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아리시마 다케오의 개인적인 삶의 궤적은 그의 사상과 문학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나 서구 교육을 받았으며,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가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는 등 복잡한 내면세계를 형성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아리시마 다케오는 1878년 3월 4일 도쿄 고이시카와구 (현 분쿄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구 사쓰마번의 향사 출신으로, 대장성 관료이자 실업가였던 아리시마 다케시였고, 어머니는 사치코였다. 조부 우헤이 또한 향사였다. 다케오가 4세 때, 아버지의 요코하마 세관장 취임을 계기로 가족은 요코하마시로 이주했다. 아버지의 교육 방침에 따라 미국인 가정에서 생활하며 영어를 배웠고, 이후 요코하마 에이와 여학교 (현 아오야마가쿠인 요코하마 에이와 초등학교)에 다녔다.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그의 동화 《한 송이 포도》를 탄생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10세에 가쿠슈인 예비과에 입학하여 기숙 생활을 시작했으며, 19세에 가쿠슈인 중등과를 졸업했다. 이후 농학자를 지망하여 홋카이도의 삿포로 농학교 (현 홋카이도 대학 농학부)에 진학했다. 삿포로 농학교 재학 중, 그는 교수였던 니토베 이나조로부터 "가장 좋아하는 학과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문학과 역사"라고 답했다가 실소를 샀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모리모토 고키치와 함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1901년 (메이지 34년)에는 우치무라 간조와 모리모토 고키치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에 입문하여 세례를 받았다.
1.2. 초기 활동
삿포로 농학교 졸업 후 의무적인 군대 생활을 잠시 거쳤다. 이후 니토베 이나조의 아내인 메리 엘킨턴 니토베에게 영어 수업을 들었으며, 1903년 8월에는 마이니치 신문의 미국 해외 특파원 자리를 얻었다. 같은 해 8월 25일 요코하마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는 퀘이커 계열의 해버퍼드 칼리지 대학원에 등록했으며, 이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1년여간 역사와 경제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에는 퀘이커 교단이 운영하는 정신병원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서의 경험을 일기에 상세히 기록했다.
미국 체류 기간 동안 그는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고, 사회주의에 매료되었다. 월트 휘트먼, 헨리크 입센, 표트르 크로폿킨, 앙리 베르그송, 프리드리히 니체 등 서구 문학 및 철학자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다. 미국에서의 경험과 이어진 유럽에서의 1년은 그의 문체와 세계관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일본 사회에 대한 이질감을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07년 (메이지 40년) 4월 11일 일본으로 귀국한 후, 그는 다시 잠시 군무(예비 견습사관)를 수행했다. 1909년에는 모교인 도호쿠 제국대학 농과대학 (삿포로 농학교가 제국대학으로 승격된 것, 훗날 홋카이도 대학)의 영어 및 윤리 교사로 부임했다. 이 무렵 그는 기독교 신앙에 의문을 품고 기독교에서 멀어졌다. 1908년에는 동료들과 함께 홋카이도 대학 미술부 '흑백합회'를 설립했으며, 이 모임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22년에는 베를린 국제 아나키즘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밀항을 계획하던 오스기 사카에에게 몰래 도항비를 건네주기도 했다. 당시 아리시마는 언론 기자에게 "나는 오스기 군과는 입장이 다르지만, 저렇게 큰 인물을 일본처럼 비좁은 곳에 가두어 내분만 일으키게 하는 것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의 대세를 보고 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2. 문학 활동과 작품
아리시마 다케오는 시라카바파의 중심 인물로서 일본 문학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개인의 내면과 사회적 모순을 깊이 있게 탐구하며, 독특한 문체와 사상적 깊이를 보여준다.
2.1. 문학적 배경과 사상
그의 문학 세계는 서구 문학 및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월트 휘트먼과 헨리크 입센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앙리 베르그송과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적 사유를 수용했다. 미국 유학 중 사회주의에 매료되었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의 글은 감정적으로 강렬하고 인간주의적이었으며, 성경, 레프 톨스토이, 아나키스트 사회주의 등의 사상을 작품에 녹여냈다. 미국과 유럽에서의 경험은 그의 글쓰기 방식과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일본 사회에 대한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2.2. 주요 작품
아리시마 다케오는 소설, 평론, 동화, 희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했다.
