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다니엘 프랑수아 말란은 어린 시절과 교육을 통해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한 기반을 다졌다.
다니엘 프랑수아 말란은 1874년 5월 22일 케이프 식민지의 리베크웨스트(Riebeek-West아프리칸스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역시 다니엘 프랑수아 말란이라는 이름의 부유한 농부이자 성직자였으며, 어머니는 아나 막달레나 뒤 토이(Ana Magdalena du Toit)였다. 그는 아홉 자녀 중 다섯째였으나, 그중 네 명은 어린 시절에 사망했다.

남아프리카 지역에 '말란'이라는 성을 전파한 선조는 프랑스 프로방스(Provence프랑스어)의 메린돌(Mérindol프랑스어) 출신 위그노 난민인 자크 말란(Jacques Malan프랑스어)으로, 그는 1689년 이전에 케이프에 도착했다. '말란'이라는 성은 아프리칸스어 이름들 중 프랑스어 기원을 가지면서도 원래 철자를 유지한 몇 안 되는 이름 중 하나이다. 말란의 누나인 프란시나 수잔나 라우(Francina Susanna Louw영어, 시니)는 훗날 선교사이자 언어학자가 되었다.
1.1. 교육

말란은 스텔렌보스의 빅토리아 칼리지(Victoria College, Stellenbosch영어)에서 음악과 과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그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가 되기 위해 스텔렌보스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 연구와 함께 빅토리아 칼리지(훗날 스텔렌보스 대학교가 됨)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00년 말란은 남아프리카를 떠나 위트레흐트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유학했으며, 1905년에 학위를 받았다.
2. 목회자로서의 삶
박사 학위 취득 후 남아프리카로 돌아온 말란은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로 서품되었고, 트란스발의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Gauteng영어)에서 6개월간 보조 목사로 봉사했다. 그는 당시 네덜란드어와 영어에 맞서 새로이 부상하던 아프리칸스어의 인정을 위해 열렬히 투쟁했으며, 1930년에 설립된 아프리카너 언어 문화 협회(Afrikaanse Taal- en Kultuurvereniging아프리칸스어, ATKV)의 창립 멤버였다. 일본어 자료에 따르면 1906년에 아프리카너 언어 연맹(Afrikaanse Taalvereeniging아프리칸스어)을 설립했다고도 한다. 그는 1906년부터 1912년까지 몬태규(Montagu, South Africa영어)에서, 이후 1915년까지 흐라프레이네트(Graaff-Reinet영어)에서 목회 활동을 했다. 또한 그는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대표하여 벨기에령 콩고, 북로디지아, 남로디지아에 거주하는 종교적인 아프리카너들을 방문하는 여정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는 매우 엄격한 기독교 신자였다.
3. 정치 경력
말란은 목회자로서의 활동을 뒤로하고 정치에 입문하여 국민당의 주요 인물로 성장했으며, 총선 승리를 통해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말란의 정치 참여는 국민당이 1914년에 창당된 직후 시작되었다. 당시 남아프리카의 정당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신문사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케이프 지역의 민족주의 성향 아프리카너들은 그러한 매체가 없었기에 1915년 더 버르허르(De Burger아프리칸스어, 훗날 디 버르허르(Die Burger아프리칸스어)로 알려짐)를 창간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말란을 새 신문의 편집장으로 설득했고, 그는 이를 발판 삼아 의회에 진출했다.
마리츠 반란(Maritz rebellion영어) 이후 아프리카너들의 정치적 입지에 대해 우려했던 그는 목사직을 내려놓고 편집장직을 수락했다. 국민당 케이프 지부는 1915년에 설립되었고, 말란은 그 지부의 주 대표로 선출되었다. 1918년, 그는 칼비니아 선거구의 하원 의원으로 처음 의회에 선출되었으며, 1938년 피케트베르흐(Piketberg영어)의 의원이 될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3.1. 내각 각료

1924년 J. B. M. 헤르초흐 총리 하에 국민당이 처음으로 집권했을 때, 말란은 내무부, 교육부, 공중보건부 장관직을 맡아 1933년까지 재임했다. 1925년에는 헌법에서 네덜란드어를 아프리칸스어로 대체하고 남아프리카에 새로운 국기를 제정하기 위한 캠페인의 선두에 섰다.
1933년 총선 이후, 헤르초흐의 국민당과 얀 스머츠의 남아프리카당(South African Party영어)이 합병하여 통일당이 결성되었다. 말란은 이 합병에 강력히 반대했으며, 1934년 그와 19명의 다른 의원들은 탈당하여 정화 국민당(Purified National Party영어)을 결성하고 14년 동안 야당 지도자로 활동했다.
말란은 제2차 세계 대전에 남아프리카가 참전하는 것에 반대했다. 남아프리카의 전쟁 참여는 아프리카너 인구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고, 1939년 이는 집권 통일당의 분열로 이어졌다. 탈당한 의원들은 국민당과 합류하여 말란의 정치적 입지를 극적으로 강화시켰고, 결과적으로 그는 1948년 총선에서 스머츠와 통일당을 물리쳤다.
4. 총리 재임 및 아파르트헤이트 확립
다니엘 프랑수아 말란은 1948년 총선에서 승리하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총리직에 올랐다. 그의 총리 재임 기간은 1948년부터 1954년까지였다. 이 시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기초가 확고히 다져진 때였다.

