혼했다. 부부 사이에는 아들 가이후 마사키와 딸 무쓰미가 있다.
7. 사망
정계 은퇴 후 가이후는 세계연방운동 협회 회장, 일본 소프트 테니스 연맹 회장, 다이쇼금 협회 이사장, 일본 티볼 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미키 무쓰코가 이사를 맡은 주오 정책 연구소의 최고 고문을 지냈다. 2010년에는 회고록 『정치와 돈』을 신초 신서에서 출판했다.
2011년 오동대수장을 수훈했다. 같은 해 6월 29일,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 명예 시민 칭호를 받았다. 같은 해 12월 3일, 아이치현 명예 현민 칭호를 수여받았다. 2012년 3월, 중화민국의 국립중앙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같은 해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 입후보한 마치무라 노부타카의 예방을 받고 격려했다. 2014년부터 주니치 신문 현내판(아이치현 지면)에 『가이후 도시키 회상록』을 연재했다. 또한, 칭화 대학의 출자를 받는 도키추카 싱크탱크의 고문을 맡기도 했다.
2019년 11월 29일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사망하면서, 총리 경험자 중 최연장자가 되었다. 또한, 당시 생존한 총리 경험자 중에서는 무라야마 도미이치(1924년 3월 3일생)에 이어 두 번째로 고령자가 되었다. 최고령 총리 경험자와 최연장 총리 경험자가 다른 것은 1993년 12월 16일 다나카 가쿠에이가 사망한 이래 처음이었다(다나카는 사망 당시 최연장 총리 경험자였으나, 최고령 총리 경험자는 후쿠다 다케오였다).
가이후는 2022년 1월 9일 오전 4시, 도쿄도 내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향년 91세. 그의 사망 발표는 언론에 1월 14일까지 지연되었다. 일본 정부는 1월 18일 각의에서 정2위 서위와 대훈위 국화대수장 추서(사후 서훈)를 결정했다. 가이후의 사망에 따라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최연장 총리 경험자가 되었다(최고령은 무라야마 도미이치 유지).
8. 평가 및 유산
가이후 도시키의 정치 경력은 혼란스러운 시기에 일본을 이끌었던 총리로서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8.1. 긍정적 기여
가이후는 리크루트 사건 등으로 정치 불신이 팽배했던 시기에 "깨끗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총리에 취임하여 국민들의 기대를 모았다. 그는 취임 직후 야마시타 도쿠오 관방장관의 스캔들에 신속히 대응하고 모리야마 마유미를 여성 최초의 관방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개혁적인 모습을 보였다. 1990년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을 대승으로 이끌며 당의 위기 극복에 기여했고, 아키히토 천황의 즉위의 예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문부대신 재임 시절에는 '대학 공통 1차 학력시험' 도입을 추진하며 교육 개혁에 힘썼다. 또한, 청년 해외 협력대 창설에 기여하는 등 젊은 세대의 국제 활동을 지원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내각 지지율이 높게 유지되었던 것은 그의 청렴하고 상쾌한 이미지 때문으로 평가된다.
8.2. 비판 및 논란
가이후 내각은 당내 기반이 취약하여 '금죽소(金竹小)'로 불리는 가네마루 신, 다케시타 노보루, 오자와 이치로 등 당내 실력자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는 그가 총리로서 정치적 주도권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중요한 정책 결정에서 당내 파벌의 눈치를 봐야 했던 한계로 지적된다. 특히, 그가 강한 의지를 보였던 정치 개혁 관련 법안이 당내 반대로 인해 폐기되고, 결국 총리직 사임으로 이어진 것은 그의 정치적 역량의 한계 또는 당내 역학 관계의 희생양으로 해석될 수 있다.
걸프 전쟁 시 130.00 억 USD라는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위대의 인적 파견이 전쟁 종결 후에야 이루어진 점은 '수표 외교' 또는 '투 리틀, 투 레이트(too little, too late, 너무 적고 너무 늦다)'라는 국내외 비판을 받았다. 이는 일본이 국제 사회에서 경제력에 걸맞은 정치적, 군사적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비판으로 이어졌다. 또한,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에 대한 엔 차관 재개를 추진한 것은 국제 사회의 대중 제재 기조와는 다른 행보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8.3. 일본 정치에 미친 영향
가이후 도시키는 버블 경제 붕괴 직전과 냉전 종식이라는 격동의 시기에 총리직을 수행하며 일본의 대내외적 전환기를 이끌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자위대의 첫 해외 실전 파견이 이루어졌고, 이는 일본의 방위 정책에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또한, 그가 추진했던 정치 개혁 시도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의 정치 개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2009년 총선에서 낙선하며 1955년 이래 거의 중단 없이 이어져 온 자민당의 장기 집권이 끝나는 상징적인 순간의 한 축을 담당했다. 총리 경험자로서 46년 만에 재선에 실패한 사례는 일본 정치사에 큰 의미를 남겼으며, 이는 유권자들의 변화된 정치 의식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었다. 그의 청렴한 이미지는 정치 스캔들로 얼룩진 시대에 국민들에게 잠시나마 희망을 주었으며, 이는 훗날 정치인들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리더십의 한 형태로 기억될 수 있다.