- 소설
- 《かんかん虫간칸무시일본어》
- 《카인의 후예카인의 후예일본어》(1917년): 성경의 카인 이야기를 모티브로, 신의 저주를 받은 인간과 자연의 모습을 자기 파괴적인 소작농의 눈을 통해 그려낸 작품이다.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작품이다.
- 《어떤 여자의 글림프스어떤 여자의 글림프스일본어》(후에 《어떤 여자》로 간행)
- 《어떤 여자》(1919년): 위선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맞서 싸우는 강인한 의지의 여성을 다룬 도덕적, 심리적 멜로드라마이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 《생겨나는 고뇌생겨나는 고뇌일본어》
- 《미로미로일본어》
- 《클라라의 출가클라라의 출가일본어》
- 《개선개선일본어》
- 《뼈뼈일본어》
- 《술에 취한 광기술에 취한 광기일본어》
- 《문화의 말로문화의 말로일본어》
- 《운명의 호소운명의 호소일본어》
- 《성좌성좌일본어》(미완)
- 《작은 자에게작은 자에게일본어》
- 《실험실실험실일본어》
- 《오마쓰의 죽음오마쓰의 죽음일본어》
- 평론
- 《사랑은 아낌없이 빼앗는다》(惜しみなく愛は奪ふ오시미나쿠 아이와 우바우일본어)
- 《선언 하나선언 하나일본어》(宣言一つ센겐 히토쓰일본어)
- 《두 갈래 길두 갈래 길일본어》
- 동화
- 《한 송이 포도》(一房の葡萄히토후사노 부도일본어)
- 《물에 빠진 남매물에 빠진 남매일본어》
- 희곡
- 《도모마타의 죽음도모마타노 시일본어》
- 교가 (작사)
- 삿포로 농학교 교가 《영원의 행복에이엔노 사치일본어》: 삿포로 농학교 재학 중 작사했으며, 훗날 홋카이도 대학 교가로도 지정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지쿠마 쇼보에서 전 15권과 별권으로 구성된 《아리시마 다케오 전집》으로 출판되었다.
2.3. 시라카바파 활동
아리시마 다케오는 동생 아리시마 이쿠마를 통해 시가 나오야, 무샤노코지 사네아쓰 등 가쿠슈인 출신의 작가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이들은 함께 문학 동인 그룹을 형성했으며, 1911년에 창간된 자신들의 문학 잡지 《시라카바》(白樺시라카바일본어, '자작나무'라는 뜻)의 이름을 따서 '시라카바파'로 불렸다. 아리시마는 이 시라카바파의 중심 인물 중 한 명으로서 소설과 평론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1918년 7월 《주오고론》에 신시키무라를 비판하는 평론 〈무샤노코지 형에게〉를 발표하기도 했다.
3. 사상과 사회 참여
아리시마 다케오는 개인주의, 사회주의, 인간주의적 사상을 추구하며 당시 일본 사회의 모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특히 그의 사회주의 실천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3.1. 사회주의 실천과 농장 개방
아리시마 다케오는 자신이 발전시킨 사회주의 철학을 실천에 옮기고자 했다. 1922년 (다이쇼 11년)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홋카이도 가리타촌 (현 니세코정)의 대규모 소작농 농장 소유권을 포기하고 농장을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개방했다. 그는 곧 다가올 혁명에서 자신을 쁘띠 부르주아로부터 멀리하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 결정은 그의 사회주의적 신념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평론 《선언 하나》를 발표하기도 했다.

3.2. 기독교 및 사회 비판
아리시마는 미국 유학 중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갖게 되었고, 귀국 후에는 신앙에서 멀어졌다. 그의 작품과 평론에는 당시 일본 사회의 위선, 특히 남성 중심적인 문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는 감정적으로 강렬하고 인간주의적인 글쓰기를 통해 이러한 비판 의식을 표출했다.
4. 개인 생활
아리시마 다케오의 개인 생활은 그의 문학적 고뇌와 연결되어 있으며, 특히 마지막 연인과의 동반 자살은 그의 삶에 대한 비극적인 결말을 상징한다.
