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가미오 미쓰오미는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통해 일본 제국의 확장에 기여한 주요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일본의 근대화와 제국주의적 팽창이 맞물려 진행된 시기와 궤를 같이한다.
1.1. 출생과 어린 시절
가미오 미쓰오미는 1855년 2월 27일(안세이 2년 1월 11일) 신슈 스와군 오카야촌(현 나가노현 오카야시)에서 스와번의 사무라이 가미오 헤이자부로(神尾平三郎)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2. 교육
그는 1874년 10월 육군교도단에 입단하며 군인의 길을 걸었다. 1876년 2월 육군교도단을 졸업하고 육군 보병 군조로 임관했다.
1.3. 초기 경력
가미오는 1877년 1월부터 사쓰마 반란에 참전했으며, 같은 해 7월 조장, 10월 소위 시보로 진급했다. 1879년 2월 1일 사쓰마 반란에서의 전공을 인정받아 육군 소위로 진급했으며, 1882년 4월에는 육군 중위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부터 일본 제국 육군 참모본부 소속으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1885년 8월 육군 대위로 진급했으며, 1886년 2월 일본으로 귀국했다. 같은 해 4월 보병 제11연대 중대장으로 임명되었고, 1888년 5월 참모본부 소속으로 이동하여 1889년 12월부터 참모본부 제2국 요원으로 활동했다. 1891년 12월 육군 소좌로 승진하여 보병 제1연대에 배속되었다.
2. 군 경력
가미오 미쓰오미는 일본 제국 육군에서 다양한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일본의 군사력 강화와 대외 확장에 기여했다.
2.1. 무관 활동
가미오는 1885년부터 1886년까지 청나라에 주재무관으로 파견되어 근무했으며, 이 기간 동안 대위로 진급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에는 여러 참모 직책을 맡았다. 1892년 4월 28일부터 1894년까지 다시 청나라 베이징의 일본 공사관에 부속된 무관으로 파견되었다. 1899년 2월부터 1900년 4월까지는 참모본부 소속으로 유럽에 출장하여 서구의 군사 시스템을 시찰했다.
2.2. 주요 전쟁 참전
1894년부터 1895년까지의 청일 전쟁 발발과 함께 그는 일본 제2군 소속 참모 장교로 참전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인 1895년 1월 육군 중좌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 6월 2일부터 다시 청나라 공사관에 부속되었다. 1897년 10월 11일 육군 대좌로 진급함과 동시에 근위 보병 제3연대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러일 전쟁 기간 동안 가미오는 제22여단, 일본 지나 주둔군, 일본 제9사단, 일본 제18사단 등 여러 사단 지휘관직을 역임했으나, 최전선 전투 부대에는 배치되지 않았다.
2.3. 주요 사령관직
1900년 4월 일본 제1사단 참모장을 역임했으며, 같은 해 7월 참모본부 소속을 거쳐 1901년 2월 일본 제10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02년 5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보병 제22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904년 8월 요동수비군 참모장으로 취임했으며, 1905년 6월부터 대본영 소속으로 임명된 후 같은 달 청나라 주둔군 사령관을 맡았다. 1906년 11월 관동도독부 참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07년 11월 근위 보병 제1여단장을 거쳐 1908년 12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일본 제9사단 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12년 12월에는 일본 제18사단 사단장으로 이동했다. 1915년 5월 도쿄 위수총독에 임명되었으며, 1916년 6월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3. 제1차 세계 대전 및 칭다오 전투
가미오 미쓰오미의 군 경력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칭다오 전투를 지휘한 것이다. 이 전투는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3.1. 연합군 지휘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신중하고 견고한 지휘력으로 명성이 높았던 가미오 미쓰오미는 독일 제국으로부터 칭다오를 점령하기 위한 연합군 지상 병력의 지휘관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가능한 한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막대한 보급품과 압도적인 화력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전술을 선호했다.
3.2. 칭다오 공략
1914년 여름, 가미오가 지휘하는 제18사단은 23,000명의 병력과 144문의 포병을 동원하여 9월 2일부터 칭다오 항구에 대한 포격을 시작했다. 약 두 달여 후 칭다오 항은 함락되었으며, 가미오의 공성전 전술은 보병 진격을 지원하기 위한 포병 전술을 능숙하게 배치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 전투는 일본이 중국 내 독일의 이권을 장악하고 중국 대륙으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3.3. 칭다오 총독
칭다오 공략 이후 가미오는 칭다오 지역의 일본 총독으로 재직했다. 그는 1914년 11월부터 칭다오 수비군 사령관을 겸임하며 칭다오 지역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 행정적 통치를 확립하는 데 주력했다. 이는 일본이 중국에 대한 식민 지배를 강화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그의 역할은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을 상징한다.