9. 수상 및 영예
가이후 도시키는 생애 동안 다음과 같은 주요 훈장과 영예를 받았다.
- 페루 태양의 훈장 대십자 (1989년)
- 오동대수장 (2011년)
- 대훈위 국화대수장 (사후 서훈, 2022년)
- 명예 아이치현민장 (2011년)
- 이치노미야시 명예 시민 (2011년)
- 뉴욕 대학교 명예박사 (1990년)
- 보스턴 대학교 명예법학박사 (1991년)
- 국립중앙대학 명예박사 (2012년)
10. 선거 기록
선거 | 연령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 선거 결과 |
---|---|---|---|---|---|
1960년 총선거 | 29 | 아이치 3구 | 자유민주당 | 49,767 | 당선 |
1963년 총선거 | 32 | 아이치 3구 | 자유민주당 | 57,586 | 당선 |
1967년 총선거 | 36 | 아이치 3구 | 자유민주당 | 80,874 | 당선 |
1969년 총선거 | 38 | 아이치 3구 | 자유민주당 | 82,695 | 당선 |
1972년 총선거 | 41 | 아이치 3구 | 자유민주당 | 87,733 | 당선 |
1976년 총선거 | 45 | 아이치 3구 | 자유민주당 | 151,151 | 당선 |
1979년 총선거 | 48 | 아이치 3구 | 자유민주당 | 119,049 | 당선 |
1980년 총선거 | 49 | 아이치 3구 | 자유민주당 | 145,322 | 당선 |
1983년 총선거 | 52 | 아이치 3구 | 자유민주당 | 123,415 | 당선 |
1986년 총선거 | 55 | 아이치 3구 | 자유민주당 | 133,829 | 당선 |
1990년 총선거 | 59 | 아이치 3구 | 자유민주당 | 195,713 | 당선 |
1993년 총선거 | 62 | 아이치 3구 | 자유민주당 | 194,863 | 당선 |
1996년 총선거 | 65 | 아이치 9구 | 신진당 | 111,578 | 당선 |
2000년 총선거 | 69 | 아이치 9구 | 보수당 | 122,175 | 당선 |
2003년 총선거 | 72 | 아이치 9구 | 보수신당 | 104,075 | 당선 |
2005년 총선거 | 74 | 아이치 9구 | 자유민주당 | 130,771 | 당선 |
2009년 총선거 | 78 | 아이치 9구 | 자유민주당 | 100,549 | 낙선 |
11. 저서
- 『모범 스피치 385선』 유키 서방, 1968년 1월 1일
- 『미래를 향한 선택: 창조와 충실의 시대로』 도쿠마 서점, 1981년 3월 19일
- 『21세기를 지향한다: 가이후 도시키 대담집』 교도 통신사, 1985년 6월 24일
- 『뜻있는 국가 일본의 구상』 도요케이자이 신보사, 1995년 7월 27일
- 『정치와 돈 - 가이후 도시키 회고록』 신초 신서, 2010년 11월 20일
- 『가이후 도시키 회상록 - 자아작고』 인간사, 2015년 12월 1일 (초판: 『주니치 신문』 2014년 6월 24일 ~ 2015년 3월 25일 연재, 총 57회)
11.1. 공저
- 『뉴 미디어 르네상스 다채로운 필진이 내다보는 뉴 미디어의 미래상』 자유민주당 쇼와회 공저. 기오이 서방, 1985년 6월
- 『몽골 말 다라이후레그의 기적 일본과 몽골 우호의 가교가 된 명마 이야기』 시모다 가게키 공저, 사사모리 시키 그림, 모미야마 사에코 영역, 미야타 오사무 기획·감수. Kiba book, 2006년 7월
12. 일화 및 개인적 특징
12.1. 중국 방문
가이후는 난징 대학살에 대해 일본군의 학살을 인정한 입장을 취했다. 2010년 중국의 초청으로 방중했을 때 난징 대학살 논쟁에 언급하며 "일본은 역사상 난징 시민에게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한 정치인으로서 난징 시민에게 깊이 사과드리고 싶다"고 사죄했다.