4.1. 1948년 총선 승리
1948년 총선에서 말란의 국민당은 아파르트헤이트('분리', '격리'를 의미하는 아프리칸스어)를 선거 캠페인의 핵심 공약으로 내세워 승리했다. 이 선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국민당의 승리는 인종 분리 정책의 전면적인 시행을 예고했다.
4.2.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수립 및 시행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말란은 인종 분리 및 차별을 골자로 하는 아파르트헤이트 법안들을 제정하고 시행했다. 그는 군대를 포함한 공직에서 아프리카너 국민당원 이외의 인물들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또한 케이프주에서는 유색인의 선거권을 제한하고, 전국의 선거구 구획을 정권에 유리하게 변경하는 게리맨더링을 단행했다. 집회의 자유를 비롯한 여러 기본권도 제한되었다. 이로써 말란에 의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확립되었다.
4.3. 주요 정책 및 법안
말란 정부는 1950년 추밀원 항소법(Privy Council Appeals Act, 1950영어)을 통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법원 항소부에서 런던의 추밀원 사법위원회로의 항소권을 박탈했다. 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법 주권을 강화하는 조치였지만, 동시에 인종차별 정책에 대한 외부의 개입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1953년 2월 24일, 말란은 흑인과 인도인들의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독재적인 권한을 부여받기도 했다.

1954년, 80세가 된 말란은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그는 니콜라스 하벤가(Nicolaas Havenga영어)가 자신의 후임이 되기를 바랐으나, 하벤가는 요하네스 스트레이돔에게 패배했다.
5. 이념 및 사상
다니엘 프랑수아 말란의 정치적 이념은 강한 아프리카너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었으며, 이는 그의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5.1. 아프리카너 민족주의
말란은 아프리카너 민족주의의 대표적인 옹호자로 여겨졌다. 그는 남아프리카가 하느님에 의해 백인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념은 유색인과 흑인에 대한 철저한 격리 정책으로 이어졌다. 특히, 그는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을 지지하는 등 추축국에 친화적인 성향을 보였다. 이는 그의 인종주의적 사상과 연결되는 중요한 측면으로 평가된다.
6. 개인 생활
말란은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 출신답게 매우 엄격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의 개인적인 엄격함을 보여주는 일화로는 국빈으로 벨기에를 방문했을 때 브뤼셀의 오줌싸개 동상 앞을 지나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죄스럽다"고 중얼거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7. 사망
다니엘 프랑수아 말란은 1959년 2월 7일, 84세의 나이로 스텔렌보스에 있는 그의 자택 모레바흐(Môrewag아프리칸스어)에서 사망했다. 그의 저서 아프리카너 민족 단결과 그 길에서의 나의 경험(Afrikaner Volkseenheid en my ervaringe op die pad daarheen아프리칸스어)은 그가 사망한 같은 해에 출판되었다. 그의 저작물과 문서들은 스텔렌보스 대학교의 J.S. 게리케 도서관 문서 센터에 보관되어 있다.
8. 평가 및 유산
다니엘 프랑수아 말란의 삶과 업적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역사에서 깊은 논란과 비판의 대상이 된다.
8.1. 긍정적 평가
말란은 아프리칸스어의 공식 언어 채택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기 제정에 기여하는 등 아프리카너 문화 및 언어적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4년 남아프리카 방송 협회(SABC3)가 선정한 '위대한 남아프리카인' 목록에서 81위에 오르기도 했다.
8.2. 비판 및 논란

말란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확립하고 강화한 주요 인물로, 이로 인해 심각한 인권 침해와 사회적 갈등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아프리카너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남아프리카를 백인만을 위한 국가로 만들고자 했으며, 유색인과 흑인 등 비백인들을 철저히 격리하고 탄압했다. 국민당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탄압과 언론 및 집회의 자유 제한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사실상 독재 체제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그가 친추축국 성향을 보이며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을 지지했다는 점은 그의 인종주의적 사상과 연결되어 더욱 큰 비판을 받는다. 그의 정책은 1994년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인종차별의 암흑기로 이끌었다.
9. 영향
다니엘 프랑수아 말란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9.1.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미친 영향
말란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확립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이후 수십 년간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회를 지배하며 인종 분리, 차별, 억압을 제도화했다. 그의 이념과 정책은 비백인 인구에게 엄청난 고통과 불평등을 안겨주었으며, 국제 사회로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고립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1994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회에 깊은 상처와 후유증을 남겼다. 그의 저서와 문서들은 스텔렌보스 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의 사상과 정책이 후대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0. 관련 항목
- 아파르트헤이트
- 국민당 (남아프리카 공화국)
- 아프리카너 민족주의
- 남아프리카 공화국
- 얀 스머츠
- J. B. M. 헤르초흐
- 요하네스 스트레이돔