4.1. 결혼과 가족
1909년 (메이지 42년) 도쿄에서 육군 소장 가미오 미쓰오미의 둘째 딸인 가미오 야스코와 결혼했다. 1911년 (메이지 44년)에는 삿포로에서 장남 유키미쓰가 태어났는데, 그는 훗날 배우 모리 마사유키로 활동하게 된다.
1913년 (다이쇼 2년)에는 삿포로에 영구 정착할 계획으로 현재의 홋카이도 대학 근처인 삿포로시 기타구 기타12조 니시3초메에 서양식 저택을 신축했다. 그러나 이듬해 아내의 병으로 인해 삿포로를 떠나게 되었다.
1916년 (다이쇼 5년), 아내 야스코가 히라쓰카의 교운도에서 27세의 나이로 폐결핵으로 사망하며 세 자녀를 남겼다. 같은 해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아리시마는 아내와 사별한 후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다.
그의 자녀로는 장남 유키미쓰 (배우 모리 마사유키, 모리와 그의 애인 사이에서 사랑의 코리다 등으로 활약한 여배우 나카지마 아오이가 태어났으며, 모리의 손자로는 음악가 아리시마 고레스케가 있다), 차남 도시유키 (번역가, 이시이 요시코와 약혼했다고 전해지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 삼남 교조 (어머니 쪽 가미오 가문을 이어 남작이 되었으며, 차남은 싱어송라이터 히라이와 에이코의 남편이자 신시사이저 연주자인 아리시마 아키라이다)가 있다.
그의 형제로는 화가 아리시마 이쿠마, 작가 사토미 톤, 일본유지 이사 아리시마 유키오 (차남은 창가학회 초대 음악대장이자 공명당 대의원인 아리시마 시게타케)가 있다. 여동생 시마는 도쿄 지케이카이 의과대학을 설립한 다카기 가네히로의 장남 다카기 요시히로와 결혼했다. 여동생 아이는 구 미카사 호텔 경영자 야마모토 나오요시와 결혼했으며, 아이의 손자로는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야마모토 나오즈미가 있다.
4.2. 하타노 아키코와의 관계 및 동반 자살
1922년 (다이쇼 11년), 아리시마는 여성 잡지 《부인공론》의 기자이자 유부녀였던 하타노 아키코와 만나 사랑에 빠졌다. 아리시마는 아내와 사별 후 독신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들의 관계는 빠르게 불륜으로 발전했다. 이 사실은 아키코의 남편 하타노 하루후사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그는 협박을 가하며 두 사람을 괴롭혔다.
1923년 (다이쇼 12년) 6월 9일, 아리시마 다케오와 하타노 아키코는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정에 있는 아리시마의 별장(정월장조게쓰소일본어)에서 함께 목을 매 자살했다. 외딴곳에 위치한 별장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시신은 장마철에 한 달 이상 발견되지 못했고, 7월 7일 별장 관리인에 의해 발견되었을 때는 상당히 부패가 진행된 상태였다. 시신은 현장에 남겨진 유서를 통해 본인으로 확인되었다. 여러 통의 유서 중 하나에는 "사랑 앞에서 죽음이 이토록 무력한 것이라는 생각은 이 순간까지 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2009년 7월, 사망 약 반년 전부터 아리시마가 아키코와 주고받은 서간 각 3통이 삿포로시에 있는 홋카이도립 문학관에서 일반에 공개되기도 했다.
5. 죽음
아리시마 다케오와 하타노 아키코는 1923년 6월 9일 가루이자와의 별장 정월장에서 동반 자살했다. 시신은 한 달여 뒤인 7월 7일에 발견되었으며, 장마철이었던 탓에 심하게 부패한 상태였다. 현장에서 발견된 유서를 통해 이들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그의 사세구는 다음과 같다고 전해진다.
- "몇 해의 목숨을 사람은 다하려 하는가 기쁨도 보지 못하고"
- "수선(修禪)하는 사람처럼 세상 등지고 고요히 사랑의 문에 임하리"
- "매미 하나 나무를 떠나 땅에 떨어지니 바람 없는 가을 고요하구나"
이 사세구에 대해 가라키 준조는 평론 《자살에 대하여》(1950년)에서 "모두 소녀 취미 이상은 아니다"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아리시마의 스승이었던 우치무라 간조는 "이번 아리시마 씨의 행위를 칭찬하는 자가 내 지인 중에 있다면, 그 자와의 교류를 끊겠다"고 천명하며 그의 자살을 강하게 비판했다.