12.2. 넥타이

물방울 무늬 넥타이를 트레이드마크로 삼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미키 내각의 관방부장관 시절 국철의 파업권 파업 문제로 TV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업무 처리로 바빠 귀가조차 어려웠던 시기라 우연히 같은 물방울 무늬 넥타이를 연일 착용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시청자들로부터 지적이 들어왔다. 이를 계기로 의도적으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삼게 되었다. 당시 이 토론 프로그램에서 그는 공공기업체 등 노동조합협의회 사무국장이었던 도미즈카 미쓰오에게 자신의 변론 경험을 살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변설을 선보이며 "자민당에 가이후가 있다"는 평을 듣고 이후 출세 가도를 걷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총리 시절에는 물방울 무늬 넥타이만 600개 이상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평화 기념식에도 검은색 바탕에 검은색 물방울 무늬 넥타이를 하고 참석할 정도로 철저했다(겉으로는 상복용 검은 넥타이지만, 밝은 곳에서 보면 희미하게 물방울 무늬가 보였다). 또한, 쇼와 천황의 대례에서도 같은 검은색 바탕에 검은색 물방울 무늬 넥타이를 하고 주목을 받았다.
12.3. 변론
구제 도카이 중학 시절에는 직접 변론부를 창설하여 지구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일찍부터 변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구제 주오 대학 전문부 법과 입학 후에는 주오 대학 사달학회(변론부)에 소속되어 수많은 변론 대회에서 활약했다. 주오 대학 졸업 후 한때 법무성에 사무관으로 입사했으나 퇴직하고, 고향 선배 의원 고노 긴쇼의 서생(의원 비서)으로 일하며 고노의 모교이기도 한 와세다 대학 제2법학부 법률학과에 편입하여 와세다 대학 웅변회에 소속되었다. 와세다 대학 재학 중에는 웅변회에서 변론술 연마 및 인맥 형성에 힘썼다. 학생 변론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에는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와세다 대학 총장 도키코야마 쓰네사부로로부터 "가이후 군(의 연설)을 능가하는 자는 없다. 가이후 이전에 가이후 없고, 가이후 이후에 가이후 없다"는 평을 받았다. 동년배의 웅변회 동료로는 와타나베 쓰네오 등이 있었으며, 이 시기에 쌓은 인맥이 정계 입문 후 큰 힘이 되어 소수 파벌의 2인자이면서도 총리직을 얻는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에는 단독 강화 반대를 주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12.4. '29'와의 인연
1960년 치러진 제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고노 긴쇼 사망 후 후계자로 출마하여 1기 의원을 지낸 미망인 고노 다카코의 후계자로서 출마했다. 응원 연설을 온 이데 이치타로가 던진 "지갑은 잃어도 가이후는 잃지 마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인기가 폭발하여 당선되었다. 이때 가이후의 나이는 29세였으며, 처음 들어간 의원회관 방도 29호실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29회 총선거에 29세로 당선되었으니, 29년 후 총리대신이 되어 은혜를 갚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자민당 내에서 비주류인 미키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총리가 되는 것이 현실적인 이야기로 여겨지지 않았고, 본인도 강연회 등에서 반쯤 농담 삼아 이 이야기를 사용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29년 후인 1989년, 공언대로 총리대신 취임이 실현되었다.
12.5. 비서
총리직에 오르면서 많은 비서들이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 다나카 시텐 - 전 이누야마시 시장, 전 아이치현 의회 의원.
- 구마다 히로미치 - 중의원 의원, 전 아이치현 의회 의원.
- 나가사카 야스마사 - 중의원 의원, 전 아이치현 의회 의원.
- 이와무라 신지 - 전 아이치현 의회 의원, 전 의장. 사설 비서 폭행 사건이 드러나 2019년 아이치현 의회 의원 선거에서 낙선.
- 니시카와 마나부 - 나고야시 의회 의원. 대학 재학 중 가이후 사무실 수습으로 일했다.