4. 말년 및 퇴역
가미오 미쓰오미는 1916년 7월 오랜 군 복무의 공로를 인정받아 남작 작위를 수여받아 화족에 편입되었다. 같은 해 8월 대기 발령을 받았으며, 1917년 8월 6일 본인의 희망에 따라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1921년 4월 예비역을 거쳐 1925년 4월 완전히 퇴역했다.
5. 영예 및 작위
가미오 미쓰오미는 일본 제국과 해외에서 수많은 영예와 작위를 받으며 그의 군사적 업적을 인정받았다.
5.1. 군 계급 및 작위
- 육군 소장 (1902년 5월)
- 육군 중장 (1908년 12월)
- 육군 대장 (1916년 6월)
- 남작 (1916년 7월 14일)
- 종2위 (1927년 2월 6일)
- 정6위 (1895년 6월 8일)
- 종5위 (1897년 10월 30일)
- 정5위 (1902년 9월 20일)
- 종4위 (1907년 10월 11일)
- 정4위 (1909년 11월 30일)
- 종3위 (1912년 12월 28일)
- 정3위 (1916년 7월 10일)
5.2. 훈장 및 표창
- 욱일장 (1등 욱일대수장, 2등 욱일중광장, 쌍광욱일장)
- 보관장 (1등)
- 금계훈장 (1급, 2급, 4급)
- 성 마이클 성 조지 훈장 (나이트 그랜드 크로스, 1915년 9월 30일)
- 보물장 (5등, 3등, 1등)
- 명치 27·28년 종군기장 (1895년 11월 18일)
- 명치 37·38년 종군기장 (1906년 4월 1일)
- 대정 3·4년 종군기장 (1915년 11월 7일)
- 대례기념장 (1915년 11월 10일)
- 전승기장 (1919년 12월 15일)
- 적수리훈장 2등 (독일)
- 어사쌍룡보성 3등 1급 (청나라, 1908년 10월 30일)
- 프란츠 요제프 훈장 대십자장 (오스트리아-헝가리, 1909년 10월 26일)
-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1등 (러시아, 1909년 12월 15일)
6. 사생활
가미오 미쓰오미의 아내는 에자키 마사쿠니(江崎政国)의 장녀 마쓰(まつ, 1863년생)이다. 그에게는 세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녀 아이(愛, 1887년생)는 야소시마 키지로(八十島樹次郎)와 결혼했다. 차녀 야스코(安子, 1889년생)는 유명한 작가 아리시마 다케오와 결혼했다. 장남 가미오 키이치(神尾毅一, 1892년생)는 1931년에 사망하여 가미오 가문의 대가 끊길 위기에 처했으나, 아리시마 다케오의 삼남 교조(行三)가 가미오 가문을 이었다. 삼녀 류코(龍子, 1904년생)는 타고 지쓰오(多湖實夫)와 결혼했다.
7. 사망
가미오 미쓰오미는 1927년 2월 6일 사망했다. 그의 묘소는 도쿄도 도시마구 미나미이케부쿠로에 위치한 조시가야 영원에 있다.

8. 평가
가미오 미쓰오미는 일본 제국 육군의 주요 지휘관으로서 특히 칭다오 전투에서 보여준 군사적 리더십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신중한 계획과 압도적인 병력 및 화력 운용을 통해 최소한의 피해로 목표를 달성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이러한 전술적 역량은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일본의 군사적 성공에 기여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적 맥락에서 비판적으로 평가될 필요가 있다. 그가 참여했던 청일 전쟁, 러일 전쟁,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중 칭다오 점령은 모두 일본이 아시아 대륙으로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식민 지배를 강화하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특히 칭다오 총독으로서의 역할은 일본의 군사적 점령을 행정적 통치로 전환하며 타국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했다. 따라서 가미오 미쓰오미의 군사적 성공은 일본 제국의 대외 침략과 확장을 가능하게 한 요소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의 행위가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미친 영향과 인권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동반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