아리시마 다케오의 묘는 도쿄도 다마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묘비에는 아리시마 다케오와 그의 아내 야스코의 얼굴 부조가 새겨져 있다.

6. 유산과 평가
아리시마 다케오는 사후에 발견된 방대한 양의 일기와 그의 작품, 사상으로 인해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6.1. 일기
그의 사후 발견된 20권이 넘는 방대한 양의 일기는 그의 삶, 두려움, 희망 등을 상세하고 내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일기들은 그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2009년 7월에는 사망 약 반년 전부터 하타노 아키코와 주고받은 서간 각 3통이 홋카이도립 문학관에서 일반에 공개되기도 했다.
6.2. 동시대 및 후대 평가
동시대인들은 아리시마를 단순히 소설가뿐만 아니라 철학자이자 사회 비평가로도 높이 평가했다. 그의 글은 기독교에 비판적이었고 사회주의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감정적으로 강렬하고 인간주의적이었다. 그는 성경, 레프 톨스토이, 아나키스트 사회주의 등 다양한 사상을 작품에 녹여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루쉰이 그의 작품을 소개한 이래 인지도가 높으며, 교과서에도 실려 널리 읽히고 있다. 홋카이도와 인연이 깊은 작가였기에 홋카이도 신문사에서는 '아리시마 청소년 문학상'을 제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6.3. 비판과 논란
아리시마 다케오의 자살은 그의 스승이었던 우치무라 간조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우치무라는 아리시마의 행위를 칭찬하는 자와는 교류를 끊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그의 자살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그의 사세구에 대해서도 가라키 준조는 "소녀 취미 이상은 아니다"라고 혹평하며 문학적 깊이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7. 영향
아리시마 다케오의 문학, 사상, 그리고 삶의 방식은 후대 작가와 사회, 문화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7.1. 후세에 미친 영향
그의 작품 세계와 사회주의적 사상은 후대 문학 및 사회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농장 개방은 이상주의적인 사회주의 실천의 한 사례로 기억되며, 일본 지식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내면적 갈등과 사회적 모순을 깊이 있게 다루어 후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특히 중국에서 루쉰에 의해 소개된 이후 널리 읽히며 국제적인 영향력도 보여주었다. 홋카이도 신문사에서 제정한 '아리시마 청소년 문학상'은 그의 문학적 유산을 기리고 후진 양성에 기여하고 있다.
8. 기념 및 추모
아리시마 다케오를 기리기 위한 여러 시설들이 일본 각지에 존재한다.
- 아리시마 기념관 (홋카이도 니세코정): 아리시마가 이 지역에 농장을 소유했던 것과 관련하여 그의 자료들이 보존되어 있다.
- 삿포로 예술의 숲 (삿포로시 미나미구): 삿포로시 기타구에 있었던 아리시마 다케오의 옛 저택이 이곳으로 이전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내부에는 아리시마 관련 전시물이 있다.
- 홋카이도 개척의 마을 (삿포로시 아쓰베쓰구): 삿포로시 시로이시구에 있었던 아리시마의 옛 거처가 이곳으로 이전되어 보존되고 있다.
- 아리시마 다케오 저택 터 비 (삿포로시 시로이시구, 기타구): 삿포로에 있던 그의 저택 터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종언의 지 비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정): 그가 동반 자살한 가루이자와 별장 터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9. 관련 항목
- 모리모토 고키치
- 모리토 다쓰오
- 다니카와 데쓰조
- 가가와 도요히코
- 기다 긴지로
- 오스기 사카에
- 야마다 아키오
- 나카무라 미쓰하루
- 일본의 자살 및 자결 인물 목록
- 시라카바파
- 홋카이도 대학
- 가쿠슈인
- 해버퍼드 칼리지
- 하버드 대학교
- 부인공론
- 다마 공동묘지
- 니세코정
- 가루이자와정
- 한 송이 포도
- 카인의 후예 (일본 소설)
- 어떤 여자
- 사랑은 아낌없이 빼앗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