12.6. 휴스턴 정상회의

1990년, 미국 휴스턴에서 개최된 제16회 선진국 정상회의에서 정상 기념 촬영 시, 가이후가 몸짓을 섞어 영어로 가벼운 농담을 던졌는데 큰 웃음을 자아내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 브라이언 멀로니 캐나다 총리가 폭소하는 장면이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가이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너무 더웠어요. 야외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 캐나다의 멀로니 총리가 '미국은 시골이라 너무 덥다. 캐나다는 이렇게 덥지 않다'고 말하더군요.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촬영을 위해 줄을 서는데 '덥다, 덥다. 나는 쓰러질 것 같다'고 말하는 겁니다. 저는 마침 멀로니의 왼쪽 옆에 있었고, 그 반대편(멀로니 총리의 오른쪽 옆)에는 대처 영국 총리가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캐나다가 쓰러지면 일본은 지탱할 수 없다. 저쪽으로 쓰러져라, 철의 여사에게 어떻게든 해달라고 해라'라고 말했죠. 이것이 부시 미국 대통령, 대처 영국 총리, 멀로니 캐나다 총리의 폭소를 자아냈습니다."
12.7. 기타

- 총리 취임 중이던 1991년 방영된 TV 애니메이션 『루팡 3세 나폴레옹의 사전을 빼앗아라』에 등장하는 게스트 캐릭터 '우미베(海辺) 총리'의 모델이 되었다. 참고로, 우미베 총리의 말버릇은 "간사장과도 상의하겠습니다"로, 당시 자민당 간사장 오자와 이치로와의 역학 관계를 풍자한 패러디이다.
- 총리 퇴임 후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산마의 사랑! 폭소 클리닉』에 부부가 함께 출연했다.
- 젊은 시절부터 미키 다케오를 정치인으로서 존경하고 친분을 가졌으며, 미키 무쓰코로부터는 아들처럼 귀여움을 받았다. 무쓰코가 그를 "도시키 짱"이라고 부르는 모습이 TV 등에 보도되면서, 어느새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도시키 짱"이 애칭으로 자리 잡았다.
- 기록적인 장수로 화제가 된 쌍둥이 자매 나리타 긴과 가니에 긴은 생전에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가이후의 이름을 꼽았다. 가이후는 긴의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 전 나고야시 시장이자 지역 정당 감세 일본 대표 및 정치 단체 '일본보수당'의 공동 대표이기도 한 가와무라 다카시와는 가와무라의 어머니가 가이후의 누나와 친구였고, 나고야시에 있던 어머니의 본가가 가이후의 자택과 이웃이었다. 가와무라가 안내하여 함께 옛집 터를 방문하기로 약속하기도 했다. 또한, 신진당 시절에는 초대 당수에 취임한 가이후와 가와무라가 동료였고, 가와무라는 가이후에게 많은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가이후가 자민당에 복당했을 때 "내게 오라"고 권유했지만, 가와무라는 고민 끝에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 나가부치 쓰요시의 곡 '사랑니' 가사 속에 미하일 고르바초프, 사담 후세인, 조지 H. W. 부시와 함께 등장한다.
- 영화 『소설 요시다 학교』(1983년)에서는 후쿠다 가쓰히로가 가이후를 연기했다.
- 총리로서 국민영예상을 수여한 치요노후지 미쓰구와의 인연 때문인지, 1990년 5월 26일에는 국기관 귀빈석에서 오즈모 여름 장소 14일째 경기를 관전했다. 현직 총리의 국기관 관전은 기시 노부스케 이후 처음이었으며,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도 귀빈석에서 관전했다. 2016년 7월 31일 치요노후지가 사망했을 때 조전을 보냈다.
- 두 번째 문부대신 취임 직후 오카다 유키코가 자살했다. 중의원 문교위원회에서 에다 사쓰키가 이 문제를 다루어 질문했을 때, "아이돌은 모두에게 꿈을 주는 존재이다. 부디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강하고 굳건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답변했다.
13. 가족 관계
- 증조부 가이후 고조는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가령이자 어상담인을 지냈다.
- 아들 가이후 마사키는 다마가와 대학을 졸업한 후 비서를 지냈으며, 가이후의 장례식에서 상주를 맡았다.
- 딸 무쓰미는 1963년 7월 19일생으로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을 졸업했다.
- 외교관 가이후 아쓰시는 조카이다.
- 천문학자 가이후 노리오, 200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고바야시 마코토, 신코 홈 사기 사건으로 2002년 유죄 판결을 받은 신코 홈 전 상무 가이후 슌이치는 사촌이다.
- 나고야 코친의 창시자로 알려진 옛 오와리 번의 번사 가이후 소헤이·가이후 마사히데 형제는 먼 친척이다(소헤이·마사히데의 누나의 증손자).
14. 외부 링크
- [http://www.anan.ne.jp/kaifu/ 가이후 도시키 공식 홈페이지]
- [http://www.kantei.go.jp/jp/rekidai/souri/76.html 역대 총리의 사진과 경력 - 가이후 도시키(수상